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기로 유명한 대구에 차츰 더위가 가실 때 쯤, 어김없이 도깨비들이 나타난다. K-리그 후기리그 돌풍의 주역, 대구FC. 익숙한 도깨비들 사이에 생소한 이름의 살인미소 도깨비가 출현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후기리그 혜성같이 나타나 대구의 허리를 든든히 책임진 진경선(대구,26) 선수. 그를 지난 15일 연습경기를 마치고 구단 사무국에서 만났다.
순조로운 출발로 부천SK(제주의 전신)에 입단해 순탄한 길을 걸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프로 데뷔 이후 4년이라는 시간동안 참 많이 울고, 아팠다. 대구에 처음 이름을 올렸을 때 다수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 알지 못했고, 의문에 쌓였었다. 그러나 미소를 머금고 대구의 잔디를 달리는 그를 통해 대구는 웃었다. 진경선, 그의 돌아온 K-리그를 들어보자.
New Face, 살인미소 도깨비 대구를 점령하다
행복한 2006년 여름, 그리고 가을을 보내고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는 그. 다사다난 했던 2006년을 보냈지만 힘들었던 지난해 가을과 올해 봄의 아픔 보단, 올해 후반기의 참된 시간들 덕분에 그는 싱글벙글 웃고 있다.
“대구가 후기에는 중상위 정도의 좋은 경기를 보였다고 생각하거든요. 나름대로 팀에서 열심히 뛴 것 같아서 너무 좋아요. 조금 더 잘 했으면 플레이오프 진출도 가능했었는데 고비를 넘지 못한 부분에 있어서는 또 많이 아쉬워요. 포항과의 경기에서만 이겼더라면 정말 대구가 최초로 진출할 수 있었을 텐데. 제가 그날 골도 넣었잖아요. 연달아 기분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었는데 많이 아쉬워요. 주위 분들도 안타까워 하셨고요.
저희가 그 경기에서 1대 0으로 리드하고 있는데, 마지막에 한골 내어줬잖아요. 팀 수비선수가 실수하고 제가 그 다음에 또 실수해서 그게 골로 이어진 거예요. 다리까지 뻗었는데 그 사이로 들어가서 각도의 조절이 아쉬웠죠. (웃음)”
“감독님과 코칭스텝 모두 많이 믿어주셨던 것 같아요. 믿고 뛰게 해주셨으니까, 좋은 기회를 잡았고 또 이만큼 뛴 것 같아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해서 속상한 면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후반기 모두 열심히 달렸기 때문에 그 마음 하나만으로 다 다독일 수 있는 것 같아요. 내년에 더 열심히 해야죠. 그럼 기회가 또 찾아 올 것이고. 지금 섭섭한 마음 계속 가지고 달려봐야 무어하겠어요.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니까, 거기서 안주하지 않고 또 달려야죠.”
전기리그, 컵대회 모두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대구. 다수의 주요선수들이 부상을 입으면서 대구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작년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어찌 보면 똑같은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하다면 팬들은 후기리그에 기대를 걸겠다는 마음을 품었고, 대구는 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새로운 선수들을 입단시켰다.
외국인 선수인 제펠손과 진경선, 두 명의 선수를 새로이 맞았다. 함께 입단한 제펠손의 프로필은 믿음직할 만큼 다양했고 기대를 불러 모았다. 제펠손과 반대로 진경선, 그는 알려지지 않은 무명으로 쉽게 말해 ‘저 선수는 왜 왔을까?’ 하는 치명적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기는 시작되지 않은 상황, 휘슬이 울리고 진경선은 대구 서포터들의 가슴에 안겼다.
“후반기 스스로 평점을 내리자면 10점 만점에 5점? (웃음) 열심히는 했는데 글쎄요. 저는 저한테 점수를 짜게 주고 싶은데요? (웃음). 팬 분들이 많이 우려할거란 생각보단 ‘어떻게 해서든 열심히 뛰어야 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일단은 제가 전혀 보여드린 것이 없었으니까요. 빨리 그라운드에서 달리는 모습 보여드리고 인정받는 방법밖엔 없었어요. 그 생각은 역시나 마음먹은 것처럼 이루어졌고 지금 뿌듯해요.”
“경기 마치면 서포터 분들께 인사하러 가잖아요. 단 한번도 서포터 분들께 경기 끝나고 다가갔을 때 제 이름을 불러주고 환호해주는 걸 들어보지 못했거든요. 근데 대구에 와서 서포터 분들이 제 이름을 불러주시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니까 너무 기분이 좋은 거예요. 행복해요. 열심히 뛰었는데 그 마음 알아주시고, 많이 아껴주시는 것 같아서 감사해요. (웃음)”
우려했던 마음들은 진경선이라는 이름을 오히려 품게 하고 또 믿게 했다. 프로라는 냉정한 세계에 다시 발을 내딛은 그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준 팬들이 있어 그는 행복했단다. 그리고 내년을 기약하며 멋진 모습 보여줄 것을 맹세한단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달리고 있다.
