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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마이라 맥피어슨
저자 마이라 맥피어슨Myra MacPherson은 「워싱턴 포스트」정치부 기자 출신의 여성 작가. 「뉴욕 타임스」를 거쳐 「워싱턴 포스트」에서 23년간(1968~1991) 있으면서 대통령 선거 보도를 다섯 차례 담당했고, 정치와 인권·여권 운동, 베트남전 반대 운동 관련 기사를 많이 썼다. 베트남전을 다각도로 조명한 『오랜 시간이 흐른 뒤Long Time Passing: Vietnam and the Haunted Generation』(1985), 유방암으로 죽어가면서도 웃음과 용기를 잃지 않은 여성의 실화를 그린 『그녀는 끝까지 꿋꿋했다She Came to Live Out Loud』(1999), 정치인들의 결혼생활을 파헤친 『권력을 사랑한 사람들The Power Lovers: an Intimate Look at Politics and Marriage』(1976) 등을 썼다. 지금은 여러 신문과 잡지, 인터넷 매체에 시사 및 언론비평 관련 글을 쓰는 한편으로 다섯번째 책을 집필 중이다. 그녀가 쓴 최신 기사는 하버드대학 부설 니먼언론재단의 워치독 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역자 : 이광일
역자 이광일은 전문 번역가. 1962년 서울생.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기획취재 부장을 지냈고, 연세대 독문과 강사로 일했다. 『수잔 바우어의 중세 이야기』 『엥겔스 평전: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 『생각의 역사Ⅱ-20세기 지성사』 『사이비 역사의 탄생』 등 영어와 독일어 책을 다수 번역했다.
서론 이지 스톤: 우리 시대 참언론인의 초상 -11
1부|반골 기자의 탄생
1. 미국에 오다 -41
2. 어린 시절 -55
3. 소년 신문 발행인 -83
4. 폭로 저널리즘과 애국주의의 광풍 -102
5. 반바지를 입은 소년 통신원 -131
2부|격동의 1930년대
6. 대공황과 루스벨트 대통령 당선 -161
7. 뉴딜, 뉴라이프,「뉴욕 포스트」 -183
8. 우익 선동가들과 인민전선 -220
9. 히틀러, 리프먼, 이지, 그리고 유대인 -248
10. 스페인 내전:“ 나의 가슴은 공화파와 함께” -275
11. 독재자의 시대: 스탈린과 히틀러 -292
3부|2차 대전, 그리고 냉전
12. 기로에 선 미국:「더 네이션」시절 -317
13. 위대한 유산:「PM」시절 -338
14. 남편 이지, 아버지 스톤 -361
15. 원폭 투하와 팔레스타인 잠행 -387
16. 충성 서약, 하원 반미활동조사위원회 -415
17. 한국전쟁과 특파원 피살 사건 -442
4부|혼자서 가다
18. 이지를 잡아라 -471
19. 거짓말 그리고 스파이 -505
20. 고독한 게릴라 전사: 광기의 1950년대 -539
21. 환멸과 고백 -569
22. 민권 운동: 미국의 유혈 혁명 -586
23. 케네디, 흐루쇼프, 카스트로 -616
24. 전쟁의 수렁 속으로 -637
25. 베트남전과 인종차별의 한복판에서 -669
5부|시대의 아이콘이 되다
26. 우상파괴자에서 시대의 우상으로 -705
27. 스톤 대 소크라테스 -740
28. 거짓의 안개를 걷어내고 떠나다 -768
감사의 말 -780
주석 -787
참고문헌 -839
옮긴이의 말 -855
찾아보기 -861
20세기 저널리즘 최고의 히트작 「I. F. 스톤 위클리」
4쪽짜리 미니 신문이 미국 현대사를 바꿨다!
신문과 정치와 세계사 그리고 놀라운 1인 주간지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정치권력과 상업권력에 봉사해온 한국 언론을 '불편하게' 만들어줄 책”
- 강인규(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언론학 교수)
공영 방송과 거대 신문사 등 언론 문제로 몸살을 앓는 한국 사회가 참고해야 할 시의성 큰 책이 나왔다. 문학동네가 펴낸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 - 20세기 진보 언론의 영웅 이지 스톤 평전』은 권언유착에 맞서 저널리스트의 참모습을 보여준 I. F. 스톤의 인생을 조명한 평전이다. 어떻게 하면 정치권과 언론계의 유착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미국의 진보 저널리스트 스톤의 생애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정치판에서 기자들은 취재원을 잡기 위해 공정성을 팔아먹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스톤은 정부 측의 감언이설과 협박에 초연했고, 열정적으로 진실을 추구하면서 거침없이 발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업계에서 왕따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1인 독립 주간신문 「I. F. 스톤 위클리」를 통해 다른 기자들이 정부의 나팔수 노릇을 할 때 냉전 정책에 반대했고, 대다수 언론이 침묵할 때 조지프 매카시와 싸웠고, 다른 언론인들이 정부 발표에 속아 넘어갈 때 베트남전 참전의 빌미가 된 통킹 만 사건은 날조라고 비판했다. 저명한 기자 출신 작가 마이라 맥피어슨이 15년간의 자료 조사와 연구, 각종 인터뷰를 토대로 쓴 이 평전은 전설적인 언론인 스톤의 파란만장한 삶과 더불어 그가 언론인으로 활동한 20세기 격동의 현대사를 비판적으로 정리한다. 또한 스톤이 저널리즘에 미친 깊은 영향을 찬찬히 짚으면서 언론이 우리 사회와 문화에서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한다. 저자가 입수한 1,600쪽에 달하는 FBI 사찰 파일과 옛 소련 기밀문서 같은 자료도 흥미롭다.
