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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jjhima Nikāya uparipaṇṇāsapāḷi 5. saḷāyatanavaggo 6. chachakkasuttaṃ (MN 148)
여섯씩 여섯[六六] 경 Chachakka Sutta(M148)
66 六六法
62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 2장 육육법설六六法說 1. 육육법의 명칭 1) 육육법의 유형 아함에는 보통 십이처와 한 자리에서 설해지며 그와 똑같은 속성, 다시 말하면 무상 · 고 · 무아 등의 유위속성을 나타내는 한 무리의 법이 있는데 그 유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육근六根 · 육경六境 · 육식六識(viññāṇa) ⓑ 육근 · 육경 · 육식 · 육촉六觸(samphassa) · 육수고락불고불락-六受苦樂不苦不樂 (vedayita-dukkha- sukha-adukkhamasukha) ⓒ 육근 · 육경 · 육식 · 육촉 · 육수六受(vedanā) · 육상六想 (saññā) · 육사六思(sañcetanā 또는 cetanā) ⓓ 육근 · 육경 · 육식 · 육촉 · 육수 · 육상 · 육사 · 육애大愛 (taṇhā; 觸을 緣하여 일어난 것) ⓔ 육근 · 육경 · 육식 · 육촉 · 육수 · 육애 ⓕ 육근 · 육경 · 육식 · 육촉 · 육수 · 육애(受로 緣하여 일어 난 것) ⓖ 육근 · 육경 · 육식 · 육촉 · 육수 · 육애 · 취取(upādānaṇ · 유有(bhava) · 생生(jāti) · 노사老死(jarā-maraṇa) … … 2. 육육법六六法의 독립성 아함이나 니카야의 편집에 의하면 십이처와 육육법은 주로 육처부六處部(saḷāyatana-vagga)에 속해 있다. 이것은 그들 을 각각 독립 법문으로 보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 종래의 불교 68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 학에서도 육육법을 하나의 독립법문으로 취급한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별다른 주의마저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육육법은 오온 · 십이처 · 십이연기 등에 못지않은 중요한 독립법문이다. 십이처나 오온 또는 십이연기에 '일체 · 세간'이라는 술어가 연결되어 그들이 각각 현실세계 전체를 포섭하는 독자적인 법 문임을 표시하고 있듯이 이 육육법에도 그런 말이 따르고 있 다. 일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所謂一切法 云何爲一切法, 佛告婆羅門 眼及色 眼識眼獨 眼 觸因緣生受 若苦若樂不苦不樂 耳鼻舌身意法 意識意觸 意 觸因緣生受 若苦若樂不苦不樂 是名為一切法.8) 그리고 이 육육법은 오온설과 십이연기설에 인도하는 교량 적인 법문으로서 그들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 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으로도 훌륭한 교리조직을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해서 고찰해 갈 것이다. 따라서 본 서는 육육법을 십이처나 오온 또는 십이연기에 못지않은 하나 의 중요한 독립법문으로 취급한다. 8) 『雜阿含』卷13, 高麗 18, p.834.a; 大正 2, p.91.b(321) * 六六經(잡아함304) |
ⓓ 육근 · 육경 · 육식 · 육촉 · 육수 · 육상 · 육사 · 육애
6내-6외-6식-6촉-6수-6상-6사-6애-. ----이후 연속해서 나오는
6尋-6伺--- 총 60법도 66법으로
같은 방법으로 이어지다가 -----6애-. --이후
6界-5蘊----------------의 총59법도 66법으로
물론 두 가지 합친 법수들이 나오는
공양받아 마땅함 품 Āhuneyya-vagga 무상(無常) 경(A7:85) 등의
---6尋-6伺-5蘊, 즉 65법도 66법에 속하는 것으로 한다.
59법들이 나열되어 있는
S25(okkantasaṃyuttaṃ)와 S27(kilesasaṃyuttaṃ)이다.
'들어감 相應(S25)'에서는 (욕계에서 살고 있는 자기 자신에 속하는 법인)
59법들을 知見한다면 예류자라고 하고,
'오염원 相應(S27)'에서는 이러한 59법은 心의 오염원인데
이런 법수들에 대한 욕탐(chandarāgo)을 버리면
出離(nekkhamma, 욕계를 벗어남)로 기운다고 한다.
