2020년 3월 22일 (일) 촬영.

가을이면 구절초가 아름답게 피는 폐철길이 있는 고잔역입니다.

고잔역에서 지하도를 통해 건너편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6번 버스를 타고 화정리 종점까지 가면 오정각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일행은 4명이라서 택시를 탔습니다. 요금이 8,000원 나오니까 택시나, 버스나 비용이 비슷합니다.

버스는 1번 출구로 나와 건너편 정류장에서 타면 되고, 택시를 타려면 2번 출구로 나가야 돌지 않습니다.

택시를 타고 오정각 바로 앞까지 왔습니다.

오정각은 앞에 있는 집 뒤에 있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차도에서 왼편으로 난 소로로 들어 가면 우측에 오정각이 있습니다.

오정각이 뭔지 궁금하죠.

밭에서는 지금 파종하느라 분주합니다. 우리가 택시에서 내린 삼거리가 저 아래 보이네요.

오정각입니다.

오정각은 김문기와 그의 아들 손자 등에게 내린 다섯의 정려문을 모아 놓은 각(閣)이랍니다.

오정각,五旌閣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호.
정문(旌門)이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고자 마을 입구나 집 문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말한다.
오정각은 김문기(金文起)와 그의 아들 김현석에 대한 충신 정문과
손자인 김충주, 증손자인 김경남, 고손인 김약전 세 사람의 효자 정문을 모신 곳이다.
현재의 이 건물은 조선 고종 7년(1870)에 후손들이 오세충효 정각(五世忠孝 旌閣)을 건립한 뒤 국가 보조와
종친들의 성금으로 몇 차례 중수하여 보전하고 있다.
김문기는 세종 8년(1426)에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세조 원년에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가
되었으나 성삼문 박팽년 등과 단종 복위를 꾀할 때 병력 동원을 책임진 사실이 적발되어 처형되었다.
그 후 영조 33년에 충의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 아들 김현석은 영월군수로 재임 중 아버지와 같이 순절하였다.
손자인 김충주는 형인 충립과 함께 노비가 되어 상주로 가는 도중 삼수점(三水店)에서 도망하여
이곳 마하산에 숨어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였다.
후손들은 선조인 김충주가 망월암에 올라가 영월쪽을 바라보며, 단종과 할아버지.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일생을 보내어 그곳에 있던 소나무가 말라죽었다 하여 그가 살던 집터에 고송정을 지었다.
아들인 김경남과 손자인 김약전도 효성이 지극하여 3대가 효자로 일컬어져 왔다. -현지 안내문-

어렵게 찾아온 오정각은 문이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문틈으로 이렇게 안을 들여다 보긴 했지만,

다섯 분에게 내린 정려는 볼 수가 없더군요.

아쉬움에 주변에 있을 법한 관리인이나 후손들을 찾아 보기로 하고 마을을 돌아 다녔습니다.

모든 사진들은 클릭하면 크게볼 수 있습니다.

밭에는 비료 포대들이 널려 있네요.

개인집이라기엔 상당히 큰 한옥도 후손이 살고 있다는데 사람은 볼 수 없었고

붉은벽돌의 이 집에도 후손이 살고 있었지만 모르신다고....



시집올 때부터 이 집에 살고 계신 할머니도 관리인은 모른다며, 나라에서 관리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네요


이 집에서 만난 후손 분도 열쇠는 시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현장에선 열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수선화가 곱게 피었습니다.

우리는 버스 종점까지 내려가 보기로 했습니다.

오정각에서 버스 종점까지는 1km 정도 됩니다.

너비울마을의 뜻은 이 마을이 마하산 아래 넓은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넓은골(廣谷)이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변음되어 너비울로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이 버스정류장입니다. 6번 버스의 종점입니다. 오정각, 고송정지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습니다.

버스도 대기하고 있네요.

버스정류장에서 다시 오정각을 향해 걸었습니다. 농원에 산수유도 노란 꽃을 피웠습니다.

되돌아 보는 것도 재밋네요. 오랜만에 연기 내음도 맡고....

방금 내려왔던 길입니다.

다시 올라가고 있네요. ㅋㅋㅋ 바쁠 일이 없으니까요.


맛있어 보이는 총각무 김치를 담그고 있던 집.

개는 없는 것 같았는데. 조심하라네요.

시골길에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네요. 이 길로 넘어 가면 물왕저수지가 됩니다.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고송정지로 갑니다.

