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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7:1-6 비판하지 말라(2)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마 7:1-6 / [남을 비판하지 말라;눅6:37-38,41-42] 남을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판단을 받지 않을 것이다. 2)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3) 왜 너희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탓하느냐? 4) 네 눈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 속의 티를 빼주마'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줄 수 있을 것이 아니냐. 6)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지 말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 그것들이 발로 진주를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 뜯을지도 모른다.
< 설 교 >
정직의 함정
마 7:1-5 / 김동호목사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한 마디로 정리하라면 저는 그것을 ‘믿으면 살고(롬1:17), 죄 지으면 죽는다.’ (롬6:23)라고 정리하겠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궁극적으로 말씀하시려고 하시는 말씀이 그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자신의 주(主)로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식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란 자기가 자신의 주(主)가 되어, 자기 욕심, 세상 식을 좇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예수를 믿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식과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와 우리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라고 하였을 때, 믿음으로 말미암은 삶은 영적인 구원과 삶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은 물론이고 육적인 것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직장생활이나, 사업도 믿음으로 하여야만 구원 즉 성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 그리고 하나님의 식과 법대로 산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깨닫게 되는 문제 중에 하나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구체적으로 하지 아니하고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살아야만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나, 우리의 믿음이 거기서 그친다면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식과 법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어떻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식을 이야기할 때, 그 하나님의 뜻과 식을 가장 구체적인 단어로, 설명을 한다면 그것은 무엇이 될까요? 저에게 그것을 물으신다면 저는 그것을 ‘정직’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죄의 삯을 사망이라고 하는데, 죄를 가장 구체적인 단어로 설명을 하라면 저는 그것을 ‘거짓’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정직은 하나님의 식이고, 거짓은 세상 식 곧 사탄의 식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매사에 정직하기를 힘쓰면 됩니다. 우리는 정직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식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정직은 율법인 동시에 믿음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은 정직한 자가 고통을 받고 손해를 보는 세상입니다. 정직하면 바보가 되고, 정직하면 손해를 보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식과 뜻을 믿고, 결국에는 정직한자가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좁은 길을 가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는 가장 구체적인 길입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그 동안 참으로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귀한 일들을 하여 온 단체 중에 하나입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그 동안의 사역을 정리하고 ‘정직’에 집중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일이 많아지고 방대해 짐으로 가장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정직’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역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방대해진 일을 좀 정리하고, ‘정직’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집중적으로 사역을 하자는 의논을 할 때 일부 위원들 중에 ‘정직이 너무 진부한 주제가 아닌가?’하는 의견을 내신 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의견을 내 놓으셨다고 해서 그 분이 ‘정직’을 우습게 여기거나 경홀히 여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직’은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절대로 진부해 질 수 없는 근본적인 주제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저의 남은 인생을 보다 정직해 지는 일에 걸겠고,(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해 질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에게 정직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에 걸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가장 구체적인 일 중에 하나라고 믿으며, 사랑하는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주는 가장 훌륭한 일 중에 하나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직’에 도전하십시다. 원죄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절대적인 정직에는 물론 이르지 못하겠지만, 그러나 정직하게 살려고 발버둥질 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크리스천하면 정직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수 있도록 정직에 생명을 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탄은 우리가 정직하게 사는 사람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우리가 형통하게 되는 유일한 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정직하게 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곳저곳에 많은 함정들을 파 놓고 우리를 정직하지 못하게 하려고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정직의 첫째 함정은 ‘정직하면 손해 본다.’ ‘정직하면 바보 된다.’는 거짓을 퍼트리고 그것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출판하였을 때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진 분들의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 비판 중에는 ‘깨끗한데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느냐?’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이 바로 사탄의 함정에 빠진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깨끗하면 성공할 수 없다. 물론 부자가 되는 것이 성공의 전부는 아니지만, ‘부자가 될 수 없다.’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속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을 통하여 모로 가지 않으면, 서울을 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의 대부분이 그와 같은 사탄의 거짓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히 거짓을 사용할 줄 알아야만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타락하고 왜곡된 세상에서 그 말은 실제로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게 살다가 손해를 보고, 심지어는 죽고 망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죽고, 망하면 망한다.’는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그것을 뛰어 넘어야만 합니다.
정직의 둘째 함정은, 교만입니다. 힘들게 사탄의 첫째 함정을 뛰어 넘으면, 사탄은 즉시 그 첫째 함정을 뛰어 넘은 사람들을 위한 둘째 함정을 파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이라는 함정입니다. 그 함정에 빠진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정직하게 살려고 힘쓰면 힘쓸수록 우리의 정직하지 못함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의로, 다시 말해서 정직함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앞에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정직의 둘째 함정에 빠지게 되면, 남보다 조금 나은 의와 정직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실존적으로 붙잡을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만을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잠 16:18)
오늘은 정직의 함정에 대하여 세 번째로 말씀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정직의 두 번째 함정인 ‘교만’에 대하여 계속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교만의 끝은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이후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설픈 정직으로 교만하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이 되어 인간을 판단하고 심판하게 됩니다. 그것이 치명적인 정직의 함정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다 잘 아는 말씀입니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번역이 잘 못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비판’이라기보다는 ‘심판’ 또는 ‘판단’이라는 말로 번역을 하여야 뜻이 바로 통하는 말씀입니다.
제가 찾아 본 영어 성경은 모두 그 비판이라는 말을 'judge'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판이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판단 또는 심판이라고 번역을 하여야 옳습니다. 우리는 비판과 판단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비판과 판단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비판은 judgement가 아니라 critic 입니다. judgement와 critic은 엄연히 다른 말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critic은 해야 하는 것이고, judgement는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판과 판단을 구별하지 못하여,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번역을 해 놓은 것입니다.
비판(critic)은 있어야만 합니다. 비판이 없으면 모든 사람은 김일성과 김정일과 같은 독재자가 되고, 모든 나라와 교회와 집단과 사회는 북한과 같이 됩니다. 북한이 저토록 비참한 사회가 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 사회에 건전하고 바른 비판이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건강치 못한 교회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도 교회 안에 건전한 비판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전한 비판이 사라져가고 있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층이 비판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람들이 바른 비판에 서툴기 때문입니다. 비판한다고 하면서 대부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심판하고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비판과 판단을 잘 구별하지 못하여, 판단하지 말라고 하면서 비판까지 못하게 하고, 비판이 있어야 한다면 함부로 판단까지 합니다. 나라의 문제도 여기에 있으며, 교회의 문제도 여기에 있고, 심지어는 가정의 문제와 자녀교육의 문제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의 선친은 탁월한 면이 있으셨습니다. 저의 선친은 제가 잘못하면 때리셨습니다. 제가 어려서 가장 많이들은 말 중에 하나는 ‘하나가 아니라 반쪽이라도 안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저의 선친은 제가 외아들이어서 버릇없게 되는 것을 많이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매를 들어 때리실 때 저의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매를 맞을 때에도 아버지가 저를 비난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저의 선친은 매를 드실 때에 한번도 저를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솔직히 말하면 아버지는 너보다 더 했다는 말씀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매를 들 때 흔히 범하는 치명적인 실수는 자식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흥분하여 대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는 어떻게 되먹은 놈이 밤낮 그 모양이냐?’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한 것은 사실이나 밤낮 그런 것은 아닌데 부모는 흥분하여 아이를 밤낮 그 모양이라고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잘못한 일에 대하여 비판하지 아니하고, 아예 되먹기를 잘못 되먹은 놈으로 비난하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와 정직의 치명적인 함정은 비난과 판단입니다. 정직의 함정에 빠진 사람은, 그것도 교만이라고 하는 함정에 빠진 사람은 사람을, 그것도 모든 사람을 다 형편없는 사람으로, 되먹지 못한 사람으로, 쓰레기 같은 사람으로 판단하고(judge), 심판하는 것입니다.