즉 59법(이하 66법으로 통칭한다.)을 알고 보면 예류자이고
이런 법수들에 대한 욕탐을 버리면 불환자가 된다는 설명이므로
66법들은 욕계에 속하는 법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대념처경(D22)의 苦集/苦滅에 나오는 60법은 갈애의 대상이 되는 법들인데
이 갈애는 욕계와 연관되어 있는 갈애(慾愛)로 이해된다.
다만 6내외입처(이른바 12처)의 각각의 處들을 하나의 set로 볼 것이냐
아니면 별개로 나누어진 경우로도 볼 것이냐에 따라
욕계로만 한정할 수도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 모두에 대한 설법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즉 무색계라면 당연히 [意處-法處]로만 이루어진 세상이고
색계라면 [鼻處-香處], [舌處-味處]는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자라지도 않고 번잡하지도 않게 나눈 66법은 욕계의 법들로 정리한다.
같은 법문을 듣고 어떤 이들은 아라한이 되고 어떤 이들은 불환자 등이 되고
어떤 자는 법의 눈이 생기고 누구는 무슨 말인지도 알아먹지도 못한다. 하여튼
본 경은 설법이 끝나고 나서 엄청난 아라한들이 생겨난 유일한 경문이다.
주석서의 설명은 참고하지 않는다.
♦ 420. evaṃ me sutaṃ —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 “bhikkhavo”ti.
“bhadante”ti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bhagavā etadavoca —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dhammaṃ vo, bhikkhave, desessāmi ādikalyāṇaṃ majjhekalyāṇaṃ pariyosānakalyāṇaṃ
sātthaṃ sabyañjanaṃ, kevalaparipuṇṇaṃ parisuddhaṃ brahmacariyaṃ pakāsessāmi,
yadidaṃ — cha chakkāni.
taṃ suṇātha, sādhukaṃ manasi karotha; bhāsissāmī”ti.
“evaṃ, bhante”ti kho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bhagavā etadavoca —
2.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나는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며 의미와 표현을 구족했고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법을 설하고, 범행(梵行)을 드러낼 것이니
그것은 여섯씩 여섯이다. 그것을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이제 설하리라.”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개요.
♦ “cha ajjhattikāni āyatanāni veditabbāni,
3.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들을 알아야 한다.681)
681) “'알아야 한다(veditabbāni)'는 것은 위빳사나와 함께한(saha-vipassana) 도(magga)로써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MA.v.100)
“즉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은 도의 역할(magga-kicca)이고, 그 도를 얻는 방법이 위빳사나이기 때문에 위빳사나와 함께한 도로써 알아야 한다고 했다.”(MAȚ.ii.430)
cha bāhirāni āyatanāni veditabbāni,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들을 알아야 한다.
cha viññāṇakāyā veditabbā,
여섯 가지 알음알이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cha phassakāyā veditabbā,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cha vedanākāyā veditabbā,
여섯 가지 느낌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cha taṇhākāyā veditabbā.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해체해서 보기(vinibbhoga-dassana)
♦ 421. “‘cha ajjhattikāni āyatanāni veditabbānī’ti — iti kho panetaṃ vuttaṃ.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cakkhāyatanaṃ, sotāyatanaṃ, ghānāyatanaṃ, jivhāyatanaṃ, kāyāyatanaṃ, manāyatanaṃ.
‘cha ajjhattikāni āyatanāni veditabbānī’ti — iti yaṃ taṃ vuttaṃ, idametaṃ paṭicca vuttaṃ.
idaṃ paṭhamaṃ chakkaṃ.
4.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를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무엇을 반연하여 한 말인가?
눈의 감각장소, 귀의 감각장소, 코의 감각장소,
혀의 감각장소 몸의 감각장소, 마노[意]의 감각장소가 있다.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를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한 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여섯이다.”
♦ “‘cha bāhirāni āyatanāni veditabbānī’ti — iti kho panetaṃ vuttaṃ.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rūpāyatanaṃ, saddāyatanaṃ, gandhāyatanaṃ, rasāyatanaṃ, phoṭṭhabbāyatanaṃ, dhammāyatanaṃ.
‘cha bāhirāni āyatanāni veditabbānī’ti — iti yaṃ taṃ vuttaṃ, idametaṃ paṭicca vuttaṃ.
idaṃ dutiyaṃ chakkaṃ.
5.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를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무엇을 반연하여 한 말인가?
형색의 감각장소, 소리의 감각장소, 냄새의 감각장소,
맛의 감각장소, 감촉의 감각장소, 법의 감각장소가 있다.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를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한 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여섯이다.”
