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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 7:7-14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 7:7-14 /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눅11:9-13] 구하라, 받게 될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8) 누구든지 구하면 받을 것이고, 찾으면 얻을 것이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9) 아들이 아버지에게 떡을 달라고 하는데 그 아버지가 떡 대신에 돌을 주겠느냐? 10) 또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그 아버지가 뱀을 주겠느냐? 11) 악한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애쓰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더욱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12)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눅6:31] 남에게 대접받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진정한 율법의 가르침이요,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좁은 문;눅13:24] 하늘나라는 좁은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넓고 그 문도 커서 쉬운 길을 택한 많은 사람이 다 그리로 들어간다. 14) 그러나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그 문도 작아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
천국 백성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7-8) 구하는 것은 자기의 결핍을 인식하고 그것이 채워지도록 호소하는 것입니다. 찾는 것은 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스스로의 노력을 동반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그것이 성취되기까지 믿음으로 인내를 더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의 결핍을 인식하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에게 응답해 주시겠다 말씀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 땅에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마 6:33).
하물며 너희 아버지께서(9-12)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약 4:2). 기도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어 자녀의 권세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요 1:12).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구할 때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좋은 것은 이 땅에 있다가 안개처럼 사라질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눅 11:9-13). 성령이 임하여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천국 백성이요 자녀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12).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14) 좁은 문, 좁은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요, 길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만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요 10:7; 14:6). 그 길과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자기의 생각과 기준으로 사는 삶이 아닌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나의 옛 본성과 세상의 풍조와 유행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롭고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오늘의 안일함과 편함을 위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넓은 문, 넓은 길의 익숙함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 끝은 멸망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심령으로 하나님의 법인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생명임을 알고 끝까지 이 길을 걷게 되길 소망합니다.
적용: 당신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이 땅의 안일함인가요? 성령을 따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함인가 생각해봅시다.
자기를 바로 알고 바로 대접하는 사람은 남을 바로 알고 바로 대접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서로 심판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바른 양심과 신앙을 가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활방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깨닫는 사람은 자기는 물론 타인도 새롭게 바라봅니다. 의식의 확장을 가져오고, 세상을 이전과는 다르게 보게 됩니다. 냉정하던 사람은 이해심이 생기고, 비판하던 사람은 긍휼을 가집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 설 교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 피영민 목사
서 론
마태복음 5, 6, 7, 세 장(Chapter)은 매우 유명한 산상수훈입니다. 어렵지도 무겁지도 않지만 대단히 심오한 교훈으로가득차 있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7장에 있으므로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이요 결론부분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언제나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정확한 강해(exposition)부분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런 것이다”하는 정확한 설명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교훈은 강해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삶에 적용(application)하는 부분을 반드시 첨가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이렇게 행하라”하는 부분입니다. 설교자들도 하나님 말씀을 강론할 때에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정확한 강해를 먼저하고, 그 말씀을 현재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을 해야 되느냐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강해와 적용, 이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해야 완전한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핵심은 예수님이 강해해주신 모든 진리에 대해서 인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느냐는 적용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길의 비유로 이 진리를 적용하는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두 길 가운데 한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샛길을 간다든가 가운데 길이 있다든가 다른 길이 있지 않습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 두 길 가운데 한 길을 반드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반드시 좁은 길로 가야하고 넒은 길로 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군자(君子)는 대로행(大路行)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군자는 넓은 길로 가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동양사상과 예수님 말씀은 속 깊은 뜻은 동일할지 몰라도 표면적으로는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방식에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넓은 길이 매력적인 길이고 좁은 길이 어려운 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넓은 길이 매력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이 어려워 보일지라도 반드시 그 길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직선적으로 말씀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잘못된 동기로 당신을 따르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매력적인 동기와 이기적인 목적으로 인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언젠가 예수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기가 원하는 소원을 채워주지 못하면 떠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되고 자식이 좋은 대학 가서 출세 할 줄 알았는데 안되더라. 예수 믿어도 소용이 없더라’며 나중에는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부자가 되려거나 출세해 보려는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나중에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나를 믿고 따르는 길은 어려운 길이다. 이것은 매력적이고 쉬운 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따라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공개적으로 정직하게 두 길을 제시하시면서 좁은 길에는 어려운 요소도 있고 장애요인도 많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런 장애요인과 어려움을 극복하고서라도 좁은 길로 가야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두 길의 예화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두 길은 어떤 면에서 차이점이 있는가?”하는 것을 네 가지로 나누워 말씀드리겠습니다.
1. 넓은 길은 “표류하면 되는 길”이요, 좁은 길은 “결단과 변화”가 요구되는 길입니다.
넓은 길은 사람들이 자연 상태에서 저절로 가는 길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은 넓은 길에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무 변화 없이 왔으면 넓은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넓은 길은 강물이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가면 되는 “표류하는 길(road of drift)”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은 의도적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들어가야 되는 길입니다. 그대로 흘러가면 안되는 결단과 변화가 요구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넓은 길로 자연스럽게 가던 사람이 “이 길이 잘못된 길이다. 이 길로 가면 안되겠구나.”하며 의도적인 변화를 하고 의도적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변화를 원하는데 피상적으로 표면으로만 변화를 원하지 속으로는 변화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사고방식도 생활습관도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배드리는 자리도 수십 년 동안 바꾸지 않는 분이 계시는데 이것은 자기가 앉던 자리에 앉아야 심리적으로 편안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일을 하게 되면 인간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이 보통 은행계좌를 만들면 아무리 다른 은행에서 이자를 많이 준다 해도 거래은행을 잘 바꾸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변화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 상태 즉, 어려서부터 지내온 현재 상태에 그대로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천국 가는 것을 방해하는 최고의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길이 잘못되었으면 바꿔야 합니다. 인생의 작전을 바꿔야 됩니다. 예수님은 넓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넓은 길로 가고 있기 때문에 말씀하실 필요가 없어서입니다. 넓은 길로 가기 위해서는 아무런 변화가 필요치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냥 태어날 때부터 살던 대로 그대로 인생길을 가면 그는 넓은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은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의식적인 행동과 결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길의 비유에서 인간은 자연 상태 그대로 살아서는 안되고 결단과 변화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일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필요한 일이요 결단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넓은 길을 가고계신 분들은 변화하고 결단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넓은 길은 “자기 방종(Self-Indulgence)”의 길이요, 좁은 길은 “자기 부인(Self-Denial)”의 길입니다.
넓은 길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사는 자기 방종의 길입니다.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제안해야 되는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넓은 문과 넓은 길은 문도 넓고 길도 넓어서 짐도 많이 가져갈 수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제한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면 되고,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되며,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중심이 나인 것입니다. 종교에 관해서도 “내 눈에 좋은 대로 믿겠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하나님이 무슨 상관이냐? 예수님이 무슨 상관이냐?”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현대인에게 인기 있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입니다.
그런데 좁은 길은 다릅니다. 문이 좁아서 짐을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들어갈 때에도 무릎을 굽히고 겸손하게 들어가야지 벋정다리로 서서 들어가면 문에 부딪쳐서 이마에 혹이 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의 표현대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짐을 모두 벗어 버려야 좁은 문에도 들어가고 좁은 길에도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죄를 용서받고 죄짐을 던져버려야만 갈 수 있는 길이 좁은 길인 것입니다. 한 번에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제한도 많고 한계도 많은 길입니다. 생각도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되고 하나님 말씀에 굴복해야 하고, 행동도 내 멋대로 해서는 안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믿는 것도 아무것이나 믿어서는 안되고 진리를 믿어야 하고, 추구하는 것도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는 길을 추구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좁은 길은 자기 방종의 길이 아니라 자기 부인의 길인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길입니다.
3. 넓은 길은 “편안한 길”이요, 좁은 길은 “고생스러운 길”입니다.
사람은 자기 멋대로 하면 편안합니다. 그러나 제한과 한계를 받으면 고생스럽습니다. 넓은 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넓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평평합니다. 아스팔트가 깔려있고 쉬운 길입니다. 여유 공간도 많고 거친 길도 없으며 오르내리는 언덕길도 없습니다. 넓은 길을 가는 데는 어려운 희생도 고통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할 것도 없고 이웃을 위해서 고생할 것도 없습니다. 나 혼자만 잘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좁다는 것입니다. 협착하고 표면이 거칩니다. 자갈이 있어 가끔은 자갈을 밟아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언덕이 가파릅니다. 그래서 올라갈 때 숨을 헐떡거리기도 하고 내려갈 때는 무릎이 아프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좁은 길은 결코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시험과 유혹을 이겨내야 되고 세상과 마귀와도 싸워야 됩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면 마귀가 쳐들어옵니다. 악령이 유혹하고 세상이 유혹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서 희생과 노력을 해야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주를 따르는 길은 어려운 길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희생도 있고 고난도 있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기록되었고, 요한복음 16장 33절 후반에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때로는 환난도 고생도 자기 십자가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길에 어려움이 있으셔도 원래 이 길이 그런 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사도바울도 천국에 들어가는 길에는 고생이 많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 후반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천국에 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는 그 길 즉, 주님을 섬기는 길에는 어려움과 환난과 고생이 많다는 것입니다.
