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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釋대원성
부산연합회 임제록 제3강-3 (2012.06.30.)
14-5 修行(수행)이란 業(업)을 짓는 일이다.
14-7 平常心(평상심)이 道(도)다.
14-10 형상 없는 것이 참 형상이다.
14-13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14-17 逢佛殺佛(봉불살불)
14-18 欠少什麽(흠소심마)
39쪽.
너무 엄청난 소리가 또 나옵니다. 우리 한 번씩 그냥 깨집시다.
그동안 우리의 의식이 한 번 이렇게 벼락을 맞아가지고 깨져야 됩니다.
청천에 벽력을 쳐가지고 한 번 깨져야 됩니다.
14-5 修行(수행)이란 業(업)을 짓는 일이다.
儞諸方言道호대 有修有證이라하니 莫錯하라
設有修得者라도 皆是生死業이며 儞言六度萬行齊修라하나
我見皆是造業이니라 求佛求法은 卽是造地獄業이라
求菩薩亦是造業이요 看經看敎도 亦是造業이니
佛與祖師는 是無事人이라
所以有漏有爲와 無漏無爲가 爲淸淨業이니라
有一般瞎禿子하야 飽喫飯了하고 便坐禪觀行호대
把捉念漏하야 不令放起하며 厭喧求靜하나니 是外道法이니라
祖師云 儞若住心看靜하며 擧心外照하고 攝心內澄하며
凝心入定하면 如是之流는 皆是造作이라하니라
是儞如今與麽聽法底人을 作麽生擬修他證他莊嚴他리오
渠且不是修底物이며 不是莊嚴得底物이니라
若敎他莊嚴하면 一切物을 卽莊嚴得이니 儞且莫錯하라
修行이란 業 짓는 일이다.
우리 그동안 수행한 걸 어쩌란 말입니까? 여기 와서 완전히 박살이 나는 것이지요. 여기서 박살이 나야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새롭게 우리는 또 태어나야 돼지요. 依法出生(의법출생)! 법에 의해서 다시 출생해야 됩니다. 법화경에도 있잖아요. 땅이 그냥, 지진 강도 한 1000도쯤 되는 대지진이 일어나가지고 “땅이 진정한다.” 그래요. 땅이 찢어지고 막 흔들리고 찢어져가지고 그 속에서 무량 무수 무변 보살이 그냥 땅에서 솟아오른다. 從地涌出(종지용출). 땅으로부터 밖으로 솟아오른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정말 진정한 참 생명이ㆍ진정한 나의 참 생명이 기존의 의식으로부터 그동안의 어떤 가치관이라든지ㆍ그동안의 어떤 구태의연한 상식을 다 깨부수고 참다운 생명이 용솟음치는 그런 것을 從地涌出이라고 합니다. 땅이 찢어지면서 무수한 보살들이 올라오는, 야~ 법화경이 참 그런 아주 상징적인 그런 표현도 정말 아주 용기가 나는 그런 내용이지요.
儞諸方言道(이제방언도)호대, 그대들 諸方에서 말하기를
有修有證(유수유증)이라하니,
수행도 있고 증득함도 있다ㆍ닦음도 있다. 라고 하는데.
莫錯(막착)하라. 그르치지 말라. 잘못 착각이다ㆍ착각이다.
계속 그 사람이지 무슨 수행함이 있고 무슨 증득함이 있어요?
行行本處요 至至發處(행행본처지지발처)입니다.
행하고ㆍ행해도 늘 본래의 자리이고, 이르고ㆍ이르렀다. 하더라도 출발한 그 장소입니다. 무슨 有修有證입니까? 수행이 어디 있어요? 증득함이 어디 있어요? 본래 그 사람ㆍ그 자리인데 착각하지 말라 말입니다.
設有修得者(설유수득자)라도, 설사 수행을 아주 난행고행을 해서ㆍ수행해서 얻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뭐라고요?
皆是生死業(개시생사업)이며, 그것은 전부 생사 업이다.
그대로 죽고 사는 일이지 딴 것 아니다 말입니다. 그것을 못 벗어났다.
儞言六度萬行齊修(이언육도만행제수)라하나,
그대들이 말하기를 六度萬行을 가지런히 다 닦는다. 布施ㆍ持戒ㆍ忍辱ㆍ精進ㆍ禪定ㆍ智慧(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 보살의 덕목으로써 필수 아닙니까? 우리 필수 과목인데 그것을 다 닦는다고 하지만,
我見皆是造業(아견개시조업)이니라. 내가 보기에는 전부 업 짓는 노릇이다ㆍ전부 업 짓는 노릇이다. 그것은 무슨 장엄은 될지는 몰라요. 복 많이 짓고 조업을 많이 청정 업을 해서 겉 포장지는 근사하게 장엄이 될지는 몰라요. 그렇지만 기존의 것. 불교하고 아무 관계없이 우리들 본래 갖추고 있는 진실한 우리의 불성 = 참 생명. 그것 하고는 도대체가 비교가 안 돼요. 비교가 안 되는 겁니다. 그 소중한 가치를 두고 자꾸 바깥으로 헤매니까 다 내가 보기에는 전부 업 짓는 짓이다.
求佛求法(구불구법)은,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卽是造地獄業(즉시조지옥업)이라. 전부 지옥 업 짓는 일이다.
이렇게 충격적이고 날벼락 같은 법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데서 좀 깨져야 됩니다. 그동안 舊習(구습), 구태의연한 상식에서 깨져야 되는 것입니다.
求菩薩亦是造業(구보살역시조업)이요.