♦ “‘cha viññāṇakāyā veditabbā’ti — iti kho panetaṃ vuttaṃ.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so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ṃ,
ghānañca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ṃ,
jivhañca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ṃ,
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ṃ,
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ṃ.
‘cha viññāṇakāyā veditabbā’ti — iti yaṃ taṃ vuttaṃ, idametaṃ paṭicca vuttaṃ.
idaṃ tatiyaṃ chakkaṃ.
6. “'여섯 가지 알음알이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무엇을 반연하여 한 말인가?
눈과 형색들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귀와 소리들을 조건으로 귀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코와 냄새들을 조건으로 코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혀와 맛들을 조건으로 혀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몸과 감촉들을 조건으로 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마노[意]와 법들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682)가 일어난다.
'여섯 가지 알음알이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한 말이다.
이것이 세 번째 여섯이다.”
682) “여기서 '마노의 알음알이(manoviññāṇena)'란 [32가지 세간적인 과보의 마음 중에서 한 쌍의 전오식(dve pañca-viññāṇāni)을 제외한 22가지 과보로 나타난 마음(lokiya-vipāka-citta)을 말한다.” (MA.v.100)
♦ “‘cha phassakāyā veditabbā’ti — iti kho panetaṃ vuttaṃ.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so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ghānañca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jivhañca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cha phassakāyā veditabbā’ti — iti yaṃ taṃ vuttaṃ, idametaṃ paṭicca vuttaṃ.
idaṃ catutthaṃ chakkaṃ.
7.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무엇을 반연하여 한 말인가?
눈과 형색들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귀와 소리들을 조건으로 귀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코와 냄새들을 조건으로 코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혀와 맛들을 조건으로 혀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몸과 감촉들을 조건으로 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마노와 법들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한 말이다.
이것이 네 번째 여섯이다.”
♦ “‘cha vedanākāyā veditabbā’ti — iti kho panetaṃ vuttaṃ.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so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ghānañca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jivhañca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cha vedanākāyā veditabbā’ti — iti yaṃ taṃ vuttaṃ, idametaṃ paṭicca vuttaṃ.
idaṃ pañcamaṃ chakkaṃ.
8. “'여섯 가지 느낌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무엇 을 반연하여 한 말인가?
눈과 형색들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 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귀와 소리들을 조건으로 귀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코와 냄새들을 조건으로 코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혀와 맛들을 조건으로 혀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몸과 감촉들을 조건으로 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마노와 법들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여섯 가지 느낌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한 말이다. [282]
이것이 다섯 번째 여섯이다.”
♦ “‘cha taṇhākāyā veditabbā’ti — iti kho panetaṃ vuttaṃ.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so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ṃ ... pe ...
ghānañca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ṃ...
jivhañca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ṃ...
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ṃ...
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cha taṇhākāyā veditabbā’ti — iti yaṃ taṃ vuttaṃ, idametaṃ paṭicca vuttaṃ.
idaṃ chaṭṭhaṃ chakkaṃ.
9.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무엇을 반연하여 한 말인가?
눈과 형색들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683)가 있다.
귀와 소리들을 조건으로 귀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코와 냄새들을 조건으로 코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혀와 맛들을 조건으로 혀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몸과 감촉들을 조건으로 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마노와 법들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라고 이렇게 한 말은 이것을 반연하여 한 말이다.
이것이 여섯 번째 여섯이다.” 684)
683) “'느낌을 조건으로 한 갈애(vedanāpaccayā taṇhā)'란 과보의 느낌을 조건으로(vipāka-vedanā-paccayā) 속행의 순간(javana-kkhaṇa)에 일어난 갈에를 말한다.”(MA.v.100)
684) 이렇게 하여 본경은 6근-6경-6식-6촉-6수-6애의 육지연기를 설하신다. 이 육지연기의 여섯 가지가 다시 각각 여섯 개씩의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경의 제목을 여섯씩 여섯 즉 육육(六六) 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렇게 36가지로 해체해서 보면 이 36가지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자아라고 주장할 수가 없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이제 아래 §10 이하에서 멋지게 설명 하신다. 그리고 40에서는 이 36가지에 대해서 염오가 일어나고 §41에서는 이욕-해탈-구경해탈지가 실현된다.