영락교회에 있을 때 교인들이 한경직 목사님을 존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몇 년을 지내면서 한 목사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저들에게 한 목사님 외에는 목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목사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목사는 목사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한 경우 다른 목사는 다 삯꾼 목사 같아 보였습니다.
얼마 전에 저희 교회에 게시판 토론방에 어느 목사님에 대하여 비난하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자신은 그것을 비판이라고 생각하였겠지만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비판이 아닌 비난이었습니다. 옳고 그른 것만을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저는 그 목사님 편이 아니라 그 글을 쓴 사람 편입니다. 저는 그 글을 올린 사람의 입장이 옳고, 비난을 받고 있는 목사님의 입장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글을 올린 사람은 비판을 하다가 흥분하여 도를 넘었습니다. 비판이 비난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글을 ‘야 이 아무개 목사 새끼야’로 맺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 글을 삭제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 게시판은 웬만해서는 글을 삭제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 37절에 보면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비판은 하되 (옳다 아니다 하라) 판단과 비난은 하지 말라(이에서 지나는 것은)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7절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아무개 목사님은 그 일에 대하여 옳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옳지 않은 일에 대하여 비판하다가 지나쳐서 ‘야 이 아무개 목사 새끼야’라고 욕을 한 사람은 악한 것이었습니다. 의와 정직의 함정은 잘못하면 그 의와 정직이 곧바로 악한 것으로 변모한다는 것입니다.
비판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판단과 심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정직하려고 힘쓰다가 조금 남보다 정직하게 되었다고 모든 사람을 다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은, 거짓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빼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에 저는 설교를 통하여 매사를 십자가를 통하여 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을 보면, 자신의 죄가 보입니다. 자신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인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여 타인을 보면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귀히 여기고 사랑하시는가가 보입니다.
정직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과제입니다. 정직에 대하여 설교를 하고 있는 최근에도 저는 정직에 대한 내적 갈등이 많았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 미국과 독일을 다녀왔습니다. 미국에서는 교회 집회를 하였고, 독일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코스타 집회가 열렸습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미국 집회는 사적인 집회였고, 독일 집회는 공적인 집회였습니다. 미국 집회를 위한 비행기 삯은 제가 내는 것이 옳고, 독일 집회를 위한 비행기 삯은 교회가 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비행 일정을 함께 잡으면서 모든 삯을 다 교회재정으로 지불하였습니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을 독일에서 집회를 하면서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을 미리 하지 못하고 뒤늦게야 하게 되었다는 것도 부끄럽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을 구별하여 떼는 것이 쉽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산다는 것은 한도 끝도 없어 보이는 목표와 같습니다.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저는 깨닫습니다. 발버둥질 치는 것일 뿐 결국은 완전해질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가다가 넘어지고, 가다가 넘어져도 또 일어서서 가보겠다는 것일 뿐 넘어지지 않을 자신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자신을 바라보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비판은 할 수 있겠으나, 교만하여져서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고 비난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견디기 어려워하실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눈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만 탓하는, 그리고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은 ‘이 외식하는 자여’라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직에 도전하십시다. 그러나 함정에 빠지지는 마십시다. 정직하게 살다가 이 세상에서 바보가 되고,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식이 통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며 삽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혹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그렇게 살게 된다고 할지라도 교만이라고 하는 함정에 빠져 바리새인처럼 되지 마십시다. 형제를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자리에 빠지지 마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붙잡고 온전한 구원을 이루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남을 비판하는 죄
마 7:1-5 / 김홍도 목사
남을 비판하는 죄 마태복음 7장 1-5절 우리 성도들, 특히 주의 종들이 범하는 가장 많은 죄는 함부로 남을 비판하고 훼방하는 죄라고 봅니다. 뿐만 아니라 기껏 은혜 받고 능력 받았다가도 우리의 입으로 다 쏟아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비판하지 말라 "고 했는데 이 명령을 어길 때가 너무 많습니다. 비판하는 버릇은 남을 해칠 뿐 아니라 자신도 해치는 행위입니다. 데이비드 푹(David H fink)박사에 의하면 신경과민증에 걸린 환자 1,000명과 그렇지 않은 사람 1,000명을 상대로 조사해본 결과 신경과민증에 걸린 사람들 대부분이 남을 날카롭게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고 그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 대부분은 남을 비판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날카롭게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남에게도 해를 끼치고 자신에게도 큰 손해를 가져옵니다. 예수께서 왜 "비판하지 말라 "고 하셨을까요? 물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1. 우리는 정확한 판단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법정 앞에 동상이 하나 서있는데 저울질하는 저울대를 가지고 저울질하는 모습의 동상인데 그 사람의 눈은 수건으로 가려져 있는 동상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리 공평하고 바르게 판단한다고 해도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판단하실 분은 만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뿐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것은 내가 보기에 틀려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은 현재 보기에 틀려 보이나 나중에는 옳은 것으로 판명되는 때가 오기도 합니다. 함부로 남을 비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요 잘못된 것입니다.
2. 나도 실수가 많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 인간은 내 잘못은 못보고 남의 잘못만 들추어 찾아내는 수가 많습니다. 본문 3-4절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요사이 이 말씀의 참 뜻을 깨달았습니다. 대부분 남을 비판하고 중상 모략하는 사람들은 자기 비판하는 사람보다 백 배, 천 배, 죄가 더 많은 사람들임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못보고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보느냐? "하신 말씀이 참으로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남을 비판하기에 앞서 "나는 저런 잘못이 없는가 살펴보고 없다면 나는 저런 잘못을 하면 안되겠다 " 하고 조심해야 됩니다.
3. 비판하는 만큼 자시고 비판을 받게 됩니다.
남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도 더 가혹하게 비판받는 때가 옵니다. 남에게 너그러운 사람은 자기도 너그러운 판단을 받게 됩니다. 본문 7장 1절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그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도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되로 주면 되로 받을 뿐 아니라 마로 받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심는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 남에게 너그러우면 자기도 너그러운 대접을 받게 되는 법입니다. 손가락 하나로 남을 손가락질하면 적어도 세 손가락은 자기를 손가락질합니다. 남을 흉보면 자기는 더 크게 흉보는 사람이 생기는 법입니다. 어느 목사님 한 분이 상당히 유명한 분인데 아들 하나를 신학교 보내고 나서 "목사로서 자기 아들 하나도 목사 만들지 못하면 목회에 실패한 것이다 "고 큰소리치며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아들이 신학교를 다니다가 술 먹고 담배 먹고 속만 썩히는 사람이 되어 버려서 그 목사님이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하면서 더 이상 남을 비판하지 못하더랍니다. 남을 비판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 비판받는 날이 꼭 옵니다.
4. 모든 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억울한 욕을 받았지만 같이 욕하거나 저주하지 아니하시고 공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바르게 판단하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조급하게 남을 비판하는 죄를 범치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시편 37편 7-8절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제 감신대 총장님을 비롯한 교수님들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여 식사를 하고 대화도 하고 성전 이모저모를 구경도 했습니다. 이것은 남북정상회담이 분단 5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며 희귀한 만남인 것처럼 감신대 교수님들이 우리 교회를 방문한 사실도 희귀한 일이었습니다. 교수님들이 변, 홍 교수 출교시킨 것 때문에 이미지가 좋지 않다고 하길래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수님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 일로 말미암아 타 교단, 특히 보수교단에서 감리교를 이단이라고 비방하던 말이 다 쑥 들어갔고 이단 교파라는 누명을 벗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살고 부흥되어야 신학생 지원자도 많고 여러모로 유익한데 왜 그렇게 교회를 비방하고, 특히 대형교회들을 무참하게 짓밟고 혹독하게 비판하지 마십시오. 바르트 신학자도 신학은 교회를 봉사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심한 표현인지 모르지만 교회는 어머니와 같은데 어머니를 죽이시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뱀 중에 '살모사 ' 즉 엄마를 잡아먹는 뱀이라고 해서 살모사라고 한답니다. "고 했더니 "교회가 잘 못하는 것은 누가 바로 잡습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잘못되거나 목사가 잘못하면 하나님이 심판하고 하나님이 쳐버리십니다. 교회가 부흥된 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교수님들이 공부하고 수고해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 것 못지 않게 목회자들도 금식하고, 기도하며 희생, 헌신했기 때문에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지 여러분 생각하듯이 누워서 팥떡 먹는 것 같이 쉽게 되는 것 아닙니다 "라고 대립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언론들이 하나님의 종들과 교회들을 비판하며 도마 위의 생선처럼 난도질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영안이 어둡고 거듭나지 못해서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세에나 내세에 무서운 심판을 받는 때가 옵니다. 주의 종들이나 교회는 하나님이 그때그때 판단하시고 징계하십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비판하면 무서운 죄를 짓게 됩니다. 함부로 사람을 비판해도 무서운 죄인데 하나님의 교회를 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얼마나 큰 죄이겠습니까?
