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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복음 9,7-9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가?”
헤로데의 이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참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미사를 드리고, 기도하며, 강론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가 예수님을 궁금해했던 이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음에 작은 질문이 생깁니다.
나는 예수님을 알고 싶어서 찾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궁금해서 바라보고 있는가?
헤로데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직접 만나서 어떤 분인지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호기심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훗날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게 되었을 때에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도 이와 비슷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는 예수님을 찾지만, 막상 내 뜻과 다른 일이 생기면 그분의 말씀보다 내 생각을 앞세웁니다.
성당에서는 “주님, 주님” 하고 기도하지만, 가정에서는 가까운 사람에게 쉽게 화를 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관한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움직이지만, 정작 내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는 모른 척 지나갈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을 알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갖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내 삶의 구체적인 자리에서 그분의 말씀을 선택하는 것일 것입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먼저 따뜻한 말을 건네야 할 때,
내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용서해야 할 때,
불평하고 싶은 순간에 감사할 이유를 찾아야 할 때,
나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정직을 선택해야 할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특별하고 놀라운 모습으로만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주 평범한 하루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질문을 조금 다르게 바꾸어 봅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그리고 그 질문에 이어
“나는 오늘 내 삶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예수님을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되기보다,
예수님을 조금 더 닮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기도할 때만 주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선택 안에서 주님을 선택하고,
말씀을 들을 때만 감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에 대해 아는 것에 머물지 않게 하소서.
오늘 제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주님을 알아보고,
오늘 제가 해야 할 작은 사랑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천 사비나 수녀님)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9,7-9
솔직함이 주는 힘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헤로데 영주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습니다.
죽은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는 소문, 엘리야나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무성하였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는 것까지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헤로데가 자신의 잘못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만나려면 요한의 목을 벤 사실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에 자신의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분을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려면 자기 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 솔직해져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루카 2,35) 하시는 분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을 거부하면 의롭지 않은 사람임이 증명됩니다.
영화 ‘뮬란’(2020)은 중국 역사에서 여성이 실제로 남성으로 위장한 채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볐던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내용입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진실’입니다.
영화에서는 ‘진실과 초자연적 힘’을 결합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지혜와 힘을 지닌 여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는 여성은 얌전하게 시집이나 잘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사내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가문의 수치였습니다.
하지만 뮬란은 이런 기존의 틀을 거부합니다.
뮬란은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 대신 군대에 입대합니다.
그리고 남성으로 속이고 모든 훈련을 감내합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내재한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실할 수 없는 이유는 여성인 것이 발각되는 즉시 군에서 쫓겨나고 그러면 가문 전체가 불명예를 입기 때문입니다.
뮬란은 자신의 힘이 발휘되지 않으면 자신의 전우들이 죽게 될 것을 알고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초자연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숨을 내거는 결단이었지만, 그 진실함 때문에 자신 주위에 맴돌기만 하던 기(氣)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기는 우리로 말하면 성령님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오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동료들을 구합니다.
사람이 왜 진실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교만’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다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같아지는 것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하느님 뜻보다 우선합니다.
그런 교만함은 죄를 짓게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렵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아담이 주님의 존재를 느끼고 뒷걸음질 친 것과 같습니다.
진실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평판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병자성사에 관련된 말씀을 하며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야고 5,16)라고 권고합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려는 겸손이 없으면 아담과 하와처럼 서로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남을 비난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멀어지고 그분이 주시는 은총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고해성사 때 굳이 죄를 사제 앞에서 고백하게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적어도 오늘 헤로데는 “내가 요한의 목을 베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까이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한 달 정도 어느 부대의 중대장 운전병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제 기억으로 미스터 건국대였습니다.
대학에서 보디빌딩으로 일등을 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늘 자랑하였습니다.
그분은 30대 중후반이 되었고, 저는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저는 운전병으로 운동할 시간이 많아서 근육이 한창 붙을 때고 그분은 빠져나갈 때였습니다.
그분의 대학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몸을 만드는 것을 좋아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사우나에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저의 몸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멀리에서 해. 내 옆으로 오지마!”
다른 것은 몰라도 팔뚝은 제가 더 두꺼웠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근육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제가 조금 더 좋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 하는 사람은 자신과 비교될 만한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물며 우리 죄의 민낯이 드러나게 만드는 주님께서 옆에 계시게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해야겠습니까?
내 죄가 만천하에 드러날 수 있도록 나를 낮추기를 원해야 합니다.
낮아지기를 원치 않으면 주님을 가까이하기 싫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원하고 그분이 주시는 성령의 힘을 받아 살고 싶다면 가장 우선하여서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여 겸손해지는 일을 즐기는 것입니다.
겸손이 은총과 진리를 부르고 지혜와 힘을 발휘하며 살게 합니다.
