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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대선배인 다윗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 때부터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이 오실 메시야를 믿고 구원에 참예케 될 수 있도록 미리 구주 예수님에 대해 보이시고 안내하시며 연결될 수 있게 하신 여자의 후손에 대한 계시, 다양한 피 제사와 희생 제물들, 유월절 어린 양, 모세를 통한 장대 위의 놋뱀, 회막, 제사장과 선지자들, 제사장 및 선지자 역할을 했던 믿음의 선조들 등과 같은 다양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을 통해 말 그대로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함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것일 뿐 아니라..
그와 같은 방법과 이치로 오늘날의 우리들이 날마다 순간마다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시공을 넘는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으면서 죄악이 아닌 살아 있는 말씀의 신앙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간순간 죄악들과 싸우고 범한 죄악들에서는 자복하며 돌이킴과 함께 말씀의 신앙으로 치열하게 몸부림친 대표적인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상 그러한 다윗이 다른 그 무엇보다 그와 같이 말씀의 신앙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서 기도하고 찬미하며 경배함과 함께 그렇게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으로 살고 죽고자 했을 때는 진정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 역사하시면서 날마다 힘주시고 도우시며 인도하시고 책임져 주시며 응답하시고 예비하시며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셨고, 특히 골리앗 같은 거인 장수와의 싸움도, 게다가 민족 차원의 전쟁에서도 이기게 하셨을 뿐 아니라 갈수록 더 강인하게 하셨고, 은혜와 응답과 복들이 생생하고 강렬하며 깊어지게 하셨고..
더 나아가 더욱 더 큰 영광을 위한 의로운 고난이라 할 수 있는 진정 이 험악한 세상 가운데에서의 가장 커 보일 수 있는 정도인 것이면서 동시에 심히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수 있는, 곧 합당한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한 많은 시련과 박해들 속에서도 오히려 더 치열한 믿음과 함께 더욱 큰 그릇으로의 연단과 훈련과 준비가 되게 하신 것이며, 순간순간 그러한 고난 이상의 하늘의 힘과 손길들로 감당하게 하신 것이고, 가면 갈수록 더욱 놀라운 선과 복과 형통과 영광의 제목들이 되게 하시는 등 모든 상황들에 있어서 전적으로 도우시고 예비하시며 책임져 주셨으며, 정말 그의 고백과 증거대로 마치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와 같은 삶과 신앙이 되게 해 주신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 땅의 한쪽 외진 곳에서의 목동에서 전체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들의 왕으로 세우셨을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더 흥왕케 하셨고, 계속해서 앞서 가시며 크고 작은 적과 전쟁들에서 대신 싸워 주시고 이기게 하시면서 온 지경을 평안케 하셨으며,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심과 함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세워 주셨고, 그가 통치한 나라를 메시야 왕국의 모형으로 삼아 주셨으며..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마태복음의 시작인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에서 뿐 아니라 복음서 속에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시게 하는 등에서도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듯이 다윗을 메시야의 가계, 구속사의 계보 한가운데 두시면서 전 인류를 위한, 게다가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세상 끝 날까지 이어질 정도의 심히 아름다운 도구와 통로가 되게 해 주셨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대단한 자라도, 진정 그러한 다윗 같은 자라 할지라도, 더 나아가 솔로몬도, 게다가 구주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니며 직접 생생한 역사와 말씀들을 수없이 보고 들으며 누리고 경험하면서 특별하게 훈련받았던 수제자인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까지도 인간적으로는 심히 연약했음을 여러 방면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고, 심지어는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의 가장 중대하고 긴박하며 실로 절체절명의 때에 오히려 배신하고 세 번이나 부인하며 게다가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하는 등과 같이 생각 이상으로 큰 악들을 행하는 등에서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참으로 허물없는 인생들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실상 다른 그 누구보다 아래 본문의 다윗 같은 경우에야 말로 비록 한 때이긴 했지만 순간순간 깨어 있고 치열해 지는 대신 미지근해 짐과 함께 한 순간에 방심함으로 인해 심각한 간음을 범했고, 더 나아가 자신의 허물과 발각을 덮기 위해 그 여인의 남편이자 심히 충성된 용사를 죽이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은혜의 직위를 악용해 살인 교사와 유사한 악까지 행하는 등 믿기 힘든 것일 뿐 아니라 참으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죄악들까지 