조금 전에 보았던 수선화 꽃도 다시 봤습니다.

고송정지로 가는 길입니다. 후손들의 집이 있는 곳에서 약 500미터 정도 올라가면 됩니다.

철문이 앞을 가로 막고 있지만 작은 문이 열려 있습니다.

가는 길은 제비꽃 천지였어요.

고송정입니다.




고송정지(탄옹고지) / 경기도 기념물 제101호.
고송정이 있는 이곳은 조선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던 김문기와 그의 아들 김현석이 죽음을 당하자
손자인 김충주(金忠柱)가 여러 곳을 떠돌다가 정착하여 살던 곳이다.
순조 27년(1827)에 김충주의 9세손인 김처일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고송정(枯松亭)이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김충주가 단종을 그리며 울던 "망월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 올라 단종의 묘가 있는 영월 땅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자
바위 아래에 있던 소나무가 말라죽었다는 일화에서 "고송정"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김충주가 이곳에서 숯을 구워 연명하면서 스스로 "숯 굽는 노인"이라고 불렀다고 하여 "탄옹고지"라고도
한다. 정자 서쪽에 "탄옹고지"라고 새긴 작은 바위가 있으며 동쪽에는 그 당시에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다.
원래의 건물은 없어지고
1936년에 후손들이 다시 그 자리에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사방이 개방된 정자를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992년에 전면 보수한 것이다. -현지 안내문-


보호수인 향나무입니다.

보호수 / 향나무, 수령 350년, (지정일자 2003, 1, 3), 나무높이 18m.


고송정에서 쉬어 갔습니다. 배도 채우고요. 옛날 이야기도 했습니다. 뭐 나랏님 욕이지만요. ㅋㅋㅋ
나랏님 욕보다는 단종이 불쌍하다는 야그와 김문기 선생 등 사육신의 사연이 가슴 아프다는 이야기였어요.



고송정 뒤에도 보호수가 있습니다. 오래살다 보니 옷을 갈아 입고 있네요.

깔판 접고



이제 산으로 올라 갑니다. 탄옹묘소와 망월암이 있다는 곳을 향하여...



탄옹공 김충주의 묘는 고송정 바로 위에 있었습니다.

김충주와 부인의 쌍분입니다..

묘역에서 본 고송정입니다.

후손들의 묘인가 봅니다. 새로 만들었습니다.


김충주 묘의 후경입니다.

김충주의 묘 위에 있다는 망월암이 새겨진 바위를 찾다가 바위는 못찾고 진달래 꽃들만 만났네요.

정말로 화사하네요.

향을 맡아 보기도 하고, 맛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먹는건 좀 심했나요.

일행중에 식인종이 아니, 식화종(食花種)이 있었습니다. ㅋㅋㅋ

꽃 한송이 먹고 사자처럼 폼잡고 있네용.


기개 좋게 정상까지 올라가 보자며 출발 했습니다.


그런데, 정상일까라고 생각하고 올라서 보면 뒤에 봉우리가 또 나오고,



여기가 정상이겠지 하고 올라서면 뒤에 또 봉우리가 나온는 바람에

정상 정복은 포기하고 되돌아 나오기로 했습니다. 그런 우리를 보며 진달래가 웃어 주었습니다.
잘 가라고 손도 흔들어 주었어요.

홀로 핀 진달래 꽃 한 송이도 배웅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외롭게 딱 한 송이의 꽃만 피웠을까요.



사람이 다니지 않는 산길은 정글 같았습니다.

산끝에서 마을로 가는 길을 만났습니다.

꼬불꼬불한 길에는 산수유 나무가 살고 있네요.

옆에는 개울도 있고 물도 흐르고 있었어요.

산골 같았습니다.



산길의 끝은 오정각이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밭에서는 파종을 시작하려고 경운기에 비닐을 장착하고 있네요. 이곳에 코로나는 없습니다.

무슨 꽃인지는 모릅니다. 그냥, 예쁘게 피었구나, 하고 바라만 봤습니다.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이것, 무슨 꽃이예요?

홍매화인가요.




그럼 이 꽃은 요....

너비울경노당도 문을 닫았습니다.

이제 찻길따라 물왕저수지까지 걸어 가기로 했습니다.

상당히 큰 나무에 붉은빛이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붉은 것은 꽃망울 때문이었습니다. 이 나무에 붉은 꽃이 만발하면 얼마나 장관일까요.