【이지 스톤은 누구인가】
이사도어 파인슈타인 스톤Isador Feinstein Stone(1907~1989년)
I. F. 스톤 또는 ‘이지Izzy’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그는, 20세기 최고의 독립 언론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1922년 14세에 동네 신문 「진보」를 창간해 활동했고 고등학교 때는 지역신문 통신원으로 일했다. 명문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하다 신문 잉크 냄새에 이끌려 그만두고 기자의 길을 걷는다. 1933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 일간지 논설위원이 되고, 45세까지 「더 네이션」 「PM」 등을 거치며 기자와 논설위원으로 저널리즘의 양대 축인 보도와 논평에서 맹렬히 활약했다. 뉴욕과 워싱턴을 중심으로 한 주류 언론에서 쌓은 탄탄한 경험은 1953년 1인 독립 신문 「I. F. 스톤 위클리」를 창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취재, 집필, 편집, 발행, 배포를 혼자 도맡고 광고를 일절 싣지 않고 구독료만으로 버티며 매주 4쪽짜리 신문을 펴냈다. 공정성과 독립성이 이 신문의 자랑이었고, 1971년 폐간될 때까지 20년 가까이 미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보도하고 어디서도 접할 수 없는 진실을 전하는 신문으로 명성을 얻는다. 말년에는 젊은 시절 중단했던 철학에 열정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관심은 여전히 언론에 있었다. 1989년 81세로 타계할 때까지 그는 시사 칼럼을 쓰고 방송 논평을 하는 등 기자로서의 열정을 잃지 않았다.
1920년대 거대기업들의 횡포 고발, 1930년대 독일과 결탁한 대기업의 스캔들 폭로와 히틀러의 나치즘에 대한 경고, 1940~50년대에 미국의 냉전 정책과 빨갱이 마녀사냥에 대한 비판, 1960~70년대에 베트남전 참전 반대 운동과 인종차별 철폐 흑인 민권 운동 등 수많은 경력을 쌓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통킹 만 사건 특종보도였다. 1964년 8월 미국 정부는 베트남 통킹 만에서 미 군함이 북베트남의 어뢰정 공격에 침몰했다고 발표하면서 베트남전 확전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당시 모든 언론이 정부의 앵무새가 됐을 때 그는 조목조목 의문점을 제기하고 정부 발표가 날조라고 주장했다. 7년 뒤인 1971년 국방부 기밀문서가 언론에 폭로됨으로써 이 사건은 거짓이었음이 공식 확인된다. 동서냉전 시대 징고이즘의 광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어지간한 용기가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그의 뒤에는 평생 FBI가 따라다녔다. 오늘날 제도권 언론의 행태, 특히 정부가 분칠해서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쓰는 행태에 절망하는 이들은 그를 언론의 전범을 보여준 인물로 기억한다. 이제 ‘이지’라는 애칭은 참다운 언론인의 상징으로 통한다. 1989년 스톤이 사망한 후 ‘I. F. 스톤’이라는 명칭이 붙은 석좌교수 자리, 연구기금, 장학금이 점점 많이 생겨났다. 더불어 그가 발행한 미니 신문 「스톤 위클리」는 20세기 저널리즘 최고의 히트작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추천사】
편한 자를 불편하게 만들고, 불편한 자를 편안하게 만드는 일, 이것이 언론의 사명이다. 이지 스톤은 이 역할을 온전히 해낸 드문 언론인이었다. 현재 한국사회가 겪는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은 언론에 있다. 한국 대다수의 언론이 편한 자를 더 편하게 만듦으로써 스스로 편안을 추구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정치권력과 상업권력에 봉사해온 한국 언론을 ‘불편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 강인규(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언론학 교수)
언론계는 물론 학계에 신화적 존재가 있다. 20세기 최고의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월터 리프먼이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은 리프먼의 그 빛나는 별빛을 홍등가 불빛으로 만든 I. F. 스톤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책을 덮는 순간 누구나 기자로서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 손석춘(언론학자,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스톤은 거대 신문사가 진실을 탐사한 자신의 기사를 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I. F. 스톤 위클리」라는 1인 신문을 창간했다. 누구에게도 간섭 받지 않는 독립 언론이었다. 이 신문은 다른 신문에서 다루지 않는 정보를 공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학생들 앞에서 기자란 진실을 보도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에게 얘기할 온갖 사실보다, 여러분이 정말로 좋은 언론인이 되고자 한다면 딱 세 마디만 기억하고 있어도 너끈하리라 생각합니다.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 미국 정부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모든 정부가 다 그렇다는 것이지요.”
무정부주의자나 할 수 있는 발언, 정부를 무시하라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 말에는 우리가 깨닫고 있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권력자들이란 권력을 이어가는 일에 혈안이 돼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들과 같은 평범한 시민은 공적 권력을 쥔 그들의 말을 의심하고 회의할 권리가 있다는 것 말이다.
- 하워드 진(역사학자, 『미국 민중사』의 저자)
스톤은 언론계의 걸출한 영웅이었다. 사람들은 ‘이지 스톤 같은 인물이 좀더 많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실제 사정은 전혀 달랐다. 과격한 주간신문 「I. F. 스톤 위클리」를 발행할 때 그는 완전히 따돌림 받고 ‘공산주의자’라고 기피되는 인물이었다. 1971년 신문을 폐간하자 그제야 스톤에게 조지 포크 상이 주어졌고 그의 일생은 영화화되었고 어딜 가나 위대한 기자로 칭송받았다.
- 노엄 촘스키(언어학자, 철학자)
두툼한 분량이지만, 펼쳐드는 순간 덮을 수가 없는 책이다. 읽어나갈수록 수많은 생각이 끊임없이 솟구친다. 읽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 고어 비달(미국 역사소설 작가, 『링컨』의 저자)
저널리즘의 미래와 본질에 관한 논쟁에 크게 기여할 책이다. 언론인은 물론이고 대중이 그런 논쟁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 빌 코바치(미주리대학 저널리즘 스쿨 교수)
현대의 고전이자 젊은 기자들의 필독서!