대구라는 낯설지 않은 곳에 둥지를 틀다
시작이라는 출발선에서 달려온 사람은 아무런 동요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간다. 다가올 장애물과 힘든 상황은 미리 출발선에서 생각했기에 피하고 또 가볍게 부딪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보다 조금 늦게 출발했지만 중간지점에서 함께 뛰고 있는 사람은 불안하다. 그들과 함께 뛴 시간도 적을뿐더러 생각할 시간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경선에게 위의 이야기는 절대 성립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빠르게 대구에 적응했고, 동료들의 손을 잡고 함께 달려 나갔다.
“감독님이나 코칭스텝분들이 편안하게 해주셨어요. 그리고 팀 선수들 중에도 대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선, 후배들이 많아서 금방 적응했죠. 제가 아주대학교 출신이거든요. 여름에 양구전지훈련 따라갔을 때도 아무런 불편함 없이 되게 편했어요. 다른 팀에 있을 때도 대구가 어떤 스타일이고 어떤 축구를 한다고 많이 들었었는데, 제가 직접 입단해서 겪어 보니까 들었던 그대로였거든요. 안팎에서 바라본 팀이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닥터선생님들께서 어느 날 그러시더라고요. ‘너는 여기 온지 몇 년 된 것 같다고’ 말예요. (웃음) 옆에 친한 동생인 (오)장은이도 있고, 편하게 시작했어요.”
내셔널리그 울산 미포조선에서 자리를 옮긴 그는 과연 어떻게 대구에 입단했을까? 궁금증으로 남아있는 그 질문을 던졌다.
“(오)장은이랑 친해요. 혹시 장은이의 특별한 선생님을 아시나요? 저도 그 선생님과 알고 지내거든요. 그렇게 다들 가족같이 지내요. 그러면서 장은이도 알았고요. 부천에 있다가 미포에 갔다가 십자인대 수술을 하면서 팀에서 나왔어요. 수술 이후에 선생님 옆에 있으면서 몸 만들고 있었죠. 회복을 해가면서 팀을 알아보아야 했어요. 다른 어느 분들보다 제 스타일을 잘 아시는 분이셨는데 대구를 말씀하시더라고요. ‘제 스타일과 대구가 맞지 않느냐’고 하시면서요.” “그래서 대구로 결정을 하고 일이 좋게 풀렸어요. 양구에서 시작했죠. 장은이한테 고마워요. 저를 믿고 자신의 신뢰를 걸고 추천해주었잖아요. 그래서 전지훈련에서 더 열심히 했고요. 훈련 마지막 날 코치님께 여쭤봤어요. ‘코치님 저는 어떻게 되나요?’ 라고 했더니 ‘당연히 와야지’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대구에 입단하게 되었죠. 모두들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어느 누군가가 자신의 신뢰를 바탕으로 다른 이에게 내 주변 사람을 추천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사람으로 인해 더욱 두터운 신뢰를 쌓을 수도 있지만 도리어 그 사람으로 인해 자신의 신뢰를 깎아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추천해 준 그도 단호했고, 진경선 그 또한 단호히 앞만 보고 달렸기에 뒤 늦은 출발임에도 불구하고 대구에서 당당히 인정받았음이 아닌가 한다.
프로의 시작, 그리고 내셔널 리그
대학 졸업반. 그러나 그는 어려움 없이 프로에 입단했다. 부천SK, 모두가 인정하는 명문구단에 그가 이름을 올린 것이다. 앞으로의 일은 장담컨대 순탄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의 앞길에 아니나 다를까 적신호가 들어왔다. 불과 프로 4경기를 마치고.
“제가 부천에 입단할 때는 ‘트루파니’라는 외국인 감독님이 계셨어요. 대학교 때 경기하는 걸 보시고는 부천에 입단하게 됐죠. 감독님 눈에 들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부천에 입단하게 되었어요. 입단 이후로 4게임을 연속해서 모두 출전했어요. 그런데 부천이 그 4경기 동안 한번도 이기지를 못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서 감독님 경질설이 돌기 시작했고, 멤버 구성을 감독님의 단독 결정이 아닌 코치님들이 참여하게 되었죠.
스타일이 맞지 않았나 봐요. 처음엔 교체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리다가 결국에는 교체선수에도 들지 못하게 됐죠. 또 시간이 흘러서 정해성 감독님이 취임하셨고, 나름대로 열심히 운동하려고 했는데 감독님하고 저랑 스타일이 맞지 않았나 봐요.”
