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토요일, 동갑내기 산악회에서 충북 단양 제비봉으로 원정 산행 가는 날이다. 구석에 웅크리고 자고 있던 등산 가방을 6시에 깨워 바나나 한 꾸러미, 빵, 얼음물 두 통을 주섬주섬 챙겨 넣었다. 전날 막걸리 한 통을 냉장고에 얼려 놓으면 좋으련만 안 그래도 술 많이 마신다는 아내의 잔소리 듣는 터에 눈치 보이는 일이다. 산 정상에서 시원한 막걸리 한잔하는 맛을 술도 못 마시는 아내가 어찌 알랴.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등산 다녀오면 아내가 가방을 다 정리했었는데 요즘엔 손도 대지 않는다. 놀러 갔다 온 가방까지 챙기지는 않겠다는 엄포 같은데 아내가 아침으로 국밥을 줄까 죽을 줄까 물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한 숟가락 뜨고 보니 원정 산행 땐 운영진이 관광버스 안에서 아침으로 김밥을 나눠준다는 게 생각났다. 아내에겐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안 그래도 적은 밥을 반만 먹고 집을 나서 지하철역에 다다르자 가방을 어깨에 추스르고 나니 손에 김치 냄새가 난다. 아내가 가방에 김칫국물을 잘못 흘렸나 보구나 무심하게 지하철을 탔다. 날씨도 좋으니 약속 장소에 가면 젖은 부분이 말라 괜찮겠지 했는데 웬걸 그때까지도 가방 밑부분이 축축한 게 만졌던 손에서 보란 듯이 냄새가 풀풀거린다.
단양까지는 두어 시간이 걸리니 적어도 거기에서만큼은 뽀송뽀송 말라서 냄새도 연기처럼 날아가겠지. 버스 밑 짐칸으로 친구들과 함께 차곡차곡 가방을 밀어 넣었는데 막상 도착해 가방을 꺼내도 냄새는 버젓이 안방을 꿰차고 있었다. 뭐 짐칸이라 통풍이 안 되어 지도 갈 데가 마땅찮았겠지. 햇볕도 따뜻하고 정겨운 시골 마당에 풀어놨으니 정상 이르기 전엔 바람 따라 기분 좋게 날아가며 내게 고마워하지 않겠나.
초여름이 꽤 덥다. 땀은 비 오듯 흘러내리는데 착각은 자유라더니 냄새가 거의 고문이다. 내 코에 스미는 냄새도 냄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앞뒤로 바짝 붙어 올라가는 일행의 눈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직은 의식적으로 날 피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 조금 안도가 되는데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마침내 한 친구가 홍어 싸왔느냐고 묻기에 김칫국물이 흐른 것 같다고 얼버무렸다. 홍어를 먹을 줄 아는 친구이니 그나마 다행인데 옆의 사람에게도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긴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근데 일행 사십여 명을 모아 놓고 양해를 구할 형편도 안 될 뿐만 아니라 내 근처 십 미터 안 접근 금지라는 팻말을 등에 붙이기도 볼썽사나우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재수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하필이면 처음 보는 친구들도 많고 오늘따라 바람도 불지 않는다.
행위나 인품에 따라 그 냄새도 다르고 냄새도 각자 제자리가 있다. 김치 냄새는 밥상 위에 있어야 군침이 돌고 모양이 좋다. 잘 익은 김치 냄새도 지하철이나 택시 안에 풍기면 유쾌한 일이 아닌데 김치 상한 냄새가 오죽하랴. 식칼이 주방에 있어야 정상인데 안방 복판에 시퍼런 눈을 뜨고 버젓이 누워있는 격이다. 난 지금 주위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내 방귀는 시원하고 구수하지만 소리 없는 남의 방귀는 독한 법이다. 특히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 안에서의 방귀는 거의 공포 수준이다. 그래도 제아무리 독한들 김치 냄새를 이길 수는 없다. 김치를 질식시킬 만큼 김치통을 겹겹이 밀봉시키고 야무진 줄로 몇 번씩 동여매도 냄새의 생존력은 놀랍다. 자동차 안에서 창문만 잠시 열어두어도 방귀는 재빠르게 도망가지만 김치 냄새는 바위에 달라붙은 멍게의 뿌리처럼 험한 파도를 이겨낸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의 끈기는 김치에서 나왔을 것이다.
인간미 넘치는 사람을 사람 냄새나는 사람이라고도 하니 사람의 첫인상이나 몸가짐도 냄새와 같을 것이다. 번지르르하게 잘 차려입은 사람도 시간이 지날수록 실망할 때가 있고 설령 추레하게 입었어도 만날수록 정이 가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볼수록 믿음이 무너져 역한 냄새가 진동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사람의 향기가 풍기는 것이리라. 난 세상에 어떤 냄새를 풍기고 있는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며 자신에게만 이롭게 돈을 쫓는 사람은 사기꾼의 냄새를 풍길 테고 남이나 자신 모두에게 유익한 걸 잘 탐지하는 사람은 성공하는 사업가의 냄새가 날 것이다. 나도 그런 냄새가 있어야 부자가 되고 사회 기여도 할 텐데 아직은 낙제 점수인 것 같다.