5. 겸손한 사람은 너무 날카로운 비판의 눈을 가지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교만해질 때 다른 사람을 날카롭게 비판하게 됩니다. 겸손의 영이 충만한 사람은 함부로 남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내 입에서 너무 날카로운 비판의 말이 나올 때 내 영적 상태가 잘못되거나 병들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회개해야 됩니다. 제가 30대 초반 부흥회 처음 다니고 있을 때 존경하는 노장급 부흥사 목사님들과 식사를 하는 중에 젊은 부흥사들을 혹독히 비판하면서 "같지도 않은 젊은것들이 부흥회 다닌다고....참 한심해서... " 또 어떤 분은 "요사이 부흥사 춘추전국시대를 만나서.... " 하면서 모두 젊은 목사들을 비판하다 못해 욕을 하면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듣고 '아! 나는 안 그래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제 마음속에서도 풋내기 부흥사들이 신문에 광고를 많이 내는 것을 보고 그 노장 부흥사들의 말이 제 입에서도 나오는 것을 보고 정신을 번쩍 차리고 입을 다물곤 합니다. 그만해도 제가 고참 부흥사라는 자부심이 생긴 모양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과 사모님 한 분은 다 좋고 훌륭한데 말끝마다 다른 목사를 혹독하게 비판을 하는 말을 듣게 될 때 '그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선배목사님 훌륭한 목사님을 충고할 수도 없는 형편이고요 서양에 비판에 대한 이런 경구들이 있습니다. "비판하는 즐거움은 깊은 내면의 더 큰 즐거움을 빼앗아 간다 "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지 말라 " "한 소년이 그 집 개를 사랑하는 것은 그 집 주위에 그의 결점을 발견하지 않는 자는 오직 그 개뿐이기 때문이다 " "좁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항상 큰 입을 가지고 있음을 주의하라 " "만이 비판이 당신에게 고통을 주거든 그것을 하라; 만이 비판이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주거든 네 입을 닫아 버리라 "고 했습니다.
6. 비판을 받을 때의 태도 끝으로 우리가 온당치 않은 비판을 받을 때에는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 보고 마치려 합니다.
올바른 비판은 괴로워도 받아드리고 고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변명하느라고 바쁩니다. 온당치 않은 비판이나 험담은 내게 해를 줄 것 같지만 실상 아무런 해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고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담대히 나아가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비판 악담을 나비처럼 날아다니기는 해도 돌처럼 나를 해치지는 못합니다. Tasso 라는 시인에게 어떤 친구가 "당신의 친구가 당신을 악평하고 다닙니다. "하고 일러줬더니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온 세상에 악평하고 다니는 것이 온 세상이 나를 악평하고 다니는 것 보다 낫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하더랍니다. 한 번은 보스턴의 저명인사가 자신을 비평하는 신문기사를 보고 달려와서 항의하면서 화를 내니까 유명한 헤일씨(Edward Everett Hale)는 대답하기를 "자. 좀 진정하십시오. 이 도시에 이 신문을 읽는 사람이 절반도 안됩니다. 또 이 독자 중에 신문을 전부 다 읽는 사람이 절반도 안됩니다. 또 읽는 사람의 절반이 그 기사를 보지 않습니다. 그 기사를 읽는 사람들 중에 그 기사를 믿는 사람이 절반도 안됩니다. 믿는 사람 중에도 결과를 초래할 사람은 절반도 안됩니다. "라고 설명해 주더랍니다. 이사야 51장 7-8절에 "너희가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 "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함부로 남을 비판하는 죄를 짓지 맙시다. 좋은 말 칭찬하는 말만 전달하는 사람이 되도록 힘씁시다. 남을 헐뜯고, 비방하고 참소하는 일은 분명한 마귀의 역사입니다. 마태복음 13장 36-38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혀를 마귀의 도구로 내어주지 맙시다. 할렐루야!
복 있는 사람은? 비판하지 않는 사람
마 7:1-6, 눅 7:36-40 / 김명혁 목사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비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도 아주 중요한 제목입니다. 사람의 불행은 비판에 있고 사람의 행복은 칭찬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 평생 비판하고 비난하면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평생 칭찬하고 자랑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비판하는 사람의 세 가지 불행과 칭찬하는 사람의 세 가지 행복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비판하는 사람의 첫째 불행은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비판하는 사람은 비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에게 비판을 받고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습니다. 그래서 불행하게 삽니다. 비판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좋아하시지 않고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행하게 삽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은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집에 죄인인 한 여자가 들어왔을 때 그 여자를 비판했습니다. 그 여자를 더러운 여자라고 비난했습니다. 시몬은 그 여자뿐 아니라 예수님까지 비판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7:39). 비판의 소질이 있는 사람은 죄인을 비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물론 하나님까지 비판합니다. 미리암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비방했다고 했습니다.