- 스터즈 터클(미국 역사학자, 작가)
이지 스톤은 평생 기자 생활을 하면서 정부의 사기와 언론의 공모에 도전했다. 이 평전은 그의 유산이 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지를 잘 보여준다.
- 「살롱」
생생하고 참신하다. 저널리즘 수업의 필독서로 삼아야 할 만큼 인상적이다. 맥피어슨은 사안을 구체적으로 넓고 깊게 파고듦으로써 주제를 흥미진진하게 부각시켰다.
- 「보스턴 글로브」
이지 스톤의 삶을 꼼꼼한 연구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 책은 하나의 평전을 넘어 언론과 정부의 관계에 관한 연구서다.
- 「유에스에이 투데이」
주제에 값하는 역작이다. 세심하고 치밀한 취재와 날카로운 분석, 사려 깊고 성실한 서술이 돋보인다.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는 이지 스톤의 금언은 모든 기자들이 책상머리에 붙여놓고 음미해야 할 명언이다.
- 「뉴욕 리뷰 오브 북스」
이 책은 이지 스톤 전기로 끝나지 않는다. 20세기에 정부가 어떤 식으로 여론을 조작했는지를 상세히 파헤친 역작이다.
- 「컬럼비아 저널리즘 리뷰」
언론이 지금처럼 심심풀이 땅콩이 되기 전의 모습이 어땠는지 알고 싶다면, 언론인이 요즘처럼 간신이 되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보라.
- 마틴 카플란(USC 저널리즘 스쿨 교수)
마이라 맥피어슨은 저널리즘의 아이돌 이지 스톤의 일생을 놀라운 필치로 완벽하게 그려냈다.
- 헬런 토머스(전설적인 백악관 출입기자, 작가)
신문과 정치와 세계사, 그리고 놀라운 1인 주간지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한 인간의 삶 속에 녹아 있다. 제대로 된 기자라면 이 책을 읽고 교훈을 되새겨야 할 때다.
- 몰리 아이빈스(미국 칼럼니스트, 정치평론가)
【출판사 리뷰】
“워싱턴에서는 정조대를 차야 언론으로서의 처녀성을 지킬 수 있다. 국무장관이 당신을 오찬에 초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물어보는 수준이 되면 당신은 이미 끝장난 거다.” 이지 스톤이 미국 정부의 미디어 조작을 비판하면서 기고했던 칼럼에서 한 말이다. 워싱턴에서만 그럴까. 제 기능을 상실하고 권력의 편에 줄서기를 하고 있는 2012년 한국, 정치권력의 등을 토닥여주기에 바쁜 언론, 상업권력을 가진 자의 편에 서서 진실을 외면하는 언론, 제 몸집 불리기에 여념이 없는 언론, 이런 한국의 언론을 두고 하는 말 같지 않은가. 그간 독립성을 상실한 한국 언론의 문제를 지적할 때마다 간간이 호명되곤 하던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언론인 I. F. 스톤의 삶을 다룬 묵직한 평전이 출간되었다.
미국의 진보 언론인 이지 스톤에게서 배우자
「워싱턴 포스트」 정치부 기자 출신의 작가 마이라 맥피어슨이 2006년 발표한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 - 20세기 진보 언론의 영웅 이지 스톤』은 사회적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으로 꼽히는 한국의 신문과 방송에 쓰디쓴 약이 될 책이다. 오늘날 이지 스톤의 명성은 1인 신문 「I. F. 스톤 위클리」 활동에 힘입은 것이다. 이 신문 창간 당시, 이지 스톤은 시쳇말로 잘나가는 언론인이었다. 「뉴욕 포스트」「더 네이션」「PM」 등의 신문사를 거치며 보도 기사와 사설 논평에서 명망을 쌓고 있던 사십대의 중견 언론인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1인 신문을 창간한 것이다. 사업의 성패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뿐 아니라, 1953년 당시는 조지프 매카시의 빨갱이 마녀사냥이 기승을 부리던 이념의 빙하기였다. 이지 스톤처럼 진보적 성향을 지닌 언론인이 정부를 맘껏 까대는 신문을 만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을 내놓는 일이었다. 실제로 연방수사국 FBI는 평생 이지의 뒤를 캤다. 그러나 이렇게 출범한 이 신문은, 1971년 그가 건강상 이유로 폐간할 때까지 미국 지식인들의 큰 사랑을 받으며 2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그 좋은 직장을 때려치우고 어째서 위험천만하고 장래도 불투명한 신문을 만들었는가? 그의 대답은 이랬다. “억압 받는 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려고, 직접 본 그대로의 진실을 쓰려고, 무능력에 따른 한계를 빼놓고는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으려고, 내 욕망 이외의 그 어떤 주인도 따르지 않을 자유를 누리려고, 진정한 언론인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나름대로의 이상을 실천해보려고,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고…. 이것 말고 뭘 더 바랐겠는가?” 이지는 필라델피아 해든필드란 작은 동네에서 「진보」란 신문을 펴내던 어린 시절처럼, 자율적이면서 독립적이고 능동적으로 자기주장을 맘껏 펼칠 신문다운 신문을 만들려 했다. 그렇게 창간된 「I. F. 스톤 위클리」는 경쾌하고 날렵하게 시대의 핵심을 전했다. 사안의 핵심으로 진입할 적에는 진지하고 장기적인 관점을 유지했고, 또 그렇게 분석한 사안에 관해서는 꿋꿋이 신념과 소신을 지켰다. 그러나 신문 형식만큼은 고전적이었다. 더러 잘못된 가설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그때도 그의 관점은 미국인들에게 사안을 다각도로 보고 입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숱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민주주의에 없어서는 안 될 말썽꾸러기
“이 책은 스톤이라는 인물의 전기인 동시에 언론에 관한 역사적 분석이며, 20세기 미국에 대해 스톤이 그때그때 했던 비판들의 모음집이기도 하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I. F. 스톤의 생애와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 지금도 유효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러면서 특히 중요한 여러 대목에서 영원한 아웃사이더였던 I. F. 스톤과 인사이더였던 월터 리프먼을 비교 대조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야말로 저널리즘의 양대 유형을 대표하는 전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리프먼이 권력자들과 친분을 맺고 기자로서 명성을 얻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언론인이었다면, 이지는 권력과 명성의 단맛을 추구하기보다 거친 광야에 내던져진 외로운 예언자같이 진실을 고하고 약자의 편에 섰던 재야 언론인이라 할 수 있다. 역사는 훗날 이지의 손을 들어주었다.
