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가수 차중락.. 배호를 비교해 본다~!!!
1960년대 전반 스탠더드 팝이 새로운 주류로 등극함으로써 당시
쇠락했던 트로트가 1964년 이미자 (1941년生) 부른 '동백아가씨'
로 새롭게 인기를 얻으면서 부활하였다. 이 흐름을 타고 1960년대
후반에 최고의 인기를 누린 동갑내기(1942년생) 두남자 가수가 나
타났는 바, 그들이 바로 故 배호. 故 차중락이다.이들은 대중가요를
불렀지만, 서로 색깔이 전혀 다른 가수였다. 한사람은 고혹적인 저
음의가수 배호였고, 또한 사람은 미국 팝을 국산화한 가수 차중락
이었다. 차중락은 엘비스 풍의 창법을 사용했으며, 20대 여성들이
좋아했다. 배호는 깊은 바리톤 창법을 쓰는 저음 가수였는데, 3,40
대 여성들과 남성들이 좋아했다. 이 두 가수는 1940년대가 낳은
개성적인 창법을 만든 천재가수로 보아야 옳다.이들은 모두 20대에
요절했다. 차중락은 27세에 뇌막염으로 공연도중 쓰러졌으며, 배호
는 신장염으로 투병중, 공연끝나고 귀환중 29세 나이로 앰브런스에
서 사망했다. 이들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우연히 스타가수가 되어
1,2년 사이 당대의 최고 트롯 가수였던 이미자를 제치고 뜨던 중
요절했다. 그들이 죽은 지 반세기가 가까워져도,그들의 기념회가 활
동하며, 그들의 무덤가에는 생화가 끊이지 않는다고 하니,가히 평범
한 흘러간 대중가수들은 아닌 듯 대단한 족적을 남겼다고 보인다.
1.. 차중락 평론[1942~1968]
그는 8남 3녀 중 셋째 아들이다. 아버지는 보성 전문학교 마라톤 선수
출신으로 인쇄소를 운영하였고,어머니는 경성 여자 고등 상업학교 단거
리 선수 출신이라고 한다. 시인 김수영(金洙暎)[1921~1968]은 차중락
의이종 사촌 형이다.록 밴드 '키보이스'의 멤버 차도균은 사촌 형이다.
차중락은 장충 초등학교, 경복 중학교,경복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재학
중에는 육상 선수로 활약하였다. 1961년 한양 대학교 연극 영화과에 입
학하여 그해에 미스터 코리아 2위에 입상하기도 하였다.21세 때 일본 행
을 결심하고 대학을 중퇴한 후 밀항선을 타려 했으나 밀항 사기에 걸려
부산에 도착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후 사촌 형 차도균의 권유로 1964년 '
한국의 비틀스'로 불린 록 밴드 '키보이스'에 합류하여 보컬을 맡았다. 키
보이스는 주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였다.차중락은 1966년 12월 솔로
로 독립하여 '한국의 엘비스'로 불리기도 하였다.1968년 11월 공연 도중
뇌막염으로 쓰러져 사망하였다. 차중락은 196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
래를 번안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러 크게 인기를 끌었다.차중락
의 묘는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 내에 있다.1969년 2월 10일 차중
락 기념 사업회에서 세운 추모비에는 시인 조병화 (趙炳華 1921~2003)
가 쓴 '낙엽의 뜻'이란 시가, 차중락의 맏형 차중경의 글씨로 쓰여 있다.
또 같은해 차중락을 기리기위해 신인 가수에게주는 '낙엽상'이 제정됫다.
