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노야 세노야'는 고은 시인의 시에 작곡가 '김광희'가 작곡한 곡이다.
전북 옥구군 미면(米面)(지금의 군산시 미룡동)에서 태어나 자란 고은 시인이 지은, 이 詩는 남해 바닷가 뱃사람들이 멸치잡이를 할 때 부르는 흥겨운 앞소리 ‘세노야’를 소재 삼아 지은 것이라 합니다. 고은 시인이 말씀 하시길...
1968년인가 그 다음해인가 나는 미당과 함께 경남 진해의 육군대학 문예강연에 갔다. 육군 고급장교들이 교생이었는데 전두환 노태우 등도 교생이었던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강연 뒤 육군대학 총장 김익권 장군의 호의로 육군대학 전용의 소형군함에 두사람이 타고 통영에서 여수까지의 다도해를 경유하게 되었다. 도중에 박재삼의 고향인 삼천포에도 잠시 기항해서 소주를 마시는 여유를 누렸다.
바로 그 남해 난바다까지 나가 나의 뜻에 따라 멸치잡이 어선들에 조심스레 접근했다. 멸치 그물을 후리고 끄는 선상 노동은 노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어부가 중 후렴으로 "세노야 세노야" 라는 낯선 낱말이 내 뇌리에 박혔다. 이 ‘세노야’는 내 고향 군산 앞바다의 그것이 아니라 남해 일대의 노동요의 흥겨운 소리다.
그런데 훗날 나는 일본 규슈를 여행하다가 규슈해안의 어부가로 다시 ‘세노야’를 만날 수 있었다. <한겨레> 10월 26일치 30면 말글살이난의 ‘세노야’는 이 낱말이 일본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나서 내가 그 사실을 모르고 일본말로 노래 제목을 삼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군산 앞바다 어부가에는 '세노야’가 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간 우리 모국어는 금지된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 기간 이후로도 많은 손상과 오염 그리고 지배언어의 잔재가 거기에 개입한 바 있다. 아니 근대어의 경우 일본의 조어를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을 굳이 숨길 까닭도 없다. 이는 현대 한국어나 중국어의 관념어 대부분에 해당한다. 그래서 우리 언어의 한 부분은 고대에는 중국에 빚지고 근대에는 일본에 빚지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남해 일대의 언어는 당대의 시각으로 한국어다 일본어다 하고 분별하기보다 고대 한국어가 일본으로 건너간 분명한 사실이 일본어의 기원에 대한 절대조건인 것을 전제한다. 그래서 남해의 이쪽 한국 쪽이나 그 건너 일본 쪽에서 해상언어의 공동사용이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온 것이다. (이런 사례가 아니더라도 심지어는 고대 이집트어가 한국어로도 충분히 토착화되었다. 만주어의 경우도 적지 않다.)
나는 ‘세노야’가 일본어라고만 단정하는 것을 주저한다. 그것은 오랜 공해상의 흥취를 담은 고대 한국어이자 지금 국제어로서의 한 낱말이기 십상이다.
70년대 온 국민이 즐겨 불렀던 포크송 '세노야'를 작곡하고 최초로 노래했던 주인공 김광희. 양희은의 노래로 대중에게 폭 넓게 알려진 이 노래가 만들어진 것은 1970년 가을이었다. 바로 그 주인공이 당시 베일에 가려있던 서울대 음대 작곡과 학생 김광희였다.
그녀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엄격한 인텔리 부모 슬하의 부유한 가정에서 2남 3녀중 셋째로 1950년 5월 10일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서 태어났다. 교육열이 대단하셨던 부모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전축을 사다 주셨다. 그래서 그녀의 형제 모두는 공부뿐 아니라 노래도 잘했다.
이화여중에 입학해서부터 성악을 공부했다. 성악가의 꿈을 키우며 연습에 몰두했지만 목을 혹사시킬 만큼 과도한 연습은 맑고 고역이던 목소리를 허스키하게 변화시켰다. 이화여고에 진학해서는 결국 성악을 포기하고 작곡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후 김광희는 존 바에즈 등 외국 포크 가수들의 노래를 접하고 아름다운 포크송의 가사가 마음에 들었다. 이후 포크송을 즐겨 듣고 노래하던 그녀는 68년,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합격했다. 입시의 해방감에서 벗어난 김광희는 포크송에 관심은 많았지만 엄한 가풍으로 인해 노래 활동을 하려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였다.
대학 신입생 시절 그녀가 작곡한 동요 3곡이 '윤석중 동요집'에 수록되기도 했다. 하지만 음대에서는 대중 음악 활동을 금지하고 있어 포크송을 만들어도 작곡자를 자신의 이름이 아닌 음악 친구들로 밝히기도 하고 가명으로 몇 차례 노래를 부르는 게 고작이었다.
그녀의 짧은 대중 음악 인생에서 김민기는 절대적 관계를 형성한 사람이었다. 1969년 2학년 때, 서울대 미대에 입학한 신입생 김민기를 만났다. 친구의 동생인지라 이미 안면은 있었다.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때때로 김민기가 조직한 대학생 남성듀오 '도비두'와 어울려 오르간을 쳐주며 '피터, 폴 & 메리'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는 김광희 외에도 김민기, 이정선, 현경과 영애, 두나래 등 많은 아마추어 학생 가수들이 노래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70년 초가을,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기독교 방송의 '꿈과 음악사이' 프로그램에서 시인 고은이 수필을 낭독하는 시간에 '고은의 시로 된 노래를 깔자'는 의견이 나왔다. 선정된 시는 '세노야'. 음악평론가 최경식씨는 처음 김민기에게 '세노야'의 작곡을 의뢰했으나 김민기는 작곡과에 다니는 누나 친구 김광희에게 가사를 전달하며 작곡을 맡겼다. 그래서 만들어진 노래가 '세노야'이다.
https://youtu.be/gBxeFuhxEJE
가사
https://youtu.be/n93Q71NoK60
윤희정
https://youtu.be/Jes--8NpiQA
최양숙
https://youtu.be/eqaDX_3b90I
나윤선
https://youtu.be/upGIjdrOOqc
스페인합창단
https://youtu.be/-4UCNCt0o8E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저 산에주고
슬픈 일이면 님에게 주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바다에 주고
슬픈 일이면 내가 받네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