저자가 강조하는 또 한 가지는 반대의견에 대한 억압에 관한 것이다. 이지 스톤은 정부 노선에 반대하는 것과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 것을 결코 혼동하지 않았다. 주류 언론과 정부는 이를 혼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지는 반대의 목소리야말로 민주주의 이념을 지켜내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았다. 반대의 목소리를 가차 없이 폄하하고 묵살하는 우리의 현실에 성찰의 매개가 될 만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BBK 주가 조작, 4대강 사업 강행, 천안함 침몰, 내곡동 사저 불법 매입, 민간인 사찰 파문 등 의혹들이 줄을 잇지만, 속 시원한 해명은커녕 다른 목소리를 내기가 어렵다. 견제와 비판을 받지 않는 권력에서는 부패와 오만의 독버섯이 자라기 마련이다. 우리의 현실이 그것을 보여준다.
맥피어슨의 이 전기는 말 그대로 ‘정부의 거짓’을 되새겨본다는 의미에서 시의성도 있다. 과거 부시 정권이 이라크 침공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대량살상무기 개발 주장은 허위로 드러났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미국 정부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일선 기자건 편집 간부건 누구 하나 의혹의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는 데 있다. 걸프전쟁 이후 이라크가 거의 무장해제 당하다시피 해서 자기 방어용 무기밖에 없었다는 정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언론이 아무 의심 없이 부시 행정부의 거짓말을 앵무새처럼 받아썼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톤은 이들 저널리스트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사람이었다. 이 전기에서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묘사한 것처럼 스톤은 정부의 거짓과 기만을 폭로했다. 또 협박으로 비판세력에 재갈을 물리려는 정부의 시도를 공격하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래서 스톤의 저널 활동이 중심 내용이 된 이 전기는 한 인물이 걸어간 발자취를 좇은 기록으로 끝나지 않고, 20세기 중 상당 기간에 걸친 정부의 여론조작 기도를 세밀하게 파헤친 기록이 된다. 그동안 주류 언론은 정부의 이 같은 여론조작 기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거나 대응할 생각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스톤 같은 말썽꾸러기가 민주주의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블로거 세대의 선구자, ‘석기시대의 블로거’ 이지 스톤
1953년 이지가 「I. F. 스톤 위클리」를 창간했을 당시 구독자는 고작 5,000여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폐간을 앞두고 있던 말년에 구독자 수는 7만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지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다.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신문이 성공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구독자 수를 중시했다. 이지는 「스톤 위클리」를 순전히 구독료로만 운영했다. 외부의 압력을 받지 않고 소신 있는 발언을 하려고 일절 광고를 게재하지 않았다. 이 원칙은 단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곤 철저히 지켜졌다. 그 예외란 의회 출입 프레스 카드(기자증)를 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한 양복점 광고를 게재하면서 광고비 대신 공짜 양복 한 벌을 얻어 입었다. 하지만 의회 직원은 광고 수입이 어느 정도는 돼야 한다며 기자증 발급을 거부했고 ‘특별 방청인 카드’를 주었다. 그는 그것으로 의회에 출입할 수 있었다. 이윤 창출에 눈이 멀어 수익 사업에 골몰하는 우리 언론이 눈여겨봐야 할 일화이다. 이지는 집에서 작업했다. 취재해온 기사를 쓰고 편집했다. 인쇄소에서 신문이 나오면 그것을 싣고 가 2종 우편으로 구독자들에게 손수 부쳤다. 아내 에스터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지만,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거의 모든 걸 혼자 해결해 시대의 진실과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 인터넷 블로거들이 구현하고 있는 1인 저널리즘을, 그는 오프라인의 세상에 아날로그 방식으로 실현했다. 그의 행동 방식은 당시 관행을 앞선 능동성과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것이었고, 그것은 오늘날 누구나 자신의 견해를 전하고 스스로 언론의 기능을 할 수 있는 다변화 매체 환경에서 1인 저널의 의미와 성격을 성찰하는 재료가 될 수 있다.
이지 스톤의 삶, 래디컬이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하다
이지의 아버지는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군인이었지만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탈영한 뒤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었고, 어머니도 우크라이나 흑해 항구도시인 오데사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이었다. 이지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그들의 부모가 러시아에서 겪었던 유대인 박해, 인종주의적 탄압이 얼마나 끔찍하고 참혹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지가 평생 약자의 편에 섰던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치 않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유대인 대학살을 비판하는 기사로써 파시즘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먼저 경고(그는 파인슈타인이란 유대인식 이름을 바이라인으로 붙일 경우 파시즘에 대한 자신의 비판이 곡해될 것을 염려해 이름을 바꾸었다)했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억압했을 적에는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래서 동포들에게 배신자로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인종차별에 맞서 흑인들을 위한 민권 운동에도 큰 힘을 실어주었다. 그는 평생 미국의 백인 중심주의와 싸웠다. 백인 전용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 흑인 친구와 함께 들어갔다가 같이 쫓겨나기도 했다. 부당함과 부정의에 맞서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것, 이것이 그의 급진성이었다. 그가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을 보여 한때 당원이 되기도 했지만 자율성과 독립성을 침해받는다는 생각에서 탈퇴한다.