범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사실상 그와 같은 모든 실제와 현실들이 이 험악한 세상 속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우리 모든 인생들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고, 따지고 보면 그 누구라도 스스로를 그러한 죄악들에 있어 완전 예외라고 자신 있게 말하거나 그 다윗이나 베드로보다 더 낫다고 외치기는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과 전 인류보다, 온 우주보다도 더 크시고,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신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에 있어 필요한 모든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두 다 이루신 구원에 있어서, 특히 근원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고 완전하게 하나되시어 믿음과 함께 말씀대로 이미 하나님의 것이 되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시며 온전히 인 치신 것일 뿐 아니라 실상 구원이라는 것 자체가 처음에 믿음으로 참예케 될 때부터 영원까지 이어지고 확증되는 완료형의 의미도 포함된 것이기에 참으로 한번 제대로 된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자들은, 게다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자들인 것이기에 크고 작은 죄악들로 인해, 더군다나 어떤 인간적 행위들로 인해 그러한 구원과 거듭남이라는 것이 돌이켜 지지는 않고, 사실상 돌이켜 질 수 있는 의미나 개념 자체가 아닌 것이며, 만일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중 무흠함으로 인해 구원이 돌이켜 지지 않을 자가 단 한 사람도 없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오늘 저부터도, 저야 말로 구원이 돌이켜 지지 않을 수 없는 이치와 실상이 되는 것이며, 실제로 그러하기에 가장 심각해 보이는 죄악들을 범한 다윗까지도 구원이 돌이켜 지지 않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죄악들을 범해도 된다거나 회개가 필요 없다거나 조금이라도 잠시라도 죄악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의미일 수는 결코 없는 것이고, 그로 인해 아무 문제들, 결과들도 없게 되는 것이라는 의미도 전혀 아닌 것이며,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것이고, 실제로 그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게 되는 것으로 실상 아래 본문에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사무엘하 12장부터 해서 꽤 많은 부분과 긴 시간 동안 얼마나 그러한 죄악들의 모양과 정도와 강도에 따라 그로 인한 책임과 징계들이 무서울 수 있는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아주 구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듯이 죄악들에 빠지는 그 백성들에 있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비의 심정으로 더욱 사랑하셔서라도 더 이상의 죄악들을 반복하지 않고 하루바삐 돌이키며 속히 제대로 된 믿음에 서게 되도록 그러한 죄악들의 모양과 정도와 강도에 따라, 또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경륜에 따라, 그리고 그 당사자의 영성과 그릇과 준비도 등에 따라 하나님의 시간까지 하늘의 힘과 은혜들, 응답과 복들 등은 막으시곤 하고, 대신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들 등과 같은 징계들, 사랑의 매와 같은 쓰라린 일들을 아끼지 않으시곤 하는 분이라는 것이 문제이자 실제이며 사실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부연하면 참으로 아래 본문의 다윗의 경우야 말로 훗날에 그와 같이 최악 중의 최악의 죄악들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취소되기는커녕 오히려 결국은 반대에 가깝게 되어 갈수록 합력하여 선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나 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오랜 시간들에 걸쳐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실제로 밧세바와 그 남편 우리아에게 큰 악행들을 범한 후 그로 인해 갓 태어난 아들이 죽었고, 뿐만 아니라 그가 범했던 죄악들의 모양과 강도들, 또한 그러한 다윗의 자복과 간구들, 영성과 변화들,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들 등에 따라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들 등과 같은 징계들이 길게 이어 졌다고 볼 수 있으며, 참으로 사무엘하 13장에서 20장까지를 살펴보면 실제로 시간이 지나면서까지도 그의 배다른 자녀들 간에 성폭행과 살인까지 있었던 것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에게 반역 당해 일정 기간 나라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그 후궁들이 수치스럽게 범해지게 까지 되었으며, 후에 반역을 진압하긴 했지만 그 아들이 죽임 당했고, 다른 반역과 전쟁도 이어졌던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참회하며 감당 못할 시험 당함은 면했고, 그러한 죄악의 정도와 강도와 모양과 상황 등에 따라 하나님의 시간까지만 징계들이 있었으며,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기도 했을 뿐 아니라 진정 오늘날 우리들에 이르기까지 결론적으로는 그 다윗으로 인한 은혜와 영향력들은 말로 다 표현도 못할 정도인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죄악과 그로 인한 결과라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만만하거나 우습거나 가벼운 것일 수가 없다는 사실인 것이고, 실상은 생각 이상으로 사납고 유혹이 크며 무섭고 끔찍하며 치명적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이기에..
