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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건축가
마 7:15-29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7:15-29 /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눅6:43-44] 순진한 양의 가면을 쓰고 오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 마음은 이리 같아서 너희를 찢어 삼킬지도 모른다. 16) 열매를 보고 나무를 분간하듯이 그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을 분간할 수 있을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어찌 포도를 따먹을 수 있겠느냐? 엉겅퀴에서 어찌 무화과를 따먹을 수 있겠느냐? 17) 이와 같이 과실나무의 좋고 나쁨은 그 열매를 가지고 구별한다. 18) 좋은 나무에 나쁜 열매가 맺힐 수 없고 나쁜 나무에 좋은 열매가 맺힐 수 없다. 19) 먹지 못하는 열매를 맺는 나무는 찍혀서 불에 던져지고 만다. 20) 그러므로 나무나 사람은 다같이 그가 맺는 열매의 종류에 따라 구별이 되는 것이다. 21) [너희를 알지 못한다;눅13:25-27]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22) 심판 때에 많은 사람이 `주님 ,주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23)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람이 아니다. 물러가라, 이 악한 자들아!' 24) [듣고 실행하라; 눅 6:47-49] 내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사람은 든든한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25) 비가 쏟아져서 홍수가 나고 폭풍이 휘몰아쳐도 그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반석 위에 지었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내 가르침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쏟아져서 홍수가 나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28) [예수의 권위] 예수의 설교를 들은 군중은 매우 놀랐다. 29)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큰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천국 백성은 새로운 삶의 기준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15-20)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탐욕과 거짓의 수단으로 삼는 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겉으로 화려한 말과 종교적 행위로 믿는 자들을 미혹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그리스도인을 비진리 가운데 빠지게 만듭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이 천국의 백성과 지도자의 판별은 성령의 열매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갈 5:22-23). 아름다운 열매 맺지 않은 나무는 못된 나무인 까닭에 마지막 날에 찍어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21-23) “주여, 주여” 부르는 사람은 예수님께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자세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는 겉으로만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연극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못된 나무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주로 부르며 행했던 많은 기사와 이적들이 있더라도 재림의 날에 주어질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는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자기 열심과 자기 의로 행하는 모든 일은 불법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그때의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24-29) 본 단락은 산상수훈의 결론입니다. 말씀 위에 집을 짓는 자는 하나님의 원칙으로 사는 사람으로 자기 인생의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건축가입니다. 반면에 입술로는 신앙을 고백하며 말씀에 동의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순종하지 않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세운 어리석은 건축가입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선택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 그리고 순종과 불순종. 그 선택의 결과로 생명과 멸망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믿고 순종하여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생명이 충만하길 바랍니다.
적용: 당신은 경험의 터 위에 인생의 집을 짓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의 터 위에 성령 안에서 들려주시는 대로 순종하는 지혜로운 건축가가 되려면 지금 당신이 내려놓아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고귀하신 하나님이 친히 낮고 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을 이해하셨습니다. 굶주림, 헐벗음, 집이 없음, 병든 몸, 억울함과 비참함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친히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어느 대상이든 상대방을 이해하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 설 교 >
열매로 알리라
마 7:15-20 / 이기복 목사(하늘문교회)
나무는 그 나무의 열매를 보고 무슨 나무인지 구별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 사람이 어떤 열매를 맺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평가됩니다. 우리가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옛말에 ‘열 길 물속 깊이는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법칙을 하나 제시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는 원칙입니다(You shall know them by their fruits). 그리고 이어서 나무와 열매의 법칙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1. 가짜와 거짓을 삼가라(15절).
15절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가짜의 열매를 맺은 사람들이나 사상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무나 다른 곡식의 열매는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 사과나무는 사과 열매를,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맺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가시떨기에서 무화과 열매가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거짓 선지자들은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고 마치 순진한 양처럼 가장을 하였으나 그 속에는 이리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이단들의 정체입니다. 이단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알고 가르치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이리와 늑대 같은 아주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단일수록 더욱 그럴듯한 교리를 가르치고, 사단과 같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을 하고 믿는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하나 둘 들어오지만 나중에는 교회를 통째로 먹으려고 하는 영적 도둑들이 있습니다. 삼가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가라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2.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17-18절).
본문 17절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 열매를 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나무가 좋아야 좋은 열매를 맺고 나무가 나쁘면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무는 보잘 것 없는데 열매가 너무나 좋은 그 나무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대를 이어 오래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당대에 믿어 연조가 오래되지 않는 성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누가 좋은 성도입니까? 좋은 열매를 맺는 성도입니다. 그런 성도는 누구나 좋아합니다. 상경은 흔히 인생을 나무에 비유하였습니다. 시 1:3절에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열매가 맺습니다. 그런데 좋은 열매가 되는 비결은 가장 좋은 나무요 완전한 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이면 됩니다. 이 세상에 가장 좋은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접붙이면 최고로 좋은 열매가 열립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3.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임을 당합니다(19절).
19절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유대 광야에서 외치기를 “너희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고 아무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에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절에는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에 대하여 23절에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리라 하리라“고 엄중히 경고하였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나름대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잘라 불에 던진다는 것입니다. 불에 던진다는 것은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심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이 세상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버림을 받습니다. 사람은 세상에 살면서 모든 면에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험도 치루고 결과에 따라 상도 받고 벌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열매가 맺도록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성령의 9가지 열매와 입술의 열매, 전도의 열매, 선행의 열매 등 모든 면에서 열매를 많이 맺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봄에 꽃이 피어 꽃샘추의로부터 여름의 무더위와 가뭄과 때로는 폭우와 마지막에는 태풍까지 불어 닥치는 그 모진 환경을 이기고 탐스런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이 우리도 어떤 환난과 시련과 어려움이 있어도 잘 이기고 좋은 열매, 탐스런 열매 그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알곡 성도가 되어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큰 유익과 기쁨을 주며 마지막 날에는 저 천국 하늘 곡간에 들어가는 복을 받읍시다.
양의 옷을 입은 이리들
마 7:17-20 / 이삼규 목사(낙양교회)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왜 성경에서 그렇게도 많이 경고하였을까요? 세상에 속임수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아주 교활하게 교묘하게 사람을 속이므로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속이는 사람은 이리의 옷이 아니라 양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양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세의 상황을 미리 말씀해주셨습니다.
마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심지어 택함을 받은 자들도 그들의 표적과 기사 때문에 미혹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예언이 들어맞지 않으면 그들이 거짓 예언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예언자가 미리 말할 것들이 딱딱 들어맞으면 그 사람이 진짜 예언자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물론 구약 성경에 예언에 관해서 설명한 구절이 나타나기는 합니다.
신 18:22 /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그러나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내는 다른 기준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기준을 설정해 주셨습니다.
거짓 예언자 찾아내기
구약에 나오는 발람은 타락한 예언자였으나, 이스라엘에 관하여 정확하게 예언하고 심지어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예언적 말은 옳았을지라도 그의 열매는 옳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계 2:14 /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뇌물과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할 수 없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짓도록 유도하여 저주를 받게 하는 방법을 발락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게 죄의 구덩이로 유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만 사천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에 빠져서 전염병에 걸려 죽었습니다(민 25:9).
발람의 예언은 모두 다 들어맞았으나, 그의 열매는 사악했습니다. 발람은 거짓 예언자였고, ‘예언자’라고 불렀으나 전쟁 중에 이스라엘의 칼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수 13:22 /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살육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점술가 발람도 칼날로 죽였더라
그러므로 구약의 예를 보더라도, 예언이 맞는지의 여부가 거짓 예언자를 구분하는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진짜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려내는 하나님의 정확하고 올바른 기준을 구약에서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신 13:1-5 /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3)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4)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5) 그런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발람의 삶과 사역의 열매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이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어떤 열매입니까?
갈 5:22-23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진정한 예언자라면 그들의 삶에서 이러한 열매가 보여야 합니다. 믿는 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을 알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 13:35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좋게만 대해 주는 것을 넘어섭니다. 남을 기분 좋게 해 주려고 어르고 달래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여자를 황홀하게 대해 줄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성적으로만 이용하려는 남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상냥하게 미소 짓고 그럴듯하게 말을 늘어놓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고후 5:16 /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우리는 사람의 성격으로 그를 알지 못합니다. 성격은 우리를 속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으로 사람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가 분별되어야 합니다. 분별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동기와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중심에 들어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에게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감각이 계발된다고 밝힙니다.
히 5:14 /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제대로 분별하기 위해서는 그 동기가 사랑에 기초해야 하며 상대방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하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비방만 할 뿐입니다. 빌립보서 1:9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진정한 분별력은 사랑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거짓 선지자를 알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는 삶의 열매로 그들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소 짓는 얼굴 속에 진정한 사랑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지? 아니면 이기적인 목적이 도사리고 있는지? 진정한 사랑이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공, 인정받음, 높은 지위, 재물 취득이 그 동기가 아닙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비록 거절을 당하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진리대로 행동합니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요 15:13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진정한 예언자라면 그의 삶에서 바로 이 같은 열매가 보일 것입니다.
예언자는 개인적인 삶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에서도 열매가 보여야 합니다. 사람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인도하는가? 아니면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이 아니라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면서 사역에 참여 시키려고 유도하는가?
렘 23:14 /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가운데도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을 행하는 자의 손을 강하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과 다름이 없고 그 주민은 고모라와 다름이 없느니라
어떻게 악을 행하는 자를 더 강하게 지원해 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의 죄악을 지적하는 대신에, 적당하게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해줄 때 가능합니다. 바로 그러한 일이 오늘날 현대 교회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미가의 외침
미 3:5-8 /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 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6)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7)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릴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심이거니와 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요즘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서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무엇이든지 참아줍니다. 만약 사회적인 지위, 명성이 없거나 가난한 사람이었다면 그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참아줄까요? 이러한 불공정한 처사에 대해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약 2:1-4 /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안타깝게도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는 돈이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부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둡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 교회가 상석을 주고 직책을 맡깁니다. 그러므로 분별력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공평성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출 23:8 /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사역자가 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을 더 우대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바른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욕심이 그 동기가 되기에 분별력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빗나가고 목회 사역은 사양길로 치닫게 됩니다. 많은 재물로 인하여 잠시 왕성하게 될는지는 몰라도, 성령의 기름부음은 점차 줄어들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와 같이 하나님은 기름 부음과 부르심을 철회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롬 11:29).
미가는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했던 선지자였습니다. 미가는 돈줄이 되는 사람에게 평안하라고 축복해 주는 예언자는 주님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한 예언자의 말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말씀인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미가는 자신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핍박을 받을 것을 미리 알았지만, 그래도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미가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가는 사람들을 꾸짖고, 올바로 고쳐주고, 권면할 수 있었습니다. 사역의 이익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할 수 있었습니다. 미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의 죄를 지적해 주고 그들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부드러운 말로 둘러대지 않았으며, 듣는 자가 기분 좋게 받아들이든지 기분 나빠하며 거절해 버리든지 간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세대를 일으키십니다. 비록 사람들 사이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는 메시지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담대히 전하는 세대들입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사역을 란 사람 중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신출내기 사역자 중에서 나타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과 사역의 동기는 오직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순수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사역이나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 말씀의 참 뜻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고전 13:1-3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들은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는 말씀을 이루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거짓 사도와 속이는 형제자매들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고후 11:13 /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열매와 사역의 결과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을 어디로 이끌어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으로 데려가는가, 아니면 자신의 사역으로 끌어들이는가? 진정한 사도였던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딤후 3:10-11 /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바울은 사역을 통해서 수많은 기적과 성령의 은사가 강물같이 흘러 넘쳤지만, 바울은 디모데에게 기적이나 표적이 아닌 성령의 열매를 따르라고 권면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3:35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러므로 진짜 예언자와 사도, 형제인지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이 행하는 기적이나 기름 부음을 보지 말고, 그 사람의 개인적인 삶이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거두어지는 사역의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양의 옷을 입고 찾아오는 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을까요? 열매로 분별해야 합니다. 좋은 나무는 못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15-20 / 신수일 목사(포항대송교회)
오늘은 현대식 사자성어 풀이를 소개해드립니다. 유머니까 심각하게 듣지 마시고 웃으면 됩니다. 동문서답, 동쪽 문을 닫으니 서쪽이 답답하다. 군계일학, 군대에서는 계급이 일단 학력보다 우선한다. 박학다식, 아는 것은 없고 먹는 것만 탐한다. 희노애락, 희한하게 놀다보면 애가 태어난다. 새옹지마, 새처럼 옹졸하게 지랄하지 말라!(마지막 것이 좀 거칠죠.)
오늘은 2월 1일입니다. 2월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사람들"입니다. 금년 표어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인데, 그 나라를 세워가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한 달간 산상수훈 마지막 메시지를 가지고 나눕니다. 오늘 본문부터 남은 산상수훈은 대체로 경고 메시지로 마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경고 메시지는 우리가 언제든지 주의 깊게 간직하고 늘 잊지 말고 주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를 잊고 소홀히 하면 그 여파가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경고 메시지를 외면하면 그 영혼이 위험하고,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가정신앙도 위태롭고, 교회를 어지럽힐 수도 있고, 나아가 사회혼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경고를 무시하면 그 결과는 참혹합니다. 1912년 4월, 타이타닉 호 사건이 일어난 것은 바로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출항 당시 쌍안경의 열쇠가 인계되지 않아서 배 안에 있는 쌍안경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감시원들은 쌍안경을 사용하지 못했고 육안으로만 의존하며 거대한 배를 운항했습니다. 출항 초기부터 빙하가 돌아다닌다는 소식이 선박 사이의 무선통신으로 전달되었습니다.
타이타닉 호는 4월 14일 6통의 경고를 통신으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타이타닉 호의 통신사들은 이 경고 메시지보다 승객들의 통신 발신 업무에 쫓기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항해를 즐기는 가운데... 통신사들은 이 계절에 북대서양의 항해에는 자주 있는 일이라고 여기고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타이타닉의 인근을 지나던 화물선 캘리포니아 호가 빙하가 떠다니니 조심하라고 계속 무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타이타닉 호의 통신사는 캘리포니아 호의 무선사에게 "지금 우리 통신을 방해하고 있다!"라고 귀찮게 여겼습니다. 화가 난 캘리포니아 호의 통신사는 무전 스위치를 끄고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결국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당시 가장 가까이 있었던 캘리포니아 호는 타이타닉 호의 승객들을 구하러 오지 못하였습니다. 경고를 무시한 통신사들의 안일함이 1500여명의 생명을 구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경고를 무시한 결과는 이처럼 참담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떤 경고메시지를 주십니까? 15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십니다.(삼가라-주의하라!)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자-이들이 거짓 선지자이고 이들을 물리치라는 메시지입니다. 선지자면 선지자이지 무슨 거짓 선지자입니까? 이 문제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고 아주 오래 전부터 오늘도 앞으로 종말이 올 때까지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경고 메시지와 같이 우리가 늘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물건을 살 때 사람들마다 습관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물건이 실용적인가?" 봅니다.(주로 영국이나 미국인들)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이 최신 유행인가?" 봅니다.(주로 프랑스인들) 과거 공산주의 국가 출신들은, "이것이 공짜인가?" 물어보았답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주로, "이것이 진짜냐?"(진품이냐)고 묻습니다. "짝퉁이 아니냐?"는 것입니다.(한 때는 미제가 인기였는데, 지금은 국산이 비싸고 인기!) 중국이나 베트남에 가면 아예 짝퉁 물건을 전문으로 파는 시장이 있습니다. 수백만 원하는 가방을 몇 만원에 구입할 수 있고, 로렉스 같은 고급 시계를 30만 원 정도에 살 수 있습니다. 정상가격을 주고 살 수 없는 이들이 짝퉁인 것을 알고 구입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요즘 말로하면 짝퉁 선지자입니다. 구약성경에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들 간에 갈등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령, 열왕기상 22장에 북이스라엘 아합 왕이 남유다 여호사밧 왕과 동맹하여 아람과 전쟁을 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대개 전쟁을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전쟁에 나가도 되겠냐고 묻는데, 선지자들 간에 그 답이 달랐습니다. 시드기야와 400명의 선지자들은 전쟁에 나가라고 예언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길르앗 라못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라."(6절)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 여호사밧 왕은 이들 말고 우리가 물을 만한 다른 선지자가 없냐고 물었습니다. 아합왕은 미가야 선지자가 있기는 한데 그는 늘 길한 예언은 하지 않고 흉한 예언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를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아합왕이 잘못하는 것이라며 미가야를 불러 예언을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미가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음성은,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지는 환상을 통하여 전쟁을 하지 말고 군인들을 집으로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17절)
숫자로는 400:1입니다. 미가야의 참 예언이 거짓 예언이 될 순간이었습니다. 미가야는 거짓말 하는 영(사단)이 400명을 꾀어서 거짓 예언을 하게 한 것이라고 답했습니다.(22절) 그러자 거짓 예언자 시드기야가 참 예언자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24절) 미가야는 네가 그것을 보는 날이 올 것이라고 답했습니다.(25절) 아합왕은 참 예언자 미가야를 감옥에 가두고 전쟁에 나갔지만, 미가야의 예언대로 그는 이 전쟁에 비참하게 죽습니다. 참 예언자의 경고 메시지를 듣지 않고 무리하게 전쟁에 나갔다가 참변을 당하였습니다.
