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이 이유라는 논리, 의지는 헌법의 언어가 아니다
(청와대의 "어차피 임명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말의 위험성)
○ 유치한 건가, 사악한 건가, 무식한 건가.
조희대 대법원장의 재제청 거부에 대해 청와대가 호들갑스럽게 내놓는 반박들을 보면, 이것이 한 국가의 수뇌부에서 나온 말인가 싶어 분노 이전에 국민으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다.
청와대의 9.23 반박문에 나오는 "임명 거부 입장이 제재청을 요청한 사유"라는 말, 그리고 "임명하지 않을 후보자에 대해 국회에 임명동의안을 제출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그 말에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인가.
조희대 대법원장이 요구한 것은 단순하다. 재제청을 요구하려면 헌법적 근거와 구체적 사유를 적으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청와대의 답은 "임명하지 않겠다는 것이 사유"라는 것이다. 왜 임명하지 않는가. 그 답은 없다.
임명하지 않겠다는 의사 자체가 이유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유(reason)가 아니다. 이유의 자리에 의지(will)를 갖다 놓은 것이다.
○ 2천 년 전 로마의 어느 아낙네
고대 로마에 유베날리스 (Juvenal, 55-140) 라는 유명한 풍자 시인이 있었다.
그의 풍자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제멋대로 구는 아내가 어느 날 아침 또 무슨 변덕에서인지 남편에게 아무 까닭 없이 노예 한 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닦달한다.
남편이 왜 꼭 그래야 하느냐고 묻자 아내는 이렇게 답한다.
"Hoc volo, sic jubeo, sit pro ratione voluntas."
"내가 원하니까요. 그래서 요구하는 거고, 그게 이유죠. 내 의지가 이유를 대신하는 겁니다."
이 일화는 오경웅 (吳經熊, John C. H. Wu) 박사의 『정의의 원천』 (이호선 역, 2024)에도 소개되어 있다. 저자는 이 짧은 한 문장에 이성에 터 잡은 법치(法治)와 의지에 터 잡은 인치(人治) 차이가 모두 들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13세기 영국 법률가 브랙톤(Henry de Bracton, 1210-1268)의 말을 함께 전한다. "법이 아닌 의지가 지배권을 휘두르는 곳에는 왕이 없다.“
법의 본질은 의지와 힘이 아니다. 왕도 법을 통해 정당성을 얻는데, 그 왕이 법 대신 의지를 내세우면 왕의 존재 근거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지금 말로 하면, 헌법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대통령은 그 헌법에 기대어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쫓겨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다. 청와대의 논리는 이 막무가내 로마 아낙네의 말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 왜 이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는가?
→ 임명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 왜 국회에 보내지 않는가?
→ 임명하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 왜 제재청해야 하는가?
→ 이미 임명 거부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게 이유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디에도 이유(ratio)가 없다. 의지(voluntas)를 이유라고 강변하고 있을 뿐이다.
2천 년 전 로마의 어느 아낙네의 억지와 다를 바 없는 자가발전 논리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내가 원하니까"가 국가권력의 이유가 되는 순간, 그 권력은 이미 헌법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 이유고지 의무는 적정절차의 핵심이다
이유를 대라는 요구는 대법원장의 자존심이 아니다. 근대 법치주의가 국가권력에 부과한 가장 기본적인 의무다.
권력이 누군가의 권리나 지위에 불리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반드시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는 것, 이른바 이유고지 의무(duty to give reasons)다. 이것은 청문권과 함께 적정절차 (due process)의 두 기둥을 이룬다.
유럽연합은 일찍부터 그 기관의 모든 결정에 이유 설시를 요구하고 (구 EC조약 제253조, 현 EU기능조약 제296조), 유럽재판소는 이유가 빠진 결정을 필수적 절차요건의 흠결로 보아 무효로 선언해 왔다.
1994년 집행위원회가 독일의 어느 개별법이 조약에 부합한다고만 적고 왜 부합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은 결정을 내렸을 때, 재판소는 그 결정을 무효로 했다.