4. 넓은 길은 “다수가 가는 길”이요, 좁은 길은 “소수가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쉬운 길과 고생스러운 길 가운데 어떤 길이 대중의 인기가 있겠습니까? 넓은 길은 다수가 가는 인기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은 소수가 가는 인기 없는 길입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수많은 친구와 동료들이 넓은 길로 갑니다. 가족들도 넓은 길로 갑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많은 데로 가면 편안한 것입니다. 대중 속에 속해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편안함을 준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점심 식사를 할 음식점을 찾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음식점이 있습니다. 두 음식점 모두 똑같은 음식인 자장면을 합니다. 똑같이 깨끗하고 주방장도 똑같이 훌륭하며 밑반찬도 똑같이 맛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보통 자동차가 많이 주차된 손님이 많은 음식점으로 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많은 데서 먹어야 심리적인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음식이라도 많은 사람이 왁자지껄하면서 먹어야 마음도 편하고 맛도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로 가게 됩니다. 설렁탕을 먹어도 혼자 조용히 먹으면 맛이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며 식사하는데서 먹어야 심리적으로 편안하고 맛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도 안 믿고, 성경도 안 읽고,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이 수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별일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잘 지내고 자녀들도 좋은 대학에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구태여 예수 믿고 교회 다닐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신이나 잘 믿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14절에 보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은 숫자도 적고 사람들과 격리되어 있는 것처럼 고독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넓은 길은 편안하고 사람이 많이 가며 제멋대로 할 수 있으나, 좁은 길은 어렵고 사람이 적게 가며 제멋대로 못하고 제한과 한계가 많으며 인기도 없는 길입니다.
결 론
그런데 “왜 예수님은 구태여 넓은 길로는 가지 마라. 그리고 좁은 길로 가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 하시느냐?” 이것이 산상수훈 최고 중요한 질문이요 산상수훈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삼거리 길 가운데 서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길을 택할 때 어떤 것을 가장 중요하게 보고 택하시겠습니까? 넓은 길로 가시겠습니까? 아스팔트 길로 가시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간다고 가시겠습니까? 그런데 삼거리 길에서 묻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이냐? 이 길의 목적지는 어디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물어보고 자기가 가려는 대로 가야되는 것입니다. 강원도 강릉을 가려는 사람이 길이 좋고 많은 사람들이 간다고 부산가는 길로 가면 안되는 것입니다. 강릉 가는 길이 좁아도 눈물 골짜기가 있더라도 그리로 가야됩니다. 왜냐하면 목적지가 강릉이기 때문입니다. 길을 택할 때는 목적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길이 넓으냐 좁으냐, 많은 사람이 가느냐 마느냐, 그 길이 평탄하냐 고갯길이냐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넓은 길을 자연스럽게 표류해서 가는 사람들은 결코 스스로 묻지 않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이냐? 이 길의 목적지는 어디냐?”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길의 목적지는 한참동안은 편안하게 달려가지만 결국 목적지는 멸망(destruction)이요 지옥인 것입니다. 넓은 길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속도도 내고 여러 친구와 함께 재밌는 얘기도하며 갔지만 결국 가보니 멸망이요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넓은 길로 가시렵니까? 계속가면 그 목적지는 멸망이요 지옥인데도 넓은 길로 가시렵니까?
예수님께서 좁은 길은 생명으로 이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입니다. 좁은 길을 가느라고 힘이 들었습니다.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도 찧었습니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다가 땀도 났습니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다가 무릎 연골이 찢어져서 무릎이 아픕니다. 지치고 힘들며 가는 사람도 없어 ‘나 혼자 이 외로운 길을 가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가보니 거기에는 생명과 천국과 영광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좁은 길을 가시렵니까? 넓은 길을 가시렵니까? 예수님은 단연코 많은 사람이 가는 넓은 길로 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좁은 길로 가라고 결정적으로 확고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오늘날 나름대로 공부를 했다는 사람들이 천국 가는 길은 여러 길이 있다며 종교다원론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종교다원론은 20세기까지 존재치도 않던 이단 사설이요 악령의 사상으로 그런 것을 가르치는 사람은 매우 악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천국 가는 길은 오로지 한 길, 좁은 길, 예수 믿는 길 밖에는 없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0장 7절에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과해야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길일뿐만 아니라 천국 가는 문입니다. 우리 앞에 문도 열려있고 길도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과 길이 항상 열려있지는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종말은 반드시 옵니다. 온 세상의 종말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옵니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일반적인 종말(general eschatology)은 제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개인에게 종말은 언제라도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에도 우리 성도님의 가족 분 가운데 두 분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한 분은 화장실에 들어가셨다가 돌아가셨고 다른 한 분은 주무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이처럼 개인적인 종말은 나이에 상관없이 언제라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좁은 길로 갈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열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회가 있을 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고 좁은 길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마 7:7-12 / 김정호 목사(번동교회)
사람들의 유형 중에 완벽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일점의 실수나 허점이 없이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겠다는 사람들입니다. 듣기에는 좋을 듯 하지만 실제로는 본인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주위 사람들에게도 큰 부담을 줍니다. 본인으로서는 항상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려다 보니 과부하가 걸려 신경성 위장병이나 노이로제 같은 증상에 시달리게 됩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부담을 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실수를 하거나 허점을 남기면 실패자가 된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류 역사에 큰 기여를 하게 된 많은 발명품들이 실수에서 얻어진 것들이 허다합니다. 거듭거듭 실패하여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실수와 맞서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승리자가 됩니다. 실수는 다음에 잘 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실수는 성공에 이르는 과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실수에 너그러워지고 실수에 친숙하여져야 합니다. 사노라면 본의 아니게 실수를 거듭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실수를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실수가 다음번의 성공으로 나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실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변명하려들지 말고 숨기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맡은 일에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은 할지언정 완벽주의자가 되지는 맙시다. 자신이 범한 실수에 대하여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입시다.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잘 안 믿으려고 하거나 실패하려고 한 적은 없었습니다. 열심히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섬기고 기도하고 충성하고 땀 흘리고 회개하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되고 부족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나는 실패자이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부모, 자녀, 목회자, 직분자, 성도로서 제대로 못했다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지난날의 실수와 부족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새롭게 거듭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잘 섬겨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축복을 체험하는 용기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기도합시다
본문 7-8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기도하라는 말씀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반복하여 말씀하는 이유는 중요하면서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알지만 실천이 어렵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반복적이고 점층적으로 행동으로 강화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간절한 기도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인내와 끈기로써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며 우리 자신이 기도로 훈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머리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우리는 금강석을 캐어 금을 제련하듯 귀중한 땀과 눈물의 무릎 꿇는 수고와 노력을 바쳐야 합니다.
톨스토이 저서 중에 <재화의 근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동네에 의좋게 나란히 두 집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집에 닭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닭이 옆집에 가서 알을 낳고 꼬꼬댁 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찾아가서 우리 닭이 낳은 알이니 달걀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달걀 하나를 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 낳다고 하면서 주지 않았습니다. 둘 사이에 싸움이 되었습니다. 말다툼을 하다가 싸움이 심해졌습니다. 남편들까지 합세하여 싸움이 되었습니다. 큰 싸움이 되었습니다. 승자 패자 없이 기분 나쁘게 싸움이 끝났습니다. 그 날 밤 한 여인이 분을 삭이지 못하여 옆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 불이 자기 집까지 날아와서 두 집을 모두 불태우고 말았습니다. 두 집은 불탄 자리위에 거적을 깔고 앉아서 서로 마주 보며 한숨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사실 아무 것도 아닌 흥분의 싸움이었지만 평소에 자기 관리를 하지 못 한 뿌리의 결과입니다. 즉흥은 즉흥적이 아닙니다. 뿌리가 있었습니다.
소련은 기독교를 박해하고 공산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 땅이 세 가지 기적의 땅이 되었습니다. “나무는 많은 데 종이가 없습니다. 원유는 많은 데 휘발유가 없습니다. 땅은 넓은 데 식량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땅은 반대입니다. “깊은 산속, 굴속, 교회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밤을 지새우며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소련과 반대 나라가 되었습니다. 나무는 없는데 종이가 많습니다. 원유는 없는 데 휘발유가 많습니다. 땅은 좁은 데 식량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100년 이상 땀을 흘리고 기도한 결과입니다. 즉흥은 즉흥적이 아닙니다. 쌓여 있는 것이 나오게 됩니다. 평소 부단히 노력하고 쌓으면 즉흥적으로 하는 행동 같아도 뿌리가 깊은 움직임이 될 것입니다. 기도는 결코 배반하지 않습니다. 즉흥은 즉흥적이 아닙니다.