예레미야도 거짓 예언자들로 인해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전하라는 메시지만 그대로 전합니다. 누구든지 평안을 전하는 메시지는 선포하기가 쉽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며 심판을 경고하기는 어렵습니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미가야와 예레미야와 같이 온갖 핍박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반면 거짓 선지자는 이런 핍박과 불이익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안의 메시지만 전합니다. 소위 "예민한 얘기"를 피합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대단히 지혜로운 것처럼 자랑합니다. 그래서 선지자 노릇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과연 선지자가 있습니까? 있다면 몇 명이나 있습니까! 우리 한국교회와 사회가 부패가 만연한 것은 이 시대에 참 선지자들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목회자들이 선지자가 되지 못하면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진짜 목사가 아니고 가짜(짝퉁) 목사입니다. 목회자만 그렇지 않습니다. 평신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선지자가 아니라면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가짜(짝퉁) 그리스도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8:12,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선지지들이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거짓 예언을 할 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요즘 우리사회가 그렇습니다. 죄를 범하고도 뻔뻔스럽고 부끄러워할 줄 모릅니다. 세월 호 이후 부끄러움이 사라진 모습에 대해 중앙일보 사회부장이 칼럼을 썼습니다.(중앙일보에도 이런 인물이 있는가?)
요즘처럼 죄를 범하고도 뒤틀린 감정을 드러낸 것 보기 드문 일이라고! 재벌의 딸 조연아-검찰 조사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인질 살인범-나도 피해자이다. 경찰이 나를 흥분시켰다, 어린이집 아이들 폭행 교사-아이들을 사랑해서 그랬다, 권력투쟁이 드러나 검찰 조사를 당하면서도 청와대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화상을 드러냄, 부끄러워할 줄 몰라야 권력의 최상위에 설 수 있다는 세태이다. 부끄러움을 자정할 능력을 상실한 것-세월호를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세월호를 정치적 먹이감으로나 여기시는 어처구니 없는 현상)
거짓 선지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도 선지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방법을 오늘 본문에서 전해줍니다. 16절 시작과 20절 마지막에 두 번,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영분별이 어렵지 않다는 메시지입니다. 시간이 지나 그 열매를 보면,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 알게 됩니다. 가시나무가 포도열매를 맺을 수 없고, 엉겅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포도와 무화과는 성지에서 나는 대표적인 과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이 쉽게 공감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자연법칙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19절,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 심판을 일컫습니다.(아름다운 열매-성령의 열매, 입술의 열매, 거룩한 삶의 열매, 선한 행실의 열매, 전도의 열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맡기지도 않은 자들입니다. 자칭 선지자일 뿐입니다. 예레미야29:9,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나 지금이나 거짓 선지자들이 득세하는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거짓 선지자들을 이용하는 거짓 영-사단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단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요8:44,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거짓 영-사단이 이용하는 사람이 거짓 선지자이고, 거짓 선지자에게 미혹되는 사람들이 이단-사이비 추종자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되는 것은 그들이 잘났기 때문이 아닙니다.(과거 문선명이나 박태선, 안상홍, 오늘 신천지 이만희, 하나님의교회 장길자, JMS 정명석 등)
우리나라에 거짓 선지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많은 것은 그만큼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되며 교회가 성장하니까 사단이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최근에 있었던 거짓 예언자들-전쟁발발 예언, 땅굴 소동!)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곳은 이미 사단의 본거지가 되었기에 사단이 기승을 부릴 것이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와 그 추종자들이 한때 기승을 부리지만, 그들의 결말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경고메시지와 같이 비참합니다. 악한 마귀-사단은 자기 혼자 멸망당하지 않고 거짓 선지자들을 세워 자기와 함께 지옥 불에 들어갈 자들을 열심히 불러 모읍니다.
사단은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이 광명한 천사로 가장합니다.(고후11:14)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이 실체가 무엇인지 헷갈리게 합니다. 현대판 거짓 선자들의 특징 열 가지를 나눕니다. 첫째,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숨깁니다. 둘째, 지나친 친절과 관심으로 호감을 갖게 합니다. 셋째, 성경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고 귀찮을 정도로 접근합니다. 넷째, 필요 이상의 경건을 강조하며 대범하게 자신의 영적 권위를 과시합니다. 다섯째, 기성 교회의 비리와 약점을 지나치게 비판하고 자기들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여섯째, 자신만이 교리와 주장을 합니다. 특별한 이론과 학설을 자랑스럽게 소개합니다. 일곱째, 지나친 내세적인 교리나 지나친 현세적 교훈 등 균형적인 가르침이 약합니다. 여덟째, 마약을 먹이듯이 조금씩 상식과 도덕성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요구를 합니다. 아홉째, 지나친 복종과 맹종을 요구하며 물질을 바쳐야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열 번째, 집단적인 모임을 강조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정에서 떨어질 것까지도 요구합니다. 속에 발톱을 숨기고 있지만, 결국은 그 발톱을 드러냅니다. 내세를 강조하지만 실상 그들 스스로는 온갖 육신의 욕심과 욕망-탐욕을 채우기에 급급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단의 목적이 사람들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혀주셨습니다.(요10:10)
이렇게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거짓 선지자도 있지만, 보다 교묘하게 역사하는 거짓 선지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사랑-긍정적인 사고-성공의 법칙-기복신앙 등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현혹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죄나 회개 등... 결국 그리스도의 보혈 등 기독론에 대해서도 별로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교회인지-무슨 클럽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입니다.(휴스톤, 조엘 오스틴의 레이크우드 교회) 그럼에도 그들은 교회간판들 걸고 사람들을 모으고 예배형태를 취합니다.
종말이 올수록 영적 혼란은 가중될 것입니다. 꽃게가 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열 번의 허물을 벗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크면 더 크기 위해서 허물을 벗습니다. 우리도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가짜의 허물을 벗어버립시다! 특별히 온갖 외식을 벗어버립시다! 하나님은 우리 속을 이미 다 아십니다.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진짜 그리스도인의 멋진 삶을 누립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사람들입니다. 주 안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멋진 인생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말씀으로 축원합니다.
열매로 알리라
마태복음 7:15-20 / 서양훈 목사(청풍교회)
16절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
20절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주님 맞을 준비하던 10명의 처녀들은 다 같은 줄 알았으나 5은 미련하고 5은 지혜로운 자들이었다. 이런 차이는 열매로 드러났으니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빛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은 빛의 열매를 맺습니다.
엡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십니다.
사57:19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잠13:2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 우리의 생활도 이런 범주를 크게 벗어 나지 못합니다. 열매로 우리 믿음의 사람을 증명해야 할 때가 옵니다.
1. 징후를 알려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해가 질 무렵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면 사람들은 그 붉게 물든 하늘을 보고서 내일은 비가 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바람이 붑니다. 후덥지근하게 동풍이 불면 낼은 비가 온려나 보다. 또 연세가 높으신 어르신들은 자신의 몸에서 이상 징후가 있다고 합니다. 다름 아닌 몸(삭신)이 신호를 보냅니다. 이곳 저곳이 수시고, 저리고, 관절이 더 많이 아파서 걷기 조차 힘이 듭니다.
무화과 나문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 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것은 무화과나무의 잎사귀가 연한 잎을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게하듯이 이런 일들 즉 사랑이 식어 지고 불볍이 성행하고 있으면 심판자가 문 앞에 가까이 오셨다는 징후입니다.
하인리히 법칙
한건의 사건사고가 발생하기 이전에는 이와 관련된 소형사고가 29건, 소행사고 이전에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 사소한 징후들이 무려 300번이나 나타나는 통계적 법칙을 1대 29대 300으로 하인리히 법칙이라 부릅니다.
1931년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가 펴낸 <산업재해 예방 : 과학적 접근>이라는 책에서 소개된 법칙입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하인리히는 미국의 트래블러스 보험사라는 회사의 엔지니어링 및 손실통제 부서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업무 성격상 수많은 사고 통계를 접했던 하인리히는 산업재해 사례 분석을 통해 하나의 통계적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산업재해가 발생하여 중상자가 1명 나오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이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인리히 법칙을 1:29:300법칙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즉 큰 재해와 작은 재해, 그리고 사소한 사고의 발생 비율이 1:29:300이라는 것입니다. 큰 사고는 우연히 또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반드시 경미한 사고들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혀준 법칙으로,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 일정 기간 동안 여러 번의 경고성 징후와 전조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문학적으로 입증한 중요한 법칙입니다.
다시 말하면 큰 재해는 항상 사소한 것들을 방치할 때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이를 면밀히 살펴 그 원인을 파악하고 잘못된 점을 시정하면 대형 사고나 실패를 방지할 수 있지만, 징후가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해주는 법칙입니다. 하인리히 법칙은 노동현장에서의 재해뿐만 아니라 각종 사고나 재난, 또는 사회적·경제적·개인적 위기나 실패와 관련된 법칙으로 확장되어 해석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고도 하인리히 법칙의 전형적인 예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배의 여러 부분에서 이미 이상 징후가 여러 번 발견되고, 선장과 선원들이 문제를 제기했음에도 별것 아니라고 여기고 무시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과 제게 들려주시는 음성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이상 징후는 없으십니까?
신앙생활에 이상 징후를 발견하고서도 별 것 아니라고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이상 징후의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배날이 되어도, 예배 시간이 되었음에도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배를 기다림이 없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기쁨과 감사가 없이 형식으로 치우치는 성도,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아도 일상의 삶에서 변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성도, 교회에서 봉사가 부담이 되며 안했으면 하는 말이 곧 잘 터져 나오며 누군가 일군이 없다고 불평하는 성도, 주일 날 예배보다 생업이나 취미생활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성도가 있으시다면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임에 분명합니다.
육신의 아픔이 영혼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늙어도 결실하며 빛이 청청하며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드러내며 가무는 해에도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는 물가에 심겨진 나무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요?
영혼이 잘 되면 육체가 강건하며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입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만 구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9:26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사도 바울처럼 죽도록 충성한 인물도 하나님 앞에서 버림당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우리는 안심하고 있어도 되는 걸까요?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안일한 자세로 신앙생활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사도 바울은 촉구합니다.
2.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를, 포도나무에서는 포도 열매를 거둡니다. (16-18절)
하나님의 정하신 법을 아시나요?
@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에수님 외에 모든 사람은 포도열매와 포도즙은 포도나무에서 얻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법칙은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변함없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콩 심은데서 콩 나고 팟 심은데서 팟 난다.]는 속담을 많이 들었습니다. 즉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는대로 거둔다는 진리입니다.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둡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고, 육을 위하여 심는 자는 육으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둡니다. 무화과는 무화과나무에서 얻습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나 알알이 영근 포도는 얻을 수 없습니다. 가시나무 얻을 수 있는 것은 가시뿐입니다.
지난 수요일 오후 시간에 우리교회 3대 목회자인신 김인수 목사님의 자녀들이 우리 교회를 찾아 왔습니다. 김인수 목사님은 올해 연세가 82세이시고 아들이신 목사님이 미국에서 이민 1세 목회를 하신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 자녀 3분, 친척들과 함께 우리 교회를 찾아 오셔서 현재 중고등부 실로 사용하는 교육관을 보시고 즐거워하셨습니다. 목회자로서 아들을 목회자의 반열에 세우시고, 그 후손 중 우석대 국문학교수가 있어요. 현재는 전주 동부교회에 출석하십니다.
@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냅니다.
@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침 일찍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나오시는 길목에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그 잎 사이에서 찾으셨던 것은 무화과열매였습니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 기대 했던 열매가 없습니다. 길거리에 서 있기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따 먹었을까요?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닌 것 아닌가요?
그러나
예수님은 열매 없던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마21: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배경주석에 의하면 이 시기 무화과나무는 이른 열매를 맺는 나무, 늦은 열매를 맺는 나무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이른 열매를 맺는 나무였다면 5월쯤이면 벌써 무성하게 열렸어야 했고, 늦은 열매를 맺는 나무는 8월이나 되어야 열매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자세한 지식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시기에 잎사귀만 무성하면 이른 나무이든, 늦은 나무이든 올해에는 열매가 없는 나무라고 보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배경주석]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이르노니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 만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 할 때에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만일 나쁜 열매를 맺고 있다면
신앙생활에 중대한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을 인지하시고 속히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신다고 경고하십니다. 19절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불에 던져진다’는 표현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3. 열매로 증명됩니다. (마7:20참조)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열매로 안다.] 는 말씀이 16절과 20절에 두 번 기록됩니다.
16절은 15절의 내용을 받습니다.
15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겉옷은 선지자의 옷입니다. 겉 모양은 선지자의 거룩성으로 치장을 했으나
그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의 맘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입에서 나오는 말과 잠깐 동안의 행동은 선지자처럼 보이나 생명력이 없는
가짜입니다. 속에서부터 나오는 생명은 이리의 성품입니다.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 선지자의 탈을 쓰고 이리의 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선지자의 옳음이나 온유한 성품이 나올까요?
이리의 잔옥한 성품이 나올까요?
마음속에 이리의 잔혹함이 차곡차곡 싸여 있는데 거기서 선한 말이나 행위가 나올 까요? 열매로 드러날가요?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덯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이리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는 이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이리의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여지지 않았을 뿐이요, 조금 후에 드러났을 뿐입니다. 이리에게 양의 행실이나 희생을 기대하는 우리가 잘 못입니다. 이리는 이리일뿐입니다.
20절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는 말씀은 이제 좋은 열매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는 [유용한 열매]를 말합니다.
주의 깊게 본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전자의 열매로 알리라는 말씀은 우리의 눈으로 식별이 가능합니다. 후자의 열매로 알리라는 말씀은 우리의 눈으로 식별이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 몇 가지 이유는 든다면(22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 주여! 주여 소리치고 있습니다. @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불법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주님 한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23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불법인지 아닌지를 아는 유일한 방법은 그 열매입니다. 즉 환란을 당할 때 드러납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힐 때(25절)
지혜로운 사람, 순종의 사람, 불법을 행하지 아니한 사람은 안전합니다.
그 집을 반석위에 세운 지혜로운 자이었기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지도 않습니다. 안전합니다. 풍랑이 다 지나가기까지 바위틈 은밀한 곳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비가 내리지 아니할 때는 알 수 없었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세차게 불지 아니할 때는 누구든지 다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건강할 때, 젊었을 때, 인기가 있을 때, 주머니 사정이 좀 넉넉했을 땐 할 수 있지요. 연로 하셨을 때, 기력이 쇠하였을 때, 빈궁했을 때 본색이 드러나지요.
