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釋대원성
부산연합회 임제록 제3강-2 (2012.06.30.)
13-11 그대가 살아있는 문수다
14-3 大丈夫(대장부)
그 다음 넘겨서 35쪽
13-11 그대가 살아있는 문수다.
道流야 儞祇今聽法者가 不是儞四大로대 能用儞四大하나니
若能如是見得하면 便乃去住自由니라
約山僧見處하면 勿嫌底法이라
儞若愛聖하면 聖者聖之名이니라
有一般學人이 向五臺山裏求文殊하나니 早錯了也라
五臺山無文殊니라
儞欲識文殊麽아 祇儞目前用處가 始終不異하며 處處不疑가
此箇是活文殊니라
儞一念心無差別光이 處處總是眞普賢이요
儞一念心自能解縛하야 隨處解脫은 此是觀音三昩法이니라.
互爲主伴하야 出則一時出하나니 一卽三三卽一이라
如是解得하면 始好看敎니라
그대가 살아있는 문수다. 여기 나왔네요.
지난 시간에 제가 일찍이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요?
道流야, 도 닦는 벗들이여
儞祇今聽法者(이지금청법자)가,
그대들 다만 지금 법문 듣는 그 사람, 그 사람이
不是儞四大(불시이사대)로대,
그대의 地 水 火 風 사대로 된 이 고깃덩어리는 분명히 아니다. 말입니다.
能用儞四大(능용이사대)다. 그러나 능히 이 고깃덩어리를 사용한다. 잘 활용해요. 이 육신을 잘 활용해요. 그러나 뭔지는 모르지만 그런대로 이 육신을 가자하면 가고 오자고 하면 오고, 법문 들으러 왔지만 좀 피곤하니까 자자고 하면 잠도 좀 자주고, 참~ 하여튼 이 육신을 활용하는 사람이 조종 잘 합니다.
若能如是見得(약능여시견득)하면,
만약 능히 이와 같이만 이해한다면ㆍ본다면
便乃去住自由(변내거주자유)니라. 가고 오는데 자유롭다. 자유자재하다.
그 도리 알면 걸릴 것이 없다 말이지요. 분명히 이 육신하고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육신은 아닙니다. 육신 아무리 갈기갈기 찢어봐야 그것은 안 나옵니다. 그 물건 안 나온다고요. 아무리 갈기갈기 찢고 해부하고 해부해도 그 물건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육신을 이용해요. 잘 활용해요. 이 육신을 쓰면서 제대로 활용하지를 않습니다. 육신을 쓰고 있는 것을 뭐라고 한다고요? 귀신이라고 한다고요. 또 육신에서 그 놈이 빠져나가 버리면 그것을 뭐라고 한다고요? 송장이라고 그래요.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우리들 현실을 중심으로 해서하는 이야기입니다.
若能如是見得하면 거주 자유라.
約山僧見處(약산승견처)하면, 山僧의 見處에 의지한다면ㆍ의거한다면
勿嫌底法(물혐저법)이라. 하나도 싫어할 것이 없는 법이다.
육신 ←이것 싫어해선 안 됩니다. 무시해선 안 돼요. 육신. 잘 보호해야 됩니다. 사대육신 이것 없으면 안 돼요. 사실은 사대육신이 전부입니다.
사대육신이 전부라고요.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사대육신이 전부입니다.
勿嫌底法이라. 절대, 육신을 무시해가지고 막 그냥 고행해가지고 몸을 조복 받느니, 했습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몸 조복 받아서 어쩌잔 말입니까? 그런 어리석은 용어는 쓰지도 말아야 됩니다. 조복 받으려면 마음을 조복 받아야지 왜 몸을 조복 받아요? 몸은 법당입니다. 법당조복 받아가지고 문 쾅쾅 닫아놓고 어쩌자고요? 그것이 아닙니다. 불교를 그렇게 가르치는 불교 많잖아요. “아~ 육신조복 받아야 된다.” 고 그래가지고...
저는 어릴 때 기도하라 해가지고 법당에서 꼭 서서 해야 되는 줄 알고, 하~ 한 두 시간쯤 되면 다리가 그냥 완전히 남의 다리같이 아프고 그러는 겁니다. 꼭 서서 해야 되는 줄 알아요. 다리를 움직여도 안 되는 줄 알아요.