이제 더위와 장마도 물러갑니다. 이제 9월과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기도의 계절이고 기도하기에 좋은 기회입니다. 그리고 제 8차 100일 작정 기도회도 시작됩니다. 기도해야 할 제목이 많고 기도해야할 상황입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자세로 계속 그리고 더욱 강하게 기도하여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좋은 것을 응답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하나님을 믿읍시다
본문 9-11절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가끔 자녀를 학대하고 살해하는 부모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부모는 자녀를 지극히 사랑합니다.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거나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들이 하는 일은 부패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된 자들은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줍니다. 뿌리 깊은 본능적이고 혈연적인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온전하시고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좋은 것을 주십니다. 각자에게 좋은 영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것을 기쁨으로 주십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이 예배가 하나님을 믿는 현장이고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최고의 행운과 은혜와 축복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과 세상은 아무런 가치와 의미도 없으며 행복과 기쁨도 없습니다.
<워싱턴 포스트>에서 사람들이 정말 음악을 알아듣는 귀가 있나를 실험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Joshua Bell)에게 거리의 악사처럼 허름한 옷을 입고 300만 달러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를 시시한 깽깽이처럼 들고 연주해 보라고 한 것입니다. 자기네가 지식인입네 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다니는 워싱턴 데팡스 지하철역에서 말입니다. 조슈아 벨은 연주회 입장권이 수천 달러나 하는 스타니까 사람들이 사인해 달라고 덤비면 어떡하나 걱정하기까지 했습니다. 아침 일곱 시에서 여덟 시 반까지 출근 시간에 바이올린 연주했는데 조슈아 벨을 알아보기는커녕 그 아름다운 음악을 귀담아 듣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다들 휴대전화로 통화하느라 정신이 없고 바삐 출근하느라고 걸음을 멈추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구두닦이만이 그 음악을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그가 조슈아 벨인지는 모르고 저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구나 하고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음악이 있는데 바삐 출근하느라고 지하철을 타러 뛰어다니느라고 목적을 좇느라고 그 음악을 못 듣는 것입니다. 조슈아 벨이 길거리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카네기 홀에서 연주하면 평소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도 워낙 유명한 사람의 연주이니 가서 듣고 감탄할 거 아닙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음악으로 치면 극장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있지만 조슈아 벨 연주를 듣기 위해 티켓을 사서 들어가는 공간처럼 교회 역시 누구나 선망하는 하나님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교회에서 사람과 물질과 세상적인 모든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만나고 좋으신 하나님을 믿어 좋은 것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대접합시다
본문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을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고 합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힘 있는 말씀입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라는 말씀은 정확히 주고 정확히 받자는 매우 계산적인 대접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인 인간들에게 자기가 타인에게 기대한 만큼 타인도 자기에게 기대하고 있음을 각성시키는 의미입니다.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서로의 권리 주장을 앞세우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황금률은 희생적, 능동적, 적극적 사랑 운동을 타인에게 기대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시작함으로써 모든 사회의 악순환을 제거하라는 명령입니다. 세상에는 남의 것을 착취하여 사는 사람도 있고 자기의 것을 가지고 자기만 사는 자급자족의 인간형도 있지만 남을 대접하고 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접하고 섬기는 사람이 많아야 하고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도둑이나 강도가 아닌 대접하며 사는 것은 최고의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섬기는 삶을 실천할 때 기쁨이 있고 존경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늘 갈등과 다툼이 그칠 날이 없는 어느 젊은 부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완벽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는 아내는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고 집안도 깨끗하게 정리해놓습니다. 고전음악과 미술을 즐기면서 사용하는 말씨도 항상 정중합니다. 한편 성격이 털털한 남편은 옷도 정장 보다는 캐주얼을 좋아하고 흙이 잔뜩 묻은 신발을 신고 와서는 털지도 않고 벗어놓습니다. 음악도 항상 대중가요에, TV도 켰다 하면 대부분 개그나 오락프로입니다. 연애시절 아내는 지금 남편의 털털함과 남자다움에 반했었고 남편은 아내의 이지적이고 여성스런 모습에 끌렸었지요. 그래서 상대방을 이상적인 배우자로 확신하고 결혼했지만 결혼 후의 현실은 이상과는 달랐습니다. 무식하게 행동하는 남편을 창피하게 여긴 아내가 “제발 무식한 티 좀 내지 말라”고 핀잔을 주면, “혼자 고상한 척 하지 말라”고 남편이 되받아 칩니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의 자존감을 깎아 내리는 언어폭력이 계속되면서 결혼 생활이 지옥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성격 때문에 도저히 함께 못살겠다고 하소연을 늘어놓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내세우는 주장일 뿐, 진짜 문제는 그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기심이지요. 상대 배우자의 특성을 자신에게 맞추기를 원하는 그 이기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면서 나보다는 먼저 상대 배우자의 유익을 위해 대접하는 삶을 실천하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과 환경이라도 섬김이 없으면 불행하고 지옥입니다. 우리는 가족과 성도와 모든 사람을 섬기고 대접해야 합니다. 공경해야 하는데 공격하면 안 되고 대접해야 하는데 대적하면 안 됩니다. 대적은 황금이 아닌 쓰레기입니다. 냄새나고 썩고 부패합니다. 모두가 다 죽습니다. 제가 아는 재벌 장로님께서 “나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종들을 대접하라는 뜻입니다.”라고 고백하며 대접하고 섬기는 삶을 사시므로 본인도 행복하고 가문도 잘 되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가득한 삶을 살고 계십니다. 남에게 좋은 것을 대접하면 하나님께서 더 크고 영원한 좋을 것을 주십니다. 대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구하라 좋은 것을 주시리라
마 7:7-11 / 이윤재 목사
기도와 성령의 달 6월 둘째주일입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온 나라가 메르스로 인해 홍역을 치루고 있습니다. 격리자가 4천명을 넘었고 확진자만도 100명을 넘었습니다. 사망자는 10명이나 됩니다. 이렇게 되자 전국이 발칵 뒤집혀 대부분의 학교가 휴업하고 너도 나도 메르스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작년 세월호에 이어 우리 나라에 들이닥친 두번째 국민적 고통입니다. 과연 메르스는 그토록 무서운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지나치게 무서워 하고 있는 것일까?
메르스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세시대의 페스트병 이야기입니다. 쥐에 의해 전염된 이 병은 14세기 당시 유럽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 무렵 한 마을에 기도하는 성자가 살았는 데 그가 아침에 기도할 때 페스트 마귀가 그 마을에 들어 들어온다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침 일찍 마을 입구를 막고 서 있는 데 과연 페스트 마귀가 삼지창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성자가 앞으로 나가 손으로 막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안되오. 이 마을에는 당신이 들어올 수 없소. 이 마을은 기도하는 마음이요. 어서 나가시요”. 싸움이 벌어졌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성자가 이겼습니다. 그런데 마을로 돌아온 성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마을사람의 태반이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페스트 마귀가 들어오지도 않았는 데 왜 사람들이 죽었을까? 이유가 있었습니다. 페스트 마귀가 마을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지레 겁이 나서 스스로 죽은 것입니다. 페스트 마귀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페스트 마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진짜 무서운 것은 페스트병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메르스가 무섭다고 전 국민이 공포에 떨만큼 무서운 것입니까? 혹시 메르스보다 우리가 가진 두려움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요? 공기로 전염되지도 않고 잠복기에도 전염이 안되고 태반이 병원에서 감염되고 이미 확진 판결받은 사람은 격리되었는 데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 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세계보건구기구조차도 큰 문제 없다고 휴업중인 학교의 재개를 권고했는 데 그렇게 많은 학교가 서둘러 문닫고 심지어 병원도 아닌 교회까지 나오는 것을 꺼리고 있으니 그렇게 메르스가 두려운 것인가요? 혹시 하나님 보다 메르스를 더 두려워 하는 것은 아닙니까? 조심해야 하지만 우리가 정도 이상으로 너무 두려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연히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쓴 시 한편을 읽었습니다. 제목이 “참으로 구할 것”입니다. “위험에서 보호해달하고 기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두려움없이 그것을 직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잠재워 달라고 간청하기 보다는 그것을 정복할 수 있는 마음을 구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담대함입니다. 그리고 믿음입니다. 아무려면 하나님이 메르스보다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없어도 메르스보다 못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그런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믿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기도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난 주부터 우리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기도를 통해 은혜받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마음의 기도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마6장입니다. 마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은밀하게”, “골방”에서 하는 기도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기도의 내면성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7장으로 가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마7:7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어떻습니까? 분위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마6장에서는 진실한 기도, 마음의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마7장에서는 열심있는 기도, 부르짖는 기도를 가르칩니다. 이 두 기도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조용한 사람은 6장의 기도를 좋아하고 뜨거운 사람은 7장의 기도를 좋아할 것입니다. 장로교인은 아마 6장의 기도를, 순복음교인은 7장을 좋아할지 모릅니다. 지적인 사람은 6장의 기도를 좋아하고 정적인 사람은 7장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같이 가야 합니다. 마6장없는 7장없고 7장없는 6장없습니다. 기도는 마음에서 나와 우리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 올려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능력있는 기도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간구하는 것입니다.