무너집니다.
아주 형편없이 무너집니다.
27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고, 부족한 부분은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고 여러분의 문제에 함께 하시고 피할 길을 주시며, 이길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허락해주실 줄 믿습니다.
하늘나라 백성의 복된 삶을 누리려면
마 7:15-29 / 계강현목사(금광교회)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고 그 나라의 주인이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 복을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게 됨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팔복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늘나라 백성이 되어 그 복을 받은 자가 되었다. 하늘나라 백성은 위로와 긍휼함을 받고, 땅을 차지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 축복을 누리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의 응답과 능력과 축복을 누리고, 최종적으로 완성된 하늘나라에 맞게 되고,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된다. 이 하늘나라 백성의 복된 삶은 꼭 죽어서만 누리는 게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누리는 복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하늘나라 백성으로서의 복을 만끽하며 살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 이 하늘나라의 복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오늘 예수님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1.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
v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넓은 문으로 가는 널찍한 길은 세상 풍조를 좇아서 사는 길이다. 그 끝은 멸망과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비좁고 찾는 사람이 적지만,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좁은 길을 선택하기보다 넓은 길을 선택하기가 쉽다. 넓은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기 때문에 더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가는데, 나만 좁은 길로 갈 때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 때문에 두렵다. 어렸을 때 명절이 되면 다른 아이들은 새 옷을 사고 입는데, 가난해서 나만 헌 옷을 입는 게 엄청 싫었던 기억이 있다. 반대로 다들 헌옷을 입는데, 나만 새 옷을 입고 튀는 게 싫었던 때도 있다. 어렸을 때 튀는 게 싫었던 때가 있다. 남과 다른 게 두려운 거다. 큰 길로 가면 멸망이 있고 좁은 길로 가면 생명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들이 다 큰 길로 가기 때문에 좁은 길로 가는 데 어렵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과 다른 길을 선택한다. 다르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르기 때문에 오는 손해와 핍박을 예상해야 한다. 내 유익을 추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살려할 때 손해와 희생을 감수해야 되지 않겠나? 흠이 있는 사람이 목장에 와서 흠이 좀 매워지고, 상처 있는 사람이 목장에 와서 상처가 덮어지고 치유되려면 그런 분들을 용납하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으로 품는 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오 리를 가자는 데 십 리를 같이 가려면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지 않겠나?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가 되려면 핍박도 좀 감수해야 되지 않겠나? 이게 좁은 길이다.
구정이나 추석명절이 되면 가족 제사 문제로 염려가 많다. 제사 안 지내고 시댁식구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나? 통상적인 방식으로 지금껏 살아왔는데, 내가 이제 신앙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만 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 부모님을 사랑한다면 이분들도 그 영원한 천국의 생명을 맛보고 누려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여기서는 좁은 길로 가다가 거기서는 큰 길로 가면 그들은 지금까지 살았던 대로 다 멸망하지 않겠나? 처음에는 내가 좁은 길로 가는 게 불편하고 그래야 그분들의 구원 얻을 가능성이라는 게 생기는 거다. 그냥 처음부터 내가 큰 길로 가버리면 그분들은 생명을 얻을 가능성을 놓치고 만다.
한 번 생각해보라. 제사 거부할 때 생기는 갈등이 두려워서 제사를 지내고 평화를 꾀하면서 가족을 전도하는 것과, 좀 제사를 거부하면서 부딪치고 갈등도 생기지만, 다른 부분에 최선을 다하면서 가족을 구원하는 것과 어느 것이 가능성이 더 있을까? 통계적으로 후자가 더 가능성이 많다. 거짓 평화를 추구하다가 세월 다 흘러가고 부모님들은 다 돌아가시고 만다. 우리는 전과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한다.
사람들이 알면서도 큰 길을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 큰 길로 가면 편하기 때문이다. 고불고불한 좁은 길로 가면 멀미도 나고 어렵다. 먹을 것 먹고, 마실 것 마시고, 가고 싶은 곳 가고,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고,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만나기 싫으면 안 만나고 그렇게 살면 편하지 않나? 그런데 편하지만 그 결과는 멸망이다.
초등학생 자녀에게 “이제부터는 앞으로 네가 하고 싶은 거 다해도 좋다.”고 해봐라.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네가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자고 싶은 거 다 자고, 학교 가기 싫으면 가지 말고, pc방에 가고 싶으면 가고, 컴퓨터 게임하고 싶으면 밤새도록 하고, 친구 집에 가서 외박하고 싶으면 외박하고, 자녀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 뻔하지 않은가? 무법천지가 된다. 그걸 알면서, 왜 어른들은 자기 자신들에게는 적용하지 않는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그 결과는 멸망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희생과 훈련을 선택해야 한다. (다같이) 희생과 훈련을 선택한다! 예수님이 지금 별난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상식적인 얘기를 하는 거다. 나는 평균으로 살겠다고 하는 학생하고 좀 뛰어난 학생이 되겠다 생각하는 학생과 다르다. 좀 뛰어난 학생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남들 잘 때 밤늦게까지 공부한다. 올림픽 대표로 나가는 선수는 다른 선수들 놀 때 놀지 않고, 하고 싶은 거 못하고 절제하며 훈련하는 거다. 극기하고 절제하고 희생도 하고 그러는 거다. 예수님이 당연한 얘기를 하는 거다. 복을 누리려면 희생과 훈련이 들어가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지만, 일어나서 기도하고, 성경 읽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결단하고 읽고, 그게 안 되는 분은 주일 예배에 나오는 훈련해야 한다. 희생과 훈련이 삶 가운데 있어야 한다. 시간 있으면 예배드리고 시간 없으면 예배 빠지고, 손 집어넣어서 돈 있으면 헌금하고 돈 없으면 헌금안하고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하면 안 된다. 희생과 훈련이 필요하단 얘기다.
롬 8:17-18,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18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십자가 뒤에 면류관이고 고난 뒤에 영광이다. 좁은 문으로 가는 좁은 길을 선택하라. 그것이 복된 길이다.
2. 지도자를 잘 선택해야 한다.
v15, “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여기 보면 거짓 예언자가 나온다. 이들은 남이 모르는 걸 안다는 사람들이다.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장래를 다 밝혀주겠다는 도사들, 성경에 모든 의문점들을 뻥 시원하게 뚫리게 해주겠다고 하는 사람들, 투자 길을 알려줘서 부자 만들어주겠다는 사람들, 마음에 평안을 주겠다는 사람들, 건강을 주겠다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 이단과 거짓 예언자들이 이 세상이 있는지 모른다.
그럼 우리가 거짓 예언자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예수님은 말 대신 삶을 보라고 하신다. vv16-20,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 있다는 얘기다.
거짓 예언자들은 겉으로는 우리에게 이익을 주는 듯하지만,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말보다 행동을 봐야 한다. 성인들의 가르침을 보면 다 비슷비슷하다. 공자는 어질라고 가르친다. 부처님은 자비로워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다 비슷하다. 그래서 가르침이 아니라 그 삶을 봐야 한다. 공자님이나 부처님이나 다 죽었더라. 예수님은 돌아가신 후에 부활하셨다. 이게 삶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부활하신 분이라면 내 영원한 미래를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이 안 드는가? 말이 아니라 삶이다.
다단계 판매하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혹하게 된다. 따라서 투자만 하면 모두 큰돈을 벌고 부자가 되고 또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삶을 봐야 한다. 전에도 그러다가 말아먹었고, 감옥에도 갔다 왔고, 많은 사람을 울리고 그와 비슷한 사례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 아니라 삶을 봐야 한다. 그래서 어떤 분들이 와서 “사업 기회가 있으니 같이 일하자. 투자 하면 돈 벌어주겠다”고 말할 때 말을 듣지 말고 삶을 봐야 한다. 이 분이 그렇게 성공해본 적이 있는가? 신뢰할 만한 분인가? 그런 것도 없이 말만 듣고 돈을 턱 투자하면 어떻게 하나? 바람을 피우는 사람과 절대로 동업하지 말라! 아내를 속이는 사람이 동업자에겐들 정직하게 하겠나? 그 삶을 봐야지.~
두 사람이 의견이 어긋날 때,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 사람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저 사림이 옳은 것 같고 그럴 때, 어떻게 하나? 나는 두 사람의 삶을 본다. 어느 쪽이 더 성경적이고 삶이 뒷받침이 되고 있는가? 말이 아니라 삶이다. 부부 상담을 교인 선배에게 받는데, 기도생활을 많이 하는 분보다 두 분의 삶이 행복한 분들에게 조언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실제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거짓 예언자가 행복, 돈, 평강, 건강을 말할 때 삶을 보라.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예언자는 어떻게 발견하는가? 목회나 사역 대신에 삶을 보라. vv21-23,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여기에 능력 있는 사역자들이 나온다.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행했다. 우리 자신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사역자들이다. 영적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나?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는 거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며 물러가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마음에 의아함이 생긴다. 주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과 상관없이 사역을 할 수 있나? 더구나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이 말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다는 얘기다. 여러분이나 나나 믿음이 별로 변변치 못하지 않나?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분이나 나를 쓰지 않나? 믿음이 적은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이 믿음이 없는 사람도 도구로 쓰실 수 있지 않겠나? 안 그런가? 이집트의 바로 왕도 하나님이 도구로 쓰고,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도 도구로 쓰셨다. 하나님이 뭔들 왜 못 쓰겠냐?
민 22-24장에 발람이란 예언자가 나오는데, 베드로 사도는 벧후 2:15, “그들은 바른 길을 버리고, 그릇된 길로 갔습니다. 불의의 삯을 사랑한 불의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라간 것입니다.” ‘불의의 삯을 사랑한 발람’이라고 표현했다. 이 사람이 거짓 예언자다. 돈을 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숭배와 음란으로 몰아넣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사주한 예언자다. 그런데 그가 한 예언만큼은 몇 번이고 정확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으로 능력이 나온다고 자동적으로 이 사람이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얘기다. 많은 사람이 여기에서 현혹되기 쉽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구별하나? 예수님이 삶을 보라고 하신다. 우린 그저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된다. v21,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이 사람들이 뭐가 없냐 하면 순종이 없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얘기다. 그래서 우리는 목회, 사역을 보지 말고 삶을 봐야 한다.
그러면 순종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아나?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쉽게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관계를 보면 된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 달려 있다.”(마 22:40)라고 하셨다. 남을 사랑하면 모든 계명을 다 이룬 것이고,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능력도 나오고 사역도 열심히 하는 것 같고 그런데 이게 진짜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나오는지를 알려면 사랑을 살펴보면 된다.
물론 그게 사랑의 정도를 얘기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다 사랑의 정도 차이는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이 사랑을 하려고 애쓰고 있는 지를 보면 된다. 잘 사랑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하면서 사랑하려고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은 하나도 없이 사무적으로, 의무적으로, 책임감으로 하고 있나? 거짓 예언자들은 사랑하려는 부담도 없고 노력도 없고 관심도 없다.
이 말씀 듣고서 우리 목사님은 사랑이 있나 없나 하고 계산해보는 분이 혹시 있나? ‘안 되겠다. 다른 교회로 가서 다른 목사를 선택하고, 다른 목장으로 가서 다른 목자를 선택해야 되겠다.’ 뭐 이러라고 내가 이 설교를 하는 게 아니다. 이 말씀을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들에게 각자가 적용해야 한다. 예수님과 상관없는 분도 이런 능력이 나온다면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도 사랑 없이 얼마든지 능력을 행하고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죄를 짓고 나면 방언이 딱 그치고, 예언이 딱 그치고, 사역을 아예 못하고, 설교가 딱 막히고, 목회 능력이 확 줄어들고 그러는가? 칠 계를 범하고 나니까 목사가 설교를 갑자기 못하고 그러나? 아니다. 똑같이 잘하고 그런다. 그런데 거기서 사랑이 없이 행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얼른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언젠가 자기와 이웃을 파멸하게 되어 있다. 주님이 내 삶 가운데 역사하지 않으면 잘 되는 거 같아도 불만이 있고 불화가 있고 삐걱대고 그러면 빨리 왜 그런지 살펴보고 그런 걸 빨리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그냥 방치하고 있으면 점점 무뎌지고 나중에 화인 맞은 양심이 되고 만다.
그것에 대해서 바울사도는 고전 13:1-3,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도바울 자신도 천사의 말이나 설교도, 예언의 능력도, 탁월한 지식도, 큰 믿음도, 모든 소유를 바치는 구제나 몸을 바치는 희생도 아무 유익이 없고 아무 것도 아니하고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사역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이다. 그 삶에 사랑의 특징이 보이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목장사역을 하면서, 내가 일터와 가정에서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자주 던져야 한다. ‘내가 요새 오래 참나? 안 참나? 내가 요새 친절한가? 불친절한가? 내가 요새 남을 시기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요새 뽐내고 있지 않은가? 내가 요새 교만하고 있지 않나? 내가 요새 무례하게 굴지 않나? 내가 요새 내 유익을 구하지 않는가? 내가 요새 성내고 있지 않은가? 내가 요새 원한을 품고 있지 않은가? 내가 요새 불의한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는가? 내가 요새 진리를 보고도 기뻐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요새 모든 걸 덮어주지 못하지 않나? 내가 요새 모든 것을 믿지 못하고 있지는 않나? 내가 요새 바라지 못하고 견디고 있지 못하지 않나? 이런 걸 살펴봐야 한다. 그래서 사역을 곧잘 하는 것 같은데, 예수님이 내 삶과 사역에 역사하고 있지 않은 걸 파악한다면 얼른 예수님에게 돌아가서 그의 십자가 사랑으로 채움 받아서 사랑하며 살고 사랑하며 사역해야 한다.
3. 순종을 연습해야 한다.
어떤 분들은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조금만 어려움을 당하면 그냥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분들이 있다. 사업 어려움이나, 병이 들거나, 자녀들 어려움이나, 관계에 어려움을 만나면 전혀 성경말씀하고는 관계도 없이 삶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본문 말씀에 의하면 인생을 모래 위에 세워서 그렇다. vv26-27,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그래서 조금의 비바람에도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다.
이런 분들은 말씀에 터가 없는 거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순종하는 게 없는 거다. 이런 분들은 늘 목사님 설교를 듣고 ‘오늘은 계 목사님이 설교를 잘했네.’ 속으로 점수나 매기고 있고, 목장모임에 가서는 목사님 설교가 이래서 틀렸고 저래서 틀렸고 그런 말이나 하고, 어떨 때 좀 괜찮으면 “은혜 받았어!”하면서 막상 적용이 하나도 없는 거다. 그러니까 순종이 없는 거고, 그러니까 생활이 없는 거다. 예배만 드리고 설교만 듣고 거기서 끝난다. 이런 신앙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은 신앙생활이다. 그러니 쌓은 것 같은데, 와르르 와르르 쉽게 무너진다.
반면에 vv24-25,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25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이런 분들은 말씀을 듣고 하나라도 적용하고 실천하기 때문에 반석과 같이 튼튼하게 세워진다. 그래서 비가 오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고 환란과 역경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고 든든하게 끄떡없이 서있는 거다. 왜냐하면 순종은 감정이 아니라, 지정의가 합해진 인격의 결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석 위와 같이 든든하다.
우리 교회에 놀랄 정도로 위기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듣는 대로 그대로 실천하려고 애쓰는 분들이다. 조금만 들어도 실천하는 분이다. 그래서 오래 믿는 분들 중에 오히려 와르르 무너지는 분들이 많다. 오히려 처음 믿는 분들이 듣는 대로 실천해서 잘 흔들리지를 않는 분들이 있다. 어떤 교인은 큰 질병에 걸렸는데, 최선을 다해 치료하면서, 동시에 ‘부르시면 천국에 가지. 뭐’ 그러면서 흔들리질 않는다. 어떤 분은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신앙에 흔들림이 없다. “내가 사업하다 망하면 하나님 망신이지, 뭐.” 왜 그럴까? 평소에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고 실천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 뜻대로 사업하다가 망하면 하나님이 책임져야지 뭐. 그런 배짱이 있는 거다. 사업을 세상처세술로 하는 사람은 망하면 하나님에게 죄스럽기만 하다.