보살을 구하는 것도 또한 造業이요. 관세음보살ㆍ지장보살 부르는 것, 전부 업 짓는 짓이다.
看經看敎(간경간교)도, 경전을 보고ㆍ교리를 보는 것도
亦是造業(역시조업)이니,
佛與祖師(불여조사)는 是無事人(시무사인)이라.
부처와 조사는 是無事人 = 일없는 사람이다. 본래 우리 마음자리는 일이 없는 자리입니다. 일 한다고 마음자리 달라지는 것 아닙니다. 달라지는 관점이 ‘아~ 그 사람 절에 다니고 불교 공부해서 참는 힘도 생겼고 자비심도 생겼고 마음도 너그러워졌고, 그것은 그냥 치장입니다. 장엄이라고요. 본래 그 자리에는 아무 일이 없습니다. 無事人입니다.
所以로 有漏有爲(소이유루유위)와 無漏와 無爲(무루무위)가
爲淸淨業(위청정업)이니라. 유루는 유루대로 = 有漏有爲그러지요.
有漏 = 有爲입니다. 샘이 있는 것은 조작이 있는 겁니다. 또 샘이 없는 것은 조작이 없는 겁니다. 유루는 유루대로, 무루는 무루대로 그대로가 다 淸淨한 業이다. 그것이 淸淨한 業 = 텅 빈 업이다. 그냥 無我다 이 말입니다. 그냥 무아. 우리가 생긴 대로 살자. 본심대로 살아요. 그냥 본심대로... 본래 하는 대로하면 아무 탈 없는데 괜히 기교 부리고 뭐 재주 부린다고 그냥 길 좀 가다가 막히면 막힌 대로, 내 혼자만 막히나요? 딴 사람들도 다 막히는데... 그냥 참고 기다리면 갈 텐데, 거기 또 잔머리 굴려가지고 딴 데로 돌아간다고 더 막히지요. 딴 데로 돌아가면 더 막혀요. 참, 법문 시원시원 하잖아요.
有一般瞎禿子(유일반할독자)하야, 그랬네요.
일반 많은 대중들이 있고 그 가운데 또 일반 눈먼 머리 깎은 사람. 그 말입니다. 瞎禿子 = 눈은 깜깜하고 머리는 어디서 깎아가지고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머리 안 깎은 사람들은 해당 안 되겠네요.
飽喫飯了(포끽반요)하고, 배불리 척~ 밥 먹고 나서
便坐禪觀行(변좌선관행)호대, 坐禪觀行. 좌선하고 觀行한다 이 말입니다. 觀行은 요즘 흔히 하는 비파사나라든지 그런 겁니다.
把捉念漏하야(파착념루)하야, 念漏 = 생각이 새어나가는 것을 딱 잡도리 해가지고, 생각이 어디 흩어나가지 않도록 숨 쉬는 것 딱~ 관찰하고, 들어오는 숨 나가는 숨ㆍ들어오는 숨 나가는 숨. 내 걸음을 걸으면 걸음을 걷는 것. “일일이 예의주시하라.” 그러잖아요. 사띠. 요즘 흔히 하는 소리 사띠. “예의주시하라.” 그것이 把捉念漏입니다. 생각 빠져나가는 것을 딱~~ 잡도리 해가지고서
不令放起(불영방기)하며, 놓아 일으키지 말고, 그냥 놓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예의주시하는 그 생각을 놓치지 말고 그러면서,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되지요?
厭喧求靜(염선구정)하나니, 시끄러운 것 싫지요.
시끄러우면 좌선 안 된다고 막... 여름에 어린 아이들 와서 수련대회 좀 하고 하면 시끄럽다고 선방에서 나가서 그냥 벼락이 떨어져요. 뭐 공사 좀 하면 참선하는데 왜 공사하느냐고 시끄럽게 하느냐고 임제스님 식으로 표현하면 한 마디로 지랄지랄 하는 겁니다. 그것이 무슨 짓입니까? 공사 좀 하고, 학생들 모처럼 여름방학에 와서 수련대회 한다고 떠들 수도 있지, 그것가지고 공부 안 되면 뭐 앉아가지고 무슨 하늘을 꿰는 공부가 있단 말입니까? 여기 厭喧求靜이라. 시끄러운 것을 싫어 해가지고 고요한 것을 구하나니,
是外道法(시외도법)이니라. 여기 이렇게 외도라고 했잖아요.
外道法이다. 이 말입니다. 시끄럽다고 끄달리고, 조용하면 조용한데 끄달리면 그것은 외도지요.
祖師가 云(조사운), 儞若住心看靜(이약주심간정)하며,
그대들이 만약에 마음을 어디에 한곳에 딱~ 집중시켜가지고, 고요한 것을 관찰하고 있다 = 看靜. 고요한 것을 좋아해가지고 그리고
擧心外照(거심외조)하고, 마음을 들어서 밖으로 딱~~ 비추고 있습니다.
攝心內澄(섭심내징)하며, 이것이 그동안 그 당시 수행하는 그런 조목들을 이렇게 나열한 것입니다. 마음을 거둬서 안으로 가만히 맑혀요. 안으로 맑혀요 = 內澄. 맑힌다 이 말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요. 그런 소리 많이 듣잖아요. “마음을 가라앉히라ㆍ호흡 하는 것을 관찰하라.” 걸음을 걷는 대로 “한 걸음 두 걸음 걷는 것을 주의집중 해” 가지고서 또
凝心入定(응심입정)하면, 마음을 응고시켜요.