7장의 기도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하면 간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도중 가장 큰 것이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간구는 내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간구는 모든 기도의 기본입니다. 7절을 다시 보실까요? 마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여기에 간구하는 기도의 세 요소를 말합니다. 첫째 구하라. 둘째 찾으라. 셋째 문을 두드리라. 세 개의 요소는 간구하는 기도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구하라”. 왜 구합니까? 없으니까 구합니다. 당장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돈이 없습니다. 그런데 돈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그래서 돈을 구합니다. 돈이 필요없는 사람은 돈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도 돈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돈이 없어도 필요를 느끼지 않은 사람은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돈이 없고 당장 필요해서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찾으라”. 누가 찾습니까? 잃어버린 자가 찾습니다. 내 부모가 북한에 있다. 마침 북한에서 남한 출신의 생존자 명단을 발표했다. 그러면 북에 부모를 두고 온 사람은 찾지 않겠습니까? 왜 그렇습나까? 소중한 사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이산가족때 온 나라가 얼마나 같이 울었나요?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찾으라. 잃었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것을 잃었기 때문에 찾습니다. 지금 내가 찾지 않는다면 잃은 것이 없거나 잃었어도 소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드리라”. 누가 두드립니까? 밖에 있는 사람이 두르립니다. 밖에 있어 날씨는 춥고 배가 고파 문을 두드립니다. 급히 나오느라 집에 무엇인가 두고 온 것을 가지고 가려고 문을 두드립니다. 밖에 있는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두드립니다. 안에 있는 사람은 문을 두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밖에 있어도 급하지 않으면 두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여고생이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집으로 오는 데 누가 뒤를 따라옵니다. 잽쌔게 달려 문을 두드립니다. “엄마. 문열어. 빨리 열어”. 여학생이 조금만 지체한다면 치한에게 당할 수도 있다면 얼마나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겠습니까? 기도는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나마 다급하게 두드리는 것입니다.
간구하는 기도의 특징은 시급성입니다. 상항이 급박해서 시간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필요성입니다. 그것 없이는 내가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을 가져야 합니다. 그나마 지금 당장 가져야 합니다. 절박성입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고가 아닙니다. 지금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뒤로 미룰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왜 기도하지 않는지 아십니까? 이유는 다 있습니다. 그러나 딱 하나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급하지 않아도 그렇습니다.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당장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소중한 것을 잃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당장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당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금 구할 것입니다. 반드시 찾아야 것이 있다면 지구의 끝이라도 달려갈 것입니다. 정말 다급한 일이 있다면 문을 부셔서라도 들어갈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시급성에 달려 있습니다. 옛날 소크라테스에게 한 제자가 찾아왔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 배우러 왔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를 데리고 바닷가로 갔습니다. 물이 허리를 찰 때까지 들어가더니 갑자기 젊은이의 머리를 물속에 밀어 넣었습니다. 젊은이가 놀라 발버둥 쳤으나 소크라테스는 그대로 그를 물속에 처박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둘이 백사장에 앉았습니다.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왜 저를 물에 집어 넣었습니까?” 소크라테스는 물었습니다. "물속에 있을 때 자네에게 가장 다급한 것은 무엇이었나?“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숨쉬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숨쉬고 싶었나?“ ”예, 숨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지혜를 찾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공부하겠나?“ 젊은이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지혜도 학문도 사업도 직장도 그렇게 해야 성공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생명은 시급성입니다. 지금 간절히 필요하지 않는 데누가 주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기도해야 할 큰 제목이 가지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기도는 안되고 뒤척 뒤척하다가 잠이 들었는 데 꿈에 자기사 산을 올라갔답니다. 그러나 산에 올라가다가 발을 잘못 디뎌 낭떨어지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 살려” 하고 떨어지는 데 떨어지다가 소나무 가지 하나를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소리질렀습니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그랬더니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 손 하나를 놓아라”. 그래서 살려고 어쩔 수 없이 손 하나를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또 음성이 들렸습니다. “또 한 손을 놓아라”.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죽지 않습니까? 그래서 “안됩니다. 그것은 못합니다” 하고 오히려 두 손으로 소나무를 더 세게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까 꿈입니다. 이게 무슨 꿈인가 생각하다가 깨달았답니다. “아, 기도는 목숨걸고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다. 두 손으로 목숨걸고 소나무를 붙잡듯이 온 몸으로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놓으면 죽는다 하는 심정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믿음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믿음>
기도는 간구이지만 다만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9절, 10절이 그것입니다. 마7:9-10, “너희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 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 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는 다만 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필요해도 하나님이 안 주신다면 기도해도 무슨 수용이겠습니까?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필요로 시작하지만 결국 얻는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눅18장에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했습니다. 한 과부가 억울하게 자기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남편이 없다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삶의 조건이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남자없이는 농사 지을 수도 없고,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편 없이는 법적 보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이 여자는 혼자 소송할 수 밖에 없었는 데 판사는 여자라고 깔보고 그에게 재판을 차일피일 연기합니다. 이 여자가 살기 위해서한 가지 해야 할 일은 소송에서 이겨 재산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자신과 어린 자녀들은 굶어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에 목숨걸기로 하고 매일 법원에 나가 판사앞에서 웁니다. 여인에게 없는 것은 많았지만 한 가지 있는 것이 눈물이요 절박성이었습니다. 결국 판사는 이 여자가 목숨걸고 성가시게 하는 바람에 여인에게 재산을 돌려주기로 판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눅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를 우리에게 적용할 때 한 가지는 맞고 다른 한 가지는 틀립니다. 한 가지는 메시지입니다. 메시지는 맞습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신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주신다”. 이것이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위해 비유로 든 내용은 우리와 조금 다릅니다. 여기 나오는 과부가 나오고 재판장이 나옵니다. 과부가 가난하고 무기력하고 사람들에게 존귀히 여김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영적으로 비슷합니다. 그러나 과부와 우리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과부에게는 남편이 없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있습니다. 과부에게 없는 남편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다음 재판관입니다. 여기 나오는 재판관은 악한 사람입니다. 뇌물이나 바라며 재판을 악하게 멀고 가는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입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의 말을 들어주는 사랑이 많은 재판장입니다. 시75:7의 말씀을 아십니까?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이 이야기의 핵심은 “하물며”입니다. 남편없는 과부도 끝까지 매달려서 재산을 회복했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지 않습니까? 남편없는 과부도 응답받았는 데 아버지가 있는 우리가 받지 못하겠습니까? 불의한 재판관도 자기를 성가시게 하는 과부의 원한을 결들어 주었습니다. “하물며”,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과 기도를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간구하는 기도의 초점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필요해서 절박하게 기도를 시작하지만 결국 응답은 믿음에서 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겠느냐는 믿음, 남편없는 과부도 소원을 이루었는 데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이 외면하시겠느냐는 믿음, 그 좋으신 하나님이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당신 자녀의 기도를 외면하기느냐는 믿음, 반드시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믿음, 그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좋으신 아버지는 자녀가 요청할 때 반드시 두 가지를 하십니다. 하나는 “주고 싶고”, 다음은 “줄 수 있고”. 주고 싶어도 가난한 아버지는 줄 수 없습니다. 줄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은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언제나 주고 싶고, 언제나 줄 수 있습니다.
고후9:8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며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모든”이 네 번 나옵니다. 모든 은혜, 모든 은혜, 모든 일, 모든 것, 모든 착한 일, 하나님은 다 하십니다. 히7:25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심이라”. 하나님은 언제나 하실 수 있습니다. 항상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엡3:20도 중요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아멘.
우리는 필요하기 때문에 간구하지만 또한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간구합니다. 기도의 대가들의 명언이 여기서 나옵니다. 기도의 성자 이 엠 바운즈의 말입니다. “우리가 일할 때는 우리가 일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일하신다”. 영국의 앤드류 머레이의 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일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Prayer opens the way for God to do His work in and through me).