힘들어도 끝이 있다. 운전하다가 긴 터널을 지날 때, 답답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통과한다. 여름에 태풍이 불고 폭우가 내릴 때 이게 안 그칠 것 같고 계속 될 것 같지만, 그칠 때가 반드시 온다. 폭포수같이 내리는 고난의 비도 언젠가 그친다. 폭풍우 같은 역경도 지나가게 되어 있고 끝이 나게 되어 있다. 듣기만 하고 은혜만 받았다고 하면서 실천을 하지 않는 분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폭풍우를 만나면 무너지게 되어 있다. 죽음의 위협이 닥치면 넘어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듣고 실천하는 분들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고난의 비가 오고 폭풍 같은 역경이 와도 변함없이 든든히 서있는 것이다. 이런 자가 하나님의 복을 이 땅에서도 누리고 하늘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는 자들이다.
우리 모두 평소에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순종을 연습해라. 설교 후에 헌신대에도 나와서 결단과 헌신을 반복하며 연습하라. 그럴 때 반석 위에 세운 흔들리지 않고 든든한 신앙인이 된다.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미 도래했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그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그와 같은 복을 만끽하려면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 지도자를 잘 선택하고, 내가 사랑으로 사역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죽을 때까지 순종을 반복해서 연습해야 한다. 그런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의 복과 그 능력과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자. 아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15-29 / 이동휘 목사(평강교회)
1. 문단 계간지 <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에 실린 시인 최영미의 <괴물>이라는 시입니다.
괴물 /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최영미 시인은 이 괴물이라는 시를 통해 En이라는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원로 시인의 성폭력에 대해 고발한 것입니다. 최 시인은 문학작품일 뿐이라면서도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담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단 내 너무나 일상화된 성희롱과 성추행 혹은 성폭력 문화 또 하나는 우리 문단뿐만 아니라 사회에 만연한 일종의 우상숭배, 거짓 영웅을 숭배하는 풍조에 대한 비판입니다. 일종의 풍자 시죠.” 지난 2월 6일 오후 9시 JTBC ‘뉴스룸’에 출연한 최영미는 이미 자신의 시에 등장하는 ‘En’이 원로 시인 고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마당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상습범이다. 여러 차례, 너무나 많은 성추행과 성희롱을 목격했고 내가 피해를 봤다...권력을 쥔 남성 문인의 성적 요구를 거절하면 그들은 뒤에서 복수를 한다.....그들이 편집위원으로 있는 잡지가 있다. 요구를 거절한 여성 문인에겐 시 청탁을 하지 않고 그의 시에 대해서 한 줄도 쓰지 않는다......문단 술자리에서 저에게 성추행 행동을 한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그런데 그런 문화를 방조하고 묵인하는 분위기였다. 제가 그들의 성적인 요구를 거절해서 그들이 나에게 복수한다면 한두 명이 아니고 여러 명이다.....사례가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많다. 여성 피해자들이 아주 많다. 특히 독신의 젊은 여성들이 그들의 타깃이다. 그걸 문제화하면 그 여성 문인은 상을 탈 때 후보에 오르지도 못한다. 신문사 문학 담당 기자들도 일부 가해자였다.” 계속해서 밝혀진 사례들이 있습니다.(일요신문이 인터뷰한 문학계 인사 3명의 증언) - 고은 시인은 1964년 A 시인의 아내에게 접근했다. A 시인이 부산에서 지내며 기러기 아빠 노릇을 할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A 시인이 부산에서의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서울로 돌아 왔을 때 아내는 이미 집을 떠나고 없었다. 그 이유가 고은 시인 때문이라고 한다. 문학계에서도 당시의 일이 꽤 알려져 있었다. 또 하나 사례 - 고은 시인은 문학계에서 유명했던 대학교수 B의 아내에게도 다가갔다. 인사들은 “고은 시인이 B 교수의 아내에게 접근했던 건 그가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시절이었다. 이를 지켜 본 B 교수의 동생이 이 사실을 B 교수에게 털어놨다. B 교수는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왔다. 결국 B 교수는 쉰도 안 된 나이에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유학 갔다가 돌아온 뒤 과음으로 죽기 전 몸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었다”고 했습니다.
시인 고은은 한국 사람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고은은 1958년 시 ‘폐결핵’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 이래 시?소설 등 저서 150권 이상을 내 놓은 원로 문인입니다. 70년대엔 암울했던 독재 시대에 반기를 드는 작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1974년 출간된 《문의 마을에 가서》는 그의 치열한 시대정신을 담은 대표 시집이었습니다. 1960년 발표한 ‘눈길’은 국정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고은은 매년 국내외 문학계에서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돼 왔던 그야말로 문학계의 거목처럼 여겨왔었습니다. 이러한 고은 시인이 최영미 시 <괴물>에 등장하는 ‘En’이라는 사실을 폭로한 사람은 시인 류근이었습니다. 지난 6일 류근 시인은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은 시인의 성추행 문제가 ‘드디어’ 수면 위로 드러난 모양이다. 최영미라는 시인께서 지난 가을 모 문예지의 페미니즘 특집에 청탁 받아 쓴 시가 새삼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이다. 놀랍고 지겹다. 60~70년대부터 공공연했던 고은 시인의 손버릇, 몸버릇을 이제서야 마치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 소스라치는 척하는 문인들과 언론의 반응이 놀랍고, 하필이면 이 와중에 연예인 대마초 사건 터뜨리듯 물타기에 이용당하는 듯한 정황 또한 지겹고도 지겹다....소위 ‘문단’ 근처에라도 기웃거린 내 또래 이상의 문인들 가운데 고은 시인의 기행과 비행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 얼마나 되나. 심지어는 눈앞에서 그의 만행을 지켜보고도 마치 그것을 한 대가의 천재성이 끼치는 성령의 손길인 듯 묵인하고 지지한 사람들조차 얼마나 되나. 심지어는 그의 손길을 자랑스러워해 마땅해야 한다고 키득거린 연놈들은 또 얼마나 되나. 그의 온갖 비도덕적인 스캔들을 다 감싸 안으며 오늘날 그를 우리나라 문학의 대표로, 한국문학의 상징으로 옹립하고 우상화한 사람들 지금 무엇 하고 있나. 때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고은 시인을 떠밀어 세계인의 웃음거리로 ‘옹립’해 놓고 뒤에서 도대체 어떤 더럽고 알량한 ‘문학 권력’을 구가해 왔나...그의 온갖 비도덕적인 스캔들을 다 감싸 안으며 오늘날 그를 우리나라 문학의 대표로, 한국문학의 상징으로 옹립하고 우상화한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이렇게 문학계가 성추문 파문이 거세게 일자, 문학평론가 김병익(80)씨가 8일 이번 파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습니다.(중앙일보 2018/2/9 문화) <노벨문학상 후보로 단골 거론되는 시인의 명망이 하루아침에 침몰하는 모양새다. 시인의 폭로된 행적 자체는 어떤 논리로도 옹호되기 어렵다. 하지만 감정에 치우친 단죄는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정치적, 도덕적인 올바름으로 가득찬 멸균 공간에서 의미 있는 문학작품이 생산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내가 늙고 보수적인 사람이라 그런지, 뛰어난 예술가들의 업적은 존중하되 그들의 약점이나 실수는 보호하는 사회적 미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예술에서 도덕적 청렴함이 반드시 플러스가 되는 건 아니다. 뛰어난 예술가들은 스스로의 약점, 욕망, 좌절 같은 것 때문에 예술이 오히려 깊어질 수 있다. 잘못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깊게 하고,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사례를 뛰어난 예술가들에게서 많이 본다. 실수나 좌절감, 혹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스스로 성찰하고 깊이 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고, 그런 고통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에서 한 작가의 위대성이 드러난다. 미투 운동과 관련해 가령 출판사 사장이 책 내준다고 꾀어 여성 문인을 어떻게 했다면 그건 문화 권력을 이용한 거니까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예술가의 광기와 열망, 좌절감이나 감정의 분류(奔流)에 의해 발생한 어떤 사태에 대해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문학까지 비난한다든가 사회적으로 공개 힐난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예술과 도덕은 같이 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로 배반하는 경우가 더 많다. 도덕적 비판이 한 사람의 예술이나 업적을 할퀴어 찢어버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이 평론가가 ‘뛰어난 문학 작품은 정치적, 도덕적으로 멸균된 공간에서 나올 수 없다. 고통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에서 작가의 위대성이 드러난다. 예술과 도덕은 같이 가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로 변호하고 있지만, 최영미 시인의 시처럼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라는 한 마디로 말로 설명될 수 있다고 봅니다. 자신은 고통을 통해 위대한 작가 반열에 오를지 모르지만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사람들은 그 똥물을 만들어낸 재료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되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최영미 시인은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이라는 말로 그 질문에 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인격과 생활이 똥물인데 거기서 나오는 작품들이 수도꼭지 틀면 나오듯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올지라도, 그리고 그것들이 아무리 빼어난 글로 위장될지라도 그것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아름다운 글로 위장된 똥물을 마시면서 마치 생수를 마시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2. 오늘 분문에서 예수께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는 그 열매로 안다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막7:21-23)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문학 평론가가 ‘예술과 도덕은 같이 가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 것처럼, 신앙, 믿음도 그 인격과 같이 가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너지지 아니하는 집을 세울 수 있습니다.
B.C.931년경,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자 하나님께서 선지자 하나를 그에게 보내 경고하고자 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왕상13:9) (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그런데 그 선지자가 여로보암에게 가서 그의 우상숭배를 경고하자 여로보암이 손을 내밀어 그 선지자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여로보암이 손이 편 채로 말라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여로보암이 사태가 위급하자 그 선지자에게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주기를 당부합니다. 다급하니까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 선지자가 기도하자 이내 곧 여로보암의 굳어진 손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왕상13:6) (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도록 전과 같이 되니라
여로보암이 너무나 고마워 그 선지자를 극진히 대접하고자 왕궁에 가서 쉬었다 가면 많은 예물을 주리라고 말합니다. 그 선지자는 이렇게 거절하며 왔던 길을 버리고 다른 길로 갔습니다.
(왕상13:8-10) (8)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10)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아니하니라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벧엘의 한 늙은 선지자가 자기 아들들을 통해 전해 듣고 쫓아가, 예루살렘에서 온 선지자에게 멀리서 오셨는데 우리 집에 가서 좀 쉬었다 가시라고 권합니다. 이에 그 선지자가 정중히 “(왕상13:17) (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며 거절합니다. 그러자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왕상13:18)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는 말로 유혹하며 시험합니다.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는 말에 그만 속아 그 늙은 선지자를 따라 그 집에 들어가 떡을 먹고 물을 마셨습니다. 바로 그때 그 늙은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온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상13:21-22) (21) 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 늙은 선지자는 한 마디로 ‘네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아니했기 때문에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늙은 선지자의 말대로 예루살렘에서 온 선지자가 길을 떠나자마자 사자에게 물려 죽고 말았습니다.
(왕상13:24) (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물어 죽이매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
이처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하나님의 사람을 시험하는 것은 과연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도록 해서 결국에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게 유혹하거나 시험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로 하여금 과연 여전히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여부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마침내 영원한 생명에 이르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지 그 여부를 알기 위해 시험하셨습니다. 이는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명기8:1-3입니다.
(신8:1-3)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루살렘에서 온 선지자는 늙은 선지자가 “(왕상13:18)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는 말로 유혹하고 시험할 때,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는 말에 그만 하나님 말씀을 놓쳤고, 다음으로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이라는 말, 즉 천사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에 본래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을 놓쳤습니다. 선지자라고 해서 모두가 다 선지자가 아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거짓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천사를 들먹이며 하나님 말씀을 운운하는 거짓된 무리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쉽게 분별할 수 있는 것은 그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의 열매가 나타나기 전에는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말씀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에 비춰보면 그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히4:12-13)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2. 다음으로, 예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나 그가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그의 권세에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종교 지도자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 그러자 예수께서 되물었습니다. “너희가 먼저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해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이 말은 사람들이 요단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은 것이 성령에 이끌린 것이냐 아니면 단순히 인간적인 충동에 따른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종교 지도자들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만약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요한의 증언을 사실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증언한 내용은 한 마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시라는 것입니다.
(요1:29-34)...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반대로 요한의 세례가 단순히 인간적인 충동에 따른 것이라 하면 백성들의 분노가 두려웠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백성들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비겁하게도 “우리는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알지 못한다는 얘기는 자신들의 책임을 저버리는 행위였습니다. 이들 종교 지도자들의 의무는 선지자의 진위 여부를 분별하는 것이었는데 알지 못한다는 얘기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라를 전혀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증인과 증언을 통해 진실과 진리를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체면과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비겁하게 모른다고 답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21:27)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 이러한 비유의 말씀을 하시며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자, 맏아들은 “네, 아버지, 가겠습니다.”며 대답했지만 실제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지 않았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싫습니다.”며 거절했지만 이내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했다. 그러면 너희들은 그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그들이 둘째 아들입니다고 대답했다.>(마21:27-31) 이 비유를 잠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맏아들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네, 아버지, 가겠습니다.”고 대답해놓고 불순종했습니다. 말만하고 행하지 않았던 영락없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지적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세는 이렇습니다.
(마 23:1-7)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성경은 잘 아는데 자신은 전혀 성경대로 살지 않고, 백성들이 성경을 지키기 힘들만큼 세분화하여 무거운 짐이 되게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자신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헌신과 봉사를 약속하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여기 <맏아들>은 오랜 신앙 경륜을 지닌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고, 잘 섬긴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그 역시 아버지로부터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당장 ”싫소이다.“라고 대답했읍니다만 곧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여기 둘째 아들은 당시 멸시와 천대받는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인물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후회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다시 돌아왔다는 말씀입니다. 나중에는 회개했다 할지라도 처음에 행한 불순종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은 죄는 어디 까지나 죄이지 죄를 회개했다고 해서 그 불순종했던 죄 자체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둘째 아들의 행위를 놓고 아비의 뜻대로 행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뒤 늦게나마 회개했다는 점에서 맏아들보다는 좀 낫다는 평가받을 정도인 것입니다. 창기와 세리들이 주님 앞에 돌아온 것은 그들이 그 전에는 그 죄를 죄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돌아왔을 때 주님께서 그것을 기뻐한 것이지, 그들이 그것을 죄로 안 다음에도 그 노릇을 계속하고 그 뒤에 주님께 돌아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뒤 늦게나마 회개하고 포도원에 가서 일한 둘째 아들은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으나 맏아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맏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움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명령에 즉시 아멘하고 즉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에게 명령하십니다.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분명히 알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눅 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모든 인류에게 전파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항상 “예”하시고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은 언제든지 진실무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항상 “예”(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고후1:18-22)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서도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에 대한 결론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3. 마지막으로, 주어진 말씀은 이렇습니다.
(마7:24-27)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이 말씀은 행함이 없는 신앙생활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약2:14-26)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믿음이 있노라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 전혀 없다면 구원에 있어서 유익된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참된 믿음은 거듭나는 변화가 따르게 되는데, 삶에 그 생활과 행동에 변화된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껍데기에 불과한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데 입을 옷 한 벌 주지 않으면서 몸을 덥게 하라, 쌀 한 톨 주지 않으면서 굶지 말고 밥해 먹으라고 한다면, 그러한 행위와 말은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멸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나 말은 위선에 불과하고 죽은 믿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행함은 믿음으로부터 온 열매이기 때문에 결코 믿음과 행함은 따로 따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행함이라는 결과가 입증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입술로써 고백만 한다고 해서 그 믿음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인격과 성품 등 그 사람의 속사람의 진면목은 믿음을 통해 행함으로 나타나는 열매를 통해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입술로써만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을 행동으로 보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을 믿느냐? 잘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귀신도 하나님을 잘 안다. 그런데 귀신들은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들은 믿고 떨고 있을 뿐 행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은 귀신들도 마땅히 아는 바입니다. 한 번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그 가르치심과 교훈에 권위를 느끼고 놀라워했습니다. 말만하고 행함이 없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마침 귀신들린 사람 하나가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소리지릅니다.