이처럼 본경은 나와 세상이라는 존재를 육육 삼십육으로 해체해서 보면 무상(일어남과 사라짐, §10이하)이 보이고, 무상을 보게 되면 무아에 사무치게 된다(§10이하)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통해서 깨달음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경이야말로 ① 해체해서 보기- ② 무상 ·고 · 무아- ③ 염오- ④ 이욕- ⑤ 해탈- ⑥ 구경해탈지의 6단계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멋진 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6단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뱀의 비유 경」 (M22) §29의 주해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초기불교 이해』 제14장 어떻게 해탈 · 열반을 실현할 것인가와 『상윳따 니까야』제4권 「해제」§3과 제3권 「해제」 §3을 중심으로도 살펴볼 것을 권한다.
[해체하면] 무아가 보인다(anattabhāva-dassana)
♦ 422. “‘cakkhu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cakkhu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tasmā taṃ na upapajjati — ‘cakkhu attā’ti yo vadeyya. iti cakkhu anattā.
10. “만일 '눈이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685)
눈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알 수 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눈이 자아다.'라고 말하면] '나의 자아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눈이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눈은 자아가 아니다.
685) '타당하지 않다.'는 na upapajjati를 의역한 것이다. upapajjati는 주로 '다시 태어나다, 일어나다'의 뜻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주석서에서 “타당하지 않다. 옳지 않다(na yujjati)”(MA.v.100)로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 한편 Ee에는 upajjati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냐나몰리 스님의 지적처럼(냐나몰리 스님/보디 스님, 1355쪽 1330주해 참조) 잘못 편집된 것이다.
♦ “‘rūpā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rūpānaṃ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tasmā taṃ na upapajjati — ‘rūpā attā’ti yo vadeyya. iti cakkhu anattā, rūpā anattā.
만일 '형색들이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형색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알 수 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형'색들이 자아다.'라고 말하면] '나의 자아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형색들이 자아다.'라고 말 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눈은 자아가 아니다. 형색들은 자아가 아니다.
♦ “‘cakkhuviññāṇaṃ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cakkhuviññāṇa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tasmā taṃ na upapajjati — ‘cakkhuviññāṇaṃ attā’ti yo vadeyya.
iti cakkhu anattā, rūpā anattā, cakkhuviññāṇaṃ anattā.
만일 '눈의 알음알이가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눈의 알음알이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알 수 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눈의 알음알이가 자아다.'라고 말하면 '나의 자아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눈의 알음알이는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눈은 자아가 아니다. 형색들은 자아가 아니다. 눈의 알음알이는 자아가 아니다.
♦ “‘cakkhusamphasso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cakkhusamphassa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tasmā taṃ na upapajjati — ‘cakkhusamphasso attā’ti yo vadeyya.
iti cakkhu anattā, rūpā anattā, cakkhuviññāṇaṃ anattā, cakkhusamphasso anattā.
만일 '눈의 감각접촉이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눈의 감각접촉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알 수 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눈의 감각접촉이 자아다.'라고 말하면] '나의 자아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눈의 감각접촉이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눈은 자아가 아니다. 형색들은 자아가 아니다.
눈의 알음알이는 자아가 아니다. 눈의 감각접촉은 자아가 아니다.
♦ “‘vedanā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vedanāy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tasmā taṃ na upapajjati — ‘vedanā attā’ti yo vadeyya.
iti cakkhu anattā, rūpā anattā, cakkhuviññāṇaṃ anattā, cakkhusamphasso anattā, vedanā anattā.
만일 ‘느낌이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283]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 수 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느낌이 자아다.'라고 말하면 '나의 자아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느낌이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눈은 자아가 아니다. 형색들은 자아가 아니다.
눈의 알음알이는 자아가 아니다. 눈의 감각접촉은 자아가 아니다. 느낌은 자아가 아니다.
♦ “‘taṇhā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taṇhāy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tasmā taṃ na upapajjati — ‘taṇhā attā’ti yo vadeyya.
iti cakkhu anattā, rūpā anattā, cakkhuviññāṇaṃ anattā,
cakkhusamphasso anattā, vedanā anattā, taṇhā anattā.
만일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갈애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알 수 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하면]
'나의 자아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눈은 자아가 아니다. 형색들은 자아가 아니다. 눈의 알음알이는 자아가 아니다.
눈의 감각접촉은 자아가 아니다. 느낌은 자아가 아니다. 갈애는 자아가 아니다.