<약속>
이렇게 믿고 기도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약속입니다. 우리가 붙잡을 것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입니다. 모든 간구의 기도는 약속에 근거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가 몸이 아파 기도합니다. 어떤 약속이 있습니까? 시103:3-4절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약속입니다. 고난과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애가3:22-23,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약속입니다.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는 약속입니다. 시55:17,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우리가 두려움 가운데 있을 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시34:9-10,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앞날에 근심이 있을 때 약속입니다. 렘29:11,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자녀에게 문제가 있을 때 약속입니다. 사54:13,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 어디로 가야 할지지 모르는 사람에게 약속입니다. 시37: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제가 이 약속을 붙잡고 이스라엘에 갔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16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자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말입니다. “기도는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을 얻게 하고, 우리에게 명한 것을 실행하게 하는 능력이다”.
<끈질김>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7-8절에 나오는 세 가지 기도,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지속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구하라. 언제까지? 얻을 때까지. 정말 필요한 것이 있는 데 한번 달라고 해서 안준다고 포기하겠습니까? 찾으라. 언제까지? 찾을 때까지. 아들을 잃었는 데 몇 번 찾다가 없다고 그만 두겠습니까? 문을 두드리라. 언제까지? 열릴 때까지. 내가 정말 다급해서 문을 두드렸는 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포기하겠습니까? 소중하고 필요하고 다급한만큼 계속할 것입니다. 쉬지않고 구할 것이고, 중단하지 않고 찾을 것이고,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릴 것입니다. 7-8절의 말씀은 내용상 7:9절의 말씀은 “계속”, “쉬지 말고”, “끝까지”를 넣어 읽는 것이 원문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쉬지 말고 구하라”, “계속해서 찾아라”, “끝까지 두드리라”.
한나가 성전에서 아들을 얻을 때까지 간구하지 않았습니까? 야곱이 하란에서 라헬을 얻을 때까지 일하지 않았습니까?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때까지 사울을 참지 않았습니까?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떠날 때까지 바로와 싸우지 않았습니까? 여호수아가 아얄론 골짜기에 태양이 멈출 때까지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엘리야가 머리를 무릎사이에 넣고 비가 올 때까지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까지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건짐받을 때까지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간구하는 기도는 끝까지 기도하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십니다.
이렇게 간구하는 자에게 주님이 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11절입니다. 마7:11,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중요한 말은 “좋은 것으로”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이렇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구하는 대로 주리리라”. 구하는 자에게 구하는 대로 주어야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리리라“. 왜 주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구하는 대로 준다고 하지 않고 좋은 것으로 준다고 할까?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주 우리의 생각을 관철시키려 합니다. 느니웨로 가라고 한 하나님께 요나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다시스로 보내주소서“. 그랬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고동소리를 울립니다. 언제나 환경이 따라준다고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요나는 기도한대로 갔지만 결국 바다에 빠졌습니다. 요나에게 좋은 것이 하나님께 좋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가나안땅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롯이 땅을 선택합니다. 눈을 들어 보았더니 소돔과 고모라땅이 비옥하고 애굽땅 같이 보입니다. ”하나님, 나를 소돔, 고모라로 보내 주옵소서“. 결국 롯이 갔는데 망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좋았으나 하나님 보기에는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기도할 때 내 생각, 내 욕심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정욕대로 구한다”고 말합니다. 정욕은 욕심입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하나님이 지금까지 우리가 기도대로 응답했다면 우리는 충분히 망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주로 우리 욕심에 따라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최고의 은혜는 우리가 기도한대로 응답받지 않은 은혜입니다. 가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볼 때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즉각 응답합니다. 하나님 볼 때 좋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안주시거나 좋을 때까지 연기합니다. 그래서 가끔 안주시는 것이 좋은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의 기준은 하나님이 보실 때 좋으냐 안 좋으냐입니다. 그것도 지금 좋으냐 나중에 좋으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어떻게든 응답하십니다.
작년에 세월호에 이어 이번에 메르스로 우리가 고난당합니다. 우리는 메르스가 오기를 기도하지 않았고 메르스는 우리에게 분명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나쁜 것중에도 좋은 것은 있습니다. 메르스는 나쁘지만 그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을 때 좋은 것이 옵니다. 고난이 올 때 우리는 고난 자체를 바라보면 안됩니다. 고난 그 넘어에 있는 좋은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대학입학에 실패한 것은 분명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좋은 것은 대학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대학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좋은 일이 생깁니다. 사업이 안되는 일은 분명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업 넘어에 분명 좋은 것이 있습니다. 언제나 좋은 것은 사업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안되는 사업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분명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다 풍랑을 만났습니다. 풍랑만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이 풍랑넘어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이 그에게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행27:24, “네가 가이사앞에 서야 하겠고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문제가 생길 때 당면한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평생의 사명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러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할 때 나에게 좋은 응답을 기다리지 말고 하나님에게 좋은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메르스로 인해 고통당하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히13:5,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마28:20,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으리라”. 수1:9,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 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아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아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7-11절 / 김경형 목사
받지 못한 것은 구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찾지 못한 것은 찾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열리지 않았다는 것은 두드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안 구하면 얻지 못할 것이고, 안 찾으면 찾지 못할 것이고, 두드리지 않으면 안 열릴 것이고 짐승처럼 본능적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지 뭐!
우리 인간이 일반적으로라도 정상적인 사람은 무엇을 갖고자 하는 소유욕이 있습니다. 그 소유욕의 가치도 각자 자기 기준대로 구하는데, 크게 간단히 말하면 나이 어린 어린아이의 소유욕과, 청년들의 소유욕과, 어른들의 소유욕이 각각 다르듯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소유욕과, 예수 안 믿는 이방 세상 사람들의 소유욕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멍청한 사람은 소유욕도 없거니와 귀한 것도 모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보면 ‘세상에서 귀한 것이 무엇이다’ 라고 아는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자 하는 소유욕이 대단합니다. 예를 들면 금은보화 진주 보석반지 밍크코트 등등 임시적인 것, 도둑맞을 것, 불에 탈 것, 자기가 목숨이 위험한 것이지마는 밤낮으로 잠을 안 자고 그런 것을 가지려고 하는 욕심이 대단합니다. ‘어디를 가야 빨리 그런 곳을 찾느냐’ 하며 그 문이 열리라고 날마다 돌아다니며 아무 문이나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7절로 11절까지의 본문의 말씀이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그런 것을 똑같이 구하라는 말씀이냐? 우리가 암만 보아도 세상에 속한 물질성적인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주고 싶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냥 주시면 안 될까요? 그냥 주시면 귀한 줄을 모르고 그 가치력을 모릅니다. 마치 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는 꼴이 되기 때문에 안 됩니다.
우리도 많이 경험을 합니다. 깨닫기 위해 찾는 노력을 많이 기울이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애를 쓰고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 받은 그것이 귀하고 좋아서 남에게 주면 하찮게 여기고 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치 자기는 완전자가 된 것처럼, 더 알아야 할 것이 없는 자처럼 말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주고 싶어서일까요? 궁금하지 않은가 말입니다. 아무렴 세상에서 제일 좋다하는 그 정도이겠느냐? 아닙니다.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을 구하겠느냐?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것, 하나님의 것을 구하는 것이 당연지사입니다. 현재 예수 믿는 자기가 성경을 100% 다 깨달았고,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100% 다 성장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도 모자람이 없이 척척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된 것이니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땅에서 난 인간은 아직까지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100% 온전히 자란 사람은 없습니다. 불과 몇 %나 자라고 아는지, 이치를 몇 개나 알고 있는지?
누구든지 믿는 사람으로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것에 대한 부족성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것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것을 주는 사람이면 더욱 부족성을 느끼게 됩니다. 시급히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무엇을 구할 것이냐? 필히 구할 것은
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 하나님의 옳음을 구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 진리이치를 깨닫는 것.
②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사람이 되는 것.
③ 진리이치대로 적지적소에 실천하여 사는 것.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될 것을 구한다고 하면서 어떤 사역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성경을 안 보려면 아예 목회를 하지 말아라! 성경을 안 보고 목회하고, 무슨 꿈이나 음성이나 무슨 이적이나 무슨 간증으로 목회를 하는 자들은 이는 거짓 종들임을 자기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 종들은 이 문구(두드려라, 구하라)를 가지고 세상 것을 구하게 한다는 것도 알아두어야 합니다.
문은 두드려야 열립니다. 문은 안에서 열어줍니다. 문을 왜 두드리나? 문을 열어달라고! 문을 열어주면? 안으로 들어가려고! 들어가야 만나보고, 듣고 들어가야 무엇이 있는 줄 알지. 무엇이 있는 줄 알면 달라고 하기가 쉽지. 모두 다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지마는 다 인간 자기 주려고, 나 주려고 준비를 해 놓은 것입니다. 그 좋은 것을!