(막1:24)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그 귀신에게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며 꾸짖자 “(막1: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막1:27) 다 놀라 서로 물기를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그 귀신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시자 그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칠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히11:17-19)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같은 믿음을 가지고 보여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2:16-18)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함께 더불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믿음으로 삶의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어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15-27 / 윤석전 목사
주님이 나를 멸망에서 구원하시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 주셨듯이
나도 주를 위해 죽도록 충성하여 내 영혼의 때를 가장 부유케 해야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요,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것을 만드시고 자기의 것을 가꾸시고 또한 자기의 것을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인간도 하나님께서 주신 만물을 가꾸고 거두어서 그 수익으로 육신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시고 행한 대로 갚으시는 정직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것을 거두실 때에 타작마당의 농부와 같이 알곡은 기쁨으로 곡간에 거두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사정없이 태우십니다(마3:11~12).
주님 재림과 최후 심판의 날에 혹은 인간의 육신이 끝나고 영혼의 때가 시작되는 날에 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법 앞에서 각자 행한 대로 어느 것 하나 숨김없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의로운 것은 의로운 대로, 불의한 것은 불의한 대로, 충성된 것은 충성된 대로, 불충한 것은 불충한 대로 벌거벗은 것과 같이 숨김없이 드러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20:11~15).
하나님 말씀의 법을 어긴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피 앞에 회개함으로 용서받는다 해도, 회개치 아니한 죄와 성령을 훼방한 죄는 사함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 12:31~32).
곧 달란트는 주님이 성령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어떠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심판받고 처절하게 버림받은 불쌍한 자가 된 것입니다(마25:24~30).
그러나 충성한 자들에게는 한없는 영광을 베푸셨으니 주님의 즐거움에 영원히 참예하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마 25:21, 23)
그러나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무지하여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타락한 자들의 죄목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하게 욕되게 한 것이라 하셨습니다(히6:4~6).
누구든지 심은 대로 거두로 행한 대로 갚으리라 하셨습니다(마 16: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계 22:12~15).
죽도록 충성해 내 영혼의 때를 부유하게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 받으라 하시고 성령의 지시대로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제자들과 초대 교인들은 전혀 힘써 기도함으로 주님께서 기도 응답으로 보내 주신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 성령으로 기도하고 충성하고 전도하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성령으로 최후까지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지 못한 자는 구원의 주님께서 명령하신 직분의 충성도 전도도 순종도 감사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 없는 삶 자체가 사망, 곧 죽음뿐인 육신의 생각으로 멈춰 있기 때문입니다(롬 8:5~8).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의 생각으로 사는 자들은 핍박을 당하고 죽음을 당해도 그저 기쁨이 충만할 뿐 후회가 전혀 없는 자들입니다. 영혼의 때에 확실한 천국과 면류관이라는 영광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사는 자들만 하나님의 약속의 법에 순종할 수 있고 죽도록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의 나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셔서 내 지옥 갈 죄를 대속하시고 영생과 천국과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주심에 배신할 수 없는 확실한 지식으로 분명한 신앙 양심을 가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비록 세월 속에서 육신은 낡아져 가나 주님 앞에 서는 그날에 자신이 충성한 분량에 따라 영광스러운 작품이 확실하게 있음을 아는 자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수가족이여, 하나님께서 육신의 때를 주신 2023년 한 해 동안 구원의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영혼의 때를 위하여 확실하게 내놓을 만한 신령한 작품이 있습니까? 한 해 동안 먹고살기에 바빠서 천하보다 귀한 육신의 때를 쓸모없이 돈을 구걸하며 부귀영화를 가져 보려 정신없이 살지 아니하였습니까?
오늘 당신의 영혼을 주님께서 부르신다면 당신의 영혼에게 어떠한 영광스러운 가치가 있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주님의 법대로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는 한 달란트 받은 자와 같은 변명은 절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맡은 자가 구할 것은 충성이라 하셨습니다(고전 4:1~2).
구원받은 자가 행할 것은 오직 감사와 충성뿐인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거짓은 거짓으로 밝히 드러나고, 외식은 외식으로 밝히 드러나고, 불충은 불충으로 밝히 드러나고, 교만은 교만으로 밝히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계 22:10~13).
한 달란트 받은 자와 같이 악하고 게으른 것도 밝히 드러납니다. 아무도 전지하신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행한 대로 받을 심판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수가족이여, 2023년 한 해를 구원의 주님의 요구대로 살았습니까, 살지 못했습니까? 주신 직분을 충성되이 감당했습니까, 감당치 못했습니까?
내 영혼의 처지를 생각하고 통곡하며 회개합시다. 내 영혼이 살기 위해서 회개합시다. 회개하고 다시 살 수 있는 육신이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지금이 회개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회개합시다. 그리고 2024년에는 주님 앞에 다시 불충하지 맙시다.
주님이 나를 죄와 사망과 참혹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 주셨듯이 나도 구원의 주님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합시다. 심은 대로 거두시는 구원의 주님께 많이 거두시게 하여 당신의 영혼을 부유케 합시다. 주님은 심은 대로 거두십니다.
불안의 반대
마 7:15-27 / 이한배 목사(부천광림교회)
ㅇ 질 문 - 불안의 반대는 뭘까요 ?
I. 서 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삼성물산이 시공사로 참여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있는 부르쯔 할리파(Burj Khalifa)입니다.
높이는 828m다. 162층이다. 미국이 자랑하는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보다 두 배나 크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시속 64km다. 또한 124층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옥외 전망대가 있다. 그리고 76층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영장이 있다.
그런데 이 거대한 건물의 안전성의 비밀은 지하에 있다. 건물이 올라가기 전에 1년 동안 이 빌딩을 지탱해 줄 거대한 기초를 파고 콘크리트를 부었다. 이 건물의 기초는 11만 톤도 더 되는 58,900 cubic yards(45,000㎥)의 콘크리트로 되어 있다. 이 건물이 안전한 것은 기초가 튼튼하기 때문이다.
경건하고 의로운 삶은 인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따르는 많은 놀라운 유익들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의 원리에 따라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과 가정을 든든한 반석 위에 세우게 된다.
오늘날의 시대를 정의한다면 “불안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가 코로나19의 공격으로 그로기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로기 상태에 빠지면 다운되기 쉽습니다.
다운되면 경기가 중단되기 쉽습니다.
세계는 세계의 삶이 중단될까봐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직장 생활이 중단될까봐 불안해합니다.
죽음이 찾아와 인생이 중단될까봐 불안해합니다.
삶의 즐거움이 중단될까봐 불안해합니다.
그런데 미래를 전망하는 자들은 코로나19와 같은 재앙이 앞으로 더 많이 생기고, 또한 생기는 주기가 점점 더 단축이 된다는 것입니다.
코로나19와 같은 일들이 자주자주 찾아올 거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코로나19가 종식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점점 더 많이 생깁니다.
그래서 세계가 점점 더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불안을 이길 수 있을까요 ?
불안의 반대는 뭘까요 ?
그것은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안의 반대는 “기초 튼튼”입니다.
①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하면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집이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코로나19와 같은 강펀치가 계속하여 찾아와도 조금도 끄떡이지 않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건축가 라이트(Frank Lloyd Wright)에게 동경에 임페리얼 호텔(Imperial Hotel)을 지어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통경은 세계에서 가장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라이트가 지반을 조사해보니 지하에 60피트(18m)의 진흙층이 있었습니다.
라이트는 그 부드러운 진흙층 위에 탄탄한 기초를 만들면 그 진흙층이 지진이 날 때 그 거대한 빌딩의 충격을 흡수해줄 뿐 아니라 그 건물을 견고하게 지탱해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기초를 튼튼히 해서 건물을 지었더니 1952년 동경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주위에 있는 낮은 건물들은 다 무너졌는데, 임페리얼 호텔은 끄떡없이 서 있었습니다.
기초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기초가 튼튼하면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래서 불안의 반대는 기초 튼튼입니다.
② 기초가 튼튼하면 할수록 건물은 더 높이 올라갑니다.
기초가 튼튼하면 건물은 더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기초가 튼튼하면 우리의 삶이 더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불안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불안 중의 하나는 우리의 삶이 더 올라가지 못할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초를 튼튼히 하면 저절로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 불안의 반대입니다.
II. 본 론
그래서 오늘은 앞으로 코로나19와 같이 세계를 그로기 상태에 빠뜨리는 강펀치가 더 많이, 더 자주 온다고 하는데, 이런 불안을 이기기 위하여 우리의 삶과 가정을 반석 위에 세우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을 반석 위에 세우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
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반석 위에 주초를 놓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천국은 근심 걱정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이런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들어가는 데는 말씀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반석 위에 세우는데 제일 먼저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녀들이 잘 되기를 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당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게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신 6:4-7)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반석 위에 놓는 것입니다.
자녀들에 대한 근심을 없애고 싶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행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들은 말씀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반석 위에 세우는 것입니다.
(1)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세우는 자입니다.
그런 자들은 비가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인생의 집이 넘어지지 않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재앙이 강펀치를 날려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세우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집이 무너집니다.
코로나19와 같은 재앙이 찾아오면 무너지고 맙니다.
(2)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너희는 道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기를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고 하셨습니다.
(3) 우리가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되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① 예수님은 예수님을 보고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②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세를 행하였다고 하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실까요 ?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행하는 자는 근심 없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근심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반석 위에 놓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아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안전한 자는 예수님이 아시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아시는 자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아니합니다.”(고후 4:8-9)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세를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가 아무리 큰일을 했어도 예수님이 우리를 모르시면 헛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이 도와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쫓아내십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반석 위에 세우는 것은 예수님이 아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자들을 아실까요 ?
1)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 합니다.(마 16:16)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육신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이 바로 반석이요, 그 위에 세운 건물은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그리스도 믿는 자들을 예수님이 아십니다.
그런 삶이 바로 반석 위에 인생을 세우는 삶입니다.
2)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해야 합니다.(마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 내가 교인이라는 것을 세상에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께 찾아와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했다고 하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부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자들을 예수님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님을 믿는 자라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우리의 삶을 반석 위에 세우는 것입니다.
3) 오직 예수님만 섬겨야 합니다.(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다른 것과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수 24:15)고 했습니다.
이렇게 오직 예수님만 섬기자들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 섬기는 것이 우리의 삶을 반석 위에 세우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다원화의 세상입니다.
그러다가보니 신앙생활도 다양한 신앙을 갖기를 원합니다.
생활도 다양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두 마음을 품은 삶은 인생의 집을 모래 위에 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였습니다.
(1) 롯은 두 마음을 품은 자의 상징입니다.
롯은 하나님을 섬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세상의 즐거움도 즐기고 싶었습니다.
이런 두 마음 때문에 롯은 소돔과 고모를 택하였습니다.
(2) 롯은 소돔 성에 들어가서 그가 원하는 것들을 얻었습니다.
그는 재물을 얻었습니다.
소돔의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창 19:1)
(3)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보고 듣는 것을 때문에 늘 마음이 괴로웠습니다.(벧후 2:7-8)
행복한 삶이 아니였습니다.
(4) 세상적으로 성공한 것 같이 보이나 영적인 힘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소돔과 고모라에 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장래 사위될 자들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같이 소돔에서 나갔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5) 롯은 두 마음을 품어서 얻은 것 같이 보였지만, 결국에는 그 재물과 명성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III. 결 론
지혜로운 자는 비, 바람, 창수를 막으려 하는 자가 아닙니다.
비, 바람, 창수를 피하려고 하는 자가 아닙니다.
지혜로운 자는 반석 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 자입니다.
세상에 비, 바람, 창수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지 마시고, 여러분의 인생의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일에 힘쓰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따릅니다
마 7:15-19 / 박상훈 목사
영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었던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1889∼1977)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그가 잠시 머리도 식힐 겸해서 시골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가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을 지날 때였습니다. 때마침 그곳에서는 "채플린 흉내내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채플린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유명했습니다. 채플린은 그 현수막을 보고서 흥미를 느끼고서는 그 대회에 참관했습니다.
모두들 외모부터 진짜 채플린처럼 분장을 하고 나와서 채플린 특유의 몸짓과 말투를 흉내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채플린은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신분을 속이고 그 대회에 출전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평소에 하던 그대로 그곳에서도 했습니다.
그런데 심사결과는 재미있게 나왔습니다. 놀랍게도 채플린은 1등을 못했습니다. 그는 그 대회에서 겨우 3등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대회에서는 진짜 채플린보다 더 실감나게 연기를 한 가짜 채플린이 두 사람이나 더 있었던 셈입니다. 때로는 진짜보다 가짜가 더 진짜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일화입니다.
세상에는 가짜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남대문 시장에 있는 어떤 참기름가게에 가면 이러한 간판이 붙어있다고 합니다.
"정말로 진짜 순 참기름만 판매합니다."
참기름이라는 단어 자체에 이미 "참"자가 붙어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부족해서 그 앞에 수식어가 3개나 더 붙어있습니다. "정말로, 진짜, 순." 오죽이나 가짜가 많았으면 그러한 간판이 붙어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가짜가 많은 것이 항상 문제입니다.
미국의 어느 마을에 장난감가게 하나가 있었습니다. 장사가 잘 되기로 소문난 가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가게의 바로 왼쪽에 새로운 장난감가게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 가게는 큰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Best Quality Guaranteed."
최고의 품질을 보장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습니다. 이번에는 본래 있던 장난감가게의 오른편에 또 다른 장난감가게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 가게도 큰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Lowest Price Guaranteed."
최저의 가격을 보장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본래 가게의 주인은 그 틈바구니에 끼여서 얼마나 마음 속으로 고민을 많이 했겠습니까? 한쪽은 최고의 품질을 보장한다고 하지, 한쪽은 최저의 가격을 보장하지,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며칠 밤을 새우면서 고민하던 끝에 자기 가게에도 큰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그 간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The Main Entrance."
주 출입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곳에 있는 여러 장난감가게의 주 출입구는 자기 쪽이니까 이쪽저쪽으로 눈 돌리지 말고 다 자기 가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바른 길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여기에 다른 문이 있다, 여기에 또 다른 길도 있다." 이렇게 우리를 미혹하는 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눈길을 돌리지 맙시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출입구를 통해서만 우리는 천국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는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를 미혹하는 자들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른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15절입니다.
둘째로, 거짓 선지자를 판별하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이른바 두 나무의 비유입니다. 16∼18절입니다.
셋째로,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의 종말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그들에게는 멸망이 기다릴 뿐입니다. 19절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십시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십시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만을 따르십시다. 이러한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를 미혹하는 자들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5절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은 나쁘다, 거짓 선지자들은 옳지 않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시면서 강한 경계를 하셨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거짓 선지자들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곧 이어서 거짓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겉에는 양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양을 돌보는 목자들이 양의 옷을 입었습니다. 목자는 그런 옷을 입음으로서 양무리와 친근감을 느끼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들은 마치 자기들이 목자로서 양을 보살피는 듯한 모습으로 가장하면서 양들에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차라리 마7:6에 나오는 말씀처럼 개나 돼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덜 가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양을 보살피고 지키는 목자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이 얼마나 가식적입니까?
