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 기행 최 건 차
이름있는 높은 산을 올랐다가 내려온다. 산비탈 둔덕이며 냇가 길과 해변 길도 트레킹한다. 국립공원과국립공원과 전국 산들을 두루 찾다가 가끔은 섬에 있는 산을 등반할 때면 망망대해에서 불어오는 갯바람에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상쾌함에 젖는다. 제주도 한라산과 남해도 금산, 강화도 마니산, 울릉도의 성인봉 등은 육지의 산들에 못지않은 산세들이다. 다만 내륙의 산들은 하천과 계곡을 끼고 산맥에 이어져 있어 넓고 완만한 산이 많다. 반면에 동해와 서해 그리고 다도해 섬에 있는 산들은 해안에서 뻗쳐진 암반요철지대가 가파르게 솟아 있어 절경이지만 등반은 만만치 않다.
‘슬로우시티’로 알려진 청산도에 가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우리 서수원신협산악회에서 시행하는 산행을 청산도로 정했다. 기꺼이 참여하기로 작정하고 기다리는 중에 드디어 출발하는 날이 되었다. 2024년 4월 15일 대형버스 2대에 탄 70여 명의 산행 마니아들이 밤 12시, 무박으로 16일 새벽 5시경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큰 건물 상단에 <완도항여객선터미널>이라고 횡으로 적힌 형광등 간판이 유난히도 밝아 시선을 압도했다. 먼길을 장시간 달려왔으니 우선 볼일을 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대형 크루즈선의 내부처럼 넓게 꾸며진 시설이라. 여기가 완도항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들 변화하고 있는 게 요즘의 실상인가 보다.
일단 조반을 든든하게 먹고 7시에 출항하는 철부선에 승선했다. 주로 관광객인 승객들은 물론 대형버스와 트럭이며 승용차들을 잔뜩 싣고 50여 분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만개한 노란 유채꽃과 청보리가 앙상블이 되어 청산도 매력을 한층 더해 주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범바위’라는 곳에서 모두 내렸다. 나는 이곳 토박이라는 나이든 기사님에게 이곳을 범바위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실제로 호랑이가 있었느냐고 물으니 옛날에는 살았다고 한다. 일전에 백령도에 갔을 때였다. 육지에서 한참 떨어진 외딴 섬인데 황해도에서 헤엄쳐온 멧돼지들이 농작물을 해치고 있다는 주민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 청산도에도 그런 식으로 호랑이가 살았지 않나 싶다.
우선 청산도에 왔다는 기념으로 단체 사진을 찍고 어떻게 행선 할 것인가를 의논해야 했다. 젊은 층의 한 무리는 역시 우리는 이곳 산을 오르고 싶다며 나섰고, 다른 이들은 바다가 없는 수원에서 왔으니 해안가를 둘러보자는 것이다. 나와 나머지 일행은 ‘2024년 4월 6일-21일까지 청산도 슬로걷기 축제’라는 현수막을 목격하고, 우리를 기다렸는가 싶어 참여했다. 한적한 길가에 아무도 손대지 않은 유채꽃과 아직은 파래 보이지만 누런색을 살짝 띠고 있는 청보리 이삭이 수줍은 듯 청아하다.
선도하는 이를 따라가는 중에 유독 ‘청보리’라는 단어에 나는 마음이 꽂혔다. 보릿고개를 겪어봤던 어린 시절, 덜 익은 청보리를 베어다가 가마솥에 쪄 찐쌀처럼 군것질로 먹기도 하고, 맷돌에 갈아 죽을 써 주셨던 생전의 어머님 모습이 떠올려져 가슴이 뭉클했다. 요즘엔 청보리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낭만과 감성을 자아내는 문구로 여겨지는 것 같아 어려웠던 격동의 세대라서 격세지감이 든다. 더구나 서편제라는 애절한 사연의 영화가 만들어졌던 현장을 탐방하니 더 묘한 감상에 젖는다. 서편제를 촬영한 장소는 외부 사람들이 많이들 찾아드는 것 같다. 그런데 초가집 마루에 실물 크기의 인형들이 조금은 조잡해 보여 잘 좀 해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해풍으로 흐드러진 유채꽃과 파랗게 물결치는 청보리밭 언덕에 올랐다. 천상의 화원이라는 표현을 써도 과히 무방할 것 같다. 일행들과 나는 ‘서편제 쉼터 주막’ 정자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전복 양식장이 보이는 포구를 향해 내리막길을 천천히 걸었다. 눈요기에 잔뜩 취한 듯 느긋하게 해변 길을 휘돌아 선착장에 도착했다. 청산도를 떠날 승선 시간을 염두에 두고 기왕에 해산물 먹거리가 풍성하다는 곳에 왔으니, 허리띠를 좀 풀고 자연산 광어와 전복, 해삼, 멍게를 실컷 먹어보기로 했다.
모두가 그만 먹어도 될 만큼 먹고 청산도를 떠나는 또 다른 철부선에 승선했다. 이에 나는 속을 든든하게 채운 뒤라서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오늘을 조용히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슬로우시티는 1986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우선 페스트푸드의 상징격인 맥도날드의 입점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첫째, 전통조리법을 지키는 좋은 음식(Good food), 둘째, 신선한 유기농 식재료를 그대로 사용하는 위생 음식(Clean food), 셋째, 지역 상품과 건전한 유통으로 모두가 안전한 공정 음식(Fair food)을 3대 가치로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유럽 전체로 번지게 되어 1989년 파리에서 ‘슬로우푸드’선언문이 발표되었다. 그게 더 나아가 슬로우시티가 된 것이다.
어찌 됐든 아시아 최초의 슬로우시티가 된 청산도가 자랑스럽다. 앞으로도 기본 정신과 의미를 효과 있게 잘 살려 자연스럽게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24월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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