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무시한 굉음 소리와 함께 두꺼운 철문은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카알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
'역시...여기도...'
카알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눈으로 직접 대했을 때 느껴지는 섬짓한 느낌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겔러리 안은 온통 피바다였다. 여기 저기에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시체들... 대부분이 목이 졸리거나 몸을 관통 당한 상처였다.
카알은 묵묵히 피로 물들은 복도를 걸어갔다. 대체...그녀가...왜 이 곳에 왔을까... 단순히 그림들이 전시된 겔러리 따위에...페리트가 대체 왜...
...!!
카알의 눈이 놀라움과 공포, 섬짓한 느낌으로 뒤섞인 채 크게 떠졌다. 설마... 설마...
그의 눈길이 향한 것은 한쪽 벽에 걸려있는 초상화였다. 온통 피범벅이 된 그곳에서 유일하게 피로 물들지 않은 곳... 그곳에...초상화가...'그녀'가 있었다...
'알고 있다... 페리트는...아니, 페리트 안의 그녀는 느끼고 있는 거다... 카시드라는...기억이 없어도 느낌으로 알고 이곳을 찾아온 거다... 그 남자...준의 그림을 찾아서... 설마, 봉인의 힘이 약해지고 있는 건가... 아직...아직은... 안 돼... 이건 너무 이르다... 너무...빨라...'
초상화 속에서 한 여자가 미소짓고 있었다. 유난히 길다란 머리가 미풍에 휘날리며 기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여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환한, 정말로 환한...그러나 너무나도 슬픈... 너무나도 처연한...그래서 더욱 환하고 아름다운 그 미소...
[전시 번호 17, <연(戀)> 현웅 화백의 제 1기, 15번째 작품.]
현웅... 그 이름을 가만히 곱씹는 카알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떠올랐다. 준...그 남자다... '그녀'를...나를...이렇게 만든... 그 남자...
-미안해요...카알... 난...그를 사랑해요... 처음이자...마지막 단 하나의 사랑... 포기할 수 없어요...
"제기랄!!"
콰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카알의 주먹이 벽에 처박혔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그의 손은 아예 벽을 뚫고 깊이 들어가 있었다. 카알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주먹을 뺐다. 여전히 초상화 속의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 그는, 아픔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문득, 그의 입에서 악에 받친 듯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라리...떠나버리지 그랬나... 응? 차라리 그 남자와 도망가지 그랬나! 이 꼴이 되려고, 이렇게 되려고 날 비참하게 한 건가? 카시드라!! 이 바보 같으니!!!"
'차라리...나도 죽여다오... 이렇게 살아있는 나를...난 아직도 용서할 수 없다...'
카알은 힘없이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겔러리- 수많은 선혈로 물들은 그곳에- 단 한 사람, 그의 떨린 흐느낌이 처연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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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서초구 명성 겔러리에 신원을 알 수 없는 강도가 들어 경비원 다섯 명을 살해하고 그림을 훼손한 후 사라졌다. 경찰은 이 수법이 너무나 잔인하고, 또 그 과정이 난해하다는 점을 표명한 후 세부 수사에 나섰는데... 그 다음날인 24일, 역시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사건이 신영 미술관과 한진 겔러리, 그밖에도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또한...]
"잠깐, 모두들 조용히 좀 해보게!"
[다른 그림들은 모두 처분했으나, 유일하게 그림이 훼손되지 않은 현웅 화백의 작품은 곧 다른 겔러리로 옮길 예정이라고 한다.]
현웅...화백의 작품...
모두의 시선이 승희를 향했다. 승희가 떨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명성 겔러리라면... 그리고...신영 미술관...한진 겔러리... 거긴..."
현암이 승희에게 물었다.
"무언가...혹시 알고 있니? 짚이는 거라도..."
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창백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모두... 같은 모델을 그린 그림이야... 모두...동일한 제목... 전부...다...<연(戀)>이야..."
연...이라고?
-난...그녀를 연이라고 불러. 하 연연이란 이름은...너무 슬프거든...
'그 여자의...그림..!'
순간적으로 박신부의 얼굴에 무언가, 무언가의 미미한 변화가 스쳐지나갔다. 아주 순간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스쳐지나간 그 일말의 변화를 알아차린 사람은 현암 뿐이었다.
'신부님이... 대체 왜 그러시지?'