그들의 본색은 무엇입니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 마음 속에는 탐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양을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양을 해치고 죽였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양들을 파멸의 길로 인도할 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거짓 선지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대문에 "개조심"이라고 써 있으면 집안에 사나운 개가 있다는 뜻입니다. 개도 없으면서 "개조심"이라고 쓸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당시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종종 "외식"이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누구의 대명사입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 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척 했습니다. 예컨대 마태복음 6장을 보면 그들이 어떤 식으로 구제하고, 기도하며, 금식을 행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면서 구제했습니다. 그들은 기도시간이 되면 회당 앞을 지나가거나 큰 거리 어귀를 지나가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곧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할 때는 아예 얼굴을 흉하게 하고, 슬픈 기색을 하며 금식했습니다. 그러니 겉으로 보면 얼마나 철저하게 경건 생활에 힘썼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예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는 전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보임으로서 자기들이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기 원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단호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이 말씀을 여섯 번씩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예컨대 마23:15입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선량한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넓은 길로 또 넓은 문으로 인도하려는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이 세상 끝날에 있을 여러 징조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미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좌로도 우로도 우리의 눈길을 돌리지 마십시다. 그저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예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거짓 선지자를 판별하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우리가 거짓 선지자를 어떻게 판별할 수 있습니까? 거짓말하는 사람이 "내가 지금 거짓말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거짓말하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어떤 마을에서 거짓말대회가 열렸습니다. 거짓말에 관한 한 내노라하는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들은 열변을 토하면서 열심히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차례가 되어서 단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머뭇머뭇 거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대회에 출전하기는 했지만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태어나서 여태껏 한 번도 제대로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사람들이 이 대회에 한 번 출전해보라고 저를 부추겨서 그저 등 떠밀려 이 자리에 섰을 뿐입니다. 저는 거짓말하는 것은 정말 자신이 없기 때문에 죄송하지만 그만 내려가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내려갔습니다. 드디어 대회가 끝나고 시상식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거짓말대회에서 1등상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 선지자도 자기 이마에 거짓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에 거짓이라는 명찰을 달고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거짓 선지자들을 판별할 수 있습니까? 16절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You will know them by their fruits." 우리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시적으로는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입니다. 결국에 가서는 그들의 본색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가시나무의 일종으로서 갈매나무라는 것이 있습니다. 줄기에는 가시가 있습니다. 언뜻 보면 그 열매가 작기는 하지만 모양이나 색깔이 포도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갈매나무의 열매가 열린 것을 멀리서 보면 마치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달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써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엉겅퀴도 마찬가지입니다. 잎이 무성합니다. 멀리서 보면 무화과나무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지 이스라엘에 있는 엉겅퀴의 꽃도 무화과와 그 모양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갈매나무가 포도나무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갈매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엉겅퀴가 무화과나무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그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17∼18절을 봅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똑같은 내용을 17절에서는 긍정적으로 표현하셨고, 18절에서는 부정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선목선실"이고, "악목악실"이라는 것입니다. 나무가 선해야 열매도 선하고, 나무가 악하면 열매도 악할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모두가 하나같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수도 했습니다. 잘못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또 야고보와 요한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정말 철없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걸어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예수님에게 자기들을 위한 인사청탁을 했습니다. 의심이 많은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붙잡혔을 때 모두 예수님을 버려 두고 달아났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에게도 하나같이 다 부족하고 실수도 있고 허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근본적으로는 좋은 나무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와 같은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를 다 맺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제자 가룟 유다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는 본질적으로 못된 나무였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성실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돈궤를 맡았습니다. 그만큼 그가 신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양의 옷을 입고 나온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못된 나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거짓 선지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모든 시대에 걸쳐서 선량한 백성들을 넓은 문, 넓은 길로 미혹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2서 10절에서 이러한 사람들은 집안에 들이지도 말고, 아예 인사조차도 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못된 나무요,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좋은 나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참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좋은 나무라고 일컫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15:1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또 요15:5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가지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늘 충만한 우리들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의 종말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9절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못된 나무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찍히고 베어져서 연료용 땔감으로 불에 던지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는 불은 지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마13:41∼4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님은 지옥을 풀무불에 비유하셨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뜨겁겠습니까? 또 예수님은 마25:4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지옥불은 꺼지는 법이 없습니다. 영영한 불입니다. 계21:8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 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지옥은 뜨거운 불로 인해서 고통스럽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황이 탈 때마다 심하게 풍겨져 나오는 유독가스 때문에 더욱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지옥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곳에서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세세 무궁토록 밤낮 없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어떤 남자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내를 따라서 그저 이따금씩 교회를 출석하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확실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날이면 날마다 주색잡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서 슬금슬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죽으면 십중팔구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자기가 죽어 하늘나라 심판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다가와서는 천국과 지옥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마 천사도 그를 천국으로 보내야 하는지 지옥으로 보내야 하는지 좀 망설였던 모양입니다.
먼저 천사는 그를 이끌고서 천국으로 갔습니다. 그가 천국에 가보니까 흰옷을 입은 성도들이 천사들과 함께 새 노래로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면서 예배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천사와 함께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세상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 훈련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앉아 있으니까 좀이 쑤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아이고, 천국 생활이 왜 이리 따분하냐? 무슨 재미가 있어야지."
잠시 뒤에 그는 또 천사의 이끌림을 받아서 지옥으로 갔습니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곳에는 술집이 있습니다. 카바레도 있습니다. 카지노도 있습니다. 또 여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다 있습니다. 그는 신나게 구경을 하다가 넌지시 천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지옥체질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를 지옥으로 보내주세요."
그는 자신의 원대로 지옥에 보내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가 지옥에 와보니까, 사정은 전연 달랐습니다. 지옥의 가운데 불과 유황으로 타는 큰 못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그를 보더니 붙잡아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집어 던지려고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는 깜짝 놀라서 외쳤습니다.
"이곳은 조금 전에 보았던 광경과는 너무나도 다른데요?"
그러자 마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조금 전에는 네가 관광비자로 지옥에 왔으니까 전시용으로 만든 지옥을 마음껏 구경하고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네가 영주권을 가지고 이곳에 왔으니까 너는 이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영원토록 살아야 하느니라."
그가 깜짝 놀라서 깨어 보니까 꿈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주색잡기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 생활을 잘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장기나 바둑을 잘못 두면 다시 새롭게 두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방통행입니다. 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일단 끝이 나면 두 번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애당초부터 정신을 잘 차리고 바른 길을 걸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총장이셨던 박대선 박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일제시대때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 당시 교사를 하면 초봉으로 90원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꽤 많은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신 박상동 목사님은 아들이 자기의 대를 이어서 목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려면 신학을 공부해야 하고, 4년 뒤에 신학교를 마치고 나서라도 목사가 되기 전에 전도사로 교회에서 봉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때 돈으로 15원을 받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갈등을 느끼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아버님 댁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그의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잘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날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인사만 하고 얼른 뒤돌아 서서 집을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친이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얘, 대선아! 너 잠시 그 자리에 서거라. 너 목사가 되는 것이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거든 신학교에 아예 갈 생각을 하지 말거라."
그 한 마디에 그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4년간 공부를 하고 전도사가 되니까 정말로 그 당시 돈으로 15원의 봉급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위해서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뒤로 그에게 무한한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를 목사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교수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박사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연세대학교 총장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월드비전의 회장님을 비롯해서 수많은 명예를 그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때로는 힘들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 길에는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 생명이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참된 승리가 있습니다. 마28:20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서 지키시고 동행해 주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이 생명의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스토커들
마 7:15-20 / 이정선 목사
스토커는 뭐하는 사람입니까?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사람을 참 괴롭게 하는 정말 못된 인간이지요. 정치권에서는 저격수라는 말을 쓰더군요. 스토커나 저격수에게 늘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은 그 스토커나 저격수에 대해 무슨 감정을 갖게 될까요?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영국의 다이애나 비도 스토커 때문에 죽었습니다.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사진을 찍으려는 파파라치를 따돌리기 위해서 과속으로 달리다가 그만 사고가 났단 말이지요. 다이애나의 입장에서는 그 파파라치가 얼마나 원망스럽고 밉겠어요?
그런데 말이죠, 예수님에게도 스토커들이 따라붙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사건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시비를 걸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이 얼마나 힘들고 짜증이 나겠어요? 예수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는 것처럼 온갖 공격을 해대는 저격수들을 보시면서 예수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 이 스토커나 저격수들은 예수님 개인에 대한 위협과 반대의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스토커는 진리를 파괴하려는 사람이고,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저격수는 하나님의 왕국에 반역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스토커들에게 대해서는 특별한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스토커들은 말할 것도 없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제멋대로 주물럭거려서 자기들 취향에 맞도록 변질시켰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오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정반대로만 행동하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고 있다며 꼴값을 떠는 사람들이었지요. 자기들만 그렇게 한 것이라면 별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를 선포하실 때 그것은 당연히 그들의 잘못된 관행과 가르침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을 가짜로 몰아서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자기들 사는 길이라고 생각을 했겠지요.
이러한 예수님의 스토커들, 사람들을 잘못 가르쳐서 그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자들을 가리켜 예수님은 여기서 거짓 선지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라는 말, 아주 극단적인 모순을 내포한 단어 아닙니까? 선지자는 거룩한 직분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심부름꾼입니다. 선지자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거짓 선지자가 있습니다. 거짓을 말하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선지자인데 가짜란 말이죠. 그럼 선지자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죠. 그럼 선지자가 아닌데 선지자 노릇을 했으니까 뭐가 됩니까? 그 가짜 선지자의 해악이 어떠하겠어요?
모파상의 목걸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가난한 한 부인이 장관이 주최한 무도회에 초대되어 가면서 친구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빌려서 걸고 갔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그만 그 목걸이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 부인은 보석상에 가서 그 목걸이와 똑같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친구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걸이 값을 갚기 위해 10년이라는 세월을 힘들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흐른 후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나서 사실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은 빌려갔던 목걸이를 잃어버려서 똑같은 것으로 사서 돌려주었던 거라고. 그리고 그 목걸이 값을 갚느라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했었다고. 그러자 그 친구의 대답이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뭐라구? 그 목걸이는 가짜였어. 모조품이었다구!”
결국 가짜 목걸이 때문에 인생을 희생하게 되었다는 기막힌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짜의 기능입니다. 세상에는 가짜가 참 많지요? 종류도 많아요. 가짜 고기도 있습니다. 말고기를 소고기라고 속여서 팔거나 수입 소고기를 한우고기라고 속여 팔면 가짜 고기가 되겠지요. 그러나 말고기를 소고기인 줄 알고 먹는다고 해도 별 탈은 없습니다. 수입 소고기를 먹든 한우고기를 먹든 큰 문제는 없어요. 속아서 돈을 약간 더 냈다는 정도입니다. 가짜 신발을 사서 신었습니다. 처음에는 진짜와 똑같았는데 얼마 못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인생이 달라질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런데 죽어가는 사람을 낫게 한다는 약이 있다고 칩시다.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고 다른 약은 효과도 없는데, 오로지 그 약만 먹으면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어렵게 그 약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이 가짜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선지자 중심의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하나님께로 가는 역할을 수행하는 직분이었다면,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말입니다. 그 사회가 전적으로 믿고 따라야 하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그 선지자가 가짜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사람들은 그 선지자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고 믿었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명령으로 믿고 따랐단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러면 결과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입니까, 아닙니까? 사람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짜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노력과 진정성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결과가 되었습니다. 기가 막히지 않아요?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바로 그 가짜 선지자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도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이건 완전히 하나님을 농락한 것 아니에요? 어제 뉴스에 보니까 30대의 한 여자가 미국에서 대통령의 조카 행세를 하면서 여기저기 다니며 대접을 잘 받았더군요. 대통령의 이름을 팔고 다녔단 말이에요. 대통령이 볼 때 얼마나 괘씸하겠어요?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선지자 노릇을 하며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권력도 행사한 이 가짜 선지자들,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괘씸합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가짜 선지자의 말을 들었다가 다 망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진짜 선지자의 말을 들었더라면 생명을 얻었을 터인데, 가짜 선지자를 만나 가짜 메시지를 들은 덕분에 멸망과 파멸의 길로 가게 되었다면, 그 가짜 선지자들의 해악과 위험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얼마나 억울해요? 이제 와서 그 거짓 선지자들을 원망한다고 일이 해결됩니까? 다이애나를 따라다녔던 파파라치가 죽은 다이애나에게 미안하다고 하면 죽은 다이애나가 살아납니까? 거짓 선지자들의 꾐에 빠져 진리에서 떠나거나 멸망의 길로 가게 된 사람들은 누가 책임집니까?
구약 성경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사람 하나를 들라면 이스라엘 아합 왕 시대의 시드기야입니다. 아합이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연합군을 결성해서 아람과 전쟁을 하기로 했습니다. 여호사밧이 전쟁 나가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자고 해서 선지자들을 불러왔습니다. 그 중에 시드기야가 철로 뿔들을 만들어가지고 와서 하는 말이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시드기야의 말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지요?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잖아요? 그럼 과연 여호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여호사밧이 다른 선지자에게도 묻자고 해서 미가야가 불려왔습니다. 미가야는 전혀 다른 예언을 합니다. 그러니까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때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여호와의 영이 한 분이실진대 시드기야에게 말씀하신 여호와의 영과 미가야에게 말씀하신 영이 따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둘 중의 하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지요.
가짜는 진짜와 똑같이 생겼습니다. 만약 가짜 다이아몬드에는 가짜라고 쓰여 있다면 그 가짜 목걸이 때문에 인생을 희생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가짜라고 하면서 가르친다면 속아 넘어갈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이 거짓 선지자들 보세요. 주님은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온다고 하셨어요.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는데 누가 감히 의심하겠어요? 오히려 환영하고 존경하지 않겠어요? 순하고 착한 양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누가 겁을 내거나 두려워하겠어요? 그런데 그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희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에도 바리새인들처럼 가짜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들이 많았고, 신약시대에도 사람들을 미혹케 하고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싸우면서 진리를 지켜온 것이 바로 이 성경입니다. 오늘날 역시 얼마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성도를 미혹하려 하는지 모릅니다. 정말 아름답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성도들에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양이 오더라도 그것이 진짜 양인지 아니면 무늬만 양이고 속은 이리인지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라고 해서 그냥 무작정 믿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 진짜 선지자인지 가짜 선지자인지 알아봐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고 했습니다.