“처음 프로에 데뷔해서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하고 어쩌면 기회를 잃은 것이었으니까, 많이 답답하고 화가 났었어요. 그래도 어떻게 해요. 스승은 스승인데 미워할 수도 없는 일이고 제 스스로를 탓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중에 당시 코치분들이 ‘미포 쪽에 선수를 필요로 하는데 가는 게 어떻겠냐.’ 라고 이적을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입단하게 됐죠. 우선은 다른 환경에서 뛰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야 제게 기회도 오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울산으로 내려갔고 앞으로 열심히 하자 다짐했는데, 일이 꼬이기 시작했어요. 또 감독님이랑 스타일이 전혀 안 맞았던 거예요. 제가 뛰어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 다른 자리에서 뛰어야 하니까 답답한 면도 있었고, 그러다 불만이 쌓였죠. 그래도 뭐 어쩔 수 있나요. 꾹 참고 열심히 뛰었는데 그 와중에 연습 게임 뛰다가 십자 인대를 다치게 된 거예요. 무릎 수술을 하게 되었고, 팀에서 나왔죠.”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적, 그러나 그 또한 그에게 시련을 안겨줄 것이라곤 생각조차 못했었다. 말 그대로 한순간 무(無)적 상태. 그는 좌절했다. 아니 스스로에게 실망했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만 둘 수 없었다. 우겨서 한 축구였기에 내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고 싶었다.
“솔직히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닌데.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많이 했죠. 그런데 제 스스로 진짜 부모님이 반대 하셨던 걸 하겠다고 한거였으니까. 제가 운동 안 시켜주시면 밥 안 먹고 죽을 거라고 까지 했었거든요. 그때서야 부모님께서 백기 들고 들어주셨던 축구인데, 일단 시작을 했으니까 끝을 봐야할 것 아니에요.
부천에서 2년, 미포에서 1년 하면서 결국은 악 밖에 안 생기더라고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얼른 접어버렸어요. 여기까지 와서 주저할 것도 없고 다시 일어서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대구 와서도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요.”
그만두지 않기를 참 잘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구의 2006 후반기 돌풍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는 대구의 역사에 없어선 아니 될 인물이 되어가고 있다.
밥식이, 단식 투쟁으로 축구 시작하다
남들에게 지지 않는 체력을 가진 그. 체력에 버금가는 밥 먹는 실력까지 갖춘 그에게 있어서 밥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그것을 누구보다 가까이 계시는 부모님이 잘 알고 계실 터. 축구가 좋아서 축구를 하고 싶었던 그에게 부모님은 쉬이 승낙의 깃발을 들지 않으셨고 그는 단식 투쟁에 나섰다. 밥식이의 단식투쟁, 그 하나만으로 영향력은 상당했다. “제가 장남이고 장손이에요. 저희 외가 쪽에 야구를 한 형도 있었고, 테니스를 한 형도 있었어요. 모두 실력들은 정말 좋았지만 잘 하다가 안 좋은 길로 빠져서 운동 그만두게 됐어요. 단순히 축구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셨어요. 그런 모습을 보아오셨으니까 충분히 걱정될 만했다고 생각해요. 또 운동하는 게 많이 힘드니까. 많이 반대하시다가 결국 제 의견을 들어주시고도 초반에 쉬이 포기하시지 않으셨어요. 계속 반대하셨죠. 전지훈련 다녀오면 살이 쏘옥 빠져서 오니까 걱정스러운 눈길로 항상 보셨죠.”
“그런 말씀도 하셨어요. ‘네가 공부를 하는 것도 싫고 못하고 그런 거는 엄마 아빠가 아무 말 안하겠다. 진짜 아무 말 안할 테니까 운동만 하지 말고, 학교만 다녀라.’ 하시면서요. 어릴때부터 서울까지 버스, 지하철, 버스 갈아타고 주말에 새벽운동 한다고 가니까 걱정스러우셨겠죠.
어머니가 요즘도 자주 그 이야기 하시는데, 제가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서 축구 안 시켜주면 밥 안 먹고 죽을 거라고 그러니까 시켜주셨거든요. 밥식이가 밥 안 먹는다고 하니까 (웃음) 자식이기는 부모님 없다고 하잖아요. 한편으로 죄송해요. (웃음)”
남들 보다 늦은 시작. 그는 중학교 때 비로소 그렇게 좋아하던 축구를 시작했다. 마냥 축구화를 신는 것도 좋았고, 신나게 볼을 차는 것도 좋았다.
“중학교 때 시작을 했어요. 남들 보다 조금 늦게 시작을 했죠. 제가 지금은 경기도에 살지만 어릴 때는 인천에 살았거든요. 집 근처에 부평초등학교가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 학교에 전학시켜 달라고 했어요. 부모님께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죠. 그러다가 교회에서 선교한다고 아이들을 모아서 게임도 하고 축구도 가르쳐 주고 그러더라고요. 거기 가입해서 같이 볼을 차고 했죠.