결론이 옳은지를 따지기도 전에, 이유가 없다는 것만으로 무효라는 것이다. 우리 행정절차법 제23조가 처분에 이유 제시를 요구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이유고지의무가 적정절차의 핵심인 까닭은 세 가지다.
첫째, 이유가 있어야 상대방이 다툴 수 있다. 이유가 없으면 반박할 대상도 없다.
둘째, 이유가 있어야 제삼자가 심사할 수 있다. 법원이든 국회든 국민이든, 이유가 없는 결정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다.
셋째, 이유를 대야 하는 순간 권력은 스스로 이성에 구속된다. "내가 원하니까"를 이유로 적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유고지의무는 권력에게 이성의 언어로 말하라고 강제하는 장치다.
이 원칙은 행정기관이 국민을 대할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헌법기관이 다른 헌법기관의 권한 행사를 거부할 때에는 더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청와대는 이유를 묻는 대법원장에게 "임명 거부 입장이 사유"라고 답했다. 결정의 결론을 결정의 이유라고 내놓은 것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요구한 것은 정확히 이 원칙이다. 제재청을 요구하려면 왜 이 후보자가 안 되는지, 그 헌법적 근거가 무엇인지 적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적히지 않은 요구는 다툴 수도 없고 심사할 수도 없으므로 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고집이 아니라 적정절차의 요구다. 이유 없는 요구에 응하는 것이야말로 이유 없는 권력 행사를 승인하는 일이다.
● 의지를 발동하더라도 번지수가 틀렸다
백 보를 양보하여 대통령에게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하면 임명을 거부할 수 있다"는 청와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 그래도 지금의 행위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 의지를 발동할 요건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헌법 제104조 제2항의 순서는 명확하다. 대법원장의 제청 → 국회의 동의 → 대통령의 임명
대통령의 임명권은 이 절차의 마지막 단계에 있다. 임명을 거부할 권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임명권이 행사될 단계, 즉 국회의 동의 뒤에 온다.
국회가 동의한 후보자를 놓고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때 비로소 "대통령이 임명을 거부할 수 있는가"라는 논쟁이 성립한다.
그런데 청와대는 국회가 동의할지 말지 판단하기도 전에 "어차피 임명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결론을 먼저 내리고, 그 결론을 근거로 국회에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의 권한을 중간 단계에서 미리 행사한 것이다. 이것은 임명권의 행사가 아니라 임명권을 구실로 한 절차의 차단이다.
다시 유베날리스의 '내 맘이야' 부인에게로 돌아가 보자.
로마법에서도 주인이 노예를 처벌하려면 나름의 절차가 있었다. 그 아낙의 문제는 이유가 없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이유 없는 의지를 절차보다 앞세운 것도 문제였다.
청와대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임명할 의사가 없다"는 의지를 헌법이 정한 절차의 한가운데 끼워 넣어 그 뒤의 단계를 모두 지워 버렸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국회 동의를 받은 후보자의 임명을 거부하는 것은, 그것이 위헌인지는 별론으로 하고, 적어도 대법원장의 제청권과 국회의 동의권이 모두 행사된 뒤에 벌어지는 일이다. 두 헌법기관의 권한은 온전히 행사되었고, 남는 것은 대통령의 정치적· 헌법적 책임뿐이다.
반면 지금처럼 국회에 보내지 않는 것은 국회의 동의권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국회는 검증할 수도,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없다. 한 헌법기관이 다른 헌법기관의 권한 행사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한 것이고, 이것은 임명권의 범위를 아무리 넓게 보더라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중대한 헌법위반의 여지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청와대는 "임명하지 않을 사람을 국회에 보내는 것이 모순"이라고 했다. 말장난이다. 모순은 청와대와 민주당에 있다.
임명권은 국회 동의 다음에 오는데, 국회 동의 전에 임명 거부를 이유로 절차를 끊는 것이야말로 자기 권한의 자리를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이다.
특정 후보자를 임명하기 싫으면 한 패거리인 절대다수의석 민주당을 통해 국회에서 부결하면 된다. 어디 한두 번 해 봤나. 그걸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다. 왜 잘하던 주특기를 갑자기 안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