시몬의 불행은 자기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비판을 받은 것입니다. 비판을 받았고 싫어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비판과 싫어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비판의 소리를 들어보십시다.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눅7:44-46).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으면 이렇게 조목조목 비판을 하셨겠습니까? 시몬은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몬은 지금 저와 여러분들의 비판도 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영원히 비판을 받는 영원히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비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의로워서 그렇게 조목조목 남들을 비판하십니까? 비판하는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남들을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끼리끼리 둘러 앉아서 떠들면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부풀려서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비판하는 것이 성이 차지 않아서 미국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전화를 걸어서 국제적으로 비판을 합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비판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싫어함을 받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칭찬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습니다. 자랑하는 사람은 자랑을 받습니다. 우리 교회의 새 신자 한 사람이 자기 가게에 오는 손님에게 교회 자랑과 목사님 자랑과 구역장 자랑과 성가대 자랑을 신이 나서 했다고 합니다. 자랑의 말을 들은 손님이 지난 1월 10일 강변 홈 페이지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아름다운 교회" 라는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강변교회 자랑을 입에 달고, 사랑의 교회를 섬기고 있는 저를 볼 때마다 우리 강변 교회 오면 좋겠다고... 자기네 목사님 설교를 들어 보면 매우 은혜가 된다고... 구역장 집사님이 너무 좋아서 꼭 예수님 같다고.... 성가대에 박치원 성악가가 계시다고... 교회도 멋져서 눈이 올 때 예배 드렸는데 정말 죽이더라고... 암튼 이렇게 자랑하는 장 모 씨를 보면 강변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군요. 김 목사님 이하 성도님들의 아름다운 교제가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제가 다음 날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긍정적인 글을 올려주어서 감사합니다. 하 두 욕하고 헐뜯는 세상이니까요. 자기 교회를 좋아하고 자기 교회 자랑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꽃과 같은 예쁜 마음을 가지면 그런 긍정적인 자랑을 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좋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사람을 자기 교회에 오라고 너무 조르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완전한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좋게 보면 교회가 너무 좋아지지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 분은 다음과 같은 글을 또 올렸습니다. "초대교회와 같은 강변교회"라는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목사님, 그리고 강변교회 성도님들. 저는 사랑의 교회에 출석하며 주를 섬기고 있는 송전섭이라고 합니다. 제가 강변교회를 알게 된 동기는 제가 살고 있는 근처의 상가에 예쁜 꽃집을 운영하시는 분의 소개와 자랑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의 행사 시에 사용하는 꽃을 주문하러 자주 가게 되었는데 그 때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강변 교회를 섬기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끔 얘기를 나눌 때 이제 가족이 막 신앙 생활을 시작하신 것도 알게 되었고 교회 생활이 그 분의 삶에 어떤 모양으로든 간에 즐거움을 솟게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지방에서 조그만 교회를 30여년간 섬기다가 서울에 올라온 상태이기에 누구보다도 가족과 같은 교회 분위기를 잘 알고 있던 차에 그 분의 강변 교회 이야기를 듣노라면 이전에 섬기던 옛 교회와 그 시절 정말 친 형, 동생처럼 지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더군요. 지금 저는 소위 말하는 대형 교회를 섬기면서 많은 은혜와 새로운 도전도 받고 있지만 종종 이전의 그런 교회 모습이 그리워지기도 한답니다. 엄청난 수의 성도들 속에서 느끼는 고독이랄까요? 이러한 느낌은 비록 저만의 감정이 아닐 것입니다. 간혹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 도움을 받고자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 많은 성도들이 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처럼 느껴지구요. 오히려 세상의 친구의 도움을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답니다. 이전의 시골 교회에서는 누구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고 오히려 자기들이 앞장서서 어려운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제가 강변 교회의 홈피에 들어와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외람된 말씀 한마디 드리자면, 이전 신앙의 선배들이 섬기던 초대 교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목사님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각각의 성도들의 형편과 사정을 다 알고 계시는 듯한 목사님의 말씀, 자신의 모습을 상담의 방과 방명록을 통해 교회에 드러내 열어 보일 수 있다는 사실 한가지라도 강변 교회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교회를 이땅에 그루터기처럼 두신 은혜를 감사드리구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찬 받으시는 교회로 남아 있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저는 즉시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또 진솔한 마음의 글을 올려 주어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대중 속의 고독, 이것이 현대인의 불행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코이노니아 즉 교제와 사귐을 그렇게도 많이 강조한 것 같습니다. 이틀 전 송전섭님의 글을 받고 즉시 꽃 가게에서 일하는 장 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내 예상대로였습니다. 그분은 강변교회를 다니면서 마음의 자세와 얼굴표정이 많이 밝아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것이지요. 감사한 일입니다. 교회마다 장단점들이 다 있습니다.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주어진 기회와 장소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여기 자주 들러서 생각과 마음의 글들을 있는 그대로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도전과 자극과 격려와 도움과 위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날마다 충성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 2002년 1월 12일 아침 김명혁 목사" 칭찬과 자랑을 하는 사람은 칭찬과 자랑을 받게 됩니다. 손님의 칭찬을 받게 되고 담임 목사의 칭찬을 받게 되고 구역장의 칭찬을 받게 되고 성도들의 칭찬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됩니다. 칭찬을 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자랑을 하는 사람은 자랑을 받는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2 비판하는 사람의 둘째 불행은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비판하는 사람은 보지 못합니다. 눈이 어두워져서 자기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 평생 어두운 가운데서 불행하게 삽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은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몬은 자기 자신을 바로 보지 못했고 죄인인 여자도 바로 보지 못했고 예수님도 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시몬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외식과 위선의 죄가 세리나 창기의 죄보다 더 큰 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 눈에 들보와 같은 큰 죄가 있다는 사실도 보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색맹이고 난시이고 근시이고 원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시몬은 또한 죄인인 한 여자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겉으로는 부도덕한 죄인이었지만 안으로는 진정한 회개와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용서 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몸은 보잘 것 없는 천한 몸이었지만 그녀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불붙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었지만 주님의 칭찬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시몬은 참으로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시몬은 또한 주님의 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의인인체 하는 사람을 싫어하시고 건강한 체 하는 사람을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도무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좋아하시고 나는 병신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남을 칭찬하고 자랑하는 사람은 영의 눈이 밝아져서 모든 것을 바로 보게 됩니다. 죄인인 한 여자는 남을 비판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보다 낫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의인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사람을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낮은 자리에 앉아서 모든 것을 바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를 바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는 누구보다도 부족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바로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바로 보았습니다. 주님이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죄인들의 친구라는 사실도 바로 알 수가 있었습니다.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남을 칭찬하고 자랑하는 사람은 눈이 밝아지는 모든 것을 바로 보는 복을 받습니다.
3 비판하는 사람의 셋째 불행은 진주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비판하는 사람은 진주를 받지 못합니다. 비판하는 사람에게는 진주를 던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거룩한 것을 받지도 못하고 진주를 받지도 못합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하고 보배로운 은혜를 받지 못하고 가련하게 천하게 삽니다. 개처럼 천하게 살고 돼지처럼 땅만 바라보며 가련하게 살게 됩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시몬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바로 옆에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주와 같이 값진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비판 의식이 강한 사람은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자세가 순박하지 못하고 삐딱하기 때문입니다. 비판 의식이 강한 사람은 기도회에 나와도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무릎을 꿇고 은혜를 사모하는 겸손한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평생 은혜를 받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죄인인 한 여자는 값진 은혜를 받았습니다. 죄사함의 은혜와 헌신의 은혜와 헌물의 은혜와 사랑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님의 칭찬까지 받았습니다. 그 여자는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남을 비판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무자비하게 비판했을 망정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이 너무 고상하게 보였고 주님이 너무 거룩하게 보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보다 훌륭하게 보였고 고상하게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자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자랑하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누가 불행한 사람입니까? 비판하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칭찬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비판하기 좋아하는 의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지금 당장 그것을 십자가 앞에 묻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 비판하는 사람은 죽고 칭찬하는 사람이 살아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칭찬을 받는 복 있는 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판하지 말자
마 7:1~6 / 옥한흠 목사
며칠 전에 소포 하나를 받았습니다. 지방에 있는 꽤 큰 교회에 어느 성도가 보낸 소포였습니다. 꽤 두툼했습니다. 뜯어보았더니 편지가 한 장 있고, 테잎이 여러개 들어있었습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제가 쓴 요한복음 강해 설교 집 한 부분이 같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이상한 것이 왔구나' 하고는 편지를 읽어보았습니다. 그 편지 서두에 이런 말이 있어요. "목사님, 저희 교회의 부끄러운 현실을 알려드립니다. 무슨 내용인가 하고 봤더니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수요일마다 요한복음을 강해하는데 몇 달 동안 옥한흠 목사가 쓴 책에 있는 것을 그대로 베낀다는 것입니다. 토씨하나 빼지 않고 그대로 베끼고 설교를 하는데 너무 너무 기가 막혀서 저에게 편지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아니할까 싶어서 그 목사님의 테잎을 여러 개 넣어서 보냈고, 제가 쓴 책에 페이지마다 목사님이 어떻게 이 말을 그대로 도용했는가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빨간 줄로 전부 그어서 보낸 것입니다. 증빙서류를 첨부해 보낸 것이지요. 그리고는 편지 말미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주님의 말씀이 없어져 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을 안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자기 이름도 밝히지 않고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 심정이 착찹했습니다. 일단 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대충 훓어 보니 그 목사님이 토씨 하나도 빼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저의 책에서 중요한 내용들을 발췌하여 설교를 하신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우는 제 책을 읽었던가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 어디서 들은 말인데...' 하고는 귀담아 듣다가 '여기서 빼가지고 설교하는구나.' 생각하고는 너무 마음이 괴로워서 저에게 편지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교인을 연민의 정으로 봅니다. '조금 비정상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여러분, 설교자는 많은 사람에게 빚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말을 몇 마디나 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수많은 설교자들이 배출되었고, 저명한 저술가가 등장해서 많은 책을 남겼고, 그리고 성경을 해석하고 연구하면서 평생을 바친 위대한 주석가들이 남겨놓은 유산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 모든 분들에게 빚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책을 읽으면서 그분들의 남겨놓은 많은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아, 이 말씀이야 말로 참 은혜스러운 말씀이다. 우리 성도들이 들어야 되겠다. 우리 성도들이 이 말씀 듣고 은혜 받으면 그 영혼이 살찌고 그 영혼이 건강해질 수 있다.' 하고 생각하고는 좋은 내용들을 골고루 찾아 그것을 가슴에 안고 씨름하면서 설교를 만드는 게 설교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남의 말을 인용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게 아닙니다. 자기가 전혀 준비하지 아니하고 남의 것을 그대로 카피해서 설교한다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좀 인용한 것을 가지고 견디지 못해서 교회에 주의 말씀이 사라졌느니, 없어졌느니 하고 떠들면 설교자가 어디에 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어떤 설교자가 자기 설교는 자기만이 해석할 수 있는 성경의 의미라고 떠든다면, 그 설교는 아무도 해본 일이 없는 오직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설교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단입니다. 그런 설교자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설교자를 놓고 이런 식으로 비판하는 성도들이 교회 안에 많으면 교회가 많이 힘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시시콜콜 비판할 테니 말입니다.
