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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출신의 축구 노신사 발레리 니폼니쉬 감독(62세). 1995년부터 1998년까지 4년간 부천을 맡았던 그는 ‘니포 축구’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90년대 한국축구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터프함과 치열한 생존본능이 대세를 이루던 90년대 한국 프로축구에서 니폼니쉬 감독은 지금까지의 축구와는 사뭇 다른 우아하고 화려한 미드필드 축구를 선보였고, 이것은 국내 축구팬들에게 하나의 문화충격이었다. 단순한 전술 뿐 아니라 전체적인 팀 운영과 선수 관리 등에서도 체계적이면서도 자율적인 관리를 보여줌으로써 한국 프로축구계가 선진적인 팀 운영기법을 받아들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더군다나 당시 코칭스태프로 그를 보좌했던 조윤환(전 부천-전북 감독)과 최윤겸(전 부천, 현 대전 감독), 하재훈(전 부천 감독, 현 KFA 기술위원) 등을 전도유망한 지도자로 성장시킨 것 역시 니폼니쉬 감독의 큰 업적이었다. 이들은 ‘니포 축구’를 자신들의 이상으로 삼아 용맹정진했고, 니폼니쉬 감독의 축구 철학 하나하나가 자신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자양분이었다고 항상 말하곤 했다. 사실 4년간의 세월 동안 니폼니쉬 감독이 획득한 우승 트로피는 96년 아디다스컵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니폼니쉬 감독을 실패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4년간의 세월 동안 부천, 그리고 한국축구계에 끼친 그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비교가 적절할지 잘 모르겠다. 히딩크 감독이 2001년과 2002년에 걸쳐 한국축구, 정확히 말하면 한국 대표팀을 족집게 과외를 통해 업그레이드 시켰다면 니폼니쉬 감독은 90년대 중반 4년의 시간에 걸쳐 한국 프로축구의 전반적인 부분을 조용히 업그레이드시켰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한국축구계에 큰 파급효과를 미치고 98년 한국을 떠난 그가 2005년 11월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2002년 중국 산둥 루넝 팀의 감독으로 잠시 한국을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옛 제자들과의 만남을 위해 내한한 것은 98년 한국을 떠난 이후 처음. 사실 한국을 떠난 지 7년이 넘는 외국인 감독을 위해 당시의 선수나 스태프들이 한 자리에 모이고, 여전한 존경심을 보여주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경우가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 같다. 특유의 자애로운 웃음으로 옛 제자들과 행복한 해후를 한 니폼니쉬 감독은 바쁜 와중에도 총 1시간 40여분 동안 자신의 축구철학과 한국에서의 기억 등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그럼 지금부터 러시아의 노신사 니폼니쉬 감독의 축구 세계로 들어가 보자. - 감독님을 직접 뵐 기회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니포 축구’를 좋아했던 팬으로서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인생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웃음) -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만이며, 어떤 계기로 방문을 하시게 되었는지요? 사실 2002년에 중국 산둥 루넝 팀을 맡아서 울산과 부산에 경기하러 온 적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 때는 거기서 경기만 하고 바로 나갔기 때문에 서울을 들러 지인들을 만나지는 못했지요. 그러니까 사실상 서울에 와서 옛 친구들을 만난 것은 98년 이후 처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함께 일했던 친구들과 정말 만나보고 싶었는데, 전부 스케줄이 다르다보니 쉽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부천이 새로 출발하는 의미로 OB 행사를 치렀고, 덕분에 이런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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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20일과 22일에 예전에 가르쳤던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감회가 새로우셨을 것 같습니다. 선수 한명, 한명을 아직도 모두 기억하시고 계신 것 같던데요. 물론입니다. 부천 시절의 제자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선수는 그 때 어떤 문제가 있었고, 저 선수는 어떤 점을 고쳐야했는지를 지금도 이야기할 수 있지요.(웃음) 그 당시 선수들이 성장해서 어느덧 나이가 들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있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니 반갑습니다. 예전의 향수, 그리움이 되살아나서 너무나 행복합니다. 몇십년의 세월이 흐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선수들의 모습은 그대로인 것 같네요. 그러나 은퇴한 몇몇 선수들, 특히 (곽)경근이나 (이)임생이 같은 경우는 살이 조금 찐 것 같습니다.(웃음) 어느덧 당시 젊었던 선수들이 이제 베테랑이 되어있고, 나이 들었던 선수들은 지도자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 이제 본격적으로 예전 이야기부터 나눠보겠습니다. 부천에는 94년 말 부임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낯선 한국으로 오시게 됐습니까? 기억을 더듬어봐야 할 것 같군요.(웃음) 당시 카메룬 대표팀 감독을 그만두고 나서 3년 동안 터키에 있었습니다. 그 이후 모스크바로 왔는데, 에이전트 회사에서 연락이 왔더군요. 