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핀 기행 최 건 차
경칩이다. 움츠려진 심신을 펴보려는 크리스천 문인 10여 명이 선교문학기행이라는 명분으로 필리핀에 가려고 이른 아침 인천공항에 모였다. 우리에겐 이른 봄이지만 그곳은 한여름 7—8월의 날씨라서 미리 일러준 대로 여름 복장과 수영복을 챙겨야 했다. 마닐라 아키노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후끈한 열기에 얼른 하복으로 갈아입고 시가지를 벗어나 선교지로 행하면서 주변을 살펴보다가 34년 전으로 빠져든다.
내가 필리핀을 처음 가보았을 때인 1990년 3월의 이맘 때가 펼쳐진다. 마닐라 시가지에서 호세리잘공원과 중화인들이 가족의 유택을 생전의 모습처럼 꾸며놨다는 공동묘지를 가보게 되었다. 생활의 윤택함을 드러내는 화교들과 초라하게 경비를 서고 있는 현지인들이 언짢게 비교되는 곳이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필리핀의 정치 경제 상류층이 리잘이나 아키노부터 다수가 중국계이다 보니 이런 현상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곳을 가보게 되었는데 거기는 각종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메케한 냄새에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난에 찌들어진 채로의 헐벗은 아이들이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뭔가를 찾고 있다. 우리 서울도 80년대 초엽까지는 지금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을 멋있게 받쳐 주고 있는 조망 좋은 하늘공원이 그런 쓰레기장이었다.
여행은 잘 먹고 잘 쉬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구경거리가 좋아야 한다는 게 상식이다. 이에 분위기를 바꾸려고 시원함을 한껏 느낄 수 있다는 팍상한폭포를 찾았다. 카누에 두 사람이 타고 흘러내리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비쩍 마른 사공이 땀을 뻘뻘 흘리며 후미에서 밀고 있다. 한참을 오르는데 물결이 빨라지고 바위가 듬성듬성한 지대에서 너무 힘들어 보여 그냥 내려서 돕고 싶었는데 오히려 부담을 준다는 것이다. 안타까워서 달러로 보상해 주고서 폭포가 보이는 종착 지점에 도착했다. 모두 폭포 아래로 바짝 들어가 물 폭탄을 맞으며 즐겁게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카누에 올라 돕는 사공 없이 흐르는 물살을 타고 내려가고 있다.
나는 짝이 된 H와 머뭇거리다가 맨 마지막에 남겨진 낡은 카누를 타게 되었다. 체구가 나보다 훨씬 큰 그가 앞자리에서 상체를 뒤로 재치지 않는 상태로 흘러가다가 카누가 바윗돌에 스치면서 균형을 잃고 뒤뚱거렸다. 이에 놀란 H가 잘해 보려고 상체를 일으키며 중심을 잡으려다가 기우뚱 넘어지면서 전복되었다. 우리는 각자 깊은 데로 빠져들어 허우적대며 떠내려가는데 사고를 알고 달려온 모터보트에 무사히 구조되었다. 이에 강가 마을에서 살 때 물에서 위험천만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됐다. 물놀이에 장난이 심해져 홍수가 난 큰물에서와 소沼에서 놀다가 소용돌이치는 물살에 휩쓸려 죽을 뻔한 사고를 몇 번이나 겪었다.
세월이 약이라서 카누 사고를 당한 필리핀을 34년 만에 다시 찾아 그때를 떠올려 보게 됐다. 그날, 폭포에서의 사고를 일단 접고 스페인의 역사적 유물이 많다는 두마게이트로 갔다. 우리네 연세대학교와 비슷하다는 실리만대학교를 둘러보고 선교지가 있는 산동네로 향했다. 메마른 산비탈에 있는 초막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와 금방 백여 명이나 되었다. 준비해 온 학용품과 과자 등을 나누어 주면서 기분이 이상해져 또 타임머신을 타고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1946년 해방 후 외가에 들려 잠시 머물고 있던 우리 집 앞 신작로에 웬 미군이 지프차를 타고 나타났다. 동네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양코배기가 무섭다며 도망을 쳐 숨어버리고 나만 그대로 있었다.
흑인 한 명과 백인 두 명이 다가와 껌, 과자, 드롭프스를 내 호주머니에 가득 넣어 주었다. 미군들은 나를 번쩍 들어 지프차에 태우고서 주변을 돌아보며 꿩을 잡으려고 총질을 몇 번 하다가 우리 집 앞에서 나를 내려주고 가버렸다.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내가 미군들에게 받은 과자를 나누어 먹자며 성가시게 굴었다. 평소에 나를 괴롭히던 녀석들이어서 맘이 내키지 않아 머뭇대는데, 이를 뒤에서 지켜보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내게 있는 과자를 몽땅 꺼내어 동네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난생 처음으로 먹어보는 양코배기 과자가 달고 맛있다며 좋아들 했다. 나는 지금 목사가 되어 아련한 그 시절을 필리핀에서 회상하고 있다.
이번 필리핀 여행에서 망고를 엄청 많이 먹었다. 리잘공원과 우리가 목표로 한 선교지 외에는 별로 가보지 못했는데 우리나라 차량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다른 동남아 국가에서는 우리나라 차량을 흔하게 보았는데 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리핀 국명과 가톨릭 그리고 화폐단위는 스페인을 따랐는데, 언어는 영어를 사용하고 차량은 일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70년대까지는 필리핀이 우리보다 상당히 앞선 나라였는데 지금은 우리나라가 더 많이 앞선 것 같다.
4박5일간은 마닐라 근교만 단순하게 여행했다. 7,1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1억1천만이 넘는 인구에 상 하원제의 국회가 운영되는 나라를 얼마나 알고 있을지? 지금의 필리핀을 경제적으로 봤을 때는 좀 그렇지만, 6.25 전쟁 때 우리에게 전투병을 파병해 주었고, 70년대까지는 우리를 도와주었던 우방이다. 이에 나는 34년 전과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는 그 마을에 갔을 때, 허름한 집에서 어린아이를 안고 내다보는 여인에게 지폐 한 장을 주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어린아이에게 과자를 사주라는 뜻이었는데 기왕이면 좀 더 큰 지폐를 주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202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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