지난번 민경배 목사님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공감하셨을 것입니다. 제가 테잎을 통해 들어보니 삭개오와 니고데모를 혼동하셨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나무 위에 있었는데 예수님이 지나가셨어요. 아, 그런데 니고데모야 내려오라.' 하시는 것입니다. 또 너무 흥분해서 '니고데모가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하시는 게 아닙니까? '아, 저 목사님 완전히 삭개오를 니고데모로 착각했구나'. 그러면 그 목사님이 얼마나 귀엽습니까? 이 강단에 올라서서 흥분하면 어떤 때는 이름이 왔다갔다 합니다.
저도 옛날에 다윗을 사울이라 하고, 사울을 다윗이라 하고 그랬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너무 긴장하셔서 우리에게 좋은 설교를 해주시려고 하다가 저렇게 약간 혼동을 하셨구나' 하면 오히려 더 은혜가 될 텐데, 저에게 편지를 보낸 그런 성도는 못 참는 것입니다. '세상에 목사가 되서 삭개오와 니고데모도 구별을 못하나?' 이렇게 하면 끝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왜 자기를 따르는 우리를 향해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하는 것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비판이란 무엇입니까? 형제의 약점이나 허물을 들추어서 험담하거나 공격하는 언어의 폭력입니다. 자기 안경을 쓰고 다른 사람을 보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로 다른 사람을 재면서 '길다, 짧다' 늘어 놓는 것입니다. 물론 비판 중에는 건전한 비판도 있습니다.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여 아예 비판의식 전체를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잘못되어 가면 건전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교회가 바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한국교회가 조금이라도 부패하고 세속화되어 간다면 우리는 이런 교회를 가슴에 안고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비판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통회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비판의식을 주님이 하지 말라고, 나쁘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여 책망하는 것까지 금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잘못할 때 책망합니다. 교회에서는 우리의 잘못을 놓고 책망합니다. 잘못되는 것을 보고도 책망하지 아니하는 교회는 이미 생명이 떠난 교회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악과 손을 잡고 잘못되어 그 영혼을 파괴하고 있는데도 조금도 나쁜 소리를 하지 않는 교회라고 한다면 그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권위를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책망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해서 책망하지 말라는 말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교회 안에서 형제끼리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용납하지 못해 말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상처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비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원래 바리새인들은 남을 비판하는 데 도가 트인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십일조를 잘 내는 것을 드러내어 자랑하기 위해서 십일조 안 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공격했습니다. 왜 십일조를 안 하느냐는 말은 자기는 이렇게 한다고 자기를 내세우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남을 비판했습니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20절에 주님이 매우 엄숙한 말씀을 하신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5장 2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바리새인처럼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바리새인들이 내세우는 의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은 죽이고 자기는 사는 의입니다. 다른 사람을 깔아 뭉개고 자기가 의로워지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님을 섬긴다는 우리가 바리새인들처럼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나은 의가 필요합니다. 더 나은 의가 무엇입니까?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 의입니다. 나를 죽이고, 형제를 높이는 의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판할 수 있는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교회 안에 형제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은 우리가 영적으로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얼마나 잘못되었으며, 얼마나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으며, 얼마나 악한지 우리는 그들을 얼마든지 영적으로 분별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7장 6절에 재미있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거룩한 것이라는 말을 목걸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목걸이를 개에게 던지지 마라. 너희 손가락에 끼고 있는 진주를 빼서 개에게 던지지 마라.' 여기서 개는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이 아니라 들개입니다.
사납고 냄새 나고 더러운 옛날의 들개들입니다. 이 개들에게 값나가는 목걸이를 던져준다고 해서 개가 그 가치를 알까요? 보석을 돼지에게 던진다고 해서 돼지가 고맙다고 할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가치를 모르는 개, 돼지에게 거룩한 것을 던질 수도 없고, 진주를 던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뭘 의미합니까? 우리에게 거룩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의 축복이요, 복음입니다. 이런 것들은 너무너무 소중하고 거룩합니다. 보배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에게 함부로 던지듯이 주면 안 됩니다. 사람을 분별해가면서 예수의 이름을 전해야 되고, 영적으로 잘 판단해서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의 이름을 마구 모욕하고, 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전도하실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귀 있는 자가 들을 찌어다.'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복음을 귀한 걸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 가치를 모릅니다. 개와 돼지처럼, 뭘 모르고 오히려 찢어버리고 발로 뭉갭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함부로 거룩한 복음, 거룩한 예수의 이름을 던지면 안 됩니다.
기독교를 은근히 비판하기를 즐기는 도올 같은 사람에게 가서 '예수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을 구원하십니다.' 하고 말하면 어떤 응답을 할 지 뻔하지 않습니까? 뻔하게 알면서 주님의 이름을 그 사람의 발 밑에서 짓밟히게 만들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세상 사람을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개와 돼지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우리가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먼저 두 가지를 생각하면서 마음에 담을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비판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남이 날 두고 비판하는 것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1절에 보면, 첫 서두에 이런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너희들 다 비판 받기를 원치 않지? 남이 너희 소리하는 것을 듣고 싶어하지 않지? 그러므로 너희가 남에게 비판 받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면 남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도 남으로부터 비판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자기를 비판하는 것을 가장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남의 말 잘 하는 사람치고 남이 자기 말 하는 것 잘 견디는 것을 못 봤습니다. 전부다 히스테리컬 하게 반응합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죠?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자기는 재미있게 하면서, 남의 말은 못 받아주는,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저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사니까 비판을 하면 겸손하게 받아들일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또, 건전한 비판은 언제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건전한 비판이든 불건전한 비판이든 간에 비판하는 조로 말하는 것을 저의 본심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분이 나쁜데 어떻게 합니까? 나쁘면 나쁘다고 해야지 별도리가 없습니다.
20년이 넘도록 저에게는 어떤 사람의 표정이 제 마음에 각인이 되어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말 몇 마디가 저의 귀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다투지 않습니다
마 7:6 / 박상훈목사
주후 4세기에 텔레마쿠스라는 유명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본시 세상을 등지고, 광야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는 세상을 등지고 살았지만, 이제는 늙어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러니 남은 기간 동안은 세상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그는 그렇게 마음을 먹고서 그 당시 세계의 심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로마로 갔습니다. 때마침 로마에서는 어떤 장군의 개선을 축하하기 위해서 축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원형극장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이미 기독교 국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말이 되면 원형극장 안에서는 포로로 잡혀온 검투사들의 칼싸움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싸우는 경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잔인한 칼싸움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텔레마쿠스도 사람들 틈바구니에 싸여서 원형극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팡파르가 울려 퍼졌습니다. 두 명의 검투사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먼저 황제 앞에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죽기까지 싸우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서서히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텔레마쿠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이것을 막으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로마로 보내셨구나!"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그리고는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면서 온 힘을 다하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즉시 멈춰라!"
