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소인국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을 땐 쪼그려 앉아야 한다
책 속 소인국으로 건너가는 배는 오로지 버려진 구두 한 짝
깨진 조각 거울이 그곳의 가장 큰 호수
고양이는 고양이 수염으로 알록달록 포도씨만 한 주석을 달고
비둘기는 비둘기 똥으로 헌사를 남겼다
물뿌리개 하나로 뜨락과 울타리
모두 적실 수 있는 작은 영토
나의 책에 채송화가 피어 있다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2023.05.04. -
크고 화려하고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것들이 미디어에 넘쳐나지만, 세상에는 작고, 낡고,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많습니다. 시는 바로 그 작고 힘없고 덜 화려한 것들 속에 깃든 우주를 보여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존재 앞에 기꺼이 무릎을 굽히고 엎드려 그 작은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버려진 구두로 만든 배에 몸을 맡기고 비둘기 똥 헌사 앞에서도 미소 지을 수 있어야 채송화의 작은 세상 속에 깃든 우주가 수줍은 민낯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