그 신령계의 것을 갖기 위해서 성경의 문을 열어달라고 해야지, 깨닫는 문, 진리이치의 문을 열어달라고 해야지 어디 가서 무슨 문을 두드리느냐? 넓은 문 두드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넓은 문의 메뉴를 보면
① 사역목적 위주.
② 사람 끌어 모으기.
③ 주머니 짜내기.
④ 건물 짓기
⑤ 노후대책 세우기.
⑥ 어깨동무하기.
성경의 문을 두드릴 줄 알면 마음 문도 두드릴 줄 압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 문 두드리고 우리는 성경 깨닫는 문을 두드리고.
그런데 문을 두드리면 열어준다는 이것을 성경으로 들어가지 않고 기도로 신령한 세계를 보여달라니까 마귀가 그 소리를 듣고 얼른 열어주는데 성경 깨달음도 아닌 뭘 이상한 것을 보고 천국에 들어가서 보았다고 간증을 하는 이것은 전부는 마귀놀음인 줄 알아야 합니다.
7장 11절: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신다?
② 내가 좋다고 하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
어떻게 해 주시는 것이 좋겠느냐? 내가 구하는 것보다 아버지가 보시고 주는 것이 더 좋지! 나는 이런 이런 것을 구했는데 전혀 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최고의 좋은 것을 주시려고 최고의 낮은 방편을 쓰실 수도 있습니다. 이런 좋은 것까지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7장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남을 대접하라’
남녀노소 빈부귀천 누구든지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대우받기를 좋아합니다. 대접을 받되 최고의 대접을 원합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무슨 최고의 대접을 원하는가?
그런데 대접부터 해야지! 하되 최고의 대접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최고의 것이 없으면 대접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물질의 것을 하고 싶어도 없으면 못합니다. 어쨌든 대접은 자기 것이 없으면 못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대우받고 싶어서 공부도 하고 실력을 키웁니다. 대접을 하는 목적으로 공부하지 실력을 키우기 위해 공부를 하는 사람은 썩 보기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자들은 대접을 받기 전에 대접을 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왕이면 최고의 대접을 해야지. 대접받는 상대가 나에게 도로 주지 못할 것, 흔한 대접이 아닌 것, 세상대접이 아닌 천국의 최고의 것으로 해야지! 그러나 없으면 못합니다.
최고의 대접이 무엇이냐? 진리와 생명의 말씀이요, 아가페 사랑입니다. 나의 전 인격이 동원되는 대접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없는 대접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대접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대접입니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입니다. 이것은 지상 최고의 하늘나라 사람으로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로!
그런데 보통 보면 대접의 가치성을 모르는 자들은 이런 대접을 안 받으려고 일부러 도망을 가는 자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꼭 돼지 같은 대접을 받아야 좋은지!
7장 13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이 문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든지, 밖으로 나가든지, 혹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통과하는 것이 문입니다.
‘들어가라, 들어가지 말라’ 하고 그 결과를 말해 놓았으니 좁은 문으로 가든지, 넓은 문으로 가든지 그것은 자기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자유로 인해서 걸어간 그 결과의 책임도 인간 자기가 지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의 명령이시라면 천 번 만 번 들어도 잔소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여간 힘 드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소원 목적과 취미와 간구성을 모두 버리고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좁기 때문에 몸만 빠져나갈 수 있지 짐을 들고 짊어지고 몸에 매달고 들어갈 수가 없는 문입니다. 이 좁은 문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요, 예수 그리스도시요, 진리의 길이요 곧, 성화구원의 신앙사상입니다.
이 좁은 문을 단순히 천국으로 들어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로만 알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 좁은 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① 문이 크다.
문이 크니 그 문으로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이고 들고 짊어지고 매달고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안 버려도 됩니다. 세상을 향한 큰 포부를 마음대로 가지고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영웅성도 가지고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② 그 길이 넓다.
그 길이 넓으니 타락된 세상지식을 기준 삼아 자기 마음대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걸어도 됩니다. 술 먹고 가도 되고, 춤 추고 노래 부르고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마음대로 가도 누가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야단치는 사람도 없고, 매우 자유롭습니다. 모두들 그렇게 살다 가자고 하고, 모두들 그렇게 살고들 있습니다.
③ 그 길로 가는 자가 많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수없이 많아서 지금도 많이 가고 있지마는 옛날부터, 아담 타락 이후부터 마지막 그 날까지 보통 많이 가는 게 아닙니다. 길이 넓기도 하고 사람도 많이 가니 돈도 많고, 사람도 많고, 사람마다 재간도 많고, 특기자랑도 많고, 프로그램도 많고, 놀이기구도 많고, 얘기도 많고, 장난도 치고, 싸움도 많고, 영웅도 많고, 장군도 많고, 왕도 많고, 구경할 것도 많아서 세상 참 재미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취미가 같은 사람끼리 만나면 해 가는 줄 모르고, 일생 가는 줄을 모릅니다. 좁은 길 가는 척 하기는 쉽지마는 실상은 이 넓은 길 가는 정신은 버리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7장 14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이 생명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이요, 영의 생명이요, 부활의 생명이요, 진리생명이요, 또 신앙생명이요, 성화구원의 생명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습니다. 좁다 라는 것은 방향은 한 군데라는 말이요, 그 길로만, 그 사상으로만 산다는 말이요, 가르치고 사는 것이 그 길 하나밖에 없습니다.
‘문은 좁고 협착하다’ 라는 말은 환난과 핍박을 받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 더 있겠느냐? 세상의 길과 다르고, 세속화된 세상적인 교회와 다르니 환난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의를 주장하고 죄악적인 것을 지적을 하고 나가니 더욱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 주격으로 살지 않고 새 사람 주격으로 살려니 스스로 제재를 받는 것도 많으니 가는 길이 좁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명 길,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의 수도 적거니와 생명의 길로 인도를 하는 종들도 많지 않고 드물기 때문에 쉽게 찾아서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신앙은 흔하지 않다 라는 말입니다. 설령 발견을 했더라도 말로만 가르치고, 말로만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로 겪는 신앙이고, 진리신앙으로 인해서 오는 사건이기 때문에 견디다 못해 이 생명적 진리 신앙의 노선에서 이탈하고 도망을 가는 자가 많은 것입니다.
이 신앙은 ‘내가 좁은 길로 가겠습니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명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를 구원해 주신 감사에서 그 길로 가는 것이고, 영원 궁극적인 신앙의 삶의 그 결과를 아는 자가 그 생명 길, 좁은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 사도들이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 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 종은, 또는 인도자는 좁은 문, 생명 길로 가는 신앙사상과 넓은 길 멸망의 문, 멸망의 길로 가는 신앙사상을 잘 알고 절대로 두 가지 길을 동등시하지 않고 분별하여 그 궁극적 결과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참 하나님의 보내신 사자는 생명 길, 좁은 길로 인도하면서 절대로 세상 타락적인 정신 사상, 또는 물질적 세상 소원 목적성을 못 가져가게 하고, 추려내고, 오직 영의 것, 영적인 요소로만 가지고 들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에 타락적인, 세상적인 요소를 가지고 생명 길, 좁은 길을 간다고 하자. 만약에 그렇게 되는 날에는 그 사람은, 그 신앙은 떨어져 죽고 마는 것입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낭떠러지의 좁은 길을 가다 떨어지면 죽는 것인데 벌벌 떨면서 바위 하나하나를 붙들고 가는데 어떻게 손에 어깨에 그 무엇을 들고 지고 가겠느냐? 목숨 하나는 살아야지! 살려면 다 버리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장면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경험도 하고.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세상이요, 육신의 귀로 듣는 것이 세상이요, 육신의 입으로 먹는 것이 세상이요, 육신의 코로 맡는 것이 세상이요, 육신으로 접촉하는 것이 세상이라! 그러기에 자칫 잘못하면 그만 현실에 도취되어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영원 궁극적 결과적인 것이 현실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생각을 할 때에 영의 눈으로 살피고 삼가 조심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가는 자가 많다’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 잘 안 가는 쪽을 이상하게 생각을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왜 저 교회는 사람이 잘 안 가지? 이단인가? 저 교회는 왜 저렇게 사람이 많이 가지? 뭐가 있나 보다. 우리도 한 번 가 보자!’ 하며 사람이 많이 가는 쪽을 좋게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 교회는 개척한지 3개월도 안 됐는데 교인이 백 명이나 모인다더라! 와, 저 교회는 개척한지 1년도 안 됐는데 5부 예배로 본다더라! 와, 저 교회는 교인이 5천명이라더라! 헌금은 은행에서 트럭으로 싣고 간대!’ 하면 그만 입이 다물어 집니다.