♦ 423. “‘sotaṃ attā’ti yo vadeyya ... pe ... ‘ghānaṃ attā’ti yo vadeyya...
‘jivhā attā’ti yo vadeyya... ‘kāyo attā’ti yo vadeyya...
11. “만일 '귀가 자아다.' … '소리들이 자아다.' … '귀의 알음알이가 자아다.' …
'귀의 감각접촉이 자아다.' … '느낌이 자아다.' …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갈애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알 수 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하면] '나의 자아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귀는 자아가 아니다. 소리들은 자아가 아니다. 귀의 알음알이는 자아가 아니다.
귀의 감각접촉은 자아가 아니다. 느낌은 자아가 아니다. 갈애는 자아가 아니다.”
12. “만일 '코가 자아다.' … '냄새들이 자아다.' … '코의 알음알이가 자아다.' …
'코의 감각접촉이 자아다.' … '느낌이 자아다. …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갈애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알 수 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하면]
'나의 자아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코는 자아가 아니다. 냄새들은 자아가 아니다. 코의 알음알이는 자아가 아니다.
코의 감각접촉은 자아가 아니다. 느낌은 자아가 아니다. 갈애는 자아가 아니다.”
13. “만일 '혀가 자이다.' … '맛들이 자아다.' … '혀의 알음알이가 자아다.' …
'혀의 감각접촉이 자아다.' … '느낌이 자아다.' …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갈애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알 수 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하면]
'나의 자아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말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혀는 자아가 아니다. 맛들은 자아가 아니다. 혀의 알음알이는 자아가 아니다.
혀의 감각접촉은 자아가 아니다. 느낌은 자아가 아니다. 갈애는 자아가 아니다.”
14. “만일 '몸이 자아다.' … '감촉들이 자아다.' … '몸의 알음알이가 자아다.' …
'몸의 감각접촉이 자아다.' … '느낌이 자아다.' …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갈애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알 수 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하면
'나의 자아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몸은 자아가 아니다. 감촉들은 자아가 아니다. 몸의 알음알이는 자아가 아니다.
몸의 감각접촉은 자아가 아니다. 느낌은 자아가 아니다. 갈애는 자아가 아니다.”
‘mano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mana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tasmā taṃ na upapajjati — ‘mano attā’ti yo vadeyya. iti mano anattā.
♦ “‘dhammā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dhammānaṃ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tasmā taṃ na upapajjati — ‘dhammā attā’ti yo vadeyya.
iti mano anattā, dhammā anattā.
♦ “‘manoviññāṇaṃ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manoviññāṇa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tasmā taṃ na upapajjati — ‘manoviññāṇaṃ attā’ti yo vadeyya.
iti mano anattā, dhammā anattā, manoviññāṇaṃ anattā.
♦ “‘manosamphasso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manosamphassa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tasmā taṃ na upapajjati — ‘manosamphasso attā’ti yo vadeyya.
iti mano anattā, dhammā anattā, manoviññāṇaṃ anattā, manosamphasso anattā.
♦ “‘vedanā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vedanāy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tasmā taṃ na upapajjati — ‘vedanā attā’ti yo vadeyya.
iti mano anattā, dhammā anattā, manoviññāṇaṃ anattā, manosamphasso anattā, vedanā anattā.
♦ “‘taṇhā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taṇhāy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tasmā taṃ na upapajjati — ‘taṇhā attā’ti yo vadeyya.
iti mano anattā, dhammā anattā, manoviññāṇaṃ anattā,
manosamphasso anattā, vedanā anattā, taṇhā anattā.
15. “만일 '마노[意]가 자아다.' … '법들이 자아다.' … '마노의 알음알이가 자아다.' …
'마노의 감각접촉이 자아다.' … '느낌이 자아다.' … [284] …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갈애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알 수 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하면
'나의 자아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마노는 자아가 아니다. 법들은 자아가 아니다. 마노의 알음알이는 자아가 아니다.
마노의 감각접촉은 자아가 아니다. 느낌은 자아가 아니다. 갈애는 자아가 아니다.”
존재더미[有身]의 일어남(sakkāya-samudaya)
♦ 424. “ayaṃ kho pana, bhikkhave, sakkāyasamudayagāminī paṭipadā —
16, “비구들이여,686) 이것이 존재 더미[有身]687)의 일어남으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
686) “이 가르침은 세 가지 움켜쥠(ti gāhā)을 통해 윤회(vaṭṭa)를 보이시기 위해 시작하셨다. 그리고 괴로움(dukkha)과 일어남(samudaya)의 두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통해 윤회를 보이시기 위해서 설하셨다고도 할 수 있다.” (MA.v.100)
687) '존재 더미[有身, sakkāya]'란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을 말한다.