아무래도 가방 속 등산 용품까지도 다 젖은 것 같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마르지 않을 수가 없다. 가방을 통째로 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없는 돈에 또 사야 한다. 가방에서 옷으로 냄새가 전염됐으니 가방을 던져버린다 한들 냄새까지 떨치지 않는다. 친구 옷을 빌려 입어봐야 냄새를 옮길 게 뻔한 일이다. 정상에 올라 잠시 쉴 때 후미진 곳에서 가방을 열어보니 김칫국물을 한 바가지 부어 놓은 것처럼 비상용 옷까지 소금에 절인 배추 꼴이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가장 구실 시원찮다고 발로 한 방 차듯 아내가 혹시 국물을 쏟아부은 걸까. 아니면 아들, 딸이 그랬을까. 우선 옷을 꺼내 빨리 마르도록 가방에 펼쳐 매달았다. 노숙자가 따로 없다. 길거리에서 산 싸구려 옷이지만 버리긴 매정하고 또 산에서는 버릴 데도 없다.
산 위에서 무슨 대책이 있겠느냐먄 은근히 부아가 나서 아내에게 전화했더니 김칫국물이 가방 근처에도 갈 일이 없었단다. 그러더니 얼마 전에도 가방 정리를 하지 않아 먹다 남은 빵에 곰팡이가 슬었던 적이 있으니 남은 음식물이 또 썩은 게 아니냐며 가방을 풀어헤쳐 보란다. 그러면서 지하철에서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싼 티셔츠라도 하나 사 입고 들어오라는 말을 덧붙인다. 일행보다 먼저 발걸음을 총총이며 널찍한 바위에서 가방을 뒤집으니 침을 질질 흘리는 투명 비닐봉지 안엔 토마토 몇 개가 폭탄을 맞은 것처럼 검버섯을 덮어쓰고 납작 엎드려 있다. 동그란 토마토의 형체는 이미 사라지고 오징어포처럼 껍질만 남아 있다. 보름 전 산행 후 가방 정리를 안 한 탓이다. 잘못 없는 아내에게 괜한 짜증을 냈으니 집에 가서 본전도 못 찾을 판이다.
플라스틱 밀폐 용기에 담았으면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후회해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봉지 안의 토마토 찌꺼기를 숲에 던지고 봉지는 다시 가방에 넣었다. 발효유가 사람에게 좋다 하니 나무에도 병아리 모이만큼은 거름이 될 것이다. 원흉 아닌 원흉을 처리하고 홀가분하니 그제야 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비싼 향수라도 자연의 싱그러운 숲 냄새와 꽃향기엔 견줄 수가 없을 것이다. 높은 능선 위에서 내려다보는 강물이 평화롭다. 유람선이 허연 물줄기를 뿜으며 지나가고 있다. 바위 위에 서 있는 소나무가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는 게 비싼 분재 저리 가라 다. 분재는 굵은 철사로 칭칭 감아 억지로 자라지 못하게 꾸미니 아무리 좋다 한들 자연의 분재만 하겠는가. 수많은 풍파를 거치고 바위틈에서 물을 빨아들이는 수고 뒤에 소나무의 기품이 있다. 그러니 멀리 절벽에서 자라는 소나무는 키가 작더라도 당당한 위엄이 있다. 그것은 눈으로 맡는 냄새다. 하산길에서야 시원한 바람이 살랑인다. 저녁에 집에 가는 지하철은 염치 불고하고 타야 한다. 시골 할머니의 넉넉한 치마폭처럼 지하철이 헐렁하기 바랄 뿐이다.
첫댓글 세심한 마음 가짐이 잘 드러나 있군요. 남자분들도 이렇게 자상한 글을 쓰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잘 읽었습니다.
게을러서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
<냄새 전쟁>이었대요.
홍어 싸왔냐구?
냄새만 싸왔다!
그 친구 무도관장이라 잘못하다 국물도 없어요. ㅎㅎ
바람이 냄새를 피우면...
<제아무리 독한들 김치 냄새를 이길 수는 없다! >
바람 작품에서 봤엉 - 관장-
단지 "왁자지껄" 이에유
ㅎㅎㅎㅎ... 앞으로는 등산가방 잘 챙겨 다니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냄새때문에 곤욕을 치르셨습니다. 하긴 지나면 요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탈바꿈을 하니 그도 그럴만 합니다.^^
지나겨울엔 에세이스트 산우회에서 도봉산갔다가 집에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등산 가방을 놓고 내렸습니다. 이래저래 푼수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