그래도 그 때는 시계가 없으니까, -시계가 법당마다 그렇게 마음대로 흔할 때가 아닙니다. 그래서 향을, 옛날에 푸른 향 있지요? 아주 고약한 냄새나는 그 향을 가지고 몇 개를 태우면 한 시간이다. 두 개쯤 태우면 한 시간. 네 개쯤 태우면 두 시간 그래요. 기후 따라서 향 타는 속도가 달라요. 건조하고 바람 부는 날에는 잘 타요. 그런데 오늘같이 축축한 날은 이것이 죽어라고 안타는 겁니다. 그래도 그것이 다 타야만 내려오는 겁니다. 다 타야만 기도마쳤다고 법당에서 내려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딱 그 자리에 서가지고, 발 하나도 움직여서는 안 되는 줄 알았어요. 그것이 육신조복 받는 일과 마찬가지 일이지요.
기도 하다가 발을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든지 허리를 꾀부린다고 두두리고 하면 “무슨 기도를 그렇게 몸을 흔들어가면서 하느냐?” 고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참 허망한 일이지요. 참으로 허망한 일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다리 아프면 앉아서, 가부좌 턱 틀고 앉아서 목탁 쳐도 되고, 법당을 빙빙 돌면서 목탁 치면 더 근사하잖아요. 중국 가보면 예불 두 시간 하는데, 계속 법당 돌면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피곤한 줄도 모르고 다리도 안 아프고 참 좋더라고요. 그렇게 해도 아무 이상 없는 것을... 오히려 기도 더 잘되기만 해요. 눕고 싶으면 아예 누워서 해도 돼요. 사실입니다. 그런데 누웠는지 서있는지 앉았는지 이것 모르거든요. 제대로 “관세음보살~~” 하고 열심히 기도 집중하면요? 내가 섰는지 누웠는지 앉았는지 모릅니다. 진정으로 그렇게 되어야 기도지, 무슨 서 있는 것을 가지고 따지고, 앉은 것을 가지고 따지고, 누운 것을 가지고 따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세상에 그렇게 유치원 수준의 차원도 있습니다. 유치원 수준의 차원도... 그렇게만 살아왔다는 겁니다.
儞若愛聖(이약애성)하면, 그대가 만약에 성인을 사랑한다. 그러면
그 성인이라고 하는 것을 한번 따져보자.
聖者는 聖之名(성자성지명)이니라.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성인이라고 하는 이름일 뿐이다.
聖者는 聖之名이야.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성인의 이름일 뿐이다. 어제 제가 그랬지요? 典據(전거)에 남아있는 그~~ 하늘같은 도인. 큰스님이라고 우리가 그렇게 보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냥 사람일 뿐이다. 부처님도 “대사문 = 큰스님” 그랬잖아요. 당시 제자들은 그냥 그렇게 불렀지요. 사문이라고, 스님이라고...
有一般學人(유일반학인)이, 일반 공부하는 사람이
向五臺山裏求文殊(향오대산리구문수)하나니,
오대산을 향해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한다 말입니다. 그전에 무착선사가 그랬다고 했지요? 무착선사가 장안에서 일보일배하면서 몇 년 걸려가지고, 한 걸음에 한번 절하고, 한 걸음에 한번 절하고, 지금 티벳 그 불자들 처럼요. 그렇게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오대산까지 갔는데, 그 사람보고 하는 소리입니다.
早錯了也(조착요야)라. 벌써 틀려버렸다ㆍ벌써 틀린 짓이다
五臺山에 無文殊(오대산무문수)니라. 오대산에는 문수보살 없다.
이것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 아닙니까? 맑은 하늘에 날 벼락 치는 소리지요. 전부 다 오대산에 정말 살아있는 문수가 계신다고 하고 거기에 얼마만한 문수보살에 대한 전설이 많습니까? 문수보살 친견했다는 사연도 많고요. 그런데 사정없이 五臺山에 無文殊. 오대산에는 문수보살 없다. 말입니다.
儞欲識文殊麽(이욕식문수마)아? 그대는 문수를 알고 싶으냐?
정말 문수를 알고 싶으냐?