본서 제2권 「교리문답의 짧은 경」(M44) §2에서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대상인] 이들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을 존재 더미[有身, sakkāya]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나타난다.
「교리문답의 짧은 경」 (M44) §§2~5에서는 존재 더미[有身, sakkāya]를 통해서 사성제를 설명하고 있으니 참조할 것.
cakkhu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rūpe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cakkhuviññāṇ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cakkhusamphass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vedan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taṇh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눈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688)라고 여긴다.689)
형색들을 두고 … 눈의 알음알이를 두고 … 눈의 감각접촉을 두고 … 느낌을 두고 …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688) “이 세 가지는 갈애와 자만과 사견의 움켜쥠(taṇhā-māna-diṭṭhi-gāhā)이라고 알아야 한다.”(MA.v.100)
689) “'여긴다(samanupassati)'는 것은 세 가지 움켜쥠(gāha-ttaya)을 통해 본다는 뜻이다.” (MA.v.100)
sot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 pe ...
ghān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 pe ...
jivh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 pe ...
kāy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 pe ...
man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dhamme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manoviññāṇ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manosamphass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vedan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taṇh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17. ~ 21. “귀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
코를 두고 … 혀를 두고 … 몸을 두고 …
마노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법들을 두고 … 마노의 알음알이를 두고 … 마노의 감각접촉을 두고 … 느낌을 두고 …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존재 더미[有身]의 소멸(sakkāya-nirodha)
♦ “ayaṃ kho pana, bhikkhave, sakkāyanirodhagāminī paṭipadā —
22. “비구들이여,690) 이것이 존재 더미有身]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
690) “이와 같이 윤회를 보이신 뒤 지금은 세 가지 움켜쥠의 반대(paṭipakkha)로 소멸(nirodha)과 도(magga)의 두 가지 진리를 통해 윤회에서 벗어남(vivaṭṭa)을 보이시기 위해 이 가르침을 시작하셨다. (MA.v.100)
cakkhu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눈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691)
691) “여기서 '여긴다(samanupassati)'는 것은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로 본다는 뜻이다.” (MA.v.100)
rūpe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cakkhuviññāṇ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cakkhusamphass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vedan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taṇh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형색들을 두고 … 눈의 알음알이를 두고 … 눈의 감각접촉을 두고 … 느낌을 두고 …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sot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 pe ...
ghān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jivh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kāy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man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dhamme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manoviññāṇ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manosamphass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vedan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taṇh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23. ~ 27. 귀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
코를 두고 … 혀를 두고 … 몸을 두고 … 마노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법들을 두고 … 마노의 알음알이를 두고 … 마노의 감각접촉을 두고 … 느낌을 두고 … [285] …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잠재성향
♦ 425. “cakkhuñca, bhikkhave,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so 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abhinandati abhivadati ajjhosāya tiṭṭhati.
tassa rāgānusayo anuseti.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socati kilamati paridevati urattāḷiṃ kandati sammohaṃ āpajjati.
tassa paṭighānusayo anuseti.
adukkhama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tassā vedanāya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tassa avijjānusayo anuseti.
28. “비구들이여,692) 눈과 형색들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
692) “이와 같이 윤회에서 벗어남(vivaṭṭa)을 보이신 뒤 지금은 세 가지 잠재성행(anusaya)을 통해 다시 윤회(vaṭṭa)를 설명하신다.” (MA.v.100)
즐거운 느낌에 닿을 때 만일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움켜쥐면
그에게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하게 된다.693)
693) 세 가지 '잠재성향(anusaya)'과 세 가지 느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교리문답의 짧은 경」(M44) §§25~28을 참조할 것.
괴로운 느낌에 닿을 때 만일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하면
그에게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하게 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을 때
만일 그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재난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
그에게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하게 된다.
so vata, bhikkhave,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aṃ appahāya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aṃ appaṭivinodetvā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aṃ asamūhanitvā
avijjaṃ appahāya vijjaṃ anuppādetvā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bhavissatīti —
netaṃ ṭhānaṃ vijjati.