분산되는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켜요. 그것이 凝心입니다. 마음을 응고시켜 가지고서 定 = 선정에 들어가며
如是之流(여시지류)는 皆是造作(개시조작)이라하니라.
이것 전부 조작배기다ㆍ전부 조작배기. 공항에서 비행기 내려가지고 사람들 바쁘다고 막 걸어가는데 천천히 걸어가는 겁니다. 혼자만 걸어가나요? 떼거지 데리고 호흡 관한다고 같이 천천히... 그런 것 봤지요? 뉴스에 더러 봤지요? 안 봤어요? 하하하하하하하하 참, 조작 중엔 진짜 조작이지요. 이것 제 소리 아닙니다. 여기에 다 해놨습니다. 저는 책임 없어요.
如是之流는 皆是造作이니라.
아~~ 속 시원해요. 아, 바쁘면 걸어가고 비오면 그냥 쫓아가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지, 비가와도 천천히 걸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걸어가면 그것 안 놓치나요? 제가 그것 까지 다 오른 발ㆍ왼 발ㆍ오른 발ㆍ왼 발. 안 놓치나요? 또 숨 호흡 들락날락, 아 좀 잊어버리고 바쁘면 쫓아가고 그러지, 우리나라의 사람들에게는 그것 안 맞아요.
우리나라는 오히려 박력 있는 것이 맞고, 아니면 간화선이 맞아요. 간화선... 화두를 들고 그냥 집중을, 되든 안 되든 그냥 막 파면 거기서 정신에도 근육이 생깁니다. 정신에도... 우리가 운동을 하면요? 아령 같은 것ㆍ철봉 같은 것 안 하다가 한 달쯤 꾸준히 하면 몸에 근육이 생깁니다. 누구든지 알통이 생기고 근육이 생깁니다. 틀림없이 그렇거든요. 그것은 다 인정하지요. 그런데 화두라고 하는 것, 이것은 정말 안 되는 일이고 조작배기 엉터리 의심이지만, 거기에 집중을 하고 하루에 10시간이상, 한 달하면 우리정신 속에 근육이 생겨요. 정신의 근육을 맛 봐야 됩니다. 사실은 그런 일이 생긴다고요. 그래갖고 그런 사람들은 상당히 정신이 달라집니다. 아주 박력이 있고, 패기가 있고요.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런 좋은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들시들하고 비실비실하게 화두를 드는 둥 마는 둥 그래가지고는 100날 해봐야 소용없고요. 100년을 해봐야 소용없고요.
是儞如今與麽聽法底人(시이여금여마청법저인)을,
儞 = 그대들, 지금 바로 = 如今. 지금 바로, 당장 이 자리 이 순간,
이와 같이 = 與麽. 이와 같이 법문하는 소리 듣는 그 사람. 聽法底人 = 법문 듣는 그 사람을
作麽生擬修他證他莊嚴他(자마생의수타증타장엄타)리오?
作麽生擬修他 = 어떻게 그 사람을 닦을 것이며,
證他 = 어떻게 지금 법문 듣는 그 사람을 증득할 것이며,
莊嚴他 = 어떻게 그 사람을 장엄하겠는가? 그 사람 장엄 못해요ㆍ그 사람 닦지도 못해요ㆍ그 사람 증득도 안 돼요. 그것은 어떻게 건드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그 관법 같은 것. 비파사나라든지, 아까 제가 “화두를 열심히 들면 정신에 근육이 생긴다.” 이런 말도 했는데요. 그런 것들은 표층의식이 있습니다. 의식이 표층의식이 있고, 심층의식이 있고, 그 심층의식과 표층의식 전체를 관장하는 우리 본심이 있고 그래요. 그런데 표층의식은요? 변합니다. 사실 마음을 집중한다든지 호흡을 관찰한다든지 비파사나를 한다든지 화두를 들고 한다든지 하면, 정말 정신에 근육이 생기듯이 우리 표층의식. 들떠있는 의식입니다. 표면 의식에는 그런 변화가 와요. 틀림없이 옵니다. 그런데 심층의식에는 기별이 갈까? 말까? 입니다. 본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요. 본마음은 허공과 같아요. 허공과 같다고요.
그 표층의식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다가 건물 짓는 것하고 비슷해요. 약간의 어떤 변화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드넓은 허공에 그 까짓것 건물 좀 100층 200층 올라간들 드넓은 허공에 그것이 무슨 기별이 갑니까? 그것은 아예 허공하고는 상대를 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 마음은 허공과 똑 같다고 그랬습니다. 이 임제스님의 말씀은 그 허공과 같은 우리 마음에 초점을 맞춰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그걸 장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자리는 장엄 안 됩니다.
渠且不是修底物(거차불시수저물)이며,
그것은 또한 닦을 수 없는 물건이다.
不是莊嚴得底物(불시장엄득저물)이니라. 장엄하지도 못하는 물건이다.
장엄하지도 못할 물건ㆍ닦을 수도 없는 물건.
若敎他莊嚴(약교타장엄)하면, 만약에 그로 하여금 장엄할 수 있다면
一切物(일체물)을 卽莊嚴得(즉장엄득)이라.
모든 사물들을 전부 장엄할 수 있을 것이다.
儞且莫錯(이차막착)하라. 그대들은 또한 그런 것 착각하지 말아라.
수행해가지고 뭐 한다고 하는 것. 그것은 정말 표면적으로 그저 보자기. 이 보자기 쌌다가ㆍ저 보자기 쌌다가, 붉은 칠을 했다가ㆍ푸른 칠을 했다가 하는 그런 것이지 내용물에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내용물에는... 이것이 그런 법문입니다. 아~ 참, 대단한 내용이지요. 그 다음에 42쪽
14-7 平常心(평상심)이 道(도)다.