좋은 이유이던 나쁜 이유이던 다 그 나름대로가 이유가 있겠지만 성경본문은 우리에게 경계심을 주고 있습니다.(13, 14절)
멸망이 무엇이냐? 무엇을 보고 멸망이라고 하느냐? 신앙 면에서 말하는 멸망은 영원 궁극적 결과적으로 성화구원이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고 완전히 성화구원이 파괴된, 황폐화된 것을 말합니다. 성화구원의 멸망으로 인도하고 가르치는 자가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안에서 사람 망한 사람들을 만나보기가 쉬운데 예수를 수십 년을 믿고 교회를 오래 오래 다녔는데도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이 뭔지 구별을 못하고, 무엇이 성령의 일이고 무엇이 악령의 일인지 구별을 못하고, 인간 창조의 원인 동기와 목적이 뭔지, 인간 자기의 재세기간의 목적이 뭔지 도무지 알지 못하고 예수 믿기 전의 소원 목적을 그대로 가지고 입으로는 세상 타락성,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으니 이것이 신앙 인격 면에서 완전히 황폐된 사람인 것입니다.
비 진리적 세상적 물질적인 가르침과 그 인도를 받고 나가면 영적 신앙 면이 완전히 파괴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영원 궁극적 멸망성이 보인다면 왜 그런 길로 가겠느냐?
그런데 보통 보면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생명 길, 좁은 길은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으로만 알고 있고 멸망 길, 넓은 길은 단순히 예수 안 믿고 세상에서 부자로 죄 짓고 사는 그런 사람들로만 인식을 하니 비 진리적이며 육적이며 세상적이며 인본주의적인 그런 신앙의 사상들을 분별을 못하고, 성화구원의 멸망의 문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자기가 알던 모르던 자기 앞에는 생명 길 좁은 문, 멸망 길 넓은 문 이 두 가지 문밖에 없는 것이고, 역시 그런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가 어느 한 문을 향해서 가는 중이니 어느 문으로 인도를 받고 가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확인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하는 대접이(12절)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복있는 사람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
마 7:7-12 / 김명혁 목사
오늘 아침에는 "복 있는 사람"이란 주제로 22번 째 설교를 합니다. 이 세상은 부귀영화와 장수를 누리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소금이 된 사람, 빛이 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형제에게 화를 내지 않는 사람,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염려하지 않는 사람,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의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참으로 영원토록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의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의 복 있는 사람이 되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염려하지 않으려고 결심을 해도 염려하게 되고 비판하지 않으려고 결심해도 하루 종일 비판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될 수 있는 비결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아침 그 비결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첫째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11).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7).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좋은 것을 주시기를 좋아하시고 은혜를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눅7장에 나오는 시몬과 죄인인 한 여자는 주님의 말씀을 꼭 같이 들었지만 한 사람은 은혜를 받았고 한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고 한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복 있는 사람이 되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지난 주에 어떤 분이 강변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예배와 찬양을 통해서 감동과 은혜를 받은 것을 감사하는 글이었습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라는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저는 강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지 약 1년 반이 되어가는 신도 입니다. 항상 강변 교회를 사모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교회 일에 봉사하고픈 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게으름과 이런 저런 핑계로 항상 미루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지난 연말 박 장로님의 권유로 성가대에서 찬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찬양이라니.. 혹시 다른 성가대원들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닐까 망설이다가 일단 참여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찬양을 하기만 하면 제 몸과 마음속에 굳어있던 경직된 기운이 풀리면서 눈물이 한없이 쏟아지는 겁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멈출 수가 없어요. 매번 성가대에 앉아 훌쩍이는 제가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마음에 평화와 감사가 넘치고 완전히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순간 모든 것이 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매일, 매 순간, 하루 종일 주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부족함과 오만함, 위선과 모순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김명혁 목사님, 이영란 전도사님 그리고 성도님들 저는 아주 오랜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을 지나치고 살아온 어리석은 사람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아주 서투르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기를 원합니다. 저를 이끌어 주신 박 장로님께 감사드리며 이번 주일에는 아주 큰 손수건을 준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은혜의 고백인지 모릅니다. 사실 옛날 김삼환 목사님이 성가대에서 찬양을 하면서 울지 않은 적이 거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너무 좋아서 기도할 때도 울지 않은 적이 별로 없었고 성가대에서 찬양을 할 때도 울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울게 됩니다. 눈물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3주 전에도 어떤 분이 은혜 받은 것을 감사하는 글을 강변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주님! 오늘 목사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이웃에게 가까이 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리길 원합니다. 이웃에게 아낌 없이 나누길 원합니다. 말씀을 받고 나서 성찬 예식이 있었어요. 그런데 주님!! 오늘 제 기분이 어떠했는지 제 넉 두리 좀 들어 보세요! 떡과 포도주를 받기 위해 일어서서 겨우 받아 가지고 목사님께서 기도 하신 후에 먹고 마시는데 그 순간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제 머리부터 발끝까지 연약한 저와 주님이 함께 하여주시고 제 모습을 아시는 주님이심을 믿기에 그만 소리 낼 수 없는 내 속 깊은 곳에서의 통곡의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주님! 이것이 웬 은혜입니까!! 허물 많고 죄 많은 계집종을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여 이토록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니! 얼마 전 오른쪽 뺨과 왼쪽 다리에 마비증세가 와서 놀라기는 했지만 치료 받게 하셔서 오늘 첫 예배를 드릴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귀한 성찬예식에서 흘린 나의 눈물의 의미를 주님은 다 아실 것이며 나의 눈물이 주님의 보혈과 함께 나의 몸을 적셔 주심에 지금 이 시간도 그 사랑을 생각하니 주르르 눈물이 흘러 내립니다. 주님!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우게 하심도 감사 드립니다. 새해 첫 주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 가까이, 이웃에게 가까이,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리고, 이웃에게 아낌없이 나누는 삶을 살아 가도록 성령님 도와 주세요.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성령님 우리 좀 도와 주세요!!" 얼마나 감동적인 은혜의 고백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복 있는 사람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시몬처럼 은혜를 받지 못하면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죄인인 여자처럼 울면서 은혜를 받으면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2 둘째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너무 조심할 필요도 없고 너무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너무 걱정할 필요도 없이 자기가 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구해도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구해도 되고 찾아도 되고 문을 두드려도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아이는 아이처럼 어른은 어른처럼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맞게 다양한 방법으로 구해도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주실 은혜를 다 준비해 놓으시고 그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와서 다양한 방법으로 구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한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절하며 구했고 열 두 해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는 예수님의 겉 옷 가를 만지며 구했고 두 소경은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120명 제자들에게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한 곳에 모여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
예수님은 우리들이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기도하되 수단 방법을 총 동원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서 기도하라고 분부했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어떤 때는 앉아서 기도하고 어떤 때는 엎드려서 기도하고 어떤 때는 일어서서 기도하라. 어떤 때는 소리 지르며 기도하고 어떤 때는 울면서 기도하고 어떤 때는 소곤거리면서 기도하라. 어떤 때는 집에서 기도하고 어떤 때는 강변에서 기도하고 어떤 때는 산에서 기도하고 그리고 특별히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성전에 올라와서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넬료는 집에서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았고 루디아는 강변에서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았고 세리는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가난한 마음과 애통하는 마음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고 온유와 겸손과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염려대신 감사를 비판대신 칭찬을 지니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김삼환 목사는 소년 시절부터 새벽에 교회에 나가서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김삼환 목사는 자기 자신이 은혜 받은 것도 명성교회가 성장하게 된 것도 모두 새벽기도에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말을 몇 마디 인용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사용되었던 사람들은 늦잠을 자는 경우가 드물었다. 여호수아는 미명이 일어났고 새벽에 여리고를 점령했다. 다윗은 아침 일찍이 기도했고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라고 노래했다. 히스기야는 일찍 일어나서 주의 전으로 갔고 거기서 기도했다. 하나님은 새벽의 기도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첫 열매와 첫 소생과 첫 아들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그 날의 첫 시간을 제사로 바치는 것을 기쁘게 받으신다. 우리가 하루를 새벽기도로 시작할 때 우리는 영적인 은혜로 가득찬 건강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새벽기도가 없는 하루는 사탄이 승리하는 날이라는 말이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은혜 받기 위해서는 기도를 힘써야 하되 특히 새벽기도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의 백명희 집사님은 1981년 6월 14일부터 강변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때부터 지금까지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나오고 있습니다. 백혜란 집사님도 그렇고 최행덕 집사님도 그렇고 박영희 집사님도 그렇고 그 외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면서부터 새벽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은혜를 받아야 하고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는 신자는 불행한 신자가 되고 기도를 힘쓰는 신자는 복 있는 신자가 됩니다.