한국의 대우(현 부산), 유공(현 부천), 대표팀 쪽에서 외국인 감독을 찾고 있다고 연락을 해온 모양입니다. 당시에는 한국축구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는데, 마침 대우에서 세르게이(훗날 부천에서 뛰던 세르게이와는 동명이인)라는 선수가 테스트를 받고 있었는데 옛 제자였습니다. 그 선수를 통해서 한국축구에 대해서 어느 정도 들었지요. 그 친구 말로는 한국 선수들은 원칙이 있고, 열심히 하려는 의욕이 있다고 하더군요. 아직은 미흡하지만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큰 나라라고 이야기해줬습니다. 그리고 협상 과정에서 당시 이계원 부천 단장이 러시아를 방문해서 미팅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장이 이야기한 신임 감독이 해야 할 3가지 임무에 대해서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당시 이 단장은 첫 번째로 챔피언에 오르는 것보다는 팀 컬러, 팀 이미지를 바꾸고 싶다고 했고, 두 번째로 코치들을 잘 교육해서 함께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했으며, 세 번째로 아직 이름은 없지만 가능성이 있는 젊은 선수들을 키워주길 바란다고 말했지요. 이 세 가지 조건은 감독 입장에서는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복합적인 이유들로 인해 한국행을 선택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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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천에 부임하시고 나서 처음 선수들을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이셨습니까? 사실 첫 번째 훈련에 대한 인상은 별로 없습니다. 94년 말에 한국에 왔을 때 아무도 나를 모르는 상태에서 5-6게임을 관중석에서 지켜보면서 선수들의 이름과 신상 파악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처음 소집되어 훈련할 때는 선수들이 휴가를 다녀온 상태라 가벼운 스트레칭이나 러닝을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서서히 신체적인 부하를 주면서 몸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살펴보니 선수들이 힘든 상황에서도 잘 견뎌내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그런데 플레이와 관련되어서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경기운영을 향상시키기 위한 훈련을 해보니까 선수들의 전술 이해도가 굉장히 낮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지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시도했던 것은 코치들을 설득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이 나를 이해해야만 내가 요구하는 부분들을 선수들에게 전달해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내가 생각한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코치들과 계속 대화를 나눴고, 다행히 우리 코치들이 잘 이해하고 열심히 도와줬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였습니다. 아무래도 통역이 중간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의사전달에 있어 다소 어려움이 있었고, 그로 인해 선수들과의 간격이 멀었습니다. 또한 한국 선수들의 특징상 감독들에게는 접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점이 처음에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 부임하기 전에 5, 6게임을 보시면서, 그리고 훈련을 통해 선수들을 더 자세히 파악하신 뒤 어떤 부분에 대한 보완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전체적인 팀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당시 수비에 허기태, 이임생, 전방에는 황보관, 조정현 같은 선수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너무 머리 위로만 날아가는 축구를 했었어요. 미드필드에서의 축구는 없고, 수비에 치중하다가 롱패스에 의존한 축구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전반적인 K리그의 흐름이었고, 이 축구를 제일 잘했던 팀은 일화(현 성남)였습니다. 그리고 일화는 어찌됐든 챔피언이 됐습니다. 챔피언 팀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굳이 다른 팀들이 다른 축구를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일화의 축구가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는 거지요. 이런 인식을 바꾸는 것이 가장 시급했습니다. 훈련에서도 가장 핵심은 게임 컨트롤, 즉 경기 운영이었어요. 이 부분을 상당히 강조했는데 대체적으로 베테랑보다는 젊은 선수들이 더 빨리 적응했던 기억이 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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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선수들이나 코칭스태프나 감독님의 훈련방식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더군요. 바로 그런 것이 어려웠던 점이에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이해하고 넘어가야 함에도, 선수들에게 질문이 있냐고 물어보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이야기를 해줬어야 하는데 그런 식의 대화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생기면서 더 힘들었지요. - 한국식 훈련법에 익숙했던 선수들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는데,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문화적인 충격은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당연합니다. 