영들을 시험하는 방법,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인지 진짜 선지자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열매로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당장은 말하는 것이 아름답고 능력 있어 보이지만 그 결국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겠지요. 능력 있는 선지자 행세를 했던 시드기야의 말은 결국 그 전쟁에서 아합이 죽음으로써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수 년 전에 10월 26일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대대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던 집단도 결국 가짜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거짓말을 심은 곳에 거짓말이 열매를 맺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최종적인 결과를 보기까지 계속 헷갈리면서 따라갈 수는 없지 않아요? 그들의 열매는 그들의 살아가는 삶의 열매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어떤 이단집단에서는 가치관과 세계관이 상식 이하이거나 도무지 일반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생활방식을 고집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주 비윤리적인 행위나 삶의 행태를 보이는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쉽게 판별이 가능하지요. 매우 윤리적이고 순결한 외양을 갖는 집단일 경우는 사람들이 더 미혹되기 쉽지만, 그것은 결국 약탈하는 이리가 양의 순하고 착한 모습으로 위장한 것일 뿐입니다. 어쨌든 대부분의 이단들의 경우 그 나타나는 삶의 열매가 선하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치장을 했습니까? 그러나 그 속에는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악한 열매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악한 일을 일삼는 거짓 선지자들, 나쁜 열매를 맺는 나쁜 나무들은 마땅히 찍혀 불에 던져져야지요.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말씀,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왜곡하고 위협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늘 있기 때문에 늘 주의하라고 덧붙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이 진리를 떠나거나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따르다가는 그들과 함께 찍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좋은 열매를 맺어 진리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을 증거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의 삶을 열매맺는 삶으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시면서 주님 안에 거하는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셨고(요 15:1-5),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갈 5:22-23)를 맺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입술의 열매도 아름다워야 하겠고, 우리 행실의 열매도 좋은 열매, 아름다운 열매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마 7:15-20 / 김성광 목사
A. 열매와 결실에 대하여
1. 열매, 결실
이제 가을이 되었습니다.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또한 자연을 통해 여러 가지 교훈들을 얻게 됩니다. 그 교훈들 중 한 가지는 바로 열매입니다. 여름철에 무성했던 나뭇잎들은 낙엽이 되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지만, 열매는 남아서 그 나무를 가치 있게 만들고 인정을 받게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욱 보람되고 아름다운 결실,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녀들을 통해서 축복의 열매를 맺고, 직장과 사업장에서는 성공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꽃을 피우라고 하지 않으시고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습니다. 꽃은 아무리 화려해도 곧 시들지만 열매는 끝까지 남습니다. 열매를 보면 그 열매를 맺은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 사람의 열매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열매를 통해서 사람을 판단하시고, 영광을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가 그냥 저절로 맺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수고하며 땀도 흘려야 하고, 기도도 해야 하고, 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도 감당을 해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사상가이자 시인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 1803~1882)은 “나무가 과일을 맺듯이 인간은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과연 무슨 열매를 맺을 것인가?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었을 때, 과연 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응답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과 축복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하여 주십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아름다운 열매, 축복과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 근처의 한 산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교훈하신 ‘산상수훈’의 말씀으로, 결론적으로 ‘열매를 맺는 신앙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겉으로는 선하고 착한 양의 옷을 입고 있지만, 실상은 이리 같아서 많은 사람에게 악을 행하고 죄악된 길로 빠져서 멸망을 당할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짓된 신앙을 가진 사람, 악하게 사는 사람, 나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치, 경제, 사회 등 각종 분야, 그리고 우리 주변에도 거짓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짓된 사람들은 처음에는 좋아 보이지만 세월이 갈수록 좋지 않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못된 나무이기 때문에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나무가 좋은 나무라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좋은 나무가 되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좋은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를’이라는 제목으로 본문 말씀을 세 가지로 풀이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운다’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B.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1.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 하나님 앞에서 좋은 나무가 되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6~18)
나무가 좋아야 열매도 좋다는 말씀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는 없습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가시나무 중에 ‘갈매나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겉모습이 마치 포도나무와 비슷합니다. 겉모습만 비슷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 포도와 비슷하게 생긴 열매도 열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크기가 조금 작기는 하지만 그 열매가 포도인 줄 알고 따서 먹습니다. 그러나 갈매나무의 열매는 써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열매를 보고 이 나무가 가시나무인 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엉겅퀴는 잎이 무성해서 멀리서 보면 마치 무화과나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열매는 없고 가시만 돋아 있습니다. 아무리 겉모양이 비슷해도 그 열매를 보면 어떤 나무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나무가 좋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는 무엇을 말합니까? 품종이 좋은 나무, 우수한 나무를 말합니다. 반면 못된 나무는 쓸모없는 나무, 결실도 없고, 이익도 없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나무가 좋아야 아름답고 좋은 결실을 맺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나무가 될 수 있습니까? 좋은 나무가 되는 비결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본성이 착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고 새로운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 사람들이 바로 좋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좋은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좋은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제 아름다운 결실, 좋은 결실을 많이 맺으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열매는 무엇을 말합니까? 아름다운 열매는 축복의 열매를 말합니다. 전도의 열매를 말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 아홉 가지의 성령의 열매를 말합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사야 5장 1~4절 말씀은 포도원의 노래입니다. 그 포도원의 노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신 내용입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하나님께서는 제일 좋은 최상의,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으시고 아름답고 좋은 포도 맺기를 기대하셨는데 어째서 들 포도를 맺었는지에 대해 탄식하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잘 챙겨주고 뒷바라지하면서 자녀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는데,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스라엘의 탈무드에는 “호두나무에서 사과를 따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나무가 과연 나쁜 나무인지 좋은 나무인지 선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숭아나무나 사과나무처럼 열매를 맺는 나무들 중에서 가지를 잘라 꽃병에 꽂아 놓으면 대개 그 가지에서 꽃은 피고 향기는 나는데 열매는 맺히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지만 꺾어다 놓았으니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 열매를 맺는 나무였는데 뿌리 없이 가지만 잘라 놓으니 열매가 맺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고, 뿌리가 튼튼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 믿음이 좋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은 교회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도 없습니다.
잘난 척 하는 사람, 똑똑한 척 하는 사람들은 나무도 없고 뿌리도 없으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나무, 우리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교회를 통해서 충성하고 봉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열매를 더욱 많이 맺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거부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 1839~1937)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장래성이 없다고 하여 첫 번째 여인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또 버림받은 사내였으나,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고 말씀과 같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세계적으로 놀라운 세 가지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첫 번째는 역사상 가장 가난했던 사람이 가장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가장 부자였던 그가 또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건강하게 장수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98세까지 살았는데도 치아 하나 썩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인생을 존경하고 그의 신앙을 찬양했습니다. 록펠러가 이렇게 세계적인 세 가지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주일에 한번도 교회를 빠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갔을 뿐만 아니라, 그는 극장이나 춤추는 곳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고, 술과 담배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식사할 때는 항상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매일 성경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십일조를 도둑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록펠러에게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면 반드시 우리를 통해서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고려대학교 교수님으로 계시는 김인수 박사님의 간증입니다. 집안이 너무 어려워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중학교를 겨우 마치고 정부에서 운영하는 직업학교에 들어가 9급 공무원 임시 기능직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미래의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더 이상 공부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마침 직장에서 직장 동료의 전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때야 비로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성경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면서 갈라디아서 6장 7절의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에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3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야간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35세에 졸업을 하면서 하나님께 공부를 계속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기도한 결과 그는 미국 정부 장학금 시험에 합격하여 명문학교로 유학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MIT(메사추세츠 공대), 컬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에 있으며, 자신이 교수가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좋은 나무가 되게 하시고 좋은 열매도 맺게 하여 주십니다.
2.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운다 - 열매 없음, 심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 7:19)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결국 멸망을 당합니다. 아무런 쓸모도 없고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찍어서 불에 던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납니다. 열매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지, 더럽고 추한 열매를 맺어서는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을 받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짐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3장 7~9절 말씀에 회개하지 않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요한을 찾아왔을 때, 세례 요한은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하였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고 나쁜 열매를 맺으면, 언젠가는 도끼로 찍혀서 불에 던져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8~19절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아침에 예루살렘 성으로 가시다가 시장하셔서 무화과나무에 있는 열매를 드시려고 하였는데, 그 무화과나무는 이파리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고 하셨더니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예수님께서 심판하시자 곧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좋은 나무가 되어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청교도 작가 존 버니언(John Bunyan ; 1628~1688)은 감옥에 있으면서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이라는 훌륭한 책을 썼습니다. 그는 “심판의 날에 사람들은 자기들의 열매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무엇을 믿었느냐’ 하는 질문이 아니라 ‘너는 그 믿음으로 어떤 열매를 맺었느냐, 믿음을 그대로 실천했느냐’ 하는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무엇이 남습니까? 열매만 남게 됩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George Golden Byron ; 1788~1824)은 젊은 귀족이요, 천재적인 시인이요, 사교계의 총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멋대로 방탕하고 방종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결국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말라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말년에 자기 인생에 대해 고백하기를, “나의 인생은 말라빠진 낙엽 한 장과 같구나. 나는 벌레처럼 살았다. 나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오직 슬픔과 고독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떻게 고백하시겠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충성했습니다. 착하고 선하게 살았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었습니다.” 하고 고백하며 세상을 떠나시겠습니까? 아니면 후회하고 절망하며, 인생을 비관하면서 세상을 떠나시겠습니까?
우리의 현재의 삶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미래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보람되며 착한 삶을 살아야 하고, 또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며 좋고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풍족한 축복과 은혜를 주십니다. 건강을 주시기도 하고, 지혜를 주시기도 하고, 재물을 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세상을 살면서 착한 일을 많이 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은혜를 가지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면, 열매가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주셨던 모든 것을 다시 거두어 가십니다. 그가 마땅히 맺어야 할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실망하시고, 심판을 하십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도 집사, 장로, 권사의 직분에 합당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하고, 사회에서도 자기 회사나 직장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하고, 가정에서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만약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사람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합니다. 정치가가 올바른 열매를 맺지 못하면 국민들은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낙심합니다. 교사로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학생들은 절망하게 되고, 사업가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노동자가 황폐하게 됩니다.
우리의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도움을 주십니다.
‘십일조 10억 때문에’라는 간증이 있습니다. 벤처기업에 투자하여 무려 100억 원이라는 재산을 갖게 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IMF 때에 명예퇴직을 해서 살아갈 길이 막막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친구의 소개로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벤처기업에 투자를 했는데, 그 벤처기업이 잘 되는 바람에 짧은 시일에 무려 100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척 놀랐고, 주변 사람들도 모두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가 퇴직을 하기 전에는 수입이 적었어도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렸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떼돈을 벌게 되자 그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그 돈으로 좋은 집을 사서 이사를 가고, 좋은 차를 사는 것은 아깝지 않았지만, 100억 원에 대한 십일조 10억 원을 내려니 마음에 고민이 생겼습니다. 마음이 괴로워졌습니다.
교회를 나가는 것도 싫고, 성도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부담스러웠습니다. 목사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믿음생활은 엉망이 되었고, 또 부부간에 불화도 생겼습니다. 착하고 말 잘 듣던 자녀들은 점점 사치스러워졌고 부모의 말에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빌려달라며 찾아 왔던 형제와 친척, 친구들은 돈을 빌려주지 않자 모두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고, 나중에는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100억 원이라는 재산은 다른 사업을 하다가 다 잃어버렸고, 결국 그는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물질로도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무엇에든지 감사해야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겸손함으로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살아,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3.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여러분, 우리는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열매를 가지고 알 수 있습니다. 거짓된 사람은 거짓된 열매를 맺습니다. 진실된 사람만이 진실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무엇을 말합니까? 과실과 결실과 행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착한 행실을 많이 하고, 헌신과 봉사를 많이 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사람, 그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열매가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3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우리는 갑절의 열매와 축복을 받고, 또 그 축복을 가지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충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 8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롬 6:16, 22)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벧후 1:5~8), 인내함으로(약 5:7), 말씀을 깨달음으로(마 13:23), 자기를 희생함으로(요 12:24)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징계로 연단을 받은 사람(히 12:11), 성령 충만한 사람 (5:22~23), 예물을 드린 사람(빌 4:18)은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아름다운 열매는 어떤 종류가 있습니까? 성경말씀을 보니 회개의 열매가 있습니다.(마 3:8)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갈 5:22~23) 의의 열매가 있습니다.(빌 1:11 ; 약 3:18) 말씀의 열매가 있습니다.(마 13:23) 전도의 열매가 있습니다.(롬 1:13) 빛의 열매가 있습니다.(엡 5:9) 입술의 열매가 있고(히 13:15),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맺는 열매가 있습니다.(빌 4:17)
제가 이번 주에 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라는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제목이 ‘기분 나쁜 대통령들’입니다. 그래서 무슨 기사인지 읽어봤더니 한 라디오 토크쇼에서 코미디언이 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번 2002년 월드컵 3·4위 전에서 우리 한국팀이 패배를 했는데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면 운동선수들이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대개 운동선수들은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경기에 임해야 좋은 성적이 나오는데 그날 관중석에 기분 나쁜 대통령들이 앉아 있어 그들을 보자마자 선수들이 기분이 상해서 축구에 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코미디언이 한 이야기였지만, 한국 정치의 비극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을 하더라도 그 임기가 끝난 후에 결과가 좋아야 합니다. 정치가들도 열매가 좋아야 합니다. 사업가도, 재벌도 열매가 좋아야 합니다. 아무리 큰 소리 치며 살았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더럽고 추한 열매를 맺으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분 나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칭찬받고, 사람들에게도 존경받고 칭찬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무는 볼품이 없어도 열매만 많이 맺으면 귀한 나무로 쓰임을 받습니다. 인물이 못생겼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배운 것이 없다고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열매만 맺으면, 아름답고 좋은 열매만 맺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아름답고 귀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 1809~1865)은 천하에 못생긴 남자였습니다. 너무너무 못 생겨서 수염을 기르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여 수염을 길렀습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링컨은 성경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로 하여금 가장 존경받는 훌륭한 인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는 “나는 어느 곳에 가든지 꽃밭이 있으면 꽃을 심어 향기의 열매를 주는 인생을 살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꽃을 피워 수많은 사람에게 향기를 주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C. 좋은 나무가 되어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고,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착하고 선한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사람들 앞에 칭찬받는 좋은 나무가 되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간증입니다. 칠성섬유 회장 주수일 장로님은 선친이 원사도매업을 해서 창업한 회사를 승계 받아 경일합섬, 일성산업, (주)우성을 설립했고, 30세에 최고 경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회사를 위해 돈을 버는 일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기계를 들여와 설치하는 등, 일 속에 파묻혀 청춘을 보냈습니다. 신앙생활은 점점 더 멀어졌고 주일에도 교회를 나가지 않고 목숨을 걸고 일을 하다가 얻게 된 불면증과 위장병으로 인해 잠도 못자고 밥도 먹지 못하다가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병원에 입원을 한 후, 요양원으로 들어가게 되어 사업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요양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았습니다. 돈과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결국 그것도 이루지 못한 채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는 드디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성경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는 말씀이 그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그는 하나님도 교회도 신앙도 다 버리고 돈 밖에 모르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다시 한번 나에게 건강을 주시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10개월 동안 요양생활을 하면서 계속해서 회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10개월 만에 건강을 되찾았고 회사에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만사를 제쳐놓고 무엇보다 먼저 전 직원을 모아놓고 성경을 읽고 신앙 교육을 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열명의 부장급 직원들, 임원들을 다 모아놓고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신우회를 결성했습니다.
회사 직원들이 신앙으로 뭉쳐지자 마음이 단결되어 모두들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국내의 가공사 업계의 대표적인 기업이 되었습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상공부장관 수출부문 표창을 받았고, 무역의 날 섬유수출부문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스리랑카와 미국에 회사를 설립해서 사업을 확장시켰습니다. 특히 스리랑카의 원주민 선교를 위해서 회사를 설립해 선교지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이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업을 한다고 고백하며 ‘돈밖에 모르던 내가 예수님 안에서 참 행복을 찾았습니다’라는 제목으로 간증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은 좋은 나무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말씀을 마음속에 새김으로 좋은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름다운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일만 남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칭찬받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생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활화의 능력
마 7:15-29 / 김홍도 목사
사탕을 많이 먹으면 이가 삭는다고 합니다. 이가 삭는다는 것은 사실상 당분을 소화할 려면 칼슘이 많이 필요한데 치아에 칼습을 공급하기 전에 칼슘을 다 소비하기 때문에 치아가 튼튼하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지 삭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래서 가급적 설탕은 많이 안 먹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심지어 미국인들은 설탕을 먹으면 자살행위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비교적 해롭지 않은 당분이 있습니다. 바로 꿀입니다.
