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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풍납동 토성(서울 風納洞 土城)
속칭 : 광주풍납리토성(廣州風納里土城), 약칭 풍납토성(風納土城), 약칭 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서울 송파구 풍납1동 72-1번지 외
면적 : 403,679.4㎡
요약
서울 풍납동 토성은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한성 백제시대 첫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으로 인정되는 유적이다. 한강에 잇닿은 남북 방향의 장타원형을 띠고 있으며, 현재 2.1㎞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다. 을축년(1925) 대홍수 때 중요 유물이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1997년부터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발굴 조사 결과 판축 기법으로 축조된 거대한 토성일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왕궁 내 부속 건물로 추정되는 신전 건물지와 우물, 창고, 도로 및 관원들의 대형 주거지 등이 발견됨으로써 초기 백제시대의 왕성임이 확실시되고 있다.
위치 및 형태
서울 풍납동 토성(사적 제11호)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 1 · 2동에 걸쳐 있으며, 서쪽으로 한강에 잇닿은 남북 방향의 장타원형을 띠고 있다. 현재 북벽과 동벽, 남벽 등이 남아 있고, 서벽은 서남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유실된 상태이다. 북벽 446m 구간은 1976년부터 1978년까지 복원되었고, 동벽은 북쪽 일부 구간이 없어진 것을 제외하고 약 2.1㎞ 정도가 남아 있다. 최근 조사에서 유실된 서성벽의 흔적들이 추가로 발견되고 있어 토성의 전체 길이는 약 3.7㎞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견 경위와 변천
서울 풍납동 토성은 한강변의 충적대지상에 있는 순수한 평지 토성이다. 서울 풍납동 토성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을축년(1925) 대홍수로 서벽이 유실될 당시 성 내부에서 청동제 자루솥을 비롯하여 금으로 만든 귀고리, 동노, 백동 거울, 금으로 만든 허리띠, 짙은 자줏빛을 띤 유리구슬, 4구획 원문 수막새 등 중요 유물이 출토되면서부터이다. 당시 일본인 학자들은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삼국사기』의 기록에 견주어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비정하였다.
이러한 중요성이 인정되어 1936년 성벽이 고적 제27호로 지정되었고, 1963년 사적 제11호로 재지정되었다. 2001년 서울 풍납동 토성 보존 방침이 확정됨에 따라 지속적으로 토지를 매입하여 사적지로 추가 편입하고 있다. 토성의 외곽에는 서쪽의 한강과 동쪽의 한강 지류를 이용한 방어용 도랑못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 성과와 특징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발굴은 1964년 서울대학교 김원용 선생에 의해 이루어진 시굴 조사이다. 당시 백제시대 제1주거층, 제2주거층과 을축년 이후의 퇴적층을 확인하였고, ‘풍납리식 민무늬토기’라 명명된 경질 민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백제 토기류와 그물추, 기와, 쇳조각 등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이러한 발굴 결과를 토대로 서울 풍납동 토성의 연대를 1세기경부터 백제 한성이 고구려군에게 함락당하고 웅진으로 떠나간 475년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았다.
이후 1970~1980년대 강남 개발 과정에 훼손이 거듭되던 중 1997년 1월 서울 풍납동 토성의 실측 작업을 진행하던 선문대학교 이형구 교수로부터 풍납동 231-3번지 소재 아파트 신축 부지에서 백제 토기 다수가 출토된 사실이 신고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는 즉시 현장 점검을 실시하여 공사를 중지시키고 긴급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 조사에서는 그동안 실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 백제시대의 주거지 19기 및 그보다 이른 시기의 3중 환호 등이 조사되었고, 수막새 등의 기와 조각을 비롯한 각종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이 발굴을 계기로 서울 풍납동 토성 내에 백제시대 문화층이 잘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파트 재개발을 허용하는 대신 백제 문화층을 보존하여 계승하자는 원칙이 수립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서울 풍납동 토성 내 중요 지역에 대한 토지 보상 및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에 대한 연차적인 발굴 조사 결과 초기 백제시대 왕성의 증거로 볼 수 있는 특수한 건물지의 발견이 잇따르고 있다. 토성 내부 중앙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경당연립’ 재건축 부지에서는 동서 너비 16m, 남북 길이 18m 이상의 ‘呂’ 자 모양의 대형 건물지(44호)가 발견되었다. 북쪽 건물의 외곽은 ‘口’ 자 모양의 도랑이 감싸고 있는데 너비 150~180㎝, 깊이 120㎝ 정도로 일정하며 바닥에 2~3중의 대형 널돌이 깔려 있다. 이 건물은 내부와 외부를 도랑으로 차단한 점, 도랑 바닥에 널돌과 정선된 숯을 깐 점, 화재로 폐기된 점, 유물이 거의 없는 점 등으로부터 공공 성격의 제의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대형 건물지 남쪽에 인접해서는 9호, 101호 등의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길이 13.25m, 폭 550㎝, 깊이 240㎝에 달하는 9호 구덩이에서는 수차례의 퇴적이 이루어지면서 인위적으로 파손시킨 굽다리접시, 삼족기, 뚜껑 등의 제기류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었고, 제사와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大夫’와 ‘井’ 자가 새겨진 곧은입항아리와 12마리 분량의 말 머리뼈 등이 발견되었다.