나는 외국인이잖아요. 그러나 한국에 온 이상 서로 이해를 해야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처음에 당혹스러웠던 것은 휴식 없이 너무 많이 몸을 혹사시킨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코칭스태프에서 “감독님, 휴가를 주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하며 말리더군요.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휴식을 주면 선수들의 몸 상태가 엉망이 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훈련을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 휴가를 내보내봤더니 2-3일 쉬고 오면 정말 선수들의 몸 상태가 엉망이 되버리더군요.(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원칙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선수들 자신이 느끼게 되고, 자유를 준만큼 의무가 커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시간이 지나자 차이가 드러나더군요. 베테랑들의 기회가 점점 줄어든 반면 젊은 선수들 중에는 빨리 이해하고 적응하려는 친구들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이런 선수들이 점점 기회를 잡는 상황이 나타난 것이지요. - 지금까지 강압적인 훈련을 받아오던 선수들 입장에서는 자유로운 훈련 분위기로 인해 훈련에 집중하지 못하고 느슨해지는 경우도 발생했는데요. 전 세계 모든 축구선수들이 다 똑같습니다. 몽둥이가 필요한 선수도 있고,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는 선수도 있지요. 다만 프로축구선수라면 프로페셔널리즘이 있어야 합니다.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감독이 평생 끌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에 분명 자기 의지 속에서 점차 변해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지도했습니다. 사실 성인 선수들을 상대로 바로 뭔가를 바꾼다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교육은 어릴 때부터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당시 한국 선수들은 그런 부분에 대한 교육이 되어 있지 않았고, 성인이 된 이후에 갑자기 자유가 주어지니까 어떻게 할지를 모르는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훗날 선수들이 자주 이야기하더군요. 몇 년 전에 내가 이런 것들을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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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한국 프로축구를 접했을 때는 어떤 느낌이셨는지요? 당시 한국에는 8개 팀이 있었는데 사실 기량 면에서는 1등과 8등이 없었어요. 7-8등 하던 팀도 1등을 할 수 있었고, 1등 팀도 하위권으로 처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 경기마다 투쟁은 존재했어요. 경기력에 대한 수준은 높다고 평가할 수 없었지만, 투쟁하는 면에 있어서는 굉장히 강하다고 평가할 만 했습니다. 결국은 그런 특징이 2002 월드컵에서의 성공에 주춧돌이 된 것 같습니다. - 당시의 한국축구에 대해서 팬들은 너무 거친 축구가 아니었나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감독님의 느낌이 궁금합니다. 상황에 대한 비교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잉글랜드 축구를 보고 그 나라 축구팬들이 거칠다고 생각할까요? 내가 봤을 때는 잉글랜드 축구가 한국 축구보다 더 거칩니다. 다만 차이점은 그 곳은 더 거칠지만, 반대로 조금 더 깨끗하게 경기를 합니다. 역설적이지요? 당시의 한국은 뒤에서 가해지는 폭행에 가까운 태클 등 더티한 축구가 가능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지금의 중국 축구도 매우 심하지요. 전 세계적으로 축구 규칙은 똑같이 적용됩니다. 특히 선수를 가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엄격한 처벌이 적용됩니다. 그런데 당시 한국은 그렇지 못했어요. 거칠지만 정당한 투쟁에 대한 것은 인정해줘야 합니다. 다만 선수에게 위해를 가하는 바보 같은 행위와 정당한 투쟁의 차이점을 심판과 감독 모두 다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할 때 한국축구는 절대 거칠지 않아요. 다만 좀 더 깨끗하게 경기를 할 필요는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잉글랜드 축구가 한국 축구보다 더 거칠지만 반대로 깨끗하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이왕 잉글랜드 축구와 비교를 했으니 한 가지 더 말하지요.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될 때 한국 선수들을 보면 제 자리에 서서 볼을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잉글랜드 선수들은 공간으로 치고 들어가 지역을 점유하면서 볼을 달라고 하지요. 이것이 잉글랜드 축구와의 차이점이에요. 같은 상황에서 잉글랜드는 적어도 3-4명의 선수가 공간으로 파고들면서 패스를 달라고 하는 반면 한국은 기껏해야 1명 정도입니다. |
첫댓글 존경합니다
첫번째사진 맨오른쪽 말입니다.................................................................끌린다 (-- ) ( --)
축구 선수 말하는거겠죠? ㅋ
처음으로 4-4-2를 도입하고, 잔디 상한다고 육상트랙을 돌아서 나오던 신사
예~ 당시 제리 윤정환 선수도 부천소속이었습니다. 니포의 애제자 중 한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