첫해 수상자는 나훈아와 이영숙이다. 또한 차중락을 추모하기 위해 김기덕
감독이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키보이스는 1965년 해운대에서 한국 락 그룹 사상 처음으로 단독 야외 공
연해 한국의 ‘비틀즈’ 혹은 ‘비치 보이스’로 불리며 열광적인 환호를 받는
등 키보이스와 차중락의 인기는 높았다. 1966년 실연을 겪은 차중락은 지
인이 역시 실연의 아픔 속에 쓴 자작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엘비스
히트곡 'Anything that’s part of you' 에 가락에 붙여 발표했다. '낙엽 따
라 가버린 사랑'은 반주 음악의 템포와 느낌을 함께 표현하기위해 당시로
서는 드문 동시 녹음을 시도하여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1967년
차중락은 신세기 레코드의 전속 작곡가 홍현걸의 주선으로 솔로로 데뷔하
였고, 같은해 TBC[동양 방송]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인 '사랑의 종말'이
크게 히트 쳐, 동갑내기 라이벌 배호[1942~1971]와 함께 트로트와 팝으
로 가요계를 양분하는등 새로운 스타로 각광을 받았다. 1968년 9월 29일,
서울특별시 동일극장 무대에서 고열로 쓰러진후 뇌막염으로 세상을떠났다.
2... 배호 평론 (1942-1971)
독립운동을 했다고 알려진 부모 밑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해방 후 입
국하여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성장했다.1955년 아버지가 죽자 부산
으로 내려가 모자원에서 생활했으나, 삼성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1956년 상경하여 외삼촌 김광빈의 수하에서 대중 음악을 시작하여
김광빈 악단의 드럼 주자로 미 8군 무대와 방송국 등에서 활동했다.
1964년에 '두메산골', '굿바이'로 음반을 내며 본격적으로 솔로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1967년 신장염 발병으로 병상에서 노래한 '돌아가
는 삼각지'가 히트하여 톱 가수 반열에 올랐고 '누가 울어','안개 낀
장충단공원' 등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1967년 방송사들이 수여하는
가수상을 휩쓸었다.1971년 '마지막 잎새'를 유작으로 남기고 타계했
다.그가 부른 초기의 대표곡은 「두메산골」이 트로트일 뿐, '굿바이'
'차디찬 키스' 등 초기 작품은 재즈나 라틴음악 등이 섞인 스탠더드
팝 계열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미자(1941년생)의 '동백아가씨' 이
후 트로트가 부활한 흐름을 타고 트로트곡인 '돌아가는 삼각지'가 히
트하면서 그는 1960년대 후반 트로트를 대표하는 남성 가수로 자리
잡았다.그의 가창은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의 트로트 가수들
과 달리, 스탠더드 팝의 남자가수들이 보여준 중후한 저음을 그 특유
의 바이브레이션으로 강조하고 절정부에서 애절한 고음을 구사하는
방식으로, 오기택과 남일해에서 시작하여, 남진으로 이어지는 1960
년대식의 새로운 남성 트로트 창법의 중심에 서 있다. 또한 인기 절정
이던 29세에 타계함으로써 요절 가수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오랫동
안 그를 모창(模唱)한 가짜 배호 음반들이 판을 치는 등, 긴 인기를
누린 가수이다.저음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에 진한 호소력을 담은 배호
의 '돌아가는 삼각지','안개 낀 장충단 공원'등은 지금도 중년 남성들
의 애창곡 중 하나다. 1971년 10월 20 일에 출연한 MBC 심야 음악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가 그의 마지막 방송이다.방송 후,가을비
를 맞아 감기몸살에 걸린 배호는 병세가 심각해져 신촌 세브란스 병원
으로 옮겨졌지만 회복불능 통고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미아리
고개를 오르는 앰뷸런스안에서 29세 나이로 세상과 이별했다.다음날
정규뉴스 시간에 배호의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뉴스에 대중가요가 나오
자 청취자들은 방송사고로 생각했다. 경기도 장흥의 장지로 향하는 그
의 운구행렬에는 많은 여성팬들이 소복을 입고 따랐다. 배호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11월 15일에 발매된 '0시의 이별','마지막 잎새', '울기는
왜 울어' 등 유작들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 같았다. 전국에 노
래비가 5개나 건립되었을 만큼 그는 한국 대중음악 역사를 대표하는
가수로 기억되고 있다. 2003년 10월 옥관 문화 훈장이 추서 되었으며,
삼각지의 한 거리가 ‘배호길’로 명명되었다. 두 가수들은 평범한 흘러
간 대중가수들은 아닌 듯 대단한 족적을 남겼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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