그러려면 솔직함으로 사람들 앞에서 낮아지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강론>
(2026. 9. 24. 목)(루카 9,7-9)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7-9)>
1) 여기서 “몹시 당황하였다.” 라는 말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로 해석하면, 해석도 단순해지고, 강론을 하는 것도 편해지는데,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헤로데의 이야기들을 모두 종합해서 보면, ‘양심의 가책’으로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헤로데는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입니다.
헤로데는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하려고,
아무 잘못이 없는 왕비를 쫓아내면서 이혼했습니다.
유대교 율법으로는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것도 죄이고, 아무 잘못이 없는 왕비를 쫓아내면서 이혼한 것도 죄인데, 헤로데는 유대인이 아니었고, 유대교 율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안 믿은 사람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헤로데는 자기가 한 일이 죄라는 것을
의식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죄의식이 없었으니 양심의 가책도 없었습니다.
그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은, 헤로데의 결혼에 대한 요한의 공개적인 비난이,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대중적인 인기가 왕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도, 죄의식도 없었고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몹시 당황하였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 말은 ‘미신적인 두려움’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유령이 나타나서 해코지를 할 것만 같다는 불안감과 두려움......
그런 두려움은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과는 거리가 멉니다.
2) 아마도 헤로데는 죽은 요한이 되살아난 것도 아니고, 요한의 유령이 나타난 것도 아니고, 나자렛 출신 예수가 활동 중이라는 것을 금방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활동도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고,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3,31).”
헤로데의 그런 모습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9ㄴ-21).”
헤로데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자’입니다.
오늘날에도 헤로데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 내세와 심판을 믿지 않는 자들,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그런 자들입니다.
심판을 믿지 않으니, 심판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보편적인 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죄’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추구하고, 남을 해치는 것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이 더욱더 짙은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3,19).
<하느님의 반대쪽으로 가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은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고, ‘멸망’은
하느님 앞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을 등지고 떨어져 나가는 것은, 스스로 심판과 멸망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아무도,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아닌데, 내가 왜 당신들이 믿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라고 항의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시고, 심판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3)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 것은 불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는 나중에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루카 23,6-11).
헤로데는 어떤 신기한 기적 같은 것을 구경하기를 기대했던 것 같은데, 그에게 예수님은 그냥 ‘구경거리’였습니다.
그의 그런 모습에서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은
전혀 볼 수 없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던 일은,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간절하게 노력한 일과(루카 19,3) 좋은 비교가 됩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쓴 것은 ‘구원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인데,
헤로데처럼 구경만 하고 예수님을 조롱하다가
허망하게 끝나버리는 사람도 있고, 자캐오처럼 간절하게 구원을 원하고, 그것을 찾아서 얻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9,7-9: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 묻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활동에 관한 소문을 듣고 “이 사람은 누구인가?”(9절)라는 물음을 던지는 장면을 전한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의 불안한 양심의 반응이기도 하다. 요한 세례자를 죽인 헤로데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한 결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도 참된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
진리를 거부한 영혼은 새로운 진리의 빛이 비칠 때 기쁨보다 먼저 두려움을 느낀다. 헤로데의 내적 동요는 바로 진리의 말씀 앞에서 인간이 가지는 두려움과 회피를 보여 준다. 성 암브로시오는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으나, 믿음 없는 눈은 진리를 볼 수 없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Lib. VII, 109-110 의역)라고 지적한다. 단순한 호기심만으로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으며, 회개와 믿음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다면 결코 그분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찾으면 곧 발견하게 된다.”(Homiliae in Matthaeum Hom. 49,1-2 재구성)라고 강조했다. 즉, ‘예수님을 알고 싶음’은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을 전제로 하는 영적 갈망이어야 한다.
교회는 복음 선포가 단순히 말이 아니라, 삶 전체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교회 헌장은 “신자들은 말과 행위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35항 요약)라고 말한다.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은 강요가 아니라, 매혹으로 전해진다.”라고 강조하며, 선포자는 먼저 말씀 안에서 기쁨과 자유를 살아야 함을 상기시킨다. 즉,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목하고 질문을 던지게 하는 힘은 우리의 진실한 삶, 곧 복음을 살아내는 기쁨과 증언에서 비롯된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지만, 믿음 없는 호기심으로는 참된 만남에 이르지 못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먼저 내가 그 말씀 안에서 자유와 행복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씀 안에서 기쁘지 않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복음으로 이끌 수 있겠는가? 우리가 먼저 복음 안에서 행복해야, 그 기쁨이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싶어질 것이다.
오늘 복음의 질문은 단지 헤로데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던져야 할 물음이다.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신가?” 그분을 단순한 ‘소문 속 인물’로 남겨두지 말고, 믿음과 회개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분을 진정으로 만나게 되며, 삶 전체로 그분을 증거하는 복음의 향기가 될 수 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