道流야 諸方說有道可修하며 有法可證하나니
儞說證何法修何道오
儞今用處欠少什麽物이며 修補何處오
後生小阿師不會하야 便卽信這般野狐精魅하야
許他說事하야 繫縛他人言道호대 理行相應하고
護惜三業하야사 始得成佛이라하니, 如此說者는 如春細雨로다.
平常心이 道다. 라는 말 들어 보셨지요? 뭐가 平常心인가?
여러분 平常心이 뭐지요? 좋은 것 있으면 욕심나고, 싫은 사람 보면 싫고, 이것이 平常心입니다. 내 마음에 든 것이 있으면 갖고 싶은 것이 平常心입니다. 또 화나는 소리, 내 마음에 안 드는 소리 하면 화내고, 슬픈 일이 있으면 슬퍼하고 이것이 平常心입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해 가지고 “아주 텅 빈 마음이다.” 이런 소릴 하는데 아닙니다. 平常心은 그대로 平常心입니다.
道流야 諸方說有道可修(제방설유도가수)하며,
諸方에서 말하기를 도를 가히 닦을 수 있다고 하며
有法可證(유법가증)하나니,
법ㆍ진리ㆍ이치를 가히 깨달을 수 있다고 하나니
儞說證何法修何道(이설증하법수하도)오?
그대는 무슨 법을 증득하고ㆍ무슨 법을 닦는가? 도대체 그것이 뭐냐? 이 말입니다.
儞今用處欠少什麽物(이금용처흠소심마물)이며,
지금 작용하고 있는, 그대가 지금 用處欠少什麽物. 거기에 줄 그어야 되겠네요. 그대가 지금 작용하고 있는 거기에서 欠少什麽物이야. 도대체 부족한 물건이 뭐냐? 말입니다. 이렇게 잘보고ㆍ잘 듣고ㆍ잘 웃고ㆍ잘 울고ㆍ잘 미워하고ㆍ잘 사랑하고ㆍ잘 화내고ㆍ잘 욕심내고 아, 이렇게 하면 되는데 그것이 부족한 물건이 도대체 뭐냐?
제법 무행경 이라는 경전에도요?
삼독이 즉시 도다. 그랬습니다. 탐 진 치 삼독이 곧 도다. 보통, “우리는 삼독을 없애야 된다. 8만 4천 번뇌를 없애야 된다.” 그것이 없애지는 겁니까? 없앤 사람 있어요? 그것 가지고 사는 겁니다. 그것이 곧 생명력인데요. 그런데 그것을 없애야 된다고 자꾸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유치원생들에게는 그렇게 또 이야기를 합니다. 그 근기에는 그 말이 맞아요. 그런데 제대로, 정말 부처님도 그 깨달음의 진실을 깨놓고 이야기하는 데는 삼독이 즉시 도다. 탐진치 삼독이 즉시 도다. 그랬습니다. 제법 무행경 이라는 경전에 있는 것을 영명연수 선사가 그 말에 너무 감동해가지고, 그것을 인용해가지고 受菩薩戒法 序(수보살계법서).
보살계를 받는 서문에 그 얘기를 갖다 옮겨 놨잖아요. 아~ 참 근사하지요?
修補何處(수보하처)오? 어느 곳을 보수 하느냐?
어디를 보수한단 말이냐? 닦는다고 하는 것, 어디를 닦는다는 말이냐?
後生小阿師不會(후생소아사불회)하야,
후배, 작은 스님들이 그것을 알지 못해가지고서
便卽信這般野狐精魅(변즉신자반야호정매)하야,
이 이러한 여우들, 여우귀신 = 野狐. 여우귀신들의 그 정신을 믿어가지고
許他說事(허타설사)하야, 허다히 그런 이런 저런 일들을 이야기를 해서
繫縛他人言道(계박타인언도)호대, 다른 사람들을 繫縛해.
그 이론에 구속 시켜요. 그 이론 가지고서 사람을 구속해서 말하기를
理行相應(이행상응)하고, 이치와 행이 相應하고
護惜三業(호석삼업)하야사,
신ㆍ구ㆍ의 삼업을 잘 보호하고 아끼고 아주 점잖게 그렇게 만들어져야
始得成佛(시득성불)이라하니,
비로소 성불한다. 라고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겁니다. 대개 그렇지요.
그래서 뭡니까?
如此說者(여차설자)는 如春細雨(여춘세우)로다.
아~ 평 잘 했네요. 이와 같이 주장하는 불교는 如春細雨라.
봄날에 가랑비처럼 많다. 봄날에 가랑비숫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봄날에 가랑비숫자처럼 전부 불교이야기하고, 전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이겁니다.
임제스님도 이 시대의 우리들 사정들을 다 환히 꿰뚫고 있습니다.
이치와 행이 相應해야 되고 護惜三業입니다. 신구의 삼업을 잘 아끼고 보호하고 잘 가꿔나가야 됩니다. 그럼 안 죽는다. 잘 보호하는 三業. 신구의 안 없어집니다. 그래야 성불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如春細雨라. 봄날에 가랑비처럼 그렇게 많고ㆍ많다. 많은 불교가, 수많은 불교가 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 충격적이지요? 실로 충격적인 가르침들입니다. 그 다음에 43쪽
14-10 형상 없는 것이 참 형상이다.