그러다가 그 전도사 분 중에서 남서울 중학교 코치분이랑 아시는 분이 계셨는데 저희 경기 보러 오셨다가 바로 ‘가자’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인천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다가 그리로 전학을 갔죠. 처음 시작은 그랬어요.”
우겨서 한 축구, 부모님께 죄송스럽지만 또 그러하기에 더 당당하고 싶은 그.
“올해 초까지만 해도 부모님께 죄송스럽고 그랬어요. 후기 들어서 대구 입단하고 경기 뛰면서 지금은 기뻐요. 부모님께서 매 경기 보러 오시고. 든든하고 감사해요. (웃음)”
다방구 절대금지, 엄지발가락은 내가 최고
힘들게 시작한 축구였지만 시작한 이후로 그는 웃음을 잃어본 적이 없다. 축구를 하게 되었다는 그 성취감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는 항상 웃는 모습으로 동료들을 맞이하고 또 팬들과 마주한다.
고등학교 시절 잊지 못할 다방구 놀이와 엄지발가락 사건, 그리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그의 모습에 관한 탐구를 시작하자.
“아니, 저는 웃고 뛰는 게 아닌데… 모르겠어요.(웃음) 학교 다닐 때도 그렇고, 힘든 체력운동 같은 거 하면 남들은 인상 쓰고 힘들어 하잖아요. 저도 똑같이 힘들어요. 그런데 남들이 ‘너는 안 힘드냐고 왜 웃고 있냐고’ 그러는 거예요. 나도 힘들어서 울고 있는데, 저는 웃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남들은 웃고 있다고 하니까. 할 말 없죠 뭐. (웃음) 웃는 얼굴하면 좋잖아요. 그죠?(웃음) 그래도 웃는 모습 덕분에 주변 분들이나 처음 보시는 분들이 순해 보인다는 말씀들을 자주 하세요. 좋다고 생각해요.”
항상 웃는 얼굴. 인터뷰를 한 날, 인터뷰 전에 있었던 대학팀과의 연습경기에서도 그는 경기 하는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쩌면 극한의 상황에서 미소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터뷰 중 학창시절 재미났던 이야기를 질문으로 던지는 경우가 많다. 선수들과의 어색한 부분도 풀 겸 던지는 질문. 그러나 본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선수들은 어쩜 하나같이 모두들 기자를 기절하게 하는 막강한 에피소드를 가졌는지 참으로 의문이 든다. 우리의 진경선 선수,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두들 배꼽을 주의하세요.
“저 고등학교 때 시합 날이었어요. 시합 날은 새벽이나 아침에 일어나서 체조나 뭐 가볍게 몸을 풀잖아요. 혹시 그런 게임 아세요? 지역마다 이름이 다른데 ‘다방구’라고. 술래 몇 명이서 나머지 사람을 잡고 터치를 해서 기둥에 서로 손을 잡고 … 뭐 이런 게임이 있는데 아침에 땀을 좀 흘리자 해서 그 게임을 했어요.
새벽이니까 어두컴컴하잖아요. 선배 형이 술래를 잡으러 막 뛰어가다가 갑자기 ‘딩 ~’ 하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우리 다 놀라서 쳐다봤더니 골대 기둥에 부딪힌 거예요. 그러고 형이 쉽게 말해 뻗은 거예요. 그날 이후로 감독님이 그 게임 절대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되게 혼내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웃겨요.(웃음)”
“아, 한 가지 더 있다. 고등학교때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제가 남들보다 엄지발가락이 좀 커요.(웃음) 육사구장에서 저희가 그때 대회를 하고 있었는데, 그 경기가 8강이었거든요. 제가 슈팅을 때렸는데 상대팀에서 태클을 건거예요. 그래서 실려 나왔죠. 제가 축구 시작한 이후로 처음으로 들것에 실려 나와 봤어요.
거기가 육사구장이니까 군의관들이 달려왔죠. 제 축구화 벗기고 양말 벗기고. 저는 발등을 다쳤는데 제 발가락을 딱 보더니 너무 크니까 부은 줄 알고 ‘아이고 큰일 났다’고 ‘부러진 거 아니냐’면서 난리가 난거예요. 진짜 다친 아픈 발등은 내버려 두고 발가락에 이상한 바셀린 같은 걸 발라주고 붕대를 칭칭 감아준 뒤에 큰 병원에를 가보라는 거예요.
발등을 다쳤는데 발가락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쳐다만 보고 있었어요. 혼자 버스에 가서 막 웃었죠.(웃음)”
그의 엄지발가락이 궁금해지는 상황. 가까운 시일 내에 그의 발가락 사진을 담을 수 있길 바래본다.
