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는 누구인가?
김구(1876~1949)의 본명은 김창수,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조정을 주무르다 효종의 북벌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한 죄로 능지처참을 당했던 김자점의 손자다.
그는 1896.1.24.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의 한 주막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일본인 행상 ’쓰치다 조스케‘를 몽둥이와 돌멩이로 무참하게 살해한 후 그가 타고 왔던 쪽배에 들어가 금품을 훔쳤다.
그래놓고 ’백범일지‘에서는 국모를 살해한 일본 중위 ’쓰치다 조스케‘를 살해했다고 미화시켰다.
이로 인해 그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인천 감옥에 갇혀 있다가 1896.3.19. 탈옥했다.
이것을 놓고 ’백범일지‘에서 고종이 인천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 극적으로 살려주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가 개통된 시점은 그가 탈옥한 지 6개월이 지난 9월이었다.
일본군 중위가 쪽배를 타고 다니면서 장사를 했다니 아무리 거짓말이라 해도 지나친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탈옥을 해놓고도 고종이 사면시켜 주었다고 사실을 둔갑시킨 것이다.
「김구의 반역 행위 3가지」
1. 간첩 성시백에 넘어가 이승만을 공격했다.
평양 신미리에는 애국열사릉이 있고, 거기에는 남한에 반역한 인물들이 1.5m의 대리석 비를 세우고 누워 있다.
그 제1호가 성시백이다.
성시백이 김일성에게 애국열사 1호로 뽑힌 이유는 그가 김구를 포섭했다는 것이었다.
2. 김구는 1948년 제주도 등에서 건국을 방해하는 붉은 세력들이 준동할 때 부하들이 지키고 있는 집의 담을 몰래 타넘어 4월 19일 북으로 갔다.
김일성이 괴뢰 정권을 세우기 위한 연석회의에 나가 “남한은 거지 사회인데 반해 북은 풍요롭다”는 투의 내용으로 김일성을 띄우는 연설을 했다.
일본이 투자한 자산들이 북에 집중됐기 때문에 당시 북은 남보다 3배 더 부자였다.
3. 건국 후에도 김구는 건국을 인정하지 않고 방해했다.
그러다 애국청년 장교 안두희의 총에 맞아 저세상으로 갔다.
이런 김구를 누가 띄웠는가?
이 부분이 바로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김구는 이승만 대통령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순전히 질투심 때문이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김구를 역적으로 평가했다.
그다음 박정희가 대통령이 됐다.
박 대통령이 이순신과 김구를 역사적 인물로 선정했다.
전두환 대통령도 이를 계승했다.
그러면 두 대통령은 왜 김구를 띄웠을까? 전두환은 박 대통령의 후계자인데다 국가 발전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역사에 대해 그리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왜 김구를 이순신 반열에 올려 놓았을까??
박 대통령에게 이승만은 누구이고 김구는 누구였을까?
박 대통령은 왜 건국 대통령에게 가혹했고, 건국을 끝까지 방해한 반역자 김구를 역사적 인물로 선택했을까?
대단한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역사가 중요하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역사를 몰랐던 것이다.
그 역시 전두환처럼 무인으로 대통령이 되어 국가 발전에만 전력투구했지, 역사를 따로 공부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해방 직후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한 소련과 김일성이 한국 역사를 장악하여 조작해 놓은 공산당식 역사를 진실한 역사라고 잘못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가 남로당 조직책에서 인생을 시작했기 때문에 남로당이 떠받드는 김구를 비판없이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오늘날 남한의 역사를 빨갱이 역사로 둔갑시키고 있는 주역은 단연 남민전 간첩 ’임헌영‘이 이끄는 ’민족문제 연구소‘다.
민족문제 연구소는 김구를 애국적 ’영웅‘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매국노‘로 평가하고 있다.
박 대통령에게 김구를 추천하고 공훈공적서를 작성해 올린 사람은 이병도와 신석호다.
이 두 사람에 대해 민족문제 연구소는 ’친일파‘라는 굴레를 씌웠다.
’민족문제 연구소‘와 ’친일파‘ 이병도 및 신석호가 선정한 인물 ’김구‘를 애국적 영웅이라 섬기고 있는 것이다.
「’백범일지‘는 이광수가 조작한 소설」
이광수가 쓰면 악어가 사자가 되고, 쥐가 고양이 된다.
백범일지에는 거짓과 과장이 많다.
김구는 그가 56세였던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에게 폭탄을 주었다.
그리고 두 젊은 청춘은 사라졌다.
폭탄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다면 애초에 일본에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애국심을 가지고 이들에게 폭탄을 주었을까??
그의 근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1947년 7월,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라는 당대의 거물들이 갑자기 암살을 당했다.
미 군정은 그 배후가 김구라는 점을 지목하고 수사를 벌였지만 김구는 빠져나갔다.
반면 김구의 졸개였던 8명(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등) 최측근들은 교수형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렇듯 김구는 폭력과 살인의 아이콘이었던 것이다.
「결론」
여기까지의 이야기들에는 다 증거들이 있다.
나도 역사에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5.18을 공부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모두 왜곡됐을 것이라는 가정을 했다.
그래서 역사 그것도 해방전후사에 대해서 그리고 운동권 역사에 대해서 동시에 집중 공부하게 되었다.
김기현 국힘당 대표의 발언 “이미 평가가 종결된 역사에 대해 왜 딴소리를 하느냐”는 매우 위험천만하고 천박한 발언이다.
이 세상에 평가가 끝난 역사가 어디 있는가?
사실 자료와 평가하는 인물들의 두뇌는 늘 새롭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김기현 대표를 비롯한 정치인 범생이들은 역사 공부 좀 하라!!
모든 역사가 ’평가가 종결된 역사‘라면 역사학이라는 학문분야가 없어져 버려야 할 것이다.
<김석영 글>
* 김자점이 처형당한 것은 아들 김식의 역모 때문이었다.
* 1896년 3월 김구(당시 이름은 김창수)가 무장 상태[10]의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譲亮)를 살해한 사건. 대개 이 사건은 백범일지의 기록에 근거해 김구가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일본 군인을 죽인 의거라고 알려져 있다.
김구는 “국모를 시해한 일본인”을 살해하여 원수를 갚고자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살해 후 그가 일본군 장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반대로 일본 측의 기록에 따르면 쓰치다 조스케가 쓰시마 섬의 이즈하라 출신 상인이며 계림장업단이라는 상회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을미사변 관련인을 처단한 것이라는 김구의 증언과 계림장업단 소속의 약재상을 살해하고 엽전 800냥을 갈취했다는 일본 측의 기록에는 모두 당시 정황과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사건 당시 을미사변에 관련된 일본인들은 일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관계로 김구의 증언이 잘못되었다는 의견[11]이 있고, 치하포 사건은 1896년 3월 9일인데 그 살해당했다는 상인이 소속되어 있다는 계림장업단이 생겨난 건 1896년 5월 17일인 오류가 있으며 엽전 800냥도 김구가 가져간 것이 아니라 주막 주인이 그대로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일본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 사건을 우발적인 강도살인으로 왜곡했다는 학설[12]도 있다.
백범일지에서는 사형 직전에 고종이 사흘 전에 개통된 첫 시외전화로 사면하여 살렸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 사실은 진위가 의심되었으나 각종 사료의 발굴 이후 전화 자체는 개통된 걸로 밝혀졌다. 다만 살인죄가 사면되었다는 부분은 거짓으로, 사형집행 허가가 내려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위 내용이 여태것 몰랐
던 사실도 있고 역사상
왜곡된 부분도 있어 참
고 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