有一般禿比丘하야 向學人道호대 佛是究竟이니
於三大阿僧祇劫에 修行果滿하야 方始成道라하니
道流야 儞若道佛是究竟인댄
緣什麽하야 八十年後에 向拘尸羅城雙林樹間하야
側臥而死去며 佛今何在오 明知與我生死不別이니라
儞言 三十二相八十種好是佛이라하니 轉輪聖王도 應是如來라
明知是幻化로다.
古人云 如來擧身相은 爲順世間情이라
恐人生斷見하야 權且立虛名이로다 假言三十二하고
八十也空聲이니 有身非覺體요 無相乃眞形이로다
有一般禿比丘(유일반독비구)하야,
여기 또 한 有一般禿比丘 = 머리 깎은 비구가 있어.
向學人道(향학인도)호대, 학인을 향해서 말하기를
佛是究竟(불시구경)이니, “부처가 최고다ㆍ하~~ 부처가 최고다.”
於三大阿僧祇劫(어삼대아승지겁)에 修行果滿(수행과만)해서,
3대 아승지겁을 지나면서 수행한 결과가 만족한 사람이 부처다. 결국 부처님이 究竟 = 최고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方始成道(방시성도)라하니, 부처님은 바야흐로 도를 이뤘다.
그렇게 선전하고 있다 이겁니다.
道流야, 도 닦는 여러 벗들이여
儞若道佛是究竟(이약도불시구경)인댄,
그대들이 만약 말하기를, 佛是究竟이니, 부처님이 진짜 최고라면
緣什麽(연심마)하야, 무엇 때문에,
八十年後(팔십년후)에
向拘尸羅城雙林樹間(향구시라성쌍림수간)하야, 사라쌍수 사이에서
側臥而死去(측와이사거)며, 옆으로 누워서 죽어 버렸느냐? 이 말입니다.
부처가 최고라면 왜? 태어나서 80년 뒤에 사라쌍수 간에서 자빠져 죽었느냐? 임제스님 식으로 표현하면 그 말입니다.
그 전에 해인사에서 강의를 했는데 점잖게 했지요. 그랬더니
어떤 시인이 제 강의를 듣고, “강의는 참 잘 하는데 스님이 너무 점잖게 해가지고, 임제스님 분위기에 맞게 그렇게는 못하시네요.”
그래서 제가 “자빠져 죽었느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어떤 보살이 저 보고 그래요 . “점잖게는 하는데, 임제스님 분위기에는 안 맞는 표현인데요.” 아주 박력 있게ㆍ거칠게ㆍ사정없이 욕해가면서ㆍ육두문자 써가면서 해야지 왜? 임제록을 그따위로 점잖게 그것이, 임제록강의 잘하는 줄 아느냐? 고 저 보고 그러더라고요. 아~ 대단한 보살이 있어요.
사람 인연이라는 것이 희안해요. 제가 불교방송에 가가지고 라디오 방송인데요. 거기 가서 무슨 법문을 한 마디 딱 했는데, 그 보살은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와가지고 전혀 방송도 잘 안 듣고 그런데, 듣는다고 한 것이 라디오를 잘못 돌려가지고 불교방송이 나오더래요. 그래 들으니까 들을만한 소리가 나오더래요. 그래 가만히 들으니까 제가 그날 일요일에 설법하는 소리더라는 겁니다. 그래가지고는 인연이 돼가지고, 제가 그 때 해인사에서 스님들에게 임제록 강의를 했는데, 그 테이프를 보내 줬지요. 보내 줬더니 그걸 딱 듣고는, 그 다음에 詩도 한 편 쓰고 거기에 대해서 쭉~~ 뭐라고 이야기를 써가지고, 시인이라고 하면서 저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임제록 강의를 점잖게 잘하기는 했는데, 그 임제스님의 분위기에는 전혀 안 맞는 소리다. 안 맞게 표현한다. 그러더라고요.
側臥而死去. 저는 아주 용기내서 “자빠져 죽었다.”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부처님이 최고라면 뭐 80년 뒤에 자빠져 죽을 필요가 뭐 있느냐? 이겁니다. 그런데...
佛今何在(불금하재)오? 부처님 지금 어디 있느냐?
明知與我生死不別(명지여아생사불별)이니라.
우리들 뒈지는 것 하고 뭐가 다르냐? 똑 같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 죽는 것 하고 너무너무 똑 같지 않느냐? 與我 生 死 不別 = 우리로 더불어 生死하는 것하고, 죽고 사는 것이 하나도 다르지 않은 것이 분명한 사실이지 않느냐? 明知 = 분명함을 알겠다. 야~~ 참!
儞言(이언), 그대가 말하기를,
三十二相八十種好(삼십이상팔십종호)가 是佛(시불)이라하니,
三十二相八十種好가 부처다. 라고 그러면
轉輪聖王(전륜성왕)도 應是如來(응시여래)라.
轉輪聖王도 응당히 여래 겠구나. 금강경에 있는 말이지요?
明知是幻化(명지시환화)로다.
분명한 사실은 이 다 허망한 것. 幻化 = 환영이라고 한 것이 분명함을 알겠다. 분명히 알겠다. 幻化, 허망한 것이 아니냐? 아니 32상 80종호가 부처라면 轉輪聖王도 부처고 너도 부처고 나도 부처고 다 부처인데 잘 났다고 부처라면 그것 뭐 아무 것도 아니 아냐? 허망한 일이다 이 말입니다.
古人云, 고인이 말하기를
如來擧身相(여래거신상)은, 여래의 온 신상은
爲順世間情(위순세간정)이라. 신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世間情에 따른 것이에요. 세상 사람들의 수준에 맞춰서 하는 소리다.