다윗이나 솔로몬, 베드로, 바울 등 모든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마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더 이상의 자신의 힘과 의, 세상적인 능력과 방법들이 아니라 순간순간 깨어 하늘의 힘과 은혜를 덧입어 날마다 순간마다 모든 죄악들과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게 되고, 그러한 사실들 하나하나는 모든 인생들, 특히 먼저 구원에 참예한 하나님의 백성들에 있어서는 날마다 순간마다, 그 언제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영적인 이치이자 현실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러한 우리 인생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의 대속과 대신과 나음과 화평 등의 구원이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믿음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특히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마다 그러한 십자가를 어떤 식으로든 그 누구나, 언제 어디서라도, 그 어떤 상황들에서든 붙잡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상상 그 이상의 하늘의 은혜와 능력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직접적, 경험적인 죄사함과 나음들, 온갖 구원의 실제적인 힘과 역전들 등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하면 특히 믿음으로 값없이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들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순간순간마다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죄악과 세속과 정욕들 등과는 싸우고, 범한 죄악들은 최대한 빨리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게 되는 것인데..
곧 그에 있어 그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 구원과 함께, 실상 직접적, 실제적으로는 그 이름 가운데 예비되시고 약속되시며 실제로 생생히 일하시는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실질적인 하늘의 힘과 권능으로 인해 모든 죄와 악한 권세들에서 이길 수 있고 최대한 벗어날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더욱 말씀을 가까이 하고 실천하며 증거도 할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 정말 말씀대로 누리고 경험하며 성취되어 질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야 말로 한 시라도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며, 그러면서 삶의 자리와 인류 역사의 상황들 속에서 갈수록 더한 말씀의 신앙으로 몸부림치면서 실제로 순간순간 생생하고 풍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바로 그러한 말씀의 신앙, 말씀의 몸부림과 함께 처음의 다윗이 그러했듯 직접적, 현실적으로는 말씀의 영, 곧 좀 더 넓게 해석해서 말씀과 기도와 찬미와 경배와 경건과 사랑과 섬김과 헌신과 교제 등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더욱 강건해 지고 충만해 지면서 가면 갈수록 더 견고한 말씀과 기도와 찬미로 무기 삼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그와 함께 더더욱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충만케 될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그로 인한 하늘의 힘과 역사들이 강렬하게 되는 것이며..
근원적으로는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으로 인한 하늘의 은혜와 능력들을 삶의 자리들, 사역의 현장들에서 생각 이상, 상상 이상으로 생생하고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믿음의 몸부림들을 이 땅 가운데 임해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라고 하고, 깨어 있는 믿음, 또는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하며, 더 나아가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산 제사와 산 제물 같은 삶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무엇보다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진정한 예배와 열납의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그 가운데 실제로 사람이 못하고 세상이 짐작도 못할 하늘의 능력과 복들이 차고 넘치게 되는 것인데..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면 진정 말씀의 신앙, 곧 말씀의 갈망과 몸부림과 열정들 등이 직접적으로는 말씀의 영, 경배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일하시는 실질적 통로와 지름길인 것일 뿐 아니라 근원적으로는 말씀 그 자체이시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기뻐 역사하심으로 인한 구원의 일들, 복음의 능력들, 하나님 나라의 사건들, 특히 온갖 하늘의 힘과 은사들, 응답과 복들 등을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게 맛보고 누리면서 생생히 경험하고 실제로 거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원론적이자 현실적이며 신령하고 절대적인 방법이고 통로이며 비법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7:8~14)
('페북두란노서원66'중에서 인용과 추가/밀알서원)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10월 11일(금)2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