처음에 사람들은 그것이 쇼의 일종인 줄 알고서 그저 웃기만 했습니다. 경기장 측에서 늙은 수도사의 복장하고서 어떤 어릿광대를 집어넣어 경기를 흥겹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니까 그것은 쇼가 아니었습니다. 텔레마쿠스는 두 검투사의 사이에 들어가서 결사적으로 그 싸움을 막았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의 입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마쿠스는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급기야 경기를 진행시키던 지휘관이 검투사 가운데 한 사람에게 텔레마쿠스를 먼저 처치해버리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번쩍이는 칼과 함께 텔레마쿠스는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숨이 멈추기까지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그 순간 주변은 갑자기 숙연해졌습니다. 황제 호노리우스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경기장 밖으로 퇴장했습니다. 그의 뒤를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한 사람씩 두 사람씩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나중에는 두 검투사들 마저도 고개를 푹 숙인 채 퇴장했습니다.
주후 391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로마에서는 더 이상 검투사들의 경기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텔레마쿠스의 외침과 그의 희생적인 죽음이 그 잔인한 경기를 영원토록 종식시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되었던 관계를 십자가로 화목케 하셨습니다. 이제는 고후5:18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거룩한 직분이 주어졌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화목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화목케 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故한경직 목사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할 수 있습니까?"
그때 한경직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싸우지만 않으면 절로 부흥하기 마련입니다. 보이게든 보이지 않든 속으로 싸우니까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되기만 하면 절로 부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갈 5:15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서로 싸우고 다투면 결국은 피차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짤막한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교훈입니다. 마7:6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개와 돼지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로, 거룩한 것과 진주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로,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우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시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렇게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우리는 마5:9에서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결코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다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첫째로, 개와 돼지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요즘에는 개뿐만 아니라 돼지조차도 애완동물로 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그런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벧후 2:22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이처럼 성경에서 나타나는 개와 돼지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불결하고 혐오감을 주는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백성들이고, 자기들 이외에 이방인들은 개와 돼지처럼 영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만이 의로운 사람들이고, 자기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개나 돼지처럼 부정한 죄인이라고 경멸하고 깔보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문제가 더 많았습니다.
옛날 시골의 어떤 마을에 한 가난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양에 가서 과거에 응시했지만 불행하게도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볼 면목이 서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제나저제나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기를 바라면서 온갖 뒷바라지를 다 해준 자기 아내의 얼굴은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고민하던 중,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동안 아껴두었던 노잣돈을 다 털었습니다. 그리고는 큼지막하고 예쁜 거울 하나를 샀습니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거울을 구경조차도 할 수 없을 때였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줄 선물을 사고 나니까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드디어 그는 집에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가족들은 밭에 나가 일하는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사온 거울을 아내가 잘 볼 수 있도록 방문 입구에 걸어두었습니다.
한참 뒤 아내가 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벽에 걸려있는 거울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웬 젊고 예쁜 여자가 들어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내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지더니 급기야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이 사람이 보라는 과거는 안보고 바람이나 피우고 다녔구나. 아이고 억울해라!" 시어머니는 그가 대성통곡을 하는 소리를 듣고서 깜짝 놀라 뛰어 들어오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얘, 아가야! 왜 그러느냐? 어디 아프냐?"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거울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이런 식으로 집안에 다른 여자를 들여놓으면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시어머니는 그 소리를 듣고서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며느리에게 와서 이렇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얘야,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보니까 너하고는 상대가 안 된다. 내가 보기에는 다 늙어 빠졌는데 뭘 그러느냐? 별일 없을 것이다."
잠시 뒤에 시아버지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집으로 들어오다가 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순간 시아버지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리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님, 아무런 말씀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우선 절부터 받으옵소서."
옛날 거울이 없었을 때는 자기의 얼굴을 모르니까 이런 착각이 더러 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자기의 얼굴을 보고서 다른 사람의 얼굴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착각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실상은 그들이 개요, 돼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만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개와 돼지처럼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개의 특징을 무엇이라고 설명하셨습니까? 6절 끝 부분에 보니까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의 특징은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예수님을 비판했습니까? 한 두 번 실수로 잘못을 했으면 그것은 얼마든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은 병적인 것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본문에 보니까 돼지의 특징을 "발로 밟고"라고 했습니다. 그 옛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의를 과시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깔고, 뭉개고, 밟고, 경멸했습니다. 그들이 개와 돼지와 같은 행동을 하면서 자기들은 그저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개와 돼지와 같다고 멸시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여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착각이 없습니까? 우리 속에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적인 비판의 태도를 우리가 없애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화평케 하는 자로서의 거룩한 사명을 다하십시다.
둘째로, 거룩한 것과 진주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먼저 거룩한 것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본시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다 거룩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거룩할 성(聖)자를 써서 "성전(聖殿)"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성도(聖徒)"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가 "성직자(聖職者)"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거룩한 것에 반대되는 개념은 무엇입니까? 레10:10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람들, 특별히 제사장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것의 반대는 속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만큼 거룩해 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그만큼 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에 진주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마13:45에서 예수님은 천국을 하나의 값진 진주에 비유를 하셨습니다. 어떤 진주장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진주를 만나기 위해서 이곳 저곳을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진주를 샀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그만큼 값지고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 천국을 하나의 값진 진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개와 돼지를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거룩한 것과 진주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나타낸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약한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진주와도 같이 지극히 값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다고 여겼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들까지도 살리시는 큰 이적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이야말로 다윗의 자손이요, 메시야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우러러 보면서 감격 속에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사역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예수님의 사역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앞장서서 끈질기게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했던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반대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서 율법을 폐하는 자라고 비판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쳐주셨다고 그것을 트집잡아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하는 자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예수님을 가리켜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완전히 세속주의자로 몰아붙였습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의 몸과 마음이 온전해졌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그 귀신을 쫓아내 주었다고 모진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그 외에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신성을 모독한 자요, 백성들을 미혹하는 자 등 갖은 비판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결국은 예수님을 정죄하고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기들의 독선과 아집 때문에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여기지 못했습니다. 값진 것을 값지게 여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영원한 멸망의 자식들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세계 제 2차 대전때였습니다. 한 독일군 병사가 심하게 부상을 당했습니다. 동료들은 다 퇴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상 때문에 퇴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영국군에게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급히 영국군 병원으로 옮겨져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피를 너무나도 많이 흘렸기에 수혈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와 똑같은 혈액이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 그와 똑같은 혈액형을 가진 간호사나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다행스럽게 거기에 있는 의사 한 명과 간호사 한 명이 그와 똑같은 혈액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는 병사를 위해서 기꺼이 자기들의 피를 뽑았습니다. 이제 뽑은 피를 독일군 병사에게 수혈하려고 했을 때입니다. 그 독일군 병사가 정신을 차리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기는 영국군 병원이 아닙니까? 그럼 내 몸에 지금 넣고자 하는 피도 당신들의 피입니까?"
의사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독일군 병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아주 강경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싫습니다! 죽어도 나는 당신들의 피를 받기 싫습니다. 절대로 내 몸에 손대지 마시오!"
결국 그는 수혈을 거부해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옛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태도가 바로 이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건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영원한 멸망의 자식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음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씻음 받기를 바라며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귀한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는 참으로 감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우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시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6절 하반부입니다.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광경을 머리 속으로 한 번 연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더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어떤 진주 장사꾼이 바닷가 앞 항구에 가서 많은 돈을 주고 진주 한 포대를 샀습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광야 길을 지나다가 그만 들개와 돼지떼를 만났습니다. 들짐승들은 배가 고픈 듯이 눈을 번뜩이고 이빨을 으르렁거리면서 한 발자국씩 한 발자국씩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진주장사는 너무나도 다급했습니다. 그는 들고 있던 포대를 열고서 그 속에 있는 진주를 한 움큼 끄집어내서 들짐승들에게 뿌렸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콩이나 나무열매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들짐승들은 그 진주를 입에 넣고 씹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진주는 딱딱해서 씹히지도 않고, 전혀 맛도 없습니다. 그제야 들짐승들은 자기들이 속은 줄 알고 그 진주를 뱉어서 발로 짓밟았습니다. 그리고는 화가 난 모습의 들짐승들은 진주장사에게 덤벼들어서 그를 찢어 상하게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진주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개와 돼지에게는 진주를 던져 주어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개와 돼지는 본질적으로 진주의 가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잘못할 때 실수로 잘못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악해서 잘못하는 것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내 사라를 자기의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팔아서 부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첩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도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실수일 뿐입니다. 그의 마음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에게로 향해 있었습니다.