특별한 인연의 시작
고등학교 2학년, 황당한 엄지발가락 사건도 있었지만 그로 인해 특별한 선생님과 인연을 맺었다. 지난 4월에 가졌던 대구의 오장은 선수 인터뷰에서 함께 했던 특별한 능력의 그분을 그 또한 알고 지내고 있었다. 당장 아픈 곳을 치료해준 선생님, 그러나 이후 당장에 닥쳐온 아픔이 아닌 다가올 아픔까지도 함께 치료해줄 그 분이란 것을 그는 느끼고 있다.
“그 발가락 사건 경기 때 뵙게 되었어요. 그때서부터 인연이 되어서 만났죠. 저희 게임을 보러 오신 게 아니라 다른 선수들 치료해주러 오셨는데 제가 다친 걸 보고 걱정이 되셔서 저희 버스로 올라오셨어요. 제가 얼음을 대고 있는데 제 발을 보시고는 ‘선생님이 오늘은 이거 붓지만 않게 해놓을게. 며칠 있다가 치료해주러 갈게. 조금만 기다려라.’ 하시더라고요. 처음엔 긴가민가했죠. 진짜 오시려나 하면서.
저희가 4강 들고, 결승에 올라가게 됐어요. 마침 그때 또 비가 많이 와서 경기가 연기 됐어요. 선생님이 오셔서 오늘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뜸 떠주시면서 치료해주셨어요. 다음날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 저보고 뛰어보래요.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제가 진짜 뛰었거든요. 그걸 보시고는 조금 더 치료하자고 하셨어요. 되게 놀랐죠. 뛸 수 있으니까.
점심 먹을 때 까지 치료해주셨어요. 그리곤 그날 오후에 운동하러 나갔어요. 통증은 조금 있었는데 괜찮았어요. 그 다음날 경기에 뛰게 되었고, 어시스트 기록해서 저희 학교가 우승했죠.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세요. 다른 사람들한테 이런 이야기 하면 잘 안 믿으세요. 저는 제가 직접 겪었으니까요.”
특별한 선생님, 그의 아름다운 한걸음에 또한 힘이 되고 특별함을 안겨주는 분이 아닐까?
K-리그와 내셔널리그 그리고 아쉬움
축구를 통해 만나는 소중한 인연들. 하지만 그 행복한 시간에도 그는 항상 웃고만 있을 수 없었다. 부천에서 미포로 자리를 옮겼을 때 그는 고작 한손에 꼽을 법한 경기수를 기록했고, 짧은 시간 동안 보여주어야 했다. 많은 아쉬움이 남는 지난 시간이지만 그래도 그는 배운 것이 많다며 미소를 건넸다. 두 리그를 모두 경험한 그에게 오늘날의 K-리그와 내셔널리그를 물었다.
“K-리그는 두 말할 것 없이 많이 성장했어요. 선수들도 많이 노력하고 있고 좋은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내셔널리그와 비교했을 때 큰 차이와 작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선 내셔널리그 같은 경우는 상위팀들과 하위팀들의 차이가 커요. 내셔널리그 상위의 몇몇 팀은 K-리그로 올라와서 경기를 치러도 문안한 팀들이에요. 하지만 다른 팀들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리그 자체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고양 국민은행이 우승을 하면서 K-리그 승격을 놓고 이야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크게 신경을 두고 있었던 부분은 아니지만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서 올라온다면 아주 좋은 일이 아닐까 했어요.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조금 아쉽긴 해요.
잉글랜드처럼 팀이 20개 정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업다운제가 시작이 되면 신날 것 같아요. 내셔널리그 팀들은 K-리그로 올라오려고 노력할 것이고, K-리그 팀들은 내려가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고. 재밌을 것 같아요. 팀이 많아지고 다양해짐으로써 그만큼 K-리그도 많이 발전할거라고 예상해요.”
지치지 않는 체력, 그리고 화려한 골반
다양함과 여러 발전이 기대되는 K-리그. 이곳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달리고 있다. 대구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펼치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지치지 않는 체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좋은 체격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힘 있고 빠른 플레이, 그리고 경기 시작1분과 경기마감 90분의 모습이 같은 선수. 그가 진경선이었다.
“열심히 뛰어야죠. 체력하나 만큼은 다른 팀 어느 선수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 있어요. 달리 유지하는 비법이나 방법은 없는데, 쉴 때 잘 쉬고 먹는 걸 열심히 잘 먹어요. 밥을 제가 진짜 잘 먹거든요. 남들에게 지지 않을 만큼 먹는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시즌 중에는 먹는 기쁨을 줄여야 하죠. 조절해야하니까 적게 먹어요.