祇儞目前用處(지이목전용처)가 始終不異(시종불이)하며,
다만 그대 눈앞에서 작용하고 있는 그 것ㆍ작용하고 있는 그 것 = 用處.
참 좋은 말입니다. 눈앞에서 = 目前用處. 또 넉자네요. 줄 그어야 되겠네요. 目前用處 = 눈앞에서 작용하는 것. 줄그으라면 딱 줄긋는 그놈. 따라하는 소리 듣는 그놈. 웃음 나오면 웃는 그놈. 거칠 것 없습니다. 바로 그것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目前用處가 바로 문수보살과 始終 다르지 않다 이 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르지 않다. 그것이 바로 문수다 말입니다.
그 문수 놔두고 어디 가서 딴 문수 찾아요? 그보다 더 위대한 문수 어디 있다고요? 설사 있다 해도 가서 본들 그 다음에 뭐 하겠습니까? 가서 보았다고 합시다. 보고 어쩌자는 겁니까? 나는 나대로 여전히 始終 다르지 않고 이렇게 있는데...
處處不疑(처처불의)가,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의심할 바 없는 바로 우리들 참 생명. 그것이
此箇是活文殊(차개시활문수)니라.
이것이야말로 살아있는 문수다. 정말 피가 튀고 생명이 넘치는 이런 살아있는 문수 놔두고 어디 가서 헛일을 하느냐? 아~ 참, 법문 근사하잖아요.
여러분 그동안 익혀온 불교하고 영 정 반대이고 달라서, 마음에 들지 안 들지는 그것은 모르고, 아무튼 소화를 못 시켜도 일단 창자 속에 넣어두세요. 이것은 그야말로 다이아몬드를 삼키는 것과 같아서 그 다이아몬드가 내 뱃속에 들어가고 똥 속에 들어가고 거름 속에 들어가고 온갖 저 밭으로 논으로 굴러다녀요. 똥 묻었다고 그 다이아몬드 값이 떨어질 줄 알아요? 안 떨어져요. 흙속에 굴러다니고, 거름 속에 굴러다녀도 그 다이아몬드는 그대로입니다. 아무 이상 없습니다. 이것은 그와 같은 법입니다. 지금 당장에 소화는 안 돼도 언젠가 다이아몬드로써의 그 가치를 할 겁니다. 값은 분명한 겁니다.
‘야~ 그때 임제록. 나는 뭣도 모르고 내 배짱에는 안 맞고, 내가 그동안 들어온 불교ㆍ내가 알고 있는 불교하고는 전혀 다른 내용인데, 그래서 긴 가민가 싶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제가 만든 책 중에 작은 임제록 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것을 제가 여러 수 만권을 찍어서 법보시를 많이 했는데요. 그 탄생이 뭔가 하니, 여기 어떤 스님이 저의 임제록 강설 책을 가져온 스님이 있어서 봤는데 그 책이 어떻게 탄생했는가? 그 서문에도 적혀 있습니다만, 어느 날 밀양에 산다는 보살님이 한분 임제록 강설 책을 들고 오셨어요.
“어찌 오셨습니까?”
“제가 임제록 강설 책을 읽고 눈을 떴습니다ㆍ불교에 눈을 떴습니다.” 그래요. 그 연유를 말씀하시고 그래요. 어느 날 범어사 천 계단 오르내리면서 하~ 죽어라고 기도하고, 좋다는 기도처는 다 가고 그야말로 보살태가 막 자르르 흐르는 겁니다. 먹물 옷 차려입고 꿈에 만나 봐도 이건 보살입니다. 그런 정도로 수 10년 절에 다니면서 기도도하고 절 운영하는데도 참여하고 소임도 맡고 그랬대요. 그래도 뭔가 갑갑하고 아닌 것 같더래요. ‘이것만이 아닐 텐데, 부처님이 이런 것만 가지고 우리에게 내놓진 않았을 것 같은데...’그래서 차를 타고 내려가다가 어떤 거사님하고 이야기를 하게 돼가지고 거사님한테 자기의 어떤 불교의 신앙심을 고백을 한 겁니다.
