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붉은 꽃이 피는 나무가
있었다
어김없이
꽃이 진다고 해도 나무는
제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어김없이 어느덧
흐릿한 뒤를 돌아보는 나무
제가 만든 그늘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어느덧나무 어느덧나무
제 아름을 나지막하게 불러보는 나무를
떠나간 사랑인 듯 가지게 된 저녁이 있었다
출가한 지 오래된 나무여서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은 이름밖에 없었다
심재휘(1963 ~)
옛적에 내가 가보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았던 시절에 무엇이 살았다
이런 첫 문장은 항상 기대된다
책을 펼친다면 그 시작은 항상 이런 문장 때문이었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인생이 하는 말이 궁금해서 남의 글을 읽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작고 붉은 꽃이 피는 나무가 살았다는 첫 문장이 너무 좋다
그는 어디서 나무를 만났을까. 작고 붉은 꽃은 얼마나 작고 얼마나 붉었을까
사실 그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을 것 같은데, 시인은 그것을 어디에 감춰두었을까
잊지 않으려는 듯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불렀다고 했다
나무 아닌 것이 '어느덧' 나무가 되었다는 말로도 읽힌다
나도 이런 나무가 될 수 있을까
마음속 나무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이름을 붙여주고 그이름을 간절히 부르면 나도 분명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꽃을 피웠다고 혼나지 않고, 꽃을 떨궜다고 비난받지 않고 꽃이 피면 피는대호 꽃이 지면 또 지는대로 그저 나무일 수 있을까
그대로, 너대로, 네 이름대로 살렴. 이 시는 그렇게 응원하는 듯하다
이 더운날, 더운 지구 위에서 나무의 지지를 받고 싶다.
문학평론가
출처: 빵 과 신문 짱!! 원문보기 글쓴이: 이신춘
첫댓글 https://tv.kakao.com/v/412904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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