저희 집이 식당을 하거든요. 공기밥 3 ~ 4개 정도 먹는 것 같아요. 식구들끼리 밥을 먹어도 어머니랑 누나랑 밥을 자연스럽게 저한테 다 덜어주세요. 그럼 제가 다 먹죠. 남기지 않고. 대신에 군것질을 하지 않아요. 쉴 때 잘 먹어야 한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잘 먹고 잘 쉬어야죠. (웃음)”
“쉴 때는 산에 오르는 걸 좋아해요. 걸어 올라가는 것도 힘들지만, 그런 산을 뛰어올라가는 걸 좋아해요. 한번씩 텔레비전에 나오잖아요. 에베레스트 등정. 이런 이야기 나오면 ‘아, 이다음에 은퇴하면 나도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도 가진 적이 있어요.
한라산도 대학교 때 7시간 코스를 2시간 반 정도에 왔다갔다 오고. 제가 좋아하는 산을 오르면서 또 제 직업상 도움을 받게 되는 것 같아요. 기본 체력운동도 되고 폐활량도 좋아지고, 여러모로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제가 쉽게 지치지 않는 것도 산을 오르면서 다져놓은 것이 아닐까 해요. 체력만큼은 자신 있어요.(웃음)”
아마 시간이 흘러 어느 날 텔레비전을 켰을 때 헤드라인 뉴스 속보에 ‘한국인 최초 축구 선수 에베레스트 등정!’ 이라는 말이 나오면 자연스레 진경선이 도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듯하다.
산을 좋아하고 절대 체력을 가진 그이지만, 그도 축구선수. 이리저리 선수들과 몸을 부딪치고 넘어지고를 반복하기에 그의 뼈들은 아프다. 또한 그의 골반은 특별했다.
“대구에 와서 메디컬 테스트 받았어요.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의사선생님 소견을 들으러 갔는데 저보고 무슨 남자가 이렇게 골반이 벌어졌냐고 막 그러시는 거예요. 여자도 아니고 혹시 애 낳은 적 있냐고 하시는 거예요. 어찌나 웃기던지. 솔직히 너무 민망했어요. (웃음) 당시에 메디컬 테스트를 받은 선수가 저랑 비슷한 시기에 온 제펠손이라는 외국인 선수가 있었어요. 같이 앉아서 소견을 들었거든요. 제펠손 보고는 이 선수는 너무 깨끗하다고, 운동안한 선수 같다면서 좋다고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어깨 수술도 했었죠, 무릎 십자인대 수술도 했었죠, 또 오른쪽 축구화 끈을 꽉 못 묶었었는데 이번에 알고 보니 고등학교 때 다친 발등에 뼈 조각이 있대요. 딱 비교가 되잖아요. 의사선생님이 ‘아니 진경선 선수는 고생을 이렇게 많이 했어요’하면서 ‘어깨에 핀 박혀있지, 무릎에 핀 박혀있지, 발등에 뼈 조각 돌아다니지, 애 낳은 것도 아니면서 골반 넓지.’ 골반은 스트레칭을 많이 해서 그런가? (웃음)
운동하는 사람이니까요. 아픈 곳은 당연히 생긴다고 봐요. 덜 다치게 노력하고 주의해야죠.”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사랑하는 이들
나의 아들이, 동생과 형이 겪는 아픔에 가족들도 늘 걱정을 안고 사는 것이 운동선수의 집이다. 아프지만 ‘아프다’는 말보단 ‘괜찮다’라는 담담한 미소를 전해야하고 또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손을 맞잡는다. 그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지만 시간이 흘러도 절대 가족들에게 있어선 아픔일 상처. 그것을 알지만 그는 푸른 그라운드를 버릴 수 없었고 또 고집을 세웠다.
“항상 기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 제가 지켜 드려야하는 존재이기도 하잖아요. 집이 식당을 하는데 어머니랑 아주머니들이 하시니까 아버지는 크게 하실 일이 없으시잖아요. 동네 근처에 건축 폐기물 처리하는 곳에 일을 하러 가시는 거예요. 자식들 입장에서는 안가셨으면 하는데 ‘심심하고 집에서 놀면 뭐하냐고, 용돈이라도 벌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말리고는 있는데 그래도 계속 하셔요. 그런 모습 뵐 때면 가끔 속이 상할 때도 있지만 좋아서 하신다는데 말릴 수도 없고 그래요.
어렸을 때는 제가 개구쟁이고 그랬는데 운동시작하고 나서는 말썽을 부리거나 했던 것이 없었어요. 주변의 친구들 중에 조금 나쁜 곳에 있는 친구들도 있는데 그런 모습을 보시고는 어머님이 그러세요. 너는 운동한 게 다행이라고. 크게 속상하게 했던 일이 없다고 하세요. 오히려 축구가 저를 바꾸어 놓은 것이니까요. 아프지만 않고 열심히 사는 모습 보여드려야죠.