박신부의 머릿속에는 온통 과거의 일부에 대한 생각으로 엉켜 있었다. 오로지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 친구의 연인이었던 '그녀'... 현웅이 연이라고 불렀던 그녀... 그리고...그녀의 모습에서 그대로 투영되는 듯한 승희의 얼굴...
'설마...!'
제 4장. secret(비밀)Ⅰ
현암은 박신부의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언뜻 보기에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응시하는 듯한, 그런 무심한 표정.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 현암은 천천히 속으로 읊조렸다. 왜, 신부님은 한사코 승희를 떼어놓고 사건 현장으로 가려고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현암이 언뜻 느낄 수 있었던 것은...머뭇거림...그리고 두려움이었다. 무언가-박신부는 무언가를, 현암이 결코 짐작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감추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박신부 같은 사람이 대체, 무엇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대체-
현암은 아까 퇴마사들의 아지트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아무래도...우리가 거기에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네... 혹시 모르니 현암군은 나와 함께 가고, 웬만하면 백호 씨도 동행해주셨으면 합니다만..."
박신부는 말끝을 흐리면서 백호를 쳐다보았고, 백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저도 한 번 현웅 화백의 작품을 보고 싶었으니까요. 그분은 정말,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는 분이죠."
"그러면..."
갑자기 낯익은 목소리가 박신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럼, 저는요?"
어느새 안정을 되찾은 듯 차분한 목소리로 승희가 박신부에게 물었다. 현암은 순간적으로 박신부의 움직임이 멈칫하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머뭇거리는 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미묘한 감정 역시...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박신부는 평온한 어투로 승희에게 말했다.
"어라? 너무하세요, 신부님. 일부러 저 빼놓으시려는 거죠? 전 괜찮아요. 그러니까 저도 갈래요."
"승희야. 여기 일은 우리에게 맡기렴. 부탁이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울림이 담긴 간곡한 어조. 뭐라고 더 말하려던 승희는 박신부의 얼굴을 보자 입을 다물었다. 저런 표정의 박신부에게는 절대로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승희였다.
"그러죠, 뭐."
그때...박신부의 그 표정...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울림이 담긴 간곡한 어조...
-부탁이다...
그때...그 표정... 그 순간 현암은 짐작할 수 있었다... 무언가... 박신부는 무언가를 감추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그것은 승희와 연관된 '그 무언가'라는 것을-
'하지만... 대체...무엇을...?'
"다 왔습니다."
차를 운전하던 백호의 목소리에 현암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차는 제일 처음 사건이 일어난 명성 겔러리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겔러리 안은 지난 번 사건의 여파인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사건 경위를 조사하는 경찰, 그리고 감식반들이 남아있어서인지, 박신부와 현암은 처음에 들어가는데 꽤나 애를 먹었다. 그러나 백호의 신분증과 말 한 마디로 그것은 간단히 해결되었다. 출입을 금지 당한 듯, 아예 겔러리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을 피해 뒷문으로 들어가던 현암은 문득, 기자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안재민 기자였다. 재민이 저 녀석, 여전한가 보군. 현암은 어떻게든 사건 현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안재민 기자를 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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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입니다."
안내를 맡았던 경찰 한 사람이 손짓을 했다. 그들은 말없이 경찰이 가리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현암은 무의식중에 주먹을 쥐었다. 이럴수가...
겔러리 안은 온통 피바다였다. 시신은 이미 치워진 듯 보이지 않았지만, 사건 현장의 처참한 잔해만으로도 얼마나 처참한 광경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흘러내린 피가 딱딱하게 말라붙은 대리석 바닥, 여기저기에 처참하게 흩뿌려진 벽의 핏자국, 그리고 그 여파에 훼손된 그림들...
백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처참하군요... 어떻게 이럴수가..."
현암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퇴마행으로 잔혹한 광경이라면 웬만큼 보아온 현암까지도 절로 고개가 돌려질 정도였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신부님?"
현암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서 있던 박신부가 보이지 않자 의아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넓은 겔러리 홀 한쪽 벽 앞에서 서있는 박신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신부님?"
현암과 백호가 다가가서 불렀지만 박신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신부님..."
박신부를 부르던 현암은 문득, 박신부가 무언가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대체, 무엇을...?
...!
[전시 번호 17, <연(戀)> 현웅 화백의 제 1기, 15번째 작품]
현웅 화백의 그림... 바로 <연>이었다... 그리고...그림 속의 여자... 그녀는...
'승...희...?'
