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 말러, 대작곡가 남편의 삶을 왜곡한 팜므파탈
“그대를 위해 살다! 그대를 위해 죽다.” 그의 첫 남편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유작인 <교향곡 10번>의 악보에 이같이 열렬한 사랑을 고백했다. 두 번째 남편은 ‘바우하우스’를 창립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였다. 세 번째 남편인 작가 프란츠 베르펠은 ‘우리 시대 보기 드문 마법사 같은 사람’이라고 그를 예찬했다. 짧은 시간 그와 불꽃 같은 사랑을 꽃피웠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는 이 여성과 자신을 한 화폭에 담은 <바람의 신부>를 그렸다. 빈의 찬란한 세기말을 장식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작곡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도 그의 매력에 포박되었던, 한때의 연인이었다.
한 시대를 자신의 매력 앞에 무릎 꿇린 주인공, 숱한 천재들과 사랑을 나누고 그들과 정신적 교류를 가졌던 여성. 그는 알마 말러-베르펠이다. 그러나 알마가 동시대 남자들에게서 받은 예찬은 그의 한쪽 측면일 뿐이다. 오늘날 알마의 이름에는 ‘거짓말쟁이’라는 악명이 덧씌워진다. 당대를 대표한 대작곡가이자 지휘 거장인 구스타프 말러와 함께 살고 그를 곁에서 지켜보았으면서도 심하게 왜곡된 증언으로 말러의 인물상에 심각한 손상을 가했다는 점 때문이다. ..중략..
신들러가 베토벤의 대화록을 조작하고 자기 구미에 맞는 평전을 썼던 것처럼, 알마도 사료를 조작하고 자기 구미에 맞는 회상록을 썼다. 말러는 알마에게 편지 350통 이상을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알마는 이중 200통 가까이를 숨기고 159통만 출판했다. 그의 유품으로 남은 편지들을 검토한 결과 최소 122통에서는 알마가 조작한 혐의가 발견되었다. 알마만이 사용한 잉크로 보란 듯이 덮어씌우거나 서로 다른 편지를 이어 붙인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자신이 말러에게 보낸 편지는 결혼 전 쓴 단 한 통만 남기고 나머지는 폐기했다.
알마가 왜곡할 수 있었던 부분이 비록 사적이고 가정적인 영역에 국한됐지만, 그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말러는 누구보다도 강한 자아와 심리 상태를 가진 사람이었고, 인생의 각 단계에서 직면한 상황을 작품에 투사한 작곡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음악 팬과 음악학자들은 말러라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크게 의거해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본다. ..중략..
말러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910년, 그는 발터 그로피우스와 아내가 깊은 관계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절망 속에서 그는 아내에게 결정을 요구했고, 알마는 남편에게 돌아왔다. 이듬해 말러가 사망한 뒤에도 알마는 그로피우스와 결합하지 않았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랬다.
1912년부터 2년 동안, 알마는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와 사랑에 빠졌다. 코코슈카가 두 사람을 그린 <바람의 신부>에는 완전히 자신을 의지마혀 쉬고 있는 알마와 반대로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화가 자신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후 알마는 다시 그로피우스에게 돌아가 1915년 그와 결혼했고, 딸 마농을 낳았다. 이어 아들을 임신했지만 그로피우스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 아이의 실제 아버지는 유태인 작가인 프란츠 베르펠이었다. 알마는 그로피우스와 이혼한 뒤 베르펠과 결혼했다. 1918년 태어난 남자아이는 곧 사망했다. ..중략..
알마는 자신의 남편과 연인들을 한태나마 진정으로 사랑했을까. 그가 죽기 전 작가 엘리어스 카네티에게 했던 말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는 두 번째 남편인 그로피우스를 회상하며 “그는 진짜 아리아인이었고 인종적으로 나와 맞았던 유일한 남자다. 나와 사랑에 바진 다른 사람들은 말러처럼 작은 유대인이었다”라고 말했다. 유대인 천재 예술가 두 명과 결혼했고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여인이 나치 인종주의자와 다름없는 발언을 한 것이다. 이처럼 부박하고 편견에 가득 찬 것으로 밝혀진 그의 정신세계는, 알마에 대해 일말의 공감이라도 간직했던 사람들이 그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든 ‘불편한 진실’이었다.
알마는 1964년 뉴욕에서 별세해 빈 근교에 묻혔다. 그는 자신의 장례식에 사용할 음악까지 꼼꼼히 지정해 두었지만, 그 목록에 말러의 작품은 들어 있지 않았다.
- <클래식, 비밀과 거짓말>(저자: 유윤종)에서 발췌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