다윗 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마음에 합하는 자로다." 하나님은 다윗 왕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에게도 큰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는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살인죄까지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실수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마음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수에서 돌이키고 다시금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본질적으로 악하고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의로운 척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은 위선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겉보기에 그들은 곡식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가라지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이들에 대해서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주인이여 우리가 밭에 있는 가라지를 다 뽑아버리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때 주인은 종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하리라."
우리가 그들과 일일이 다투면서 대항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들을 친히 심판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절로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속상한 일을 당하면 스스로 복수하려고 합니다. 남이 나를 비판하면 나도 그를 비판하려고 합니다. 안 되면 연판장이라도 써서 돌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다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비성경적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그러한 방법을 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 서셨습니다. 말 한 마디만 하면 예수님을 살려주겠다는 빌라도의 회유에도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비아냥거렸습니까?
"네가 지금 만일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가 너를 믿겠노라."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외치시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은 말씀 그대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그저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마음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초대 교회때부터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에 의해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천사장 가브리엘이 가만히 내려다보니까 기가 막힙니다. 얼마 되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그나마도 나약한 모습으로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기독교의 명맥이 끊어질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이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는 걱정이 되어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이러다가는 예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끊어질 것 같습니다. 천사들을 내려보내서 손을 좀 보게 할까요?"
예수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나는 내 제자들을 믿는다. 겉보기에 저들은 약해 보이지만 저들이 결국은 승리할 것임을 나는 믿는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얼마 되지 않아서 기독교를 박해하던 대로마제국은 기독교 앞에 완전히 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승리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악은 결코 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선으로만이 악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 5:9을 다시 한 번 명심하십시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 어떤 다툼이라도 종식되고 이제는 화목으로 바뀌어지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언제 어디서라도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된 승리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한 것으로
마 7:6 / 안수관목사
옛날 어떤 임금이 민정 시찰을 나서면서 어린 공주를 데리고 갔습니다. 어린 공주는 궁중생활을 벗어나 난생 처음으로 바깥나들이를 하게 되자 너무 기쁜 마음으로 따라 나섰습니다. 임금님과 공주 일행이 어느 농촌 마을을 지나고 있을 때, 태어 난지 며칠 되지 않은 아기 돼지들이 돼지우리 밖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어린 돼지 새끼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본 공주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아빠인 임금님께 ‘아기 돼지 한 마리만 얻어가자’고 졸랐습니다. 공주가 하도 간청하는 바람에 임금님은 농부에게 돼지 값을 지불하고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사 주었습니다.
궁궐로 돌아온 공주는 아기 돼지를 정성스럽게 씻겨주고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기돼지에게 예쁜 장식품들을 달아 주고 비단 옷을 입혀 예쁘게 치장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날마다 궁궐 정원의 잔디밭에서 아기돼지를 데리고 놀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궁궐 정원 잔디밭 옆에 있는 하수구 도랑을 발견한 아기돼지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그 하수구 속으로 뛰어들어 가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냄새나는 하수구 시궁창을 좋다고 헤집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에 놀란 공주가 안타까워 소리를 칩니다. “돼지야, 어서 나와! 그렇게 더러운 데 들어가지 말고 빨리 나와!” 여러분! 공주가 아무리 돼지를 부른다 한들 돼지가 그 시궁창에서 나오겠습니까? 돼지에게는 잘 정돈된 잔디밭보다는 냄새나고 더러운 물이 흐르는 시궁창이 더 좋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공주가 애타하며 부른다 한들 거기서 나올 리가 없습니다.
돼지에게는 우리와 같이 ‘무엇이 더 깨끗하고 무엇이 더 값진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분별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비단 옷을 입혀 준다 해도 금새 시궁창으로 들어갑니다.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를 걸어준다 해도 먹을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귀찮아 할 뿐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움켜쥐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까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멀리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하고, 거룩한 것과 세상적인 것이 무엇인지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자주 “술 취하지 말라”(에베소서 5:18)고 말씀하십니다. 왜 ‘술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에베소서 5:17-18절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술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우리 신앙인들은 우리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분별하고 이해하여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음에도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가? 그 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술 취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술에 취하면 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술에 취하면 이성이 마비되기 때문입니다. 이성이 마비되면 판단력도 잃게 되고 분별력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영적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른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술 취함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바른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거룩한 것을 거룩한 것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하고, 그 거룩한 것에 인생의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거룩’이라는 말을 참 많이 씁니다.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성도’(聖徒)라고 부릅니다. 성도라는 말은 거룩한 무리,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모여 예배드리는 곳을 때로 ‘성전’(聖殿)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전이라는 말은 거룩한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 안에 있는 물건들을 가리켜 ‘성물’(聖物)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왜 이런 것들에 ‘거룩’이라는 말을 붙입니까? 평범한 우리를 왜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다른 건물과 똑같이 철근과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인데 왜 거룩한 집이라고 부르고, 교회 밖에서도 똑같이 쓰이는 물건인데 교회에서 쓴다고 하여 왜 거룩한 물건이라고 부릅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거룩함이 없습니다.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거룩하시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 잇대어 있는 것만이 거룩하다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악 가운데서 태어났고, 죄악 가운데서 죄악을 먹고 마시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거룩한 백성(성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위해 지어졌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 임재하시는 곳이기에 이 건물을 거룩한 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통하여 거룩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는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거룩함이 있습니다. 그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일반적으로 성경에서는 개를 썩은 고기를 먹는 야수라고 여겼습니다. 성서시대에 개는 오늘날처럼 잘 길들여진 가축이 아니었습니다. 성 주변에 살면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탐욕스런 동물이었고, 썩은 고기나 시체를 먹어치우는 야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죽은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되고 개에게 던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출애굽기 22:31) 거룩함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동물이 개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자주 이방인을 개에게 비유하곤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거룩함과는 전혀 관계없는 개들과 거룩한 백성을 대조시키면서 거룩한 백성들이 자신들이 간직한 그 거룩함을 거룩함을 모르는 개들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일차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너희는 거룩함을 전혀 모르고 거룩함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이방백성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씀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인 우리는 거룩함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거룩한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거룩한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세상 속에서 거룩한 자들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에게서 거룩한 옷을 벗기려고 안달을 합니다.
