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제 송사를 맡겨 드립니다”
예레 11,18-20; 요한 7,40-53 / 사순 제4주간 토요일; 2026.3.21.
하느님께서 구세주를 인류에게 보내심에 있어서 처녀 마리아를 간택하시어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신 일은 구세주의 신성에 비추어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연의 이치에 비추어서만 매사를 이해하려 드는 인간적 관점에서나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인 것이지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의 눈으로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신비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혼돈 상태에서 우주와 생명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이신데 남자 없이 여자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시키는 일쯤이야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구세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신 것도 그분의 신성에 비추어 자연스런 귀결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구세주로 세상에 보내심에 있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아브라함 이래 수많은 예언자들을 시켜 예고하게 하셨고, 특히 유다와 다윗에게는 그 후손 중에 메시아가 나오게 하리라고 약속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에 속한 다윗의 후손이었던 요셉을 굳이 마리아의 정혼자로 삼으신 이유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려던 것이었습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나올 것이라던 예언 역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메시아의 인성적 배경이 오히려 그분의 신성을 가리는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목격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들은 이들은 그분의 신성을 인정하고 있는 반면에, 그분을 기르신 아버지가 다윗의 후손이라든가 그래서 베들레헴에까지 가서 호적 등록을 하다가 그분을 낳게 된 일 등은 까맣게 모르는 군중은 인성의 차원에서 메시아에 관해 주어진 예언들 예를 들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던 약속에 매여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분의 신성을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굴레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상황을 둘러보자면 그 당시 유다인들이, 특히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같이 구약성경을 잘 알고 메시아에 관한 하느님의 약속도 철썩 같이 믿고 있던 그 윤똑똑이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함은 물론 그분을 그 당시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으로 제거해 버린 데에는 그분이 십자가 죽음으로 부활하는,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 경륜으로 당신의 신성을 증거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나오듯이 예레미야 예언자가 내다보았던 메시아의 수난은 이사야도 네 번이나 되풀이해서 강조했던 내용이지만, 다윗과 같은 강력한 메시아가 출현하기를 기다려온 유다인들은 설마 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리라는 상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메시아의 신성을 인성과 함께 신앙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단지 역사적 지식이나 교리 지식으로 메시아의 인성과 신성을 알고 있다는 확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메시아로 보내신 예수님을 십자가와 부활로 이끄신 까닭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다 함께 그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예수님의 일로만 미루어 두면 부활도 예수님의 전유물로 국한시키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고, 그분의 부활 안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부활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체성사의 거룩한 변화가 겨냥하고 있는 가톨릭 신앙의 정수입니다.
그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나아가도록 예수님께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체성사를 세워 주셨습니다. 엄청난 신앙의 은총을 남겨 주신 것입니다. 성체의 거룩한 변화란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인한 부활로 거룩하게 변화된 것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우리의 역사 안에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민중 안에서 부활하라는 뜻입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무슨 요술이나 마술처럼 알아들어서는 안 됩니다. 성체성사의 거룩한 변화는 예수님의 삶에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의 거룩한 변화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계승하라고 주어진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는 예수님의 유언이 여기에 적중합니다. 역사 안에서 투신하는 십자가를 멀리 하면 민중의 기억 안에서 부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천주교가 진리의 복음으로 들어온 지 첫 번째 백 년의 박해와 증거를 우리 역사가 높이 기리는 반면에,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정국에서 권력에 눌려 타협하고 부역한 그 부끄러운 과거를 우리 역사가 우리보다 더 부끄럽게 여기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제 세 번째 백 년을 시작하는 이 역사적 전환기에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에 부여하는 십자가를 용감하게 짊어질 수 있기를, 그래서 통일된 코리아의 민중 안에서 자랑스럽게 부활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교우 여러분!
아울러 악인들이 모함하여 놓은 덫 때문에 예언자 예레미야가 받아야 했던 고난을 고스란히 하느님께 바쳐 드렸듯이(예레 11,20), 바야흐로 시작된 새로운 대한민국의 역사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이 고난의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억울한 송사도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올바로 심판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