고개에서 살고있는 개나리들은 침입자,넝쿨식물에 뒤덮혀 숨도 제대로 못쉬면서도 노란 얼굴을 내밀었네요.
안타까운 마음에 가위를 가고 조금 제거해 보지만 역부족입니다. 시에서 이런 일 좀 하면 안되나.




이 나무에는 작년에 나온 잎들이 죽은 채 아직도 매달려 있고.

이 나무엔 목련 꽃 봉오리들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논네 눈에는 모두 꽃처럼 보입네다. ㅎㅎㅎ

영충사(鈴忠祠)란 사당을 만났습니다.
영충사는 성종의 11번째 서녀 정숙옹주와 혼인하여 성종의 부마가 된 영평위 윤섭과
그의 5세손 충정공 윤지완을 모신 불천위 사당입니다. 윤지완은 숙종의 공신당에도 배향되어 있습니다.

사당 안의 모습.

영충사 뒤에는 묘가 한기 있는데 윤민헌 선생의 묘입니다.

윤민헌 선생 묘 / 묘-인조 6년(1628), 묘갈 숙종 35년(1709), 시흥시 향토유적 제16호.
윤민헌(1562~1628)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 자는 익세(翼世) 호는 태비(苔扉)이다.
아버지는 호조좌랑 엄(儼)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주의 딸이다. 율곡 이이, 우계 성혼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선공감역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609년 (광해군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그 뒤 형조좌랑, 전라도도사,
형조정랑 등을 거쳤으며, 광해군 때 붕당간의 대립으로 정국이 어지럽자 1618년 대동찰방을 마지막으로
안산군(현재의 시흥시)로 물러나 살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군자감정에 임명되고, 그 후 평안도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을 공주까지 호종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의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직하여 안산으로 돌아와 타계하였다.
1646년(인조 24)에 대제학,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그는 자성(資性)이 순정(純正)하고 일을 당하면
스스로 지킬 줄 알았으며 경사(經史)에 밝고 시문에 능하였다고 한다.특히 조맹부를 사숙(私淑)하여 해서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묘소는 부인 연안 김씨와 합장으로 1628년(인조 6)에 조성됐는데,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복호혈(伏虎穴)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묘갈은 1709년(숙종 35)에 세운 것으로 형태는 당시 유행하던 방부개석의 양식인데,
기단석 위에 갈색의 대리석 비신 234 x 97 x 32cm로 다듬었다.
글씨는 선생의 손자인 평안도 관찰사 윤지인(1656~1718)이 썼고
함흥부윤 윤덕준(1658~1717)이 전(篆)을 올려 비신의 앞면과 뒷면에 음각하였다.
묘갈로서는 시흥시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보존상태가 좋고 양식이 독특하여
조선 중기의 묘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 -현지 안내문-

묘갈의 전면.

묘갈의 후면.

사초지가 왕릉 버금가네요. 상부에 망주석 한쌍이 보입니다.

합장묘입니다.

상석과 향료석 그리고 망주석 외에는 석물들이 없습니다.

능상에서 본 풍경입니다.




묘의 후경입니다.

묘에 잠들어 있는 윤민헌의 족보를 따져볼까요.
이곳에 터를 잡은 입향조는 윤승유와 그의 아들 윤섭입니다. 윤섭은 성종의 11번째 서녀인 정숙옹주와
혼인하여 영평위가 되었지만 후사없이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숙옹주는 양자를 들여 대를 잇습니다.
집안을 크게 일으킨 사람은 영평위의 증손 윤민헌입니다.
윤민헌의 아들은 윤강으로 이조판서를 역임했습니다.
윤강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지인, 지선, 지완, 지경, 지인 입니다. 이 중, 지선과 지완은 정승을 했습니다.
형제가 정승을 한 집안이 된 것이죠.
영충사에는 윤섭과 윤지완이 배향되어 있고 뒤의 묘에는 윤민헌이 묻혀 있습니다.
나머지 가족들도 모두 이 근처 묘소에 잠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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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있던 비


물왕호수에 거의 도달한 지점입니다.

절을 확대한 사진입니다. 뒤에 보이는 묘가 이숙번의 묘입니다.

이숙번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으나 이 곳으로 쫒겨와 죽을 때까지 도성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


물왕저수지입니다.


이곳은 딴나라 같았어요.



얼마나 사람과 차들이 많은지.. 걷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음식점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 겨우 한자리 잡고 밥 먹었습니다.





석수역에서 헤어졌습니다.

회비 16,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