세상은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 이중적인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신앙인들에게 더욱 거룩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합니다. 세상에서 우리 교회나 신앙인들을 향하여 비판의 소리를 쏟아내는 이유도 엄격하게 말하면 신앙인들이 좀 더 신앙인답게 거룩하게 살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신앙인들의 신앙을 넘어뜨리려 합니다.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기들의 죄악된 습성에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것처럼, 거룩한 빛으로 살려고 하는 신앙인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비난하고 박해해서 신앙인다움을 드러내지 못하게 합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우리 신앙인은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신앙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에서 거룩함을 잃어버린다면 우리 신앙인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세상에 소금처럼 살아야 할 우리가 그 맛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더 이상 세상을 위해 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밝게 비춰야 할 빛이 그 빛을 잃어버린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됩니다. 세상에 소금이요 빛인 우리가 맛을 잃고 빛을 잃어버린다면, 그런 우리를 향해서 세상은 오히려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우리 안에 거룩함을 간직하고 살아갈 때 신앙인은 신앙인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고, 거룩함을 간직하고 살 때 세상에 맛을 내며 빛을 비추는 삶을 살게 됩니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 5:13) 이어서 또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성경에서 개는 탐욕의 상징입니다. 썩은 것이든 썩지 않는 것이든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것이 개입니다. 개는 또 음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개를 음란한 동물로 여기는 것은 그런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시골에서 길을 다가다보면 교미하고 있는 개들이 서로 엉덩이를 맞대고 서 있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쫓아도 도망갈 줄 모릅니다. 그런 모습들 때문에 개는 음란한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개는 또 사나운 동물입니다. 서로 만나면 으르렁거리며 짖어대고, 조금만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시끄럽게 소리를 지릅니다. 개는 또 죄된 동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개는 자기가 토한 음식을 다시 주워 먹습니다. 그래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지은 사람을 가리켜서 ‘개같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개로 비유되는 세상을 닮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탐욕을 제거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음란한 문화로 유혹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더욱 거룩함에 힘써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짓밟고 서야 한다는 세상의 가치기준을 따르지 말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거룩한 마음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사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죄를 멀리하고, 주님이 주신 능력을 의지해서 죄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또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주는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것을 말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 어떤 유혹이 와도 바꿀 수 없고 어떤 핍박이 와도 마지막까지 붙잡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복음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천국복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주고, 천국을 기업으로 얻게 해 준 복음이야말로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가장 값진 것입니다. 그 천국 복음을 귀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돼지는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그 앞에 많은 진주를 가져다준다 한들 그 많은 진주보다도 우선 당장 먹을 수 있는 구정물 한 그릇을 더 좋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과 그 복음을 통해서 주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정말로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는 돼지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기준으로 본다면 천국복음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세상에 둘도 없이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 복음을 위해서 고난당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복음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의 현장에 선다 하더라도 담대하게 믿음을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더 귀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북아메리카 캐나다 옆에 알래스카(Alaska)라고 하는 커다란 땅이 있습니다. 그 땅의 크기는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7배 이상 큽니다. 그 알래스카는 원래 러시아(구 소련)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이 그 땅을 미국에 팔았습니다. 우리나라보다 7배 이상 큰 땅을 얼마에 미국에 팔았는지 아십니까? 720만 달러에 팔았습니다.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한다면 약 16억 달러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것을 우리나라 돈으로 계산한다면 약 2조 원 정도 됩니다. 그 어마어마한 땅을 우리 돈 2조원에 샀다면 그건 헐값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련이 그렇게 큰 땅을 헐값에 미국에 판 이유는 ‘늘 눈에 덮여 있어서 별로 쓸모없는 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미국에서도 ‘왜 그런 땅을 샀느냐’는 질책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1867년 미국의 제17대 대통령인 앤드류 존슨(Andrew Johnson, 1808-1875) 대통령 때에 국무장관이었던 슈어드(William Henry Seward, 1801-1872) 장관 주도로 국회의 동의 절차 없이 그 땅을 샀을 때, 국회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국회의 동의도 없이 쓸모없는 땅을 사들였다’고 온갖 비난과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 후 국회는 얼음 덩어리 황무지라고 생각한 알래스카의 정확한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서 실사단을 파견했고, 그들로부터 이런 보고를 받았습니다. “알래스카는 엄청난 순금 매장량과 풍부한 어족자원, 광활한 산림 자원과 풍부한 매장량의 석유자원이 무궁무진한 진정한 기회의 땅입니다.”
알래스카는 지금 미국의 가장 중요한 군사기지일 뿐만 아니라, 일 년에 관광수입으로만 3천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고, 어업 광업 등으로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아직도 어마어마한 자원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러시아는 그 땅의 가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그 가치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국에서조차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 땅을 샀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가치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가치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도 혹 러시아가 알래스카의 가치를 모르고 미국에 팔아버린 것처럼, 신앙과 복음의 가치를 모른 채 살고 계시진 않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누리고 살고 있는 복음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을 성경은 돼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진주보다도 눈앞에 주어진 구정물 한 그릇을 더 귀한 것으로 여기는 돼지와 다를 바가 없다고 말입니다.
이삭의 아들 쌍둥이 에서와 야곱이 있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로마서 9:13)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말씀하십니까? 사실 야곱은 우리가 볼 때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까지 속인 사람입니다. 외갓집에 가서 20년간 살 동안에도 자기 욕심을 챙기기에 혈안 되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에서보다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야곱을 그렇게 사랑하셨을까?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관찰한 바로는 야곱이 사랑받을만한 일을 한 것은 딱 한 번 밖에 없습니다. 그건 형 에서에게서 장자의 권리를 샀다는 것입니다. 물론 형 에서가 배고픈 틈을 타서 장자의 권리를 샀다는 것은 결코 옳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장자의 권리를 귀중하게 여겼다는 것만은 정말 높이 칭찬할만한 일입니다.
당시 장자의 권리에는 엄청난 축복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장자의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장이 되고, 가문의 대소사를 처리할 수 있는 주도권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을 때 다른 형제들보다 두 배의 몫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축복권을 가진 축복의 후계자가 됩니다.
이런 여러 가지 권리가 주어지기 때문에 장자의 권리는 아주 귀중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태어나면서 그 귀한 장자의 권리를 가졌음에도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장자의 권리를 팔라고 요구할 때 에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세기 25:32) 그는 장자의 권리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우선 당장 허기진 배를 채워주지도 못한 장자의 권리보다도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팥죽 한 그릇을 더 귀하여 여겼습니다. 우선 당장 내 손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는 장자의 권리보다도 떡 한 조각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반면 야곱은 그 장자의 권리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기에 그 권리를 얻을 틈을 엿보고 있다가 형이 허기져 있을 때에 팥죽과 떡으로 그 장자의 권리를 산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 가운데 에서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모른 채 살아갑니다. 우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얻기 위해서 신앙을 떡 한 조각과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립니다. 내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한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망각하고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복음을 헌신짝처럼 취급해버립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르고, 세상 가운데서 위로를 받고 도움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됨의 축복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버립니다.
여러분,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거룩한 것을 거룩한 것으로 알고 신앙생활하고 계십니까? 무엇이 더 값지고 귀한 것인지를 분별하며 살고 계십니까?
많은 일꾼들이 일을 하는 커다란 농장에 여주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일꾼들이 먹을 식사를 정성껏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아도 일꾼들은 늘 음식을 먹는 데만 신경 쓸 뿐, 그 음식을 만들어준 주인 아주머니에게 ‘고맙다’는 말이나 ‘맛있게 먹겠다.’는 인사말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주머니는 어느 날 식탁에다가 말이나 먹는 건초더미를 잔뜩 올려놓았습니다. 식사를 하기 위해서 몰려든 일꾼들은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우리가 무슨 짐승입니까? 이런 건초를 우리더러 먹으라는 말입니까?” 그 때 주인 아주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더운 날에도 비지땀을 흘리면서 당신들의 식탁을 정성껏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게걸스럽게 먹기만 할 뿐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신들은 귀한 보물을 발로 짓밟아버리는 말이나 돼지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식탁에 건초더미를 올려놓은 것입니다.”
진주를 돼지 앞에 던져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진주를 목에 걸고 있으면서도 그 진주의 가치를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 내게 주신 놀라운 축복이 있음에도 그것을 보지 못한 채 늘 불평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영생의 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른 채, 영적인 거지처럼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룩함을 거룩함으로 아는 사람, 우리 손에 들려진 진주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돼지 앞에 던지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얼마나 귀한지를 아는 사람은 지금 당장 내 손에 물질적인 풍요가 없다는 것 때문에 기죽어 살지 않습니다. 복음을 통해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믿음을 지키지 위해서 세상의 즐거움을 기쁨으로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해 주실 칭찬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아는 사람은 오늘 사람들이 나에게 칭찬해 주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을 통해 간직한 거룩함을 개에게 주지 말고, 가슴 깊숙이에 담고 그 거룩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의 보화인 복음과 은혜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고,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기쁨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한 것으로 아는 지혜 - 그것이 믿음이요 그것이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