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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28일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 <너를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제2독서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입니다.> 복음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의 묵상 복음서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의 가치관을 따라 살며 사람들을 가르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그분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이 어느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 식탁에 앉아 계십니다. 그날 초대 받은 다른 사람들이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고 신경 쓰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그리고 예수님은 교훈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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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전삼용신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의 명작 ‘양철북’을 영화로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3살 나이로 성장이 멈추어버린 오스카라는 한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거기 등장하는 자신의 가족들이나 세상 사람들은 모조리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세상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상징들입니다. 책의 처음부터 수배자였던 할아버지를 넓은 스커트 밑에 숨겨주었던 일 때문에 어머니가 태어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오스카는 매우 어리지만 어린 이상의 냉철한 시각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 부조리한 장면을 볼 때마다 북을 치며 유리가 깨어질 정도로 큰 소리를 지릅니다. 아이는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며 지하실에서 떨어져 그 나이로 멈추어 살게 됩니다. 심지어는 왜 이런 더럽고 부조리한 세상을 보고만 있느냐며 성당에 들어가 십자가 위의 예수님에게 자신의 북을 걸어주며 쳐보라고까지 합니다. 이 이야기들 중에 가장 충격적인 장면 하나가 장어를 먹는 장면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사촌 오빠와 오스카는 해변으로 놀러나갑니다. 여기서 장어 잡이를 만나는데 그는 죽은 말의 머리를 잘라 그것을 줄에 매어 바다에 던져놓고는 장어들이 그 머릿속으로 들어와 썩은 고기를 뜯어먹고 있을 때 그것을 다시 끌어 올려 그 속에 든 장어들을 빼내어 팔고 있었습니다. 입에서도 빼 내고 귀에서도 장어를 빼내는 장면을 목격한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구토를 합니다. 그런데 요리사인 남편이 그 장어를 사서 아내를 위해 요리를 해 줍니다. 아내는 그 장어가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를 보았기 때문에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성의가 무시당한 분노로 남편은 집기를 부수고 소리를 지릅니다. 아내는 울며불며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어머니의 사촌 오빠 얀은 어머니를 위로하겠다며 방으로 쫓아 들어가고 장롱 안에 오스카가 숨어있는 줄도 모르고 어머니와 사랑을 나눕니다. 둘은 처음부터 내연관계였던 것입니다. 오스카는 이제 자신의 아버지가 지금의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두 아버지 후보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 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어머니는 남편이 해 준 장어요리를 마구 먹기 시작합니다. 이는 오스카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세상을 판단하며 경종을 울리기 위해 침묵하기만 하시는 예수님 대신으로 비명과 양철북을 두드리던 오스카는 결국 자신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오스카 자신 때문에 ‘어머니’와 ‘두 아버지 후보들’이 죽음을 맞게 되고 자신도 성적 욕망으로 사로잡혀 있는 사람임을 삶으로 깨닫게 됩니다. 아내가 남편이 해 주는 장어가 역겨운 이유는 장어가 역겹기 보다는 남편이 역겨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도 남편이 있는 가운데 외도를 하고 있는 썩은 말고기를 먹고 사는 장어와 별반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장어보다 못한 존재임을 느끼면서는 상대의 더러운 면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스카도 자신이 비판만 했지 절대 자신이 비판했던 모든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고 북을 집어던지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다시 몸이 성장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식탁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건전한 삶 때문에 당연히 더 나은 취급을 받아야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윗자리는 비단 식탁에서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을 판단하며 스스로를 윗자리에 앉히는 사람들입니다. 각자가 양철북을 들고 세상과 하느님까지 판단하는 가운데 정작 성장이 멈추어버린 자신은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란 자선까지도 자신을 높이는 목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초대할 때도 그 사람들로부터 보답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만 초대합니다.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은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웃들의 매우 역겨운 것들을 사랑이라는 위장으로 억지로 먹어주는 척 합니다.
주님은 이런 위선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우리도 가장 큰 죄인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 똑같은 인간임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오스카의 어머니처럼 죄를 지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죄를 지으면 그 순간에는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금방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더더욱 타인을 비판하는 사람으로 변해버립니다. 진정한 치료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 피를 내 자신이 흘리게 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면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처지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강의에서 어떤 목사 지망생이 겪었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던 중 고양이가 차 밑으로 깔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고양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빨리 차를 세워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안 운전기사는 참으로 한심하다는 듯 그 청년을 바라보았습니다. 청년은 고양이가 죽지 않기를 기도하며 뛰었습니다. 그 곳에 도착하자 피가 흥건하게 있는데 고양이는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피를 따라 가다보니 상자 밑에 고양이가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웅크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빨리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손짓을 해도 나오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손을 집어넣었는데 고양이가 손을 물어서 피가 줄줄 흐르게 되었습니다. 다시 집어넣으니 마구 할퀴었습니다. 그럼에도 고양이를 살려야한다는 마음으로 고양이를 끌어냈습니다. 이미 허리 밑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있었습니다. 그 고양이를 피가 나는 손으로 안고 근처 동물병원으로 뛰었습니다. 동물병원 의사는 그 고양이는 곧 죽을 거라고 했고 검은 봉지에 넣어주었습니다. 매우 슬픈 마음으로 고양이를 들고 오는데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고양이가 너다. 내가 너를 그렇게 죄에서 끌어내려 했는데 네가 나를 물고 할퀴어 상처를 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어쩌면 자신만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 생명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은 하느님께 더욱 아픔을 드렸던 사람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비로소 양철북을 내던지게 됩니다. 윗자리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이것이 바리사이적 삶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윗자리에 앉지 맙시다. 주님은 낮은 자를 들어 높이시고 비천한 이를 끌어올리시는 분이십니다. 이미 높은 자리에 있는 이는 낮추시고, 부요한 자를 내치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유일한 의미가 있다면 바로 이 높이 있기를 좋아하는 내 자아를 발밑까지 끌어내리는 일입니다. 나를 윗자리를 끌어올리는 양철북을 제발 버리라는 말씀이 오늘 복음입니다. 밟혀도 당연한 상태가 되고 모든 것을 잃어도 욥처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지막의 베드로처럼 누구의 말에라도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주님은 당신의 일을 맡기십니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깊은 깨달음이 우리를 자유와 참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옵시다. 양철북을 내어 던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