“내가 이렇게 수십 년 동안 기도도 열심히 하고, 내 딴에는 내가 아는 불교를 한껏 하노라고 하면서 살았는데, 참 갑갑하다.” 그런 말을 했더니 그 거사님이 “무비스님이 쓴 임제록 강설 책을 한번 읽어보세요.” 그러더래요.
영광도서에 가가지고 그 강설 책을 사서 밤새도록 읽은 겁니다.
읽으면서 무릎을 몇 번이나 쳤는지 모른대요. “하~~ 그래ㆍ그래ㆍ그래. 바로 그것이지ㆍ그것이지, 그래ㆍ그래” 하면서 혼자 그냥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웃다가 밤새 그 책을 다 읽은 겁니다. 그래가지고 눈이 확 열려버렸어요. 마음이 확~ 열려버렸어요. 그래가지고 너무 감동스러워서 이 책을 누가 썼는가 알아보니까 범어사에 있는 스님이 쓴 겁니다. 맨날 오르내리는 그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들고 올라온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해서 스님 얼굴이라도 뵈려고 왔습니다.” 하고... “저는 그 말 못 믿겠습니다. 만약에 진정 임제록을 가지고 그렇게 마음이 열렸다면 보살님이 사경하는 셈치고 그 감동받은 구절을 노트에다 써오세요.” 그랬더니 돌아가가지고 노트에다 다 써왔어요. 그 노트 저한테 있습니다.
그래 읽어보니까 야~~ 정말 그 임제록 강설 안에 한글로 된 글을 조목조목 썼어요. 한문은 한 자도 없고 그냥 한글로만요. 한문은 관심 없어요. 배운 바도 없고요. 그래서 저는 거기에 보답한다고 ‘고맙습니다.’ 하고 보답한다고 그 보살님이 쓴 임제록내용을 그대로 책을 만들었습니다. 작은 임제록 해가지고 한문 한 자도 안 넣고 그대로 한글로 읽기 좋은 작은 임제록이라 해가지고 수 만권을 찍어서 가는 사람, 오는 사람, 우리 문수선원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언제든지 가져가라고 그랬어요. 공부하러 오는 스님들이 한 걸망씩 가져가고, 택배로도 막 부쳐주고 한 때 그랬었습니다.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그래도 열심히 기도한, 그리고 뭔가 궁금해 하고 ‘뭔가?ㆍ뭔가?’ 알고 싶어 하고, 신심은 가득차고요.
그래서 그 힘이 임제록을 통해서 문을 열어준 것이지요. 그런 길이 옵니다 또.
저도 그 임제록 강설을 쓰고 어떤 의미에선 ‘평생 부처님한테 밥 값했다.’ 제가 서슴없이 그런 표현을 하지요. 이렇게 쉽잖아요. 어디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하~~ 알뜰히 좌선을 열심히 해야 되고ㆍ다니고, 그 놈 몸 구속한다고 결과부좌 해야만 좌선을 잘하는 줄 알고, 그냥 평생 결과부좌 해가지고 나중에 관절염 생겨가지고 수술하고 병원에 쫓아다니고, 제가 실명을 거론하지 않고 그래서 그렇지, 그렇게 해서 생긴 병이 마음이 주인이지 몸뚱이는 물론 여기도 이야기했듯이 그 놈이 들어서 사대육신을 조종해요. 조종하기는 해요. 그렇지만 노력하는 그것을 갖다가... 그래서 차가 안 간다고 운전사보고 말 한마디도 안 하고 차를 그냥 냅다 발로 차고,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운전사보고 가자고 말 한마디면 그냥 갈 텐데, 차를 그냥 발로 차고 해가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피가 나고 그래요.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수레를 때려야 옳으냐? 소를 때려야 옳으냐? 그런 책도 있습니다. 답이 다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알고 보면 어렵지 아니합니다. 그래 우리 불자들은 사실은 공부해야 될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조금 한 마디 들으면 거기에 매달려가지고 집착해버리니까 더 이상 발전이 없어서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아~~ 이것이 진짜 살아있는 문수다. 문수만 그러냐?
儞一念心無差別光(이일염심무차별광)이, 그대들 마음 = 차별 없는 그 빛.
하~ 여러분의 그 빛이 지금 방광을 하고 있는데, 그 방광은 차별이 없습니다.