그리고 꼭 아버지 꿈을 이뤄드리고 싶어요. 지난번에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열심히 해서 잘되면 조그만 지프차 하나 가지고 제 경기 보러 다니시는 게 꿈이시래요. 꿈을 이뤄드려야죠. 열심히 노력해야죠. 어찌 보면 자식으로서 충분히 해드릴 수 있는 것인데 진즉에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스럽고 얼른 더 많이 성장해서 꼭 이뤄드릴 거예요.”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마음 편히 경기장에서 마주하는 날,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꿈을 실현하고 그의 꿈을 실현하는 날이 아닐까.
“집에서 항상 떨어져 있었잖아요. 지금도 그렇고, 그래도 부모님 곁에 아직 누나랑 남동생이 있어서 다행스러워요. 누나는 지금 고등학교 영어선생님인데 어릴 때도 개구쟁이인 저를 참 많이 도와주었어요. 누나 이야기 하니까 생각나네요. 초등학교 때 그런 일이 있었어요. 학교에서 독후감을 써오래요. 그런 거에 제가 별 소질이 없으니까 누나한테 써달라고 하고 제가 그거 베껴서 손으로 써서 냈죠.
그런데 어느 날 학교를 갔는데 방송으로 ‘3학년 3반 진경선 지금 바로 교무실로 와라’면서 나오는 거예요. 제가 굉장히 개구쟁이였다고 이야기 드렸잖아요. 친구들도 때리고 다니고. (웃음) 그래서 혹시 또 그 친구 부모님이 오셨나 하면서 갔어요.
그런데 그게 아닌 거예요. 오늘 월요일 아침 조례를 하는데 단상에 올라가서 상을 받으라는 거예요. 누나가 써준 그 독후감이 시 대회까지 올라가서 상을 받은 거예요. 당황했죠. 그래도 좋았어요. 누나는 그런 걸로 상을 많이 받아서 별로 기분 나빠 하지 않더라고요. (웃음)”
그가 집에 가는 날이면 달라지는 밥상위의 반찬들. 늘 그렇듯 누나와 동생의 장난스런 투정이 이어지지만 그는 한편으로 고맙고, 참 미안하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어느 누구에게 특별히 주신 사랑이 아니라 두루두루 아낌없이 나눠주신 그 사랑이 있기에 삼남매는 언제나 따뜻하고 즐겁다.
“동생은 지금 군대 다녀와서 건축 쪽에서 일을 해요. 졸업할 학년인데 일이 잘 풀려서 교수님 소개로 일을 하게 되었다더라고요. 다들 잘 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아요. 전화도 자주하고 그래요. 근래에도 어머니 생신이여서 누나한테 돈 보내고 좋은 거 사드리라고 그랬죠. 가족들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다는 게 참 행복해요.”
그도 어느새 20대의 후반에 다다르고 있다. 결혼이라는 달콤한 기쁨을 그도 이제 만나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초등학교 동창인 그녀를 만나, 그녀가 재수를 하는 1년의 시간을 기다리고 작은 먹을거리에 정성을 담아 건넸던 20살의 기억. 이제 어느 덧 풋풋한 커플이 잘 익은 결실을 맺으려 한다.
“사귄지 7년 됐어요. 저는 인천 살다가 경기도로 이사를 왔으니까 연락이 안됐는데 다른 동창들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만나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이모님 댁에서 지냈었어요. 이모님은 아직 인천에 계시는데 운동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가까운 운동장에 나갔는데 때마침 조기 축구하러 온 동창이랑 만나게 됐어요.
그러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모임을 가지게 되었죠. 거기에 지금의 여자친구가 나온 거예요. 다시 만났는데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웃음) 저는 아주대학교에 입학하게 됐고, 여자친구는 재수를 하게 됐죠. 재수를 하는 입장에서 남자친구 사귀고 하는 자체가 좋지 않잖아요. 그래서 꾹 참았죠.”
“수능 치기 전에 조금씩 연락하다가 뭐 먹을 것도 보내주고 하면서 이어 왔어요. 그러다가 수능 끝날 때 쯤 저희 축구부 신입생 환영회하고 환송회 하잖아요. 그때 파트너가 필요했는데 제가 부탁을 했죠. 여자친구가 흔쾌히 허락을 했고, 행사에 왔는데 선배들이 많이 분위기를 몰았죠. ‘너희 무슨 사이냐’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졌죠. (웃음)
너무 잘해주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7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해왔고요. 운동선수의 곁에 있다는 자체가 많이 힘들고 지칠 텐데. 그런 것들로 많이 싸우기도 했어요. 그런데 또 많이 참아주었고. 감사하죠. 고마워요. 결혼 해야죠.”
서로가 서로를 기다려주며 7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고 그 안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앞으로 남은 시간들이 더 많기에 그는 해주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안함 보단 무얼 해줄까 하는 생각으로 지내는 듯 하다.