20세기 초만 해도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불법이 아니었다. 예민한 후각과 빠른 손을 지녔던 이지가 스탈린 비판에서 한발 늦었던 것은 사회주의적 이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훗날 이지는 스탈린이 인류의 꿈을 망가뜨린 장본인이라며 날선 비판을 가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그는 매카시와 J. 에드거 후버가 낙인찍은 제거 대상이자 위험인물이었다. 과거 한국의 독재정권을 생각하면 냉전의 엄혹한 분위기에서 소신을, 그것도 래디컬한 자세로 소신을 지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 것이다. 이지의 소신은 그 시대의 진정한 흐름이 무엇인지 간파하는 데서 나왔다. 경쾌한 촌철살인의 입담이나 유머로 사태의 심각성을 까발리는 것도 철저한 사태 파악의 소산이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의 기사를 흥미진진 읽어나가면서 시대의 전모를 자연스레 파악할 수 있었다. FBI에게도 「I. F. 스톤 위클리」는 빼놓을 수 없는 자료였다. 구독자의 이름과 주소를 밝혀야 하는 입장에서 연방수사국은 꼼수를 써가며 신문 구독에 열을 올렸다. 이 평전에서 말하는 이지의 급진성은 래디컬이란 말의 본래 뜻을 그대로 보여준다. 진보성은 문제의 근본을 천착하는 데서 나온다. 이지는 시류에 편승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지닌 급진성은 근본과 원칙을 꼿꼿이 지키는 것이었다.
진정한 시대의 흐름을 깨닫는 혜안
이지 스톤은 자신의 1인 신문에 탁월한 심층 탐사보도물을 많이 실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가장 컸던 것은 논평과 칼럼이었다. 미국의 풍자만화가 데이비드 레빈스가 그린 유명한 스톤의 캐리커처를 보면 콜라병같이 두툼한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이지가 삽으로 미국 국회의사당의 돔을 열어젖히고 그 안에 든 뱀과 돈다발, 오물을 걷어내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러나 정작 스톤은 이 캐리커처에 묘사된 내용과 달리, 자유로운 사회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저널리스트가 진짜 해야 할 일은 이런 부정만 캐내는 게 아니라, 국가와 국민, 시대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상황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거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 일을 하기 위해 불철주야 뛰었다. 1인 신문을 내는 동안 고위 인사들을 취재원으로 거느리진 못했지만 누구보다 부지런히 정부의 공식 문건들을 읽었다. 이지는 후배 기자들에게 취재원 확보에만 열을 올리지 말고 문건을 읽으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사실을 조작해 비공개 기자 브리핑에서 그럴싸한 거짓말을 할 순 있어도, 공식 문건까지 새빨간 거짓말로 도배하기란 대단히 어렵다고 귀띔해줬다. 정부의 공식 문서를 확보할 수 없을 경우에는 주류 신문들을 꼼꼼히 읽으라고 했다. 1면 톱기사에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한 저널은 이지 스톤을 평가하면서, 만약 스톤의 동상을 세운다면 공문서 인쇄를 전담하는 기관인 미국 정부 인쇄국 앞에 세우는 것이 제격일 것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인쇄· 배포된 수많은 공문서와 보고서에서 상당수의 특종을 뽑아냈던 스톤은 아마 이 동상 속에서도 확대경을 든 채, 쏟아져 나오는 갖가지 인쇄물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라고.
작은 키에, 알이 두툼한 돋보기안경을 쓰고 귀에는 보청기를 꽂고 다닌 이지. 그는 시력도 형편없었고 청력까지 나빴다. 발 빠르게 정보를 캐내야 하는 기자로서는 큰 핸디캡이었다. 어릴 적에도 이지는 열등감이 많았다. 엄청난 독서량으로 또래보다 월등한 지력을 지녔음에도 고등학교 졸업 석차는 뒤에서 세 번째, 거의 꼴등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학교 공부보다 숲속에서 희랍, 라틴 고전문학을 읽는 것이 더 좋고 유익하다고 믿었다. 그에게 따라붙는 고집불통, 말썽쟁이, 골칫거리, 반골 같은 수식어는 그가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했음을 뜻하는 말이다. 1인 신문을 그만둔 말년에도 그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고, 일흔이 다 되어 희랍어를 공부하는 열정을 잃지 않았다. 베스트셀러가 된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그런 열정의 소산이었다. 저자는 스톤이야말로 미국 민주주의와 자유로운 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보물 같은 존재라고 주장한다. 미국 역사 속에서 어지간한 전공을 쌓은 장군들에 못지않다는 것이다.
2008년부터 하버드 대학에서 이지를 기리는 메달을 수여한다. 한 해 동안 미국에서 언론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낸 독립 언론인에게 주는 상이다. 그 메달 앞면에는 “저널리스트 - 퍼블리셔 - 스칼라”라는 단어가 빙 둘러 각인돼 있다. 오늘날, 이지는 불멸의 신문기자, 독특한 생산양식의 신문발행인, 그리고 열정을 지닌 독학자로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다. 맥피어슨은 이 평전에서 민주주의의 이상과 가치를 참된 언론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인물, 이지가 지닌 개성적 스타일과 인간적 매력을 생생히 재현함으로써 신화가 아닌 실재의 이지를 손에 잡힐 듯 되살려내고 있다.