處處總是眞普賢(처처총시진보현)이다.
곳곳에 그 방광하고 있는 그 모두가 참다운 보현보살이다.
저기는 살아있는 문수다. 그랬잖아요. 참다운 보현보살이다. 그리고 또
儞一念心自能解縛(이일념심자능해박)하야,
스스로 어떤 속박으로부터 능히 해탈하는, 속박에서부터 벗어나서
隨處解脫(수처해탈)은, 곳곳에서부터 벗어나 있는, 우리 마음 아무리 몸뚱이 구속해도요? 수갑을 채우고 그냥 목에 칼을 채우고 사정없이 구속해도 그 마음은 구속 못합니다. 그것이 뭐라고요?
此是觀音三昩法(차시관음삼매법)이니라.
이것이 관세음보살이다 말입니다ㆍ이것이 관세음보살이다.
互爲主伴(호위주반)하야, 서로 주인도 되고 벗도 돼요. 나 혼자 관세음보살 됐다가ㆍ문수보살 됐다가ㆍ보현보살 됐다가, 이렇게 해서 주인도 되고 벗도 돼서
出則一時出(출즉일시출)하나니, 나오면 일시에 다 나와요.
一卽三三卽一(일즉삼삼즉일))이니, 하나는 곧 셋이다.
문수ㆍ보현ㆍ관음. 이렇게 3이다. 三卽一입니다. 문수ㆍ보현ㆍ관음. 말이 셋이지 이것이 곧 나 한 사람 = 無依道人. 차별 없는 참 사람 = 無位眞人.
如是解得(여시해득)하면,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始好看敎(시호간교)니라. 이렇게 이해하면 그때야 비로소 간경을 잘한다고 할 수 있다. 경을 잘 보고 어록도 잘 보고요.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면 글줄만 쫓아가고 그러면 경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看經者慧眼通透(간경자혜안통투). 그러잖아요.
경을 보는 사람은 지혜의 눈이 툭 터져버리잖아요. 지혜의 눈이 툭 터져버리면 이런 것 전부 그냥 그렇게 척척척척 우리 일상에 맞춰가지고 전부 해석이 다 됩니다. 해석이 이렇게 다 되는 길이 있는데, 낱낱이 글만 쫓아가면 여기에 걸리고ㆍ저기에 걸리고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37페이지
14-3 大丈夫(대장부)
道流야 儞若欲得如法하면 直須是大丈夫兒라사 始得다.
若萎萎隨隨地하면 則不得也니라.
夫如[斯머리瓦]嗄之器는 不堪貯醍醐니 如大器者는
直要不受人惑이라 隨處作主하야 立處皆眞이니라.
道流야, 도 닦는 여러 벗들이여
儞若欲得如法(이약욕득여법)하면, 그대가 만약 欲得如法하면,
여법하고자 한다면ㆍ여법하고자 한다 = 如法 = 법과 같다 = 이치와 같고자 한다면 그 말입니다.
直須是大丈夫兒(직수시대장부아)라사,
바로 모름지기 大丈夫라야 된다. 진짜 여법하려면 대장부라야 된다.
그래야 始得(시득)다. 된다.
若萎萎隨隨地(약위위수수지)하면,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여름날에 풀을 뽑아 놓으면 금방 시들시들하지요. 萎자가 그런 萎자입니다. 또 隨隨는 비실비실해요. 사람이 비실비실해요. 풀이, 금방 뽑아 놓으면 여름 햇빛을 보고 시들시들한 모습. 시들시들하고 비실비실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불교를 믿고 이 세상에 제일 훌륭한 스승을 만났고, 또 제일 훌륭한 가르침을 만났으니, 이제 바로 우리 인생을 좀 더 박력 있게 大丈夫처럼 살줄 모르고, 여기 끄달리고 저기 끄달려서, 와가지고 이럽니다. 누구 말 들으니까 지장보살이 더 영험 있다고 하는데, 그동안 관세음보살 했는데 지장보살 할까요? 그 지장보살 설명 가만히 들어보니까 영험 있게 설명을 하거든요. 평생 관세음보살 했는데 지장보살하려니까, 지장보살이 제대로 되지도 않고...
그래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그야말로 萎萎隨隨라.