잊지 못할 2006년, 다가올 2007년을 준비하며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는 더욱 열심히 달려야 한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가족과 그녀에게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달려 여기까지 왔고 아직 달려가야 할 곳이 많이 남아있다.
변함없이 앞을 향해 전진하고 또 전진하면 언젠가 그 끝에 새로운 무언가를 만나 또 달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달려온 2006년, 그는 기쁜 마음으로 한해를 보내고 다가올 2007을 기대한다.
“2006년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다시 시작한 해이기도 하고 프로 데뷔 첫 골도 기록했잖아요. 무언가 정말 해볼 만 했고 또 해낸 한 해였던 것 같아요. 아참, 그날 제가 골 넣은 거 장은이가 어시스트 했잖아요. 골 넣고 제가 막 달려가는데 장은이가 뛰어와서 다리 걸어 넘어뜨려서 막 때리려고 했대요. 그래서 다리를 걸었는데 안 넘어가더래요. (웃음) 버티려고 버틴 게 아닌데, 그렇게 됐죠. 넘어갔으면 얼굴에 멍투성이가 됐겠죠? (웃음)
이번에 또 팀에서 상을 주신데요. 처음엔 무슨 상인가 싶어서 그냥 긁적긁적 했는데 받는 다니까 좋긴 해요.(웃음) 하지만 오래된 선수들도 있고 저는 늦게 합류했는데 받을 상인지 모르겠어요. 쑥스럽죠. 그래도 주신다면 감사히 받아야죠.(웃음)
상금 받으면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웃음)”
“올해 저희 팀에 FA선수들이 가장 많아요. 또 감독님도 바뀌셨고요. 선수변동이 가장 클 것 같아요. 새로운 선수들이 들어오면 제 플레이에 맞추어라 하는 것 보단 제가 받쳐주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지금까지 그렇게 노력했고요.
박종환 감독님 스타일은 1:1 스타일인데, 신임 변병주 감독님께서는 지역방어는 사용하실 것 같더라고요. 감독님 하고는 아직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진 않았는데 코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지금 변화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플레이 부분에서는 선수들이 조금 익숙하지 않아서 적응이 안 되고 있는데 다들 금방 적응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많이 도와주시고 노력해주시니까 저희도 덩달아서 노력하게 되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올해보다 내년에 더 좋은 결과를 내지 않을까 해요. 열심히 해야죠.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열심히 뛰어야죠.”
‘열심히’ 라는 말이 헛되지 않게
신인 아닌 신인. 그를 만나 인터뷰를 하는 내내 나는 그랬다. 신인 아닌 신인을 인터뷰하고 있다고. 좋은 출발이었지만 크게 빛을 보지 못한 그에게 베테랑의 자세를 논하기 보단 그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팬들의 입장 또한 그렇지 않을까 한다.
2006년이라는 일 년의 시간동안 그는 반의 시간에 고통을 즐겼고, 또한 반의 시간에 행복을 만났다.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릴 수 없는 법. 그는 그 진리를 알았기에 흘러간 시간에 안주하지 않고 먼저 한걸음을 옮겨 대구에 입단했다.
2007년 대구는 많이 변화할 것이다. 지금부터 변화를 시작했고 다가올 내년은 큰 성장을 기대하게 한다.
연습경기에서 만난 신임 대구FC 변병주 감독이 진경선 그와의 인터뷰에 꼭 한마디를 전하고 싶다 했다. 정말 좋은 선수라고, 2007년 자신이 시작하는 첫 걸음에 없어서는 안 될 그런 멋지고 든든한 선수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특별하다. 주변의 특별함이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특별하다. 2006년 후반기 잠깐의 돌풍을 일으킨 주역이 아니라, 2007년 당연한 그라운드의 주역으로써 만날 수 있길 소망한다. 앞을 보고 먼저 한걸음 내 딛어라. 그리고 자신감 있게 결정하라. 그 시간 당신은 이미 Special로 우뚝 섰다.
“미니홈피를 다시 열었어요. 팬 분들이 파도를 타고 오셔서 쪽지도 남겨주시고, 일촌도 맺어주시고 그래주세요. 너무 좋아요. 기운도 나고, 또 저를 믿어주신다는 그 한마디가 힘을 내게 해요.
후반기에 대구로 와서 게임을 많이 뛰었어요. 그전에 겪었던 힘든 시기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고 또 더 독하게 마음먹을 수 있는 좋은 발판이 된 것 같아요. 열심히 라는 말. 그 말이 참 아름답고 참된 말이 되게 달리겠습니다. 항상 지켜봐주시고, 또 함께 마음으로 달려주세요. 좋은 경기로 보답하겠습니다. 2007 대구FC를 기대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첫댓글 미소가 아름다운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