恐人生斷見(공인생단견)하야,
사람들이 斷見에 떨어질까ㆍ斷見에 떨어질까 두려워해서,
權且立虛名(권차립허명)이다. 헛된 이름을 방편으로 세웠다.
權 = 방편입니다. 헛된 이름을 방편으로 내가 세워서 이야기한다. 이겁니다. 三十二相八十種好. 우리가 이런 법문 들으면서 키가, 불교적 키가 한 10m는 커질 겁니다.
假言三十二(가언삼십이)하고, 거짓말로 32라고 하고,
八十也空聲(팔십야공성)이다. 80종호 라고 하는 것도 헛된 소리다.
空聲이다. 아~ 참, 뭔지 모르긴 모르지만, 속은 아주 툭 터진 것 같네요. 속이 후련하고 밑이 확 빠진 것 같네요.
有身非覺體(유신비각체)요. 몸이 있으면 覺體가 그냥
無相乃眞形(무상내진형)이다. 형상 없는 것. 바로 무위진인 = 참 생명. 그것이야 말로 참다운 생명이다.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45페이지,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이것 참, 한 과목, 한 과목 넘기기가 아까워 죽겠네요.
지혜의 신통이라는 것이 있었잖아요. 땅으로부터 걸어 다니는 신통.
우리가 전부 땅으로부터 걸어 다니는 신통입니다. 우리가 전부 앉아있는 신통이요. 땅으로부터 걸어 다니는 신통이고 밤 되면 누워 잠 잘 줄 아는 신통이고요. 아무튼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14-13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唯有道流의 目前現今聽法底人하야
入火不燒하며 入水不溺하며 入三塗地獄호대 如遊園觀하며
入餓鬼畜生而不受報하나니 緣何如此오 無嫌底法일새니라
儞若愛聖憎凡하면 生死海裏沈浮하리니 煩惱由心故有라
無心煩惱何拘리오 不勞分別取相하면 自然得道須臾니라
儞擬傍家波波地學得하면 於三祇劫中에 終歸生死하리니
不如無事하야 向叢林中하야 牀角頭交脚坐니라
唯有道流(유유도류)의 目前現今聽法底人(목전현금청법저인)하야,
오직 그대들, 도 닦는 여러분 目前에, 바로 現今 = 지금 바로 이 순간 聽法底人이 있어요. 법문 듣는, 내 말소리를 듣는 그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入火不燒(입화불소)하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아니하고, 물질이 아니니까요.
入水不溺(입수불익)하며,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아요.
入三塗地獄(입삼도지옥)하대 如遊園觀(여유원관)하며,
삼도 지옥에 들어가도 동산에 있어요. 아주 아름다운 동산에 나가서 나들이 하는 것과 같아요.
入餓鬼畜生而不受報(입아귀축생이불수보)하나니,
아귀ㆍ축생에 들어가더라도 그 아귀ㆍ축생의 과보를 받지 않으니
緣何如此(연하여차)오? 어째서 그러한가?
無嫌底法(무혐저법)일새니라.
전혀 이치를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치장할 것이 없는 도리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도 아무 상관없어요. 그까짓 보자기, 뭘 로 싸든지 무슨 비단보자기로 싸든지, 낡은 보자기로 싸든지 뭘 로 싸든지 얼마든지 보자기로 싸있는 것 아니냐?
儞若愛聖憎凡(이약애성증범)하면,
그대들이 만약에 성인을 사랑하고, 범부를 싫어한다면
生死海裏沈浮(생사해리침부)하리니,
生死의 바다 속에서 浮沈 = 떴다 가라앉았다. 떴다 가라앉았다 하리라.
煩惱는 由心故有(번뇌유심고유)라.
마음을 말미암은 고로 번뇌가 있어요.
無心煩惱何拘(무심번뇌하구)리오?
무심하면, 마음이 없다면 번뇌가 어찌 나를 구속하겠는가?
不勞分別取相(불노분별취상)하면,
수고롭게 분별해가지고 相을 취하지, 現相 = 눈앞에 있는 온갖 차별상.
온갖 차별상을 취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自然得道須臾(자연득도수유)니라, 저절로 순식간에 법을 얻을 것이다.
우리, 현상에만 빼앗기지 아니하면ㆍ현상에만 빠지지 아니하고, 현상에서 정말 눈을 하나 더 뜰 줄 알면, 바로 그 순간 득도입니다. 바로 도를 얻는 겁니다.
儞擬傍家波波地學得(이의방가파파지학득)하면,
그대들이 옆집을 향해서, 자기 집안보물 놔두고 옆집을 향해서 부지런ㆍ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배워서 얻을 것 같으면,
於三祇劫中(어삼지겁중)에, 3아승지겁 가운데서
終歸生死(종귀생사)하리니, 마침내 生死에 되돌아간다.
자기보물 팽개쳐두고 3아승지겁을 밖으로ㆍ밖으로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수행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生死로 돌아가고 만다.
不如無事(불여무사)하야, 마치 일 없는 것과 같지 못해서
向叢林中(향총림중)하야, 叢林中을 향해서
牀角頭交脚坐(상각두교각좌)니라. 牀角頭交脚坐.
禪牀의 모서리에 딱~ 다리 꼬고 앉아 있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 말입니다. 그냥 쉬어 가라 이 말입니다. 쉬어라.