시들시들하고 비실비실해요.
則不得也(즉부득야)니라. 그러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정말 뼈대 있는 불자가 못돼요. 뼈대 있는 부처님제자가 못돼요.
박력 있고 大丈夫같은 그런 불자가 돼야 된다.
夫如[斯머리瓦]嗄之器(부여시사지기)는,
“깨진 그릇은” 이 말입니다. 깨진 그릇은
不堪貯醍醐(불감저제호)니, 醍醐를 감히 담을 수가 없어.
때 묻고 깨진 그릇. 저~ 기 개밥그릇 같은 그런 그릇에다가 어떻게요?
醍醐라고 하는 것은 연유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고의 음식을 인도에서는 醍醐라고 그러는데, 연유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어릴 때 연유를 한 숟가락만 먹어도 얼마나 맛있나요? 그런 더러운 밥그릇에다 제호를 담을 수 없으니,
如大器者(여대기자)는, 예컨대 대 그릇 = 大器. 큰 그릇은
直要不受人惑(직요불수인혹)이라. 또 줄 그어야 되겠네요.
바로 모름지기 不受人惑이라야 된다. 不受人惑 = 다른 사람에게 속지 않는 사람. 여기 다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ㆍ관세음보살ㆍ지장보살. 심지어 임제스님까지도, 석가달마는 말 할 것도 없고 임제스님에게까지도 속지 말아야 됩니다. 不受人惑. 당당한 내 주인공이 있는데 그걸 제쳐놓고 어디 또 딴 데 팔려가지고 사람에게 속아요? 임제스님 자주 말씀하십니다. 不受人惑. 다른 사람에게 속지 말라.
隨處作主(수처작주)하야 立處皆眞(입처개진)이니라.
곳을 따라서 어디에 있든지 간에 주인노릇 하고, 그렇게 되면 내가 서 있는 이 장소. 내가 있는 이 장소가 전부 진정한 평화의 장소ㆍ진정한 행복의 장소다ㆍ 참으로 편안한 장소다. 立處皆眞. 참다운 보살이다 이 말입니다.
隨處作主 立處皆眞. 不受人惑. 전부 넉자 게송입니다.
임제스님은 넉자게송으로 아주 간단명료하고 쉽습니다.
배짱에 맞을는지 안 맞을는지 조금 걱정도 되긴 됩니다만, 그래도 한번 쯤 이런 충격 받아야 됩니다. 늘 일상적인 그런 소리, 아무 변화도 없고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은 것 들으려면 뭐하려고 임제록강의에 옵니까? 임제록강의에 왔으면 좀 충격 받아야 됩니다. 충격 받아가지고 내가 한번 씩 흔들리기도 하고, 그 동안의 내 의식이 찢어지고ㆍ갈라지고ㆍ깨지고, 그런 과정에서 내가 다시 거기서 제정신 차려가지고 ‘아, 이것이구나ㆍ진짜 불법이 이것이구나.’ 하는 그런 어떤 정리가 된다면, 우리 마음속에 그런 정리가 된다면 이것이 큰 소득입니다. 정말 큰 소득입니다. 그래 그 밀양에 있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눈이 밝아졌다고 하는 보살님은 가끔 1년에 한 두 세 번 오는데, 올 때 그 밀양에서 나는 감. 감 상자까지 들고 오고, 딸기 철엔 딸기 들고 오고 그래요.
마음이 확~~ 밝아져 놓으니까 무슨 소리든 다 통해요.
시골의 전형적인 아주머니인데, 그렇게 아주 너무 마음이 편해져 버렸어요. 마음이 아주 편안해져 버렸지요. 그렇게 열심히 기도할 때는 오히려 불안했는데, 기도하고 절 살림살고 할 때는 그렇게 불안했는데, 마음이 너무 편안해졌대요. 그래서 이제는 그야말로 피곤하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고, 농사일 하니까 농사일 있으면 농사일 짓고, 열심히 하지도 않아요.
그냥 설렁설렁 인연 따라서 隨緣消舊業이라. 인연 따라서 옛 업을 녹여가는... 그것이 남의 일같이 보이지 남의 일 아닙니다. 바로 우리일이 됩니다.
|
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釋대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