3 셋째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여기 그러므로 란 말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힘써야 한다고 말씀하시다가 그러므로 남을 대접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기도와 대접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신구약 성경의 가르침 중에서 한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는 구제와 함께 드려지는 기도, 손님 대접과 함께 드려지는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58:6,7에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드리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10:4에 보면 하나님께 상달 된 고넬료의 기도는 구제와 함께 드려진 기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를 드리려면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남을 대접해야 남에게 대접을 받고 하나님께 대접을 받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남을 대접하는 것은 하나의 윤리적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요 선지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또한 제사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라고 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6). 아브라함이 기도도 했지만 손님을 대접하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가이오가 기도도 했지만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원종수 박사도 기도도 했지만 불우한 노인들을 대접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대접과 기도와 은혜 받는 일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히13:1,2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복 있는 사람이 되는 비결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 말씀을 듣기만 하는데 그치지 말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가슴을 열고 눈물로 받아야 합니다. 둘째 은혜를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수단 방법을 총 동원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기 위해서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구제가 없는 기도 손님 대접이 없는 기도는 땅에 떨어지는 불완전한 기도가 됩니다. 금년에는 주일마다 아니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가슴과 눈물로 받으시는 복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에는 날마다 새벽마다 아니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기도를 힘쓰시는 복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에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대접하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는 그래서 하나님께 대접을 받는 복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마 7:7-12 / 박조준목사
클라우드 M. 브리스돌이란 분은 사람들이 그들의 곤경을 극복하고 성공적인 업적을 기록하는 데는 이에 도움이 된 뚜렷한 어떤 힘이나 요소 같은 것이 반드시 있다 고 말하면서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 리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라고 하였습니 다. 이 말은 우리가 마음 속에 분명한 환상을 가지고 그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면 불가능하게 생각되던 일들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믿음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 믿음의 원리를 적용해서 위인이 된 사 람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모세를 예로 들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여 애굽을 떠났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을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양을 지키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할 시간이 많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마음 속으로 이스라 엘 민족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지금 멍에를 메고 가축과 같이 노예로 살고 있지 만 모세는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에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자녀를 그려본 것입 니다. 그리하여 그는 훗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홍해를 건너서 약속의 땅 가 까이로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분명하고 뚜렷하게 원하는 바를 정하 고 어떤 어려움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자세로 실천에 옮길 때 분명하게 이를 얻을 수가 있습니 다. 우리의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 마음 속에 나타나는 환상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리고 이를 위해 기도하고 또 그 환상을 보세요. 이런 일 여러 번 반복하세요. 짜여 질 때까지 며칠이고, 몇 주일이고 몇 달이고 계속하세요. 이것이 바로 믿음을 실천해보는 방법 입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 서 이와 같은 믿음은 결국 우리의 삶 자체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더러 계속 구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의 가슴 을 벅차게 하는 말씀입니다만 이 말씀대로 살아 본 경험이 계신 분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알 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 벅찬 기쁨을 안겨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을 구하는데 주저할 것이 없습니다. 조 금 잘못 구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를 수정해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게 하는데 큰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 야 할 것은 먼저 구하기 전에 우리의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 하는 바가 합당한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에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 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와 같은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께 구할 때는 적극적인 자세로 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 니다. 믿음으로 구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매일밤 잠자리에 들 때 신발에 열쇠를 넣어 두고 잔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 아침 에 일어나 신을 신으려면 신발 속에 넣어 둔 열쇠가 발에 걸립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신발에서 열쇠를 꺼내면서 혼자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주님, 저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해결 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열쇠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주여, 내게 필요한 열쇠를 찾기까지 결코 오늘 하루를 포기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뜻있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떤 어려움도 당하지 않는다 는 말이 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어려움이 가로막힌다고 하여도 그 문을 열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응답 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좋은 성적을 얻기 원하는 학생은 밤잠을 덜 자면서 열심히 공부해야만 합니다. 공부할 생각과 노력은 하지 아니하고 좋은 성적만 원해서 기도하는 것은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는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어느 부모든지 다 자녀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그의 자녀인 우리가 다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1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 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러분, 이 말씀을 믿습니까? 선하신 하나님을 중심으 로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한 친구가 되어 주시며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또한 응 답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읍시다. 이 우주 안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기도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 능력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먼저 우리가 구하는 바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구하 기는 구하는데 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 개의 사람들은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우리 앞에 가로막혀 있는 문제에 더 집착을 합니다. 그러 므로 출발 때부터 패배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 하게 알려면 글로 써보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희미한 이론이 아니라 상세하게 분명하게 생각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과 기도하는 말이 모순을 일으키면 안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실상 전혀 다른 것인데 기도하는 가운데 엉뚱한 말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이 담기지 않은 말은 하늘에 결코 이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기도하지만 돌아서고 나면 무엇을 기도했는 지 생각도 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까? 그런 기도는 하나도 이루어지지 아니합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 이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지적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원함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진정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것이 기도의 능 력을 얻는 제일 첫 단계입니다. 둘째 단계는 받은 줄로 믿는 것입니다. 기도의 노력은 다시 말해서 믿음의 노력입니다. 그러 면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미 얻은 것으로 마음 속에 분 명하게 새겨두는 것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자신의 간구가 이루 어진 것으로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요소인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이 말씀 가운데 나타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 장소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를 다섯 번 드리지마 는 그래도 자리가 없어서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얼마나 죄송한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당회에서는 1만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과 그에 따르는 교육관 시설 을 위해서 기도하며 계획하고 있습니다. 1년 반 전에 강남구 방배동에 대지도 구입했습니다. 그 러나 그 땅이 여러 가지 제약을 받는 곳이므로 아직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우리 교회가 이대로 오래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대책이 있어야 하는데 기도의 제목은 너무 분명합니다.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언제까지나 이 런 상태로 계속해야만 합니까? 이대로는 교회가 더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담이 언제 무너지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하게 될 때 새 예배당이 눈에 선히 비쳐 옵니다. 제 책상에는 서울특별시 지도가 끼워 있습니다. 새 예배당 앞으로는 순환 도로가, 옆으로는 새 서울 과천으로 나가는 길이 환히 뚫려 있습니다. 지하철 2호선과 3호선이 교차하는 정거장이 예배당에서 5분 정도의 (도보로) 거리입니다. 영등포, 종로, 잠실에서 지하철을 타시면 10분 거 리입니다. 정말 저는 그 땅을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위하여 허락하신 것을 믿습니다. 생각할수록 감사하 고 감격스럽습니다. 이제 5년 안에 우리의 환상이 실제 눈앞에 나타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수고하시는 여러분 위해 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셋째 단계는 기도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마음 속에서 이루어진 사실로 생각하게 될 때 진정한 기도의 능력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고 하 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시는 것 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는 모든 일이 다 이루어져 현실로 나타난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 불가능 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생각에서 점점 사라져 가며 대신에 소망 과 신앙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해결책을 구하려 노 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삼일기도회 2부 예배가 끝난 다음에 자유로이 남아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집 니다. 처음에는 강단을 중심으로 모여서 기도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기도에 참여하시는 분 이 많아져서 본당 상층과 하층, 선교관과 벧엘 예배드린 곳에서 남아 기도 드립니다. 얼마나 은 혜가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에게서 이 기도 시간을 통해서 자신의 삶과 생활의 변 화를 받았다는 간증을 듣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 마음 가운데 이미 기도의 응답이 와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기도는 항상 능치 못한 것이 없는 것이 없는 영역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단계는 우리가 구하는 바를 얻으려면 자신의 무능과 약함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무릇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이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우리의 약함을 도와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가 강한 자라고 하면 기도의 힘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능 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아무리 강하고 유능하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유능하고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무능과 약함을 깨달음과 동시에 우리는 마음속 에서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내어 바쳐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흘러 들어올 수 있게 됩니다. 기도의 결과는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한 결과가 아니라 우 리가 우리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상 목적과 가장 필요 그리고 그 욕 망을 채워 주시려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원하는 바를 원하는 능력 있는 기도를 하려 할 때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 은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다 기꺼이 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성공하려면, 첫째, 시각적으로 구상을 하고 둘째,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 하고 셋째, 행동이 따르는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원하면서도 그런 것을 구하는 것이 이기적이요, 옳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그러나 사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 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구하는 바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바라고 구하는 것은 믿음의 형태입니다. 믿 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크로닌이란 사람은 「천국의 열쇠」라는 그의 책에서 지옥이란 사람들이 소망을 잃은 곳 이라 고 하였습니다. 소망과 바램은 너무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가깝고 일원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라는 것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러 분이 원하시는 바를 볼 수 있게 그려보세요. 그것이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로써 하나님 께 간구하세요. 기도는 구하는 것만이 아니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입니다. 이것 이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온전히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칠 때 우리는 전에 체험해 보지 못한 능력을 얻을 수 있게 됩니 다.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아갈 때에 여러 가지 놀라운 능력을 얻는다는 것을 이미 여러 사람에게서 보아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하는 바를 실천에 옮기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 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행동으로 실천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