<책속으로 추가>
초기에 딱 한 번 남성복 광고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스톤은 광고를 싣지 않았다. 따라서 ‘외부의 압력을 받지 않으니 벤저민 프랭클린(1729년 「펜실베이니아 가제트」를 창간하면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광고를 다양화한 것으로 유명하다)보다 낫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사실 급진파 신문에서 광고를 따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딱 한 번 광고를 낸 것도 사실은 의회 출입용 프레스 카드(기자증)를 발급받기 위해서였다. “광고가 있어야 카드 발급이 된다더군요.” 맨해튼의 한 양복점 주인이 “해리스 트위드, 플란넬, 개버딘 같은 기성복” 한 벌을 59.97달러에 특가 판매한다는 광고를 냈다. 스톤은 광고비 대신 공짜로 옷 한 벌을 받았다. 그러나 의회 직원은 광고 수입이 어느 수준 이상 돼야 프레스 카드를 발급해줄 수 있다고 했다. 스톤은 패트너와의 대담에서 당시 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럴 정도는 못 됐어요. 그래서 프레스 카드는 발급받지 못 했지요. 대신 ‘특별 방청인” 카드를 내주더군요. 덕분에 아무 때나 출입할 수 있었지요. 대통령이 왔을 때만 빼고. 내가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본문 545쪽
스톤 만년에 사람들은 그를 ‘랩톱 출판의 선구자’라고 불렀다. 좋은 뜻으로 한 얘기지만 스톤은 언짢아했다. 컴퓨터로 다 되는 게 아니라 “인쇄기가 따로 있었던” 번거롭기 그지없는 시대였다는 것이다. 컴퓨터에 걸면 나오는 프린터가 아니라 진짜 쇳덩어리 인쇄기였다. 에스터와 이지에 대해, 부부가 어렵게 꾸려가는 신문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은 FBI밖에는 없었다. 부부는 인쇄공장까지 한참을 걸어가서 몇 시간이고 작업을 했다. 요원들은 내내 그 뒤를 따랐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요원들은 까맣게 몰랐지만 저널리즘의 역사가 새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스톤은 라이노타이프 식자기 식자공에게 악을 쓰면서 이런저런 지시를 했다. 주변의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요란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인쇄돼 나온 신문 다발을 차에다 잔뜩 싣고 배본에 나섰다. -본문 565쪽
이지 스톤의 베트남전 보도
스톤이 이미 1946년부터 미국의 인도차이나 정책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관찰과 연구를 토대로 1963년에는 베트남전쟁이 터진 것은 “오랜 기간 좋은 기회를 다 놓쳐버렸기 때문”이라고 썼다. 1961년에 이미 스톤은 “게릴라 소탕전이 사회 부패에 대한 처방이 될 수는 없다”는 기사에서 그동안 미국 외교 정책이 저지른 어리석은 행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이제 우리는 군사적인 또는 준군사적인 방법으로 잔인하게 도려내는 것이 복잡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처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CIA는 1953년 인기 있는 이란의 개혁파 총리 모사데그를 제거했다. 그러나 그를 쫓아내고 들어선 부패한 쿠데타 정권은 지금 망해가고 있다. 과테말라에서도 54년 CIA는 아르벤스 대통령을 제거했지만 이 나라는 다시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 우리가 라오스와 남베트남에 쏟아 부은 수억 달러를 공적 부문 개선에 투입했다면… 두 나라는 지금쯤 안정 속에 발전하는 모델 국가가 됐을 것이다.” -본문 641쪽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됐다. 이듬해 여름, 존슨 대통령은 의회로부터 북베트남 응징을 위한 백지수표를 받았다. 북베트남 어뢰정이 통킹 만에서 미국 군함들에게 선제공격을 한 것에 대한 보복 차원의 결의안이 통과된 것이다. 통킹 만 사건은 후일 미국의 날조임이 밝혀진다. ‘통킹 만 결의안’이 통과되면서 미국은 베트남에서 전면전에 돌입한다. 리프먼은 이른바 ‘보복 폭격’을 환영했다. 그것이야말로 “미국의 의지를 보여주는 행위”라고 했다. 그러나 통킹 만 사건을 빌미로 한 미국의 폭격은 돌발 사태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존슨은 그동안 남베트남을 위해 미군을 파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공언해왔다. 그러나 뒤로는 북베트남 폭격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전쟁을(존슨은 ‘전쟁’이라는 표현은 애써 피했다) 확대할 수 있는 빌미가 생기자 지상군을 베트남에 파견했다. 베트남전에서 복무한 300만 미군 가운데 5만 8,000명이 전사했고, 34만 명이 부상했다. 귀국한 참전 군인들은 미국이 유일하게 패한 전쟁의 희생양으로 조롱거리가 되었다. -본문 644쪽
전쟁에 대해 매파적 입장이거나 정부 쪽 주장을 그대로 믿는 언론인들과 달리, 스톤이 1964년 통킹 만 사건이 발생했을 때 곧바로 미심쩍은 측면들을 정확히 짚어낸 것은 놀랍다. 그는 일부 언론이 최근 6개월 동안 미국이 특공작전에서 “공개적인 북베트남 공격”으로 입장을 선회했다고 보도한 것에 주목했다. 그러나 “통킹 만 사건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상황에 대해 “의식하는 미국인은 거의 없었다.”