48쪽
14-17 逢佛殺佛(봉불살불)
道流야 儞欲得如法見解인댄 但莫受人惑하고 向裏向外하야
逢著便殺하라 逢佛殺佛하며 逢祖殺祖하며 逢羅漢殺羅漢하며
逢父母殺父母하며 逢親眷殺親眷하야사 始得解脫하야
不與物拘하고 透脫自在니라
逢佛殺佛.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인다. 그랬습니다.
부처에도 속지 말라ㆍ이끌리지 말라. 거기에 빠지지 말라 이런 말입니다.
내가 중요하지 내가... 그런 뜻입니다.
道流야 儞欲得(이욕득여법견해)인댄,
如法한 見解를 얻고자 한다. 如法한 = 사실 = 진리에 딱 맞는 소견을 얻으려면
但莫受人惑(단막수인혹)하고, 不受人惑하고 같습니다.
사람의 미혹을 받지 말도다. 남에게 속지 말라. 그 남이라는 사람 人자는, 다른 사람에게 속지 말라는 그 다른 사람은 부처님과 보살과 조사와 일체, 심지어 임제스님에게 까지도 속지 말라.
向裏向外(향리향외)하야, 안을 향하고 밖을 향해서
逢著便殺(봉착변살)하라. 어디를 가든지 만나는 족족 곧 바로 죽여 버려라. 부정하라. 이 말입니다. 죽이라는 말은 부정하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끄달리지 말라. 이끌려가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逢佛殺佛(봉불살불)하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逢祖殺祖(봉조살조)하며,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逢羅漢殺羅漢(봉나한살나한)하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逢父母殺父母(봉부모살부모)하며,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요.
逢親眷殺親眷(봉친권살친권)하야사,
친척과 권속을 만나면 친척 권속을 다 죽여야
始得解脫(시득해탈)하야, 비로소 해탈해가지고
不與物拘(불여물구)하고, 어떤 다른 사물에게도 구애 받지를 아니해,
透脫自在(투탈자재)니라. 여기도 끄달리지 아니하고 저기도 끄달리지 아니하며 툭 터져서 자유자재 한다.
이런 말은 좀... 여기 앉은 여러분은 수준이 높으니까 괜찮겠는데, 사실 아무자리에서나 하기에는 좀 위험부담이 크지요. 아니, 부모 죽이고ㆍ친척권속 죽이고ㆍ부처 죽이고 하라는 이런 표현은... 다 소화하시지요? [예~~~] 아이고 좋습니다.
14-18 欠少什麽(흠소심마)
山僧은 無一法與人이요 祇是治病解縛이니 儞諸方道流는
試不依物出來하라
我要共儞商量이라 十年五歲토록 並無一人하고
皆是依艸附葉竹木精靈과 野狐精魅니 向一切糞塊上亂咬로다
瞎漢이여 枉消他十方信施하고 道我是出家兒라하야
作如是見解로다.
向儞道하노니 無佛無法하며 無修無證하나니
祇與麽傍家에 擬求什麽物고
瞎漢아 頭上安頭라 是儞欠少什麽오
欠少什麽. 부족한 것이 뭐냐?
자~ 이렇게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하는 이 당체자리 欠少什麽오?
山僧은 無一法與人(산승무일법여인)이요,
나는(임제스님말씀입니다.) 나는 한 법도 누구에게 주는 것이 없다. 與人. 여기서는 줄 與자지요. 한 법도 누구, 딴 사람에게 줄 수도 없고ㆍ줄 꺼리도 없고, 그런 것이 없다 말입니다. 뭡니까?
祇是治病解縛(지시치병해박)이니,
다만 병을 치료하고 온갖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속박을 풀어주는 일이다. 아~~ 좋지요.
儞諸方道流(이제방도류)는,
어느 날 그대들 제방에 도 닦는 여러 사람들은
試不依物出來(시불의물출래)하라.
시험 삼아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말고 한 번 와봐라. 이겁니다.
我要共儞商量(아요공이상량)이라.
내가 그대와 더불어 한 번 따져보겠다. 商量해보겠다.
十年五歲(십년오세)토록, 15년 동안
並無一人(병무일인)하고,
한 사람도 그런 사람이 없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냐?
皆是依艸附葉竹木精靈(개시의초부엽죽목정령)과, 그랬습니다.
依艸附葉之竹木, 이런 말이지요. 전부 풀에 의지하고ㆍ나무에 의지하고ㆍ풀잎에 의지한 그런 精靈들 = 귀신들. 그리고
野狐精魅(야호정매)니, 말하자면 여우귀신. 귀신들도 일반 친척이나 가까운 사람귀신 들리면 그런대로 좀 덜 하지만, 다른 동물들 野狐精魅 같은 것. 다른 소나 돼지나 말이나 이런 것이 죽어가지고 그런 잡귀신들이 잔뜩 붙어놓으면, 그것은 고급 무당도 못 알아 봐요. 모른다고요. 귀신이 틀림없이 여기에 붙긴 붙었는데 이것이 무슨 귀신이 붙었는지 분별이 잘 안 되는 겁니다.