비구들이여, 그가 참으로 즐거운 느낌에 대해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리지 않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 적의의 잠재성향을 파괴하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명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지 않고,
무명을 버리지 않고, 명지를 일으키지 않고, 지금 · 여기에서
괴로움694)을 끝낼 것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694) “여기서 '괴로움(dukkha)'이란 윤회의 괴로움(vaṭṭa-dukkha)과 오염원의 괴로움(kilesa-dukkha)이다.”(MA.v.101)
♦ “sotañca, bhikkhave,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ṃ ... pe ...
ghānañca, bhikkhave,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ṃ ... pe ...
jivhañca, bhikkhave,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ṃ ... pe ...
kāyañca, bhikkhave,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ṃ ... pe ...
manañca, bhikkhave,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so 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abhinandati abhivadati ajjhosāya tiṭṭhati.
tassa rāgānusayo anuseti.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socati kilamati paridevati urattāḷiṃ kandati sammohaṃ āpajjati.
tassa paṭighānusayo anuseti.
adukkhama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tassā vedanāya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tassa avijjānusayo anuseti.
so vata, bhikkhave,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aṃ appahāya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aṃ appaṭivinodetvā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aṃ asamūhanitvā
avijjaṃ appahāya vijjaṃ anuppādetvā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bhavissatīti —
netaṃ ṭhānaṃ vijjati.
29. ~ 33. “비구들이여, 귀와 소리들을 조건으로 귀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
코와 냄새들을 조건으로 코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
혀와 맛들을 조건으로 혀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
몸과 감촉 들을 조건으로 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
마노와 법들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 접촉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에 닿을 때 만일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움켜쥐면
그에게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하게 된다.
괴로운 느낌에 닿을 때 만일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하면
그에게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하게 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을 때
만일 그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재난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
그에게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그가 참으로 즐거운 느낌에 대해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리지 않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 적의의 잠재성향을 파괴하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명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지 않고,
무명을 버리지 않고, 명지를 일으키지 않고,
지금 · 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낼 것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286]
잠재성향을 버림
♦ 426. “cakkhuñca, bhikkhave,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so 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ābhinandati nābhivadati nājjhosāya tiṭṭhati.
tassa rāgānusayo nānuseti.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a socati na kilamati paridevati na urattāḷiṃ kandati na sammohaṃ āpajjati.
tassa paṭighānusayo nānuseti.
adukkhama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tassā vedanāya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pajānāti.
tassa avijjānusayo nānuseti.
34. “비구들이여,695) 눈과 형색들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에 닿을 때 만일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움켜쥐지 않으면
그에게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괴로운 느낌에 닿을 때 만일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하지 않으면 그에게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을 때
만일 그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재난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면
그에게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695) “세 가지 잠재성향을 통해 윤회를 설명하신 뒤 지금은 그 잠재성향들의 반대, 즉 그들을 버림(paṭikkhepa)으로 윤회에서 벗어남(vivaṭṭa)을 설명하신다.” (MA.v.101)
so vata, bhikkhave,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aṃ pahāya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aṃ paṭivinodetvā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aṃ samūhanitvā
avijjaṃ pahāya vijjaṃ uppādetvā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bhavissatīti —
ṭhānametaṃ vijjati.
비구들이여, 그가 참으로 즐거운 느낌에 대해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 적의의 잠재성향을 파괴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명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킴으로써696) 지금 · 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낼 것이라는 것은 가능하다.”
696)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킴으로써(avijjaṃ pahāya vijjaṃ uppādetvā)'라는 것은 윤회의 뿌리(vaṭṭa-mūlika)인 무명을 버리고, 아라한도의 명지(arahatta-magga-vijjā)를 일으킨다는 말씀이다.”(MA.v.101)
♦ “sotañca, bhikkhave,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ṃ ... pe ....
♦ “ghānañca, bhikkhave,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ṃ ... pe ....
♦ “jivhañca, bhikkhave,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ṃ ... pe ....
♦ “kāyañca, bhikkhave,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ṃ ... pe ....
♦ “manañca, bhikkhave,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so 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ābhinandati nābhivadati nājjhosāya tiṭṭhati.
tassa rāgānusayo nānuseti.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a socati na kilamati na paridevati na urattāḷiṃ kandati na sammohaṃ āpajjati.
tassa paṭighānusayo nānuseti.
adukkhama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tassā vedanāya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pajānāti.
tassa avijjānusayo nānuseti.
so vata, bhikkhave,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aṃ pahāya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aṃ paṭivinodetvā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aṃ samūhanitvā
avijjaṃ pahāya vijjaṃ uppādetvā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bhavissatīti —
ṭhānametaṃ vijjati.