스톤은 사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문제 하나를 제기했다. “대중의 의식을 조작하는 과정은 신문기자들에게 오프더레코드를 전제로 해주는 브리핑으로부터 시작된다. 북베트남의 보잘것없는 해군이 세계 최강의 미국 7함대를 왜 감히 공격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온갖 말도 안 되는 이론이 동원됐다.” 다만 미군이 “공격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론만은 제외됐다. 통킹 만 사건이 일어난 지 몇 주 만에 스톤은 정부 쪽의 조작 사실을 폭로했다. 이런 내용은 통킹 만 사건 발생 7년 후인 1971년에 가서야 미국 국방부 기밀문서Pentagon Papers가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스톤은 통킹 만 사건 관련 정부 쪽 설명에서 혼란과 사실관계의 불일치, 얼버무림 같은 이상한 부분들에 주목하고, 사건 전체가 “마치 불이 다 꺼진 술집에서 언쟁이 벌어진 것 같은 양상”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맥나마라 장관이 최근의 통킹 만 사건 관련 기자회견을 갑자기 취소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래야 쓸 데 없는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스톤은 독자들에게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라고 당부했다. “소련이나 중국 구축함이 플로리다 해변을 어슬렁거리는 사이, 그들이 카스트로에게 공급해준 배들이 연안에서 공격 행위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까? 적군 선장들한테 플로리다 포도 선물 바구니를 보내줄까?” -본문 645쪽
스톤은 건강이 나빠져 베트남전이 끝나기 전에 「I. F. 스톤 위클리」를 문 닫았지만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는 계속 열심히 글을 썼다. 키신저가 외교 문제에서 보폭을 넓혀나가자 스톤은 그가 제시한 공산권과의 평화 공존 제안에 대해 “사기꾼의 놀라운 제안”이라고 평했다. 여기서 스톤의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분석”이 특출했다고 허시 기자는 말했다. “절대다수의 미디어는 논조가 비슷했다. … 실제 문제보다는 비밀 외교에서 키신저가 수행하는 독특한 역할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베트남전은 언론과 정부가 힘으로 오만을 부릴 때 어떤 비극적인 결과를 맞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바로 이 점을 스톤은 미국인들에게 분명히 알리려고 애를 썼다. -본문 668쪽
시대의 아이콘이 된 이지 스톤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좋아하고 글로 먹고 사는 스톤이 명성을 얻은 것은 독서 시간을 잡아먹는 두 매체, 즉 텔레비전과 영화를 통해서였다. 하기야 스톤은 스포트라이트 받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다. 무성영화 시절부터 영화광이었던 그는 1974년 자신이 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칸 영화제의 새 스타 I. F. 스톤”. 당시 「뉴욕 타임스」 1면 톱기사 제목이다. 기사에서 영화평론가 빈센트 캔비는 이렇게 썼다. “67세의 미국 저널리스트가 페데리코 펠리니(이탈리아 감독), 자크 타티(프랑스 감독 겸 배우), 잭 니콜슨, 토니 커티스(미국 배우), 루이스 부뉴엘(스페인 감독) 같은 영화계 거물들 못지않게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제의 성격이 달라진 게 분명하다.” 에스터와 이지는 제리 브룩 주니어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필름
1978년 스톤은 뻔뻔스럽게도 자기 자신을 인터뷰했다. 인터뷰는 「뉴욕 타임스」에 ‘이지가 말하는 이지Izzy on Izzy’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로 나갔다. 스톤이 스스로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를 보면 그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스톤이 이 기사에서 1950년대 초에 반공주의를 비판한 자신을 혹평했던 평론가들을 의식했는지 말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공산주의의 해악을 대단히 강조했다. “공산주의는 영원히 정신의 거대한 감옥으로 굳어질 수 있다. 그런 위험성을 세계는 지금까지 보아왔다. 그것은 중세 유럽의 암흑기라고 하는 시대보다 훨씬 더 억압적이다.” 그러면서 스톤은 공산주의도 “종합, 말하자면 마르크스와 제퍼슨의 융합 같은 것을 성취한다면 위기에서 구제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막무가내로 비난만 하는 입장은 아닌 셈이다. 10년 후 80세가 된 스톤은 서글픈 과거시제로 “그런 융합이 일어날 수 있기를 ‘늘 소망했다’”고 말했다.
스톤은 만년 들어 대단한 유명 인사가 됐고, 그런 인기를 한껏 즐겼다. 이 대학 저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수여했다. 1970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는 본교 중퇴자인 스톤에게 명예 학사학위를 수여했다. 수여식 때 스톤은 유서 깊은 교내 서클 필로메이시언 소사이어티Philomathean Society의 검은색 회원복을 걸치고 나왔는데 이 서클은 1927년 스톤이 재학할 당시 그의 가입 신청을 거부한 바 있다. 졸업장을 받은 스톤은 환호성을 질렀다. “나 같은 지진아로서는 정말 멋진 날입니다. 학사 학위를 따는 데 저처럼 48년이나 걸린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1978년 ‘이지가 말하는 이지’라는 기사에서 스톤은 놀랍게도 대학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데 대한 열등감을 토로했다. “한동안 대학 캠퍼스 근처를 지날 때마다 토머스 하디의 『무명無名의 주드』의 주인공 주드처럼 기분이 엉망이었다.” 그러다가 명예학위가 쌓이면서 “무식한 촌놈이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본문 716쪽
말년과 사후의 이지 스톤