그런 귀신들, 의지가 약하고ㆍ우리 심성이 확실이 나약하고 그런 사람들은요? 心隙魔侵(심극마침)이라. 마음에 틈이 생기면 귀신이 붙어요. 귀신이 붙습니다. 문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잖아요. 그와 똑 같이 마음에 틈이 생기면 귀신이 붙습니다. 아는 귀신이 붙으면 좀 덜한데 그런 잡귀, 동물귀신까지 막 붙어가지고 무당들도 무슨 귀신이 붙었는지, 귀신이 붙기는 여러 수 십 마리가 붙었는데 모르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 우리 불자들은 불교 배워서 정신을 강화하세요. 정신을 강화해가지고 비실비실하면 안 됩니다. 아주 박력 있게ㆍ아주 파워 넘치게 그렇게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누구한테 잘 보이고 잘 못 보이고 그것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잘 보여서 뭐 하게요? 그 사람이 나 밥 먹여 주나요? 그것 크게 신경 쓸 일 없습니다. 이 보십시오. 임제스님의 이런 파워 넘치는 말씀을 우리가 공부하는 불자들입니다. 아~~ 이참, 대단한 말씀입니다.
諸方道流는 전부 그런 귀신이 붙어가지고
向一切糞塊上亂咬(향일체분괴상난교)로다. 그랬습니다. 向一切, 모든 들이 糞塊똥 덩어리 위에서 그 똥 씹어 먹느라고 이리 씹고 저리 씹고 하는 짝이다 이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또 불교공부 하는 사람들이 제 정신 못 찾고, 제 정신 못 차리고 엉뚱한 곳에 하~~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는 것은 마치 귀신들이 똥 덩어리 위에 올라가지고 그저 서로 똥 먹으려고 하는 짓거리와 똑 같다 이 말입니다. 向一切糞塊上亂咬. 그 추한 똥 덩어리를 서로 먹으려고 그렇게 어지럽게 씹고 있다ㆍ똥 덩어리 위에서 어지럽게 씹고 있다. 아~~ 임제스님이 보기에는 그런 존재들이었습니다.
瞎漢(할한)이여, 이 눈 먼 놈들이여
枉消他十方信施(왕소타시방신시)하고,
시방의 신도들 시주를 잘못 소비하면서
道我是出家兒(도아시출가아)라. 말하기를 “나는 출가한 장부다. 출가한 승려다ㆍ스님이다.” 이렇게 하는
作如是見解(작여시견해)로다. 이와 같은 소견을 짓는다.
向儞道(향이도)하노니, 그대들을 향해서 말하노니
無佛無法(무불무법)하며, 부처도 없고 법도 없으니
無修無證(무수무증)하나니, 닦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나니
祇與麽傍家(지여마방가)에, 다만 이러한 옆집에
擬求什麽物(의구십마물)고? 옆집을 향해서 부단히 쫓아다니는데, 도대체 무슨 물건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냐?
瞎漢(할한)아, 이 눈 먼 놈들이여
頭上安頭(두상안두)라. 그 짓은 머리 있는데, 머리 위에다 머리를 하나 더 올리는 것과 같다. 頭上安頭라. 머리 있는데다 머리를 하나 더 올리면 그것 괴물이지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지요. 이미 완전무결하다ㆍ이미 완전무결하다. 무엇이 부족한가? 완전무결한 존재다. 그래서 뭐라고요?
是儞欠少什麽(시이흠소십마)오?
그대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ㆍ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그 쓸데없이 밖을 향해서 뭔가를 자꾸 구하려고ㆍ구하려고 하는 것은 기존의 자기본성, 기존의 완전무결한 자기생명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이런 소리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믿는 것은 고사하고 설명도 들어본 적이 없고, 거기에 대한 지식도 없어요. 그래서 자꾸 밖에서 뭘 구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머리 위에다 머리를 하나 올려놓는 것과 같다. 정말 괴상망측하지요. 사람이 머리 두 개 달고 있어 봐요. 얼마나 괴상망측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전부 놀라서 도망갈 겁니다. 頭上安頭. 우리는 그런 짓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頭上安頭라. 그대들에게 欠少什麽오? 이렇게 두 눈 번히 뜨고 사물 잘 보고 말소리 잘 듣고 웃을 일 있으면 웃고, 슬픈 일 있으면 슬퍼하고, 완전무결한 존재다 이 말입니다. 頭上安頭. 야~ 좋은 말이네요.
정말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頭上安頭입니다. 欠少什麽오?
부족한 것이 뭐가 있느냐?
그동안 임제록 강설 인연으로 이 더운 여름에 정말 시원한 법문덕분에 저도 아주 잘 살펴보았고, 세상에 불교 8만 대장경 안에, 정말 이런 청천벽력 같고, 기상천외한 이런 가르침이 있다고 하는 말. 처음 만나신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이런 기상천외한 가르침. 이것을, 첫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우리 역사에서 눈 밝은 선지식들은 모두가 이러한 사상과 이러한 주장과 이러한 가르침을 펴는 임제스님에게 전부 줄을 서고 있고, 이러한 임제스님의 정신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튀어야 그 사람이 진정 살아있는 조사이고, 훌륭한 선지식이다. 라고 이렇게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전부 임제스님의 피가 한 방울씩 튀었습니다.
불교라고 하는 신심. 불교라고 하는 이 신심의 혈관 속에는 임제스님의 피가 지금부터 흐르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피가 들어 가가지고 막 요동을 일으켜요. 그야말로 정화를 해요. 그동안 아주 시들시들하고 비실비실한 그런 어떤 불교적 상식에서 막 요동을 쳐가지고 이것이 나로 하여금 새로운 눈을 뜨게 하고, 새로운 삶. 그리고 정말 청천에 벽력 치듯이 박력 있는 이러한 삶을 한번 구가해 본다는 그런 생각이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정말 임제록이 크게 많지는 않지만, 그 중에서도 너무 적게만 맛을 봤습니다. 부족한 점은 염화실에 들어가서 공부하시든가 아니면 C D를 통해서 보충하시기 바라고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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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釋대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