35. ~ 39, “비구들이여, 귀와 소리들을 조건으로 귀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
코와 냄새들을 조건으로 코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
혀와 맛들을 조건으로 혀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
몸과 감촉 들을 조건으로 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
마노와 법들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 접촉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에 닿을 때 만일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움켜쥐지 않으면
그에게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괴로운 느낌에 닿을 때 만일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하지 않으면 그에게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을 때
만일 그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재난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면
그에게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가 참으로 즐거운 느낌에 대해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 적의의 잠재성향을 파괴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명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킴으로써 지금 · 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낼 것이라는 것은 가능하다.”
염오 - 이욕 - 해탈 - 구경해탈지
♦ 427. “evaṃ passaṃ,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cakkhusmiṃ nibbindati, rūpesu nibbindati, cakkhuviññāṇe nibbindati,
cakkhusamphasse nibbindati, vedanāya nibbindati, taṇhāya nibbindati.
40.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면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눈에 대해 염오하고 형색들에 대해 염오하고 눈의 알음알이에 대해 염오하고
눈의 감각접촉에 대해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 염오하고 갈애에 대해 염오한다.
sotasmiṃ nibbindati, saddesu nibbindati ... pe ... ghānasmiṃ nibbindati, gandhesu nibbindati...
jivhāya nibbindati, rasesu nibbindati... kāyasmiṃ nibbindati, phoṭṭhabbesu nibbindati...
manasmiṃ nibbindati, dhammesu nibbindati, manoviññāṇe nibbindati, manosamphasse nibbindati,
vedanāya nibbindati, taṇhāya nibbindati.
그는 귀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 코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
혀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 몸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
마노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법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마노의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마노의 감각접촉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갈애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41. “염오하면서 [287] 탐욕이 빛바랜다.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할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긴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 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te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imasmiṃ kho pana veyyākaraṇasmiṃ bhaññamāne
saṭṭhimattānaṃ bhikkhūnaṃ anupādāya āsavehi cittāni vimucciṃsūti.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 비구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 60명의 비구들은 취착 없이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했다.697)
697) 주석서는 세존께서 직접 이 가르침을 설하실 때 60명의 비구들이 아라한과를 얻은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고 적고 있다. 법의 총사령관인 사리뿟따나 목갈라나나 80명의 큰 장로들이 설할 때에도 각각 60명의 비구들이 아라한과를 얻었으며, 또한 땀바빠니디빠(Tambapaṇṇi-dīpa) 즉 스리랑카에서는 말레야데와 장로(Māleyyadeva-tthera)가 이 경을 설할 때 60명의 비구가 아라한과를 얻는 등 많은 이들이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삼장법사 쭐라나가(Cūḷanāga) 장로가 많은 인간들과 신들에게 이 경을 설했는데 설법 끝에 천 명의 비구들이 아라한이 되었으며 신들 가운데는 단 한 명이 범부로 남았을 뿐이라고 주석서는 밝히고 있다.(MA.v.101)
♦ chachakkasuttaṃ niṭṭhitaṃ chaṭṭhaṃ. 여섯씩 여섯[大六] 경(M148)이 끝났다.
첫댓글 SN35.23 Sabbasutta(일체경)
//sabbaṃ? Cakkhuñceva rūpā ca, sotañca saddā ca, ghānañca gandhā ca, jivhā ca rasā ca, kāyo ca phoṭṭhabbā ca, mano ca dhammā ca—idaṃ vuccati, bhikkhave, sabbaṃ. Yo, bhikkhave, evaṃ vadeyya: ‘ahametaṃ sabbaṃ paccakkhāya aññaṃ sabbaṃ paññāpessāmī’ti, tassa vācāvatthu kamevassa; ... Yathā taṃ, bhikkhave, avisayasmin”ti.”
무엇이 일체인가? 눈과 형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노(mano)와 법, 이를 일러 일체라 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이런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천명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로만 떠벌릴 뿐이다. ...중략...그것은 그들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에서의
sabba일체가
6가지의 육육(근.경.식.촉.수.애)과 같은 목적의 경문이라고 봅니다.
근데 소위 육육법의 경문 출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