말년에 스톤은 지나온 날을 돌이켜보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유대인 난민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을 때 나는 영웅이었어요. 그런데 아랍 난민들을 위해 발언했을 때는 정결한 유대인이 아닌 자로 취급하더군요.” 그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좋은 인간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종족과 말썽을 빚게 되는 것이 인류사의 기본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석에서는 유대인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이야말로 “평생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본문 759쪽
「더 네이션」은 스톤이 사망한 뒤 바로 대학생 언론에 수여하는 ‘I. F. 스톤 상’을 만들었다. 인권에 대한 헌신, 주류 미디어가 무시하는 부정과 부패나 파괴적인 사실의 폭로 같은 스톤의 유산을 청년들이 계승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스톤 사후 다른 기관들도 그를 기리는 일을 많이 했다. 스톤 사후 12년 뒤에 UC 버클리(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 저널리즘 대학원은 ‘I. F. 스톤 기금’을 만들어 9·11 테러 이후 학내에서 운영되는 포럼을 지원했다. 이 기금은 컴퓨터 분야 기업가인 스티브 실버스틴이 기부한 것으로 인권 보도, 표현의 자유, 탐사 전문 보도 부문을 중심으로 연구비, 장학금, 인턴십 등을 지원한다. -본문 777쪽
외모에 대한 이지 스톤의 자평
불룩한 뺨에 양쪽 볼에 보조개가 깊이 팼고, 턱은 닭 볏처럼 우습게 늘어졌고, 천진난만한 미소에 툭 튀어나온 두 눈에서는 안광이 빛난다.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안경 너머에서 이쪽을 빤히 응시하는 눈길이다. 작가들은 그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묘사하느라 애를 썼다. “펭귄 몸에 부엉이 머리를 한 땅딸막한 남자” 운운하는 식이었다. 문학적 묘사가 TV 세대에게는 안 먹힌다는 것을 눈치 챈 일부 작가들은 영화 속 등장인물 요다Yoda(SF영화 「스타워즈」시리즈에 나오는 주인공의 스승)나 이티E.T.(영화 「이티」의 주인공 외계인)에 비유했다. 그러나 정작 스톤의 특징을 촌철살인으로 잡아낸 사람은 본인이었다. 그는 녹화된 TV 인터뷰에서 땅딸막한 체구에 두꺼운 안경 너머로 굵은 두 눈꺼풀이 껌뻑껌뻑하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유대계 황소개구리 같구먼!” -본문 55-56쪽
FBI의 표적이 된 이지 스톤
“1953년 11월 6일 워싱턴 DC. 표적 거주지 인근에서 오후 7시 50분 감시 시작.” 수천 페이지 분량의 스톤 사찰 파일 가운데 한 쪽은 이렇게 시작된다. (중략) 수천 건의 다른 문건과 마찬가지로 이 보고서도 FBI가 미국 시민을 연좌제까지 적용해 밤낮으로 따라다니며 뒷조사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거의 40년 동안 FBI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스톤을 추적했다. 심지어 그가 내버린 쓰레기까지 뒤졌다. “쓰레기 줍기”라는 제목이 붙은 사찰 보고서를 보면 후버가 시민권을 얼마나 침해했는지 그야말로 역겹다. 쓰레기를 뒤진 이유는 “우리 사무실 파일에는 자료가 없는 자들의 신원을 날짜까지 명시된 표적의 쓰레기에서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주운 쓰레기 쪼가리에는 “발신인이나 각종 이름”이 적혀 있었다. -본문 472쪽
FBI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건만 정보공개법에 따라 공개된 스톤 파일에는 범죄라고 할 만한 부분은 없다. 스톤 파일을 정리되기 이전에 열람한 FBI의 한 관리도 이렇게 말했다. “후버는 스톤을 보기보다 문제가 심각한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만한 내용은 전혀 없었어요. 스톤 파일에서 깜짝 놀랄 만한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 후버는 스톤을 엄청나게 미워했지요.” 이 관리는 후버가 스톤을 증오한 이유를 이렇게 해석했다. “후버가 그를 싫어한 이유는 상상력이 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후버는 고리타분한 스타일이어서 자유분방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을 아주 못마땅해 했어요. 후버가 볼 때 스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인물이었어요. 그만큼 다루는 주제가 다종다양했지요. 시각은 항상 좌편향이지만. 내가 볼 때 스톤은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나비 같은 지식인이라고 할까…. -본문 476쪽
「I.F. 스톤 위클리」 창간 당시의 이지 스톤
만 45세의 스톤은 이제 30년 가까이 몸담아온 일간지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당시 스톤이 가장 관심 깊게 들여다본 문제는 냉전으로 야기된 두 가지 위협, 즉 위험한 대외 정책과 국내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이었다. 스톤은 위궤양도 없었고 정신질환도 없었다. 그러나 기자에게 트루먼 시대는 괴로운 시기였다. 뉴딜에 열광하는 스톤의 친구와 지인들(“이상주의자와 자유주의자와 급진파가 희한하게 뒤섞여 있었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충성도 심사는 그런 사람들을 정부에서 몰아내기 위한 작전이었다. 급진파 활동 전력을 걸어서 걸리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스톤은 매카시즘을 “50년대를 사로잡은 광기fetish of the fifties”라고 불렀다. -본문 540쪽
유명 인사 독자들이 많았지만 과거 동료 언론인이나 정치가, 취재원들은 스톤을 피했다. 그래서 하염없이 전화벨 울리기만을 기다리는 적막한 사무실은 바로 정리를 했다. 대신 스톤의 집이 「I. F. 스톤 위클리」의 사무실이 됐다. 주방 테이블과 3층 복도, 침실 두 곳, 칸막이한 1층 벽난로 쪽 공간(여기서 에스터가 장부와 우편물 정리를 했다), 그리고 지하실(나중에 조수들이 일하는 공간이 됐다)이 작업공간이었다. 스톤은 에스터가 일을 많이 해서 「I. F. 스톤 위클리」가 성장했다며 ‘그럴 줄 알았으면 부인을 하나 더 얻을 걸 그랬다’고 능청을 떨기도 했다. 책과 서류와 신문이 산더미처럼 쌓인 집에서 안락의자에 편히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의자는 신문을 쌓아두는 장소가 된 지 오래였다. -본문 543-544쪽
첫댓글 마이라 맥피어슨 지음 / 역자 이광일 옮김 / 역자평점 8.2 /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