44호 건물지 남쪽의 206호 유구는 신전 앞에 위치한 왕실의 우물로 밝혀졌다. 약 10m 가량의 네모반듯한 구덩이를 깊이 3m 정도 파내고 내부를 점토와 사질토를 섞어 다시 메운 후 중앙에 깬돌과 강돌을 채워 넣은 원형의 적석부를 두었는데, 바닥에는 4단으로 얼개를 만든 네모반듯한 판재 내에 220여 점의 토기를 층층이 가지런하게 매납하였다. 토기는 호(壺)와 병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대부분 의도적으로 구멍의 어귀를 깨트린 상태였고 그 가운데는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의 것들도 섞여 있었다.
이렇게 토기의 일부를 깨트리는 행위는 고대 제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로서 이 우물 또한 제사를 지내고 버린 토기를 모아 매납한 용도로 폐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성 외의 다른 지방의 토기들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것은 당시 백제의 영역 안에 있던 지역을 포괄한 뜻으로 볼 수 있어 국가적 차원의 중요한 제사를 지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왕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는 국가 행정을 담당하기 위한 관청 건물지와 관료 집단의 주거 구역 등도 빼놓을 수 없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한 풍납동 197번지 일대에서는 지름 16m, 깊이 1.2m의 원형 구덩이 안에서 와당 30여 점을 비롯한 기와류가 5천 점 이상 매몰된 것이 발견되었다. 와당과 십각형 주춧돌 장식, 토관 등 다량의 건축 부재들이 한데 묶여 출토된 것으로 보아 기와를 얹은 건물이 붕괴되었거나 주변의 궁전과 관청 건물 등에서 나온 건축 폐자재를 버린 폐기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구덩이 옆에서는 출입구 부분이 유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길이 21m, 너비 16.4m, 잔존 면적 약 344.4㎡에 달하는 초대형 건물지도 발견되었다. 이 주변에서는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워 기와를 얹은 지상식 건물터도 다수 발굴되어 이 일대가 관청 등 행정 시설이 밀집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 서울 풍납동 토성의 가장 특징적인 유구로 대형의 수혈(竪穴) 주거지를 꼽을 수 있다. 평면 6각형의 주거지는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된 것 외에도 한강 유역 전역과 임진강, 한탄강 유역에서 계속해 발견됨으로써 초기 백제시대의 중앙과 지방을 아우르는 고위 지배 계층이 차지하였던 전형적인 형태의 주거지로 평가되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는 남북 방향과 동서 방향으로 교차하는 도로도 발견되었다. 남북 도로의 경우 확인된 길이가 110m 남짓 되는데, 조사 구역 밖으로도 계속 연장되고 있어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도로의 너비는 7.5~8m, 깊이 20~30㎝ 정도로 도로 면의 기초를 굴착한 후 가운데 부분에 너비 4.5~5m 가량의 아주 작은 자갈을 렌즈 모양(중심부 두께 약 20㎝ 내외)으로 깔아서 길바닥을 조성하였다.