무심결에 그림 속 여자의 이름을 읊조리던 현암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승희가 아니었다. 분명 승희와 닮았지만...승희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저렇게 닮을 수가...
그림 속의 여자는 길다란 검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서 있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입가에 떠오르는 환한 미소...너무나도 당당하고 도도한 그 태도...
그러나... 너무나 닮아있었다. 그림 속의 여자는...승희라고 착각할 만치, 승희와 닮은 모습이었다...
멍하니 그림을 응시하던 백호가 중얼거렸다.
"승희 씨와...너무나 닮았군요... 혹...승희 씨의 어머님이 아닙니까?"
어머니...? 현암의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승희의...어머니...? 그렇다면...이 그림 속의 여자가 바로 승희의 어머니라면, 닮은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승희의 어머니는...
현암은 오래 전, 승희를 처음 만나게 된 초상화 사건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과 박신부, 그리고 준후는 현웅 화백의 집안에 대해서 샅샅이 조사를 했었다. 그 과정에서, 현암은 현씨 집안의 가족 사진을 우연히 볼 수 있었다. 아직 승희가 어렸을 때인 듯, 사진 속의 승희는 긴 머리를 양갈래로 묶어 내리고 교복을 입고 있었다. 이란성 쌍둥이 언니인 주희 역시 그랬다. 그러나... 그 뒤에 서있는 여자... 사진 설명에 <부인, 이진경(34)>이라고 쓰여져 있던 그 여자... 현웅 화백의 아내인 그녀는...이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 현암이 보고 있는 그림 속의 여자, 승희와 너무나도 닮은 그녀와 현웅 화백의 아내 이진경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대체...이게...어떻게 된...'
그런 현암의 속마음을 알 턱이 없는 백호는 그림 속의 여자가 승희의 어머니라고 생각한 듯, 현암에게 말했다.
"정말...승희 씨는 어머님을 그대로 닮았군요. 아주...똑같아요."
현암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닮기는 정말 닮았다... 하지만...어째서... 한참동안 멍하니 그림을 응시하던 현암의 귓전에 문득 백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부님! 현암 씨! 잠깐만 여기 좀 와보세요!"
"무슨 일입니까?"
황급히 백호가 부르는 곳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간 현암이 숨가쁘게 물었다. 백호는 한쪽 벽 구석을 가리켰다. 글씨였다. 마구 휘갈겨진, 무언가 날카롭고 예리한 것으로 새겨진 듯한 글씨. 그러나 그 글씨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피로 쓰여진 글씨였던 것이다.
-준... 내...아기...
그 다음에는 뭐라고 썼는지, 영 알아볼 수가 없었다. 마구 뒤엉킨 채 쓰여진 그 글씨 중에서 현암이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준' '내 아기' 라는 그 두개의 단어뿐이었다. 백호가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이거 참... 자세히 보니까 손톱으로 쓴 듯 합니다. 그나저나 손톱으로 쓴 것이 이렇게 깊게 들어가다니... 대단하군요."
"아마...아주 대단한 힘을 가진 존재일 겁니다. 하지만...준이라니... 이름 같기는 한데, 대체 이 겔러리와 그림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준...이라고?"
등뒤에서 들려오는 박신부의 목소리에 현암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현암은 박신부의 얼굴이 굳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한번도 보지 못한...그런 모습... 무언의 섬짓함과 알 수 없는 고통으로 굳어진 그 표정... 대체...신부님이... 왜...
"혹시 짐작가시는 것이라도..."
박신부가 천천히 말했다.
"준...이라면... 내가 아는 사람일세. ...이미 죽었지만. 현암군 자네도 아는 사람일세."
"제가 아는 사람이라고요?"
박신부는 말없이 아까의 그림을 가리켰다. 현암과 백호는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현웅...화백이라고? 하지만...현웅 화백은 분명...
"하지만...신부님, 현웅 화백은..."
"무얼 말하려는지 아네. 하지만 현웅이라는 그 이름은...예명이었지. 진경(현웅 화백의 부인)이 일찍 죽은 뒤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그 이름으로 개명하긴 했지만 말이네... 원래 이름은...영준, 현영준이었지... 준이라고도 불렸어..."
-준... 하지만 나는...
-괜찮아 연... 날 믿잖아... 윤구는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준!
준... 그리고 연... 그들은 서로를 그렇게 불렀었다... 현웅과 그의 연인, 그가 평생토록 유일하게 사랑한 단 한 사람인 '그녀'...승희를 그대로 떠올리게 하는 모습의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