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버지니아 울프]하면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다. 아직도 많을까..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참고서에서 한두번씩은 꼭 마주치는 詩였는데..
박인환은 1925년에 태어나 1956년에 죽은 시인이다. 본인의 아이덴티티는 시인이었지만, 생전에 시집이라고 딱 한 권을 내었을 뿐인 무명의 시인이었다. 키 크고 훤칠한 멋쟁이였고, 술을 마시지 않고는 하루도 버티지 못했고, 외항선을 탄다느니 기자를 한다느니, 서점을 차린다느니 하며 이것저것을 하였지만, 딱히 잘 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전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절에, 보이는 높은 건물이라고는 명동성당과 국립극장 정도인 명동거리를 밤마다 헤매이며, 찻집에는 만년필을 저당 잡히고, 대폿집에서조차 술값이 밀려 외상으로 술을 마시며, 댄디즘과 자조와, 직시하고픈 한편으로 눈을 돌리고 싶도록 스산한 현실의 사이를 오락가락 하며 살고 있던,
그런 어느 초봄날 저녁에.. 단골 대폿집 은성에서, 외상값을 해결하려 했는지 그것도 아니면 첫사랑의 추억을 기리려 했는지, 박인환은 즉흥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옆에 앉아있던 극작가 이진섭이 그 시에 맞춰 곡을 지었고, 가수 나애심이 동석해 있었으나 노래는 부르지 않은 듯, 뒤이어 온 테너 임만석이 이 즉흥곡을 불러보이고, 명동백작 이봉구가 자리의 증인이 되어 자신의 소설에 이 장면을 그려넣는다.
[세월이 가면]은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이다.
이 즉흥을 남기고 며칠도 지나지 않아 박인환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친구 김훈에게서 자장면 한 그릇 얻어먹고, 술에 취한 채, 봄 코트도 찾아오지 못해 두꺼운 겨울옷을 입은 채였다고 한다. 여름은 통속이고 겨울이 아니고서야 멋들어지게 코트도 하나 입지 못하니 못쓰겠다던 그였으니, 그래도 옷은 좋아하던 것으로 입고 떠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양주 조니워커를 유달리 좋아했지만 돈이 없어서 소주나 막걸리만 마시던 그에게, 마지막 가는 길에라도 마음껏 마시라고 친구들은 그의 관에 조니워커를 부어주며 울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서른 한 살이 되는 해였다.
[세월이 가면]의 시는 애처로운 관념이 앞서고, 노랫가락은 샹송과도 같고. 자조와 센티멘탈리즘이 주조인 박인환의 다른 시들까지 비록 내 마음에 딱 공명하는 종류의 것은 없다 할지라도, 몇몇의 가슴을 울리는 구절들을 찾을 수 있고. 무엇보다도, 식민지 시대와 해방, 전쟁통을 거쳐 피폐해진 서울 거리에서 버지니아 울프니, 샹송이니,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버티어야 했던 마음 먼 곳의 이미지를 동경하고 그리워하지 않고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던 처지를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아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자조하며 허무하게 살다 간 시인.. 술마시고 담배피우던 시인.. 서른 한 살 짧게 살다 간 그 사람의 노래는 아직도 여기에 있어 울리우니.. 그래,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인가 보다.
박인희
https://youtu.be/A3dozbbtWgE
명동백작
https://youtu.be/PTrSbygqQRk
나애심
https://youtu.be/39QaJDSRQqM
현인
https://youtu.be/2gIs1FHJjvc
최백호
https://youtu.be/f_IedCXFYDE
박기영
https://youtu.be/MJ3qaEpkV70
이미배
https://youtu.be/zBxVFQ6ZVKQ
이은미
https://youtu.be/uFJdz5UprMk
임태경
https://youtu.be/IyXZvOFwfqk
지금 그 사람은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첫댓글 "지금 그 사람은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독백과 그 뒤에 나오는 애잔한 음성,
가슴을. 파고들지요~
예전에 좋아했던 곡인데~
오늘, 감상 잘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