동서 도로의 윗면에는 부분적으로 얇고 편평한 돌을 깔았는데, 22m 정도만 확인되었다. 이 도로는 궁성 내 중요 공간을 분할하거나 관청과 같은 중요 시설을 감싸던 핵심 도로이거나 한강변에 인접해 있는 서쪽 성벽을 따라 조성된 물자의 운송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번지 일대 조사에서는 기존의 동서 도로에 연결되는 구상 유구가 2중, 3중으로 확인되었는데, 길바닥이 깎여서 나가고 양옆의 도랑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이 구상 유구를 따라 열을 맞춰 조성된 장방형 수혈 20여 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일대는 궁전으로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궁전 외곽에 조성한 창고 구역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관청 시설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와 고위 계층의 집단 거주지, 그리고 궁성 내 주요 공간과 시설을 분할한 것으로 보이는 잘 짜인 도로망 등의 존재는 서울 풍납동 토성이 체계화된 도시 구획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서울 풍납동 토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1997년 이래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궁전 및 제의 관련 건축물, 관청급 대형 건물들, 고위 관료의 주거지와 도로 등으로부터 백제 왕성으로서의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에 더해 1999년과 2011년 실시된 동성벽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너비 43m, 높이 11m가 넘는 규모의 판축 토성으로 밝혀짐에 따라 서울 풍납동 토성이 위례성일 가능성은 한층 높아졌다. 최근 실시한 토목공학자 등과의 융합 연구 결과 토성을 쌓는 데만 연인원 138만 명 이상의 노동력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고서도 제출되었다. 당시의 인구 규모와 사회 구조 등을 고려할 때 고대국가의 왕권이 확립되지 않고서는 추진할 수 없는 대역사로 볼 수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의 외곽에는 성벽을 방어할 목적의 도랑못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는데, 2015~2016년에 2011년에 하였던 성벽 외곽에 대한 발굴 조사를 다시 실시한 결과 외황(外湟)으로 보이는 도랑이 3개 정도 확인되었다. 외측 성벽에 3개의 인공 도랑못이 만들어졌다는 점은 토성을 안팎으로 확장하여 여러 차례 증축하였음을 입증한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2017년부터 서울 풍납동 토성 서성벽 구역에 대한 발굴 조사를 진행하여 문이 있던 자리의 존재를 밝혀 내었다. 2020년에는 성벽의 평면 조사를 실시하여 성벽을 쌓아 올리기 위해 시설한 여러 단의 나무 기둥도 발견하였다. 중심이 되는 1토루 내에서는 나무 기둥을 88~162㎝ 간격으로 박아 시설하였으며 총 6단에 걸쳐 나무 기둥이 확인되고 있다. 2토루와 3토루 내, 그리고 2토루와 3토루 경계에서도 나무 기둥이 박혀 있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 나무들은 성벽을 쌓아 올리기 위한 공법에 이용되었던 것들로 서울 풍납동 토성의 축조 방법과 공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999년 발굴에서는 이러한 나무 기둥들이 포함된 펄층 내부에서 10㎝ 내외의 두께마다 흙과 교대로 나뭇잎이나 나무껍질 등의 식물 유기체를 10여 겹 이상 깐 부엽층(敷葉層)이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부엽 공법은 백제 성곽 축조에 이용된 대표적인 토목 기술로 알려져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은 한강을 끼고 발달한 경제 도시로 당시 활발한 대외 교류의 흔적을 보여 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경당 지구에서는 유약을 바른 중국제 질그릇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196호 수혈은 길이 11m, 너비 5.5m 가량의 판재 창고로 추정되었는데, 유약을 바른 중국제 질그릇이 30여 점 발견된 것 외에 다량의 백제 큰독이 똑바로 주저앉아 출토된 것으로 보아 저장용 항아리를 보관한 시설로 보인다. 보고자는 유약을 바른 중국제 질그릇을 중국 서진 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용도를 중국과의 교섭 과정에서 사여(賜與) 받은 위세품(威勢品)들을 담았던 용기로 판단하였다.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는 동진제 자루솥 등 중국과의 교역을 암시하는 유물뿐만 아니라 왜계, 가야계 토기도 출토되었다. 197번지 일대 발굴 조사에서는 낙랑계 청동 포수, 부여계 은제 귀고리 장식과 점뼈, 북위계 연꽃무늬 기와와 월주요 계통의 청자 완 등 외래계 유물이 속속 출토되어 당시 서울 풍납동 토성에서 북방과 남방을 넘나드는 활발한 대외 교류 활동이 있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국내외 유물들의 연대를 볼 때, 서울 풍납동 토성은 서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한성 멸망기인 5세기 후반까지 존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 등 과학적 절대연대로도 뒷받침되고 있다.
의의 및 평가
이상의 고고학적 증거로부터 서울 풍납동 토성은 백제 한성 도읍기의 첫 왕성인 ‘하남 위례성’으로 인정되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 서남쪽에 조성된 석촌동 · 방이동의 왕릉급 고분군도 서울 풍납동 토성의 왕성 가능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이다. 이 밖에 삼국시대 도성의 특징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평지에 축조된 왕성을 방어하기 위한 배후 산성의 존재인데, 문헌에 명시된 아단성(아차산성)과 사성(삼성동토성) 외에 풍납동 토성 동쪽과 남쪽으로도 전략적 요새로서의 이성산성을 쌓거나 남한산에 목책과 같은 방어 시설을 설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비정되는 ‘하남 위례성’의 축조 이후 꾸준한 왕권 강화와 체제 정비를 도모한 백제는 고구려와 낙랑, 말갈 등 북방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몽촌토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확대 정비된 도성이 ‘한성(漢城)’으로 이해되며, 이러한 구조가 고구려에 함락되는 개로왕 대까지 이어져 『삼국사기』에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의 구조로 묘사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북성’이 바로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서울 풍납동 토성이 ‘하남 위례성’으로 존재하다가 '몽촌토성'이 추가로 축조되면서 한성 백제시대 도성의 구조는 서울 풍납동 토성 단일 궁성 체제에서 ‘북성’인 서울 풍납동 토성과 ‘남성’인 몽촌토성의 양궁성 체제로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풍납동토성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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