꿀은 벌들이 꽃에서 빨아 먹었다가 다시 토해낸 것으로 일단 소화된 것이기 때문에 꿀을 물에 타 먹으면 직접 혈관속에 들어가서 영양제가 되기에 피로가 잘 풀리고 별로 해가 없다고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도 먼저 그 말씀을 받아먹고 소화해서 생활화한 다음에 그 말씀을 전하면 그 말씀이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듣는 이에게 감화와 감동을 줄 뿐만 아니라 생활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비가 벌레를 물어다가 맛도 안 보고 먹여 주듯이 자기 자신은 중심으로 믿지도 않고 생활하지도 않으면서 설교하거나 전도한다면 이것은 타인을 감동도 변화도 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생활에 실현하고 실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비록 많이 알고 위대한 신학사 상에 정통하고 또 설교를 멋지게 잘한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고 미사여구로 기도를 한다 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로써 사는 사람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요 위대한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져서 회개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깨뜨려 회개시킬 수가 있고 또 자기 자신이 기도생활에 힘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기도의 영감을 불어 넣을 수가 있고 하나님께 힘껏 바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능히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바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 말씀을 생활화하여 우리의 인격으로 나타내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무엇보다도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옹이 전세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그분이 옥스포드 출신이고 변호사이 며 해박한 지식을 가진 박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며, 또 위대한 사상 위대한 웅변 때문도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의 위대한 생활 때문에 전세계 모든 사람의 경애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영국 여왕을 만나는 자리에도 물레질할 때 입던 무명옷 맨발 그대로 가면서 나의 백성이 고생을 하는데 내가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느냐고 했다 합니다. 이 때 영국의 여왕도 경의를 표했다 합니다. 또 영국에서 어느 강연회를 마치고 난 후 어느 치과 의사가 찾아와서 그의 형편없는 치아를 보고 가장 값진 상아로 틀이를 해 드리겠다 했더니 상아 이빨이 아니라 사기 이빨이라 도 좋으니 내 백성 모두 한 후에라면 할 수 있어도 그렇지 않으면 안 하겠다고 했다 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위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열심있는 생활 속에 나타나는 것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한 온스의 모범이 한 톤의 교육보다 더 가치있다(An ounce of example is worth a ton of teaching)'는 말이 있습니다. 한 온스의 본을 보여 주는 것이 한 톤의 교육을 퍼붓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어떤 가정에 심방을 갔더니 아버지되는 사람이 아들 담배 피우지 말라고 몹시 때리더랍니다. 그리고 돌아 앉아서 파이프 담배를 뻐끔뻐끔 열심히 피우더랍니다. 이런 교육 백번 시키면 무엇합니까, 마치 옛날 어느 서당의 훈장 선생이 혀가 짧아서 바람풍자를 가르치면서 "나는 바담풍 해도 너희들은 바담풍 해라"했다는 격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 말씀은 경건하게 보이는 겉모양의 옷차림보다 입으로 주여 주여 부르는 것보다도 능력을 행사하는 것보다도 말씀의 생활화가 더 중요하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의 판가름이나 참 신자와 거짓신자의 판가름이나 또는 천국에 들어 갈 자와 못들어 갈 자의 판가름은 바로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누구든지 허물과 실수가 없어 완전한 교인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약해서 넘어질 때는 넘어지더라도 허물과 실수가 있더라도 중심으로 말씀을 믿고 생활화 하느냐 아니면 말씀을 귀로만 듣기만 하고 생각과 사상에서 그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목사님들의 모임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령한 목사라고 다 믿음 좋은 자식을 둔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자식이란 겉을 낳지 속을 낳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깡패가 된 자식이라도 우리 아버지는 진짜 목사야 하는 인정을 받아야만 됩니다. 그렇치 못한다면 그 목사는 삯꾼 목사이거나 거짓 선지자일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고 위대한 명성을 떨치고 훌륭한 설교를 한다 할지라도 그 자식들이 아버지를 믿어주지 않고 아버지 뒤를 따르는 아들이 하나도 없다면 무엇인가 중심에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인은 네 가지 인정을 받아야 참 교인이라고 합니다.
[①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하고,]
[② 목사님께 인정받아야 하고,]
[③ 가까운 친구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④ 마귀에게 인정받아야 합니다(유혹해도 안 넘어가는 인정).]
사실 늘 보고 같이 사는 가까운 식구에게 인정받는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또한 우리 아버지나 우리 어머니는 진짜 크리스챤이야 하는 인정을 못받아도 안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화 하려는 사람, 진실하게 살려는 사람은 이런 인정을 받게 마련입니다. 말씀을 생활화하는 것은 집을 지을 때 기초석을 깊이 파고 잘 놓은 것과 같아서 위에서 비가 내리고 옆에서 바람이 부딪치고 아래에 서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지만 말씀을 듣기만 하고 형식으로만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환난과 시험이 올 때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판날에 견디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고기 가운데 되새김질하고 갈라진 굽이 있는 짐승의 고기만 먹었다고 해서 오늘날도 돼지같은 고기는 먹지 말라는 것인가 하고 의문을 던지는 성도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의문에 속하는 법으로서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폐기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깊은 의미가 있는데 굽이 갈라졌다 하는 것은 구별된 생활을 의미하고 되새김질한다는 것은 소가 풀을 먹고 자꾸 씹고 씹어 되새김질할 때에 소화가 잘 되어 살찌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넘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 속에 되새김해서 생활 속에 되살아나도록 해야 한다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그것을 일상생활과 관계를 맺어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큰 결과의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말씀을 생활화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믿는다는 증거요 그 말씀을 순종한다는 증거입니다.
<2. 말씀의(再愛肉;Reincarnation) 능력>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단순히 사람의 말을 빌려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전달만으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고로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또한 생활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도성인신(道成人身)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말씀을 생활화해서 생활로 나타내는 재교육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0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했고 또 고린도후서 3장에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려 하지 않지만 우리의 생활은 읽지 말라 하여도 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 노릇을 잘 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읽도록 해야 합니다.
<3. 생활화의 능력>
설교를 잘 하는 것보다도 위대한 신학사상에 정통한 것보다도 성경을 줄줄 외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보다도 말씀으로 사는 자가 더 큰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미국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인격이 너무 크게 말하므로 당신의 입으로 하는 말은 들리지가 않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가 말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격을 통해서 말씀을 얼마만큼 생활화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생활화하는 사람은 [① 기도의 응답을 잘 받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과 생활이 까맣게 떨어져 있으면서 아무리 주여, 주여 하며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습니다.
[②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자신이 말씀대로 살면서 외칠 때는 힘이 있고 권세가 있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본문(마태 7:29)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치심에 놀라고 그 가르치심이 권세있는 자 같고 가르치기만 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 서기관들과 같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가르치기만 하고 머리 속으로만 잘했지 생활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③ 시험을 이기고 승리합니다.]
마치 반석 위에 세운 집이 위에서 비가 쏟아지고 옆에서 바람이 부딪치고 아래서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 것 같이 말씀을 듣고 생활화하는 사람은 도중에 낙심하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요한1서 3장 18절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말로나 혀로만 하지 말고 진실함과 행함으로 하자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생활화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쓴 맛을 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0장 10절에 보면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했습니다. 이 말은 설교 듣기는 달콤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달콤하지만 이것을 소화해서 생활화하려면 쓰디 쓰다는 말씀입니다.
설교를 잘하는 것보다 성경을 줄줄 외우는 것보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도 말씀을 듣고 말씀을 생활화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아멘-
순종은 믿음만큼 중요하다
마 7:15-29 / 옥한흠 목사
이 세상에는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가르쳐야 하고 선생은 제자를 가르쳐야 합니다. 목사는 성도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르치다 보면 가끔 마음에 염려가 생기고 불안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처럼 힘들게 가르쳐봐야 그대로 살지도 않을 텐데. 가르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가르쳐도 다 듣고 그만 흘려버리고 말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 가르치다가도 맥이 풀리는 일들이 가끔 있지 않습니까? 아마 이것은 가르치는 선생의 위치에 있는 분들이라면 한두 번씩 느끼는 감정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무리를 앞에 놓고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이르는 긴 산상수훈을 가르치시면서 마음으로 아마 이런 불안을 가지셨던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가르치는데 이걸 지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아마 이렇게 생각을 하셨는지 산상수훈 마무리를 하시면서 순종에 대해서 아주 강도 높은 말씀으로 끝을 맺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가 잘 아는 집 짓는 비유를 가지고 순종하는 자와 순종하지 못하는 자의 차이가 하늘과 땅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마치 자기집을 반석 위에 세워서 짓는 자와 같다. 나중에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 수고는 영원히 남는다. 그렇게 집을 짓는 자는 지혜로운 자다. 순종하는 자는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다.' 반면에 '말씀을 듣고 배우기는 하지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무너질 줄 뻔히 알면서도 모래 바닥 위에다 집을 짓노라고 땀 흘리며 온갖 돈을 다 집어넣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무너질 줄 알면서 땀 흘리고 돈 집어넣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 중에 어리석은 사람이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이런 자와 같다.' 하고 단단히 못을 박고 순종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5장에서부터 7장에 이르도록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닮아 작은 예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인품을 가져야 되며 어떠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를 여러 가지 사례와 내용을 가지고 세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잠깐 뒤로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의 기억을 되살려 살펴볼까요? 예수님은 복 있는 자가 되려고 하면 마음을 비우라고 합니다. 애통하라고 합니다. 온유하라고 합니다. 긍휼히 여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고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된다고 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의를 위해서 핍박도 감수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강도 높은 진리입니까?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나서는, 이어서 형제에게 노하지 말라고 합니다. 노한 감정을 가지고 형제를 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추악한 생각에 끌려 다니지 말라고 합니다.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원수를 위해서 축복하는 자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될 때 작은 예수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한테 보이려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그런 외식주의자가 되지 말라고 말합니다. 보물을 땅에 쌓고 돈을 하나님처럼 숭상하지 말라고 합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되어 좁은 길을 걸으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내용을 예수님께서 모두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읽고 고백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는 최고의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 아래 생명이 있습니다. 진리가 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이외에 우리 인류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은 권세를 가지고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28절, 29절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산에서 들은 모든 무리들이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권위가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직업적으로 가르치는 서기관들의 비해서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습니다. 어두운 마음을 환하게 열어주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감탄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런 절대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듣고 배우는 우리가 조금 지나서 다 잊어버리고 흘려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무너질 줄 알면서 땀 흘리고 집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똑같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구원도 못 받는다는 말인가요? 순종 안 하면 구원을 못 받습니까?" 아마 이런 질문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지 못할 확률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21절 말씀을 마음에 잘 담아야 합니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갈 것이니라.' 예수님이 무슨 빈말을 하실까요?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을 오해해서 '순종을 조금 못해도 믿기만 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 말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 말씀이 더 권위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순종하는데 관심이 없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남는 것이 없는 신앙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을 못 받을 확률도 있습니다. 그 점을 마음에 꼭 기억하길 바랍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순종은 믿음만큼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에 대해서 명확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혼란을 겪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 교회 젊은이가 하나가 저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목사님, 제 후배가 예수를 믿은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데, 성경을 읽다가 의문이 생겼나 봅니다. 그래서 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형, 어떤 성경에 보니 누구든지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는데, 또 다른 성경에 보면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했는데, 성경에 일관성이 없는 것 같아서 약간 헷갈려요. 선배가 가르쳐 주세요.'" 그런데 자기도 그 말을 듣고 보니 헷갈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답을 해달라고 부탁해 왔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약하고 교리적으로 기초가 잘 안 닦여 있으면 이런 약간의 혼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하고 해결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순종이 믿음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깜박 놓쳐버리고 제 맘대로 사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잘 못 배웠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좋지 못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잘 못 배웠거나 좋지 못한 영향을 받으면서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은 순종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길게 말씀을 하시다가 마지막에 와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경고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15절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짓 선지자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항상 안과 밖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양들이 풀을 뜯는 목장 주위에는 언제든지 이리들이 여기저기 배회하고 있으면서 양을 덮치려고 기회를 노리는 것은 유대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이 거짓 선지자들을 일컬어서 흉악한 이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리들이 교회 안에 있고 교회 밖에도 있습니다. 이들은 어그러진 말과 잘못된 말을 가지고 사람들을 유인하고 시험합니다.
또 사도 바울의 말을 들으면, 정말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어 예수를 믿었고, 사도의 눈에 들 만큼 신앙생활을 잘 하고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장로로 피택이 되어 초대 교회에 장로가 된 사람들 앞에서 그가 무엇이라고 한 줄 아십니까? '너희들 중에도 이런 흉악한 이리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나올 줄을 내가 안다.' 거짓 선지자들은 교회 밖에서만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생깁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일컬어서 나쁜 나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나무가 나쁘다는 말은 나무의 질이 근본적으로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근본이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중생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요, 입만 요란하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요, 자기 유익을 위해서 제 맘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가끔 이들이 엄청난 사역을 하는 것을 봅니다. 큰 교회를 인도하는 지도자가 됩니다. 능력을 받아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칩니다. 많은 권능을 행합니다.
이런 잘못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님이 벌써 22절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주여주여' 하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큰 교회를 목회해서 성공했다는 말 듣는데, 실제로는 전부 거짓 선지자들이요, 이리떼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말세가 되면 더 많아지고 더 기세를 올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근본이 잘못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히 나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쁘지 않습니까? 질이 안 좋은 나무에 질이 좋은 열매 맺히는 것 보셨습니까? 그러면 나쁜 열매가 무엇입니까? 순종 안 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이 나쁜 열매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여, 주여'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주여' 소리를 하루에 얼마나 자주 합니까? 자다가도 '주여, 주여.' 할 정도이고 안 믿는 사람이 보면 청승맞은 것처럼 늘 '주여, 주여'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주여'라는 말은 '왕이시여, 하나님이시여'라는 뜻입니다. '나는 당신을 나의 하나님, 나의 왕으로 모십니다. 당신께 절대 충성하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명령하십시오.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겠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내 생명도 아끼지 않고 드리겠습니다.' 하는 신하의 맹세가 '주여'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나깨나 '주여, 주여' 했지만 실제로는 순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모순이 많은 사람입니까? 입으로는 충성을 맹세해놓고는 충성을 하지 않는 겁니다. 이런 생활을 하는 것이 나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후 100년경에 교회가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면서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들의 횡포가 심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 지도자들이 견디다 못해 한데 모여서 도대체 누가 거짓 선지자인지 구별하기 위해 지침서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소위 그 유명한 '디다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지침서를 보면, 거짓 선지자를 골라내는 가이드라인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니라. 가르치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니라.' 하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리고 이 거짓 선지자들은 자기만 행하지 않고 자기만 나쁜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유인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착한 성도들을 유인합니다. 좁은 문 곁에 서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걸어가려는 사람들을 유인해서 넒은 길로 쳐 넣습니다. 이게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무엇이 넓은 길입니까? '주여, 주여' 하면서 제 맘대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넒은 길입니다. 자기 좋은 대로 신앙생활하고 편하게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순종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이 좁은 길입니까? 순종하고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 값을 지불하려는 각오를 하고 좁은 길을 들어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좁은 문 옆에 서서 그런 길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유혹해내어 그들의 김을 빼고 그들을 오염시켜서 넓은 길로 쳐 넣는 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하는 짓입니다.
우리는 바르게 반응합니다
마 7:28-29 / 박상훈 목사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옛날 어떤 시골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매우 연로하셨습니다. 그는 얼굴에 하얀 수염이 길게 나 있는 할아버지 목사님이셨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정년이 없었습니다.
어느 주일 목사님은 시골 교회 성도들을 앉혀놓고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반응이 도무지 시원치 않았습니다. 대부분 딴청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괜스레 주보를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연거푸 자기의 손목시계만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설교하는 목사님이 얼마나 맥이 빠지겠습니까?
그런데 딱 한 사람은 예외였습니다. 맨 앞줄에 앉은 할머니는 목사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계속해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그 할머니 덕분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배가 다 끝났습니다.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아무래도 오늘 저의 설교는 전적으로 할머니를 위한 말씀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군요. 그런데 오늘 저의 설교 가운데 무슨 내용이 그렇게 감동적이었습니까?"
그러자 할머니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설교 내용은 제가 잘 모르겠구요. 실은 제가 며칠 전에 애써 키우던 염소가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얼굴에 있는 수염을 보니까 자꾸만 그 염소가 생각이 나서 저도 모르게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할머니는 또다시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할머니는 목사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5, 6, 7장에 걸친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다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2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그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놀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29절은 그들이 놀란 이유를 두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29절입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첫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놀랐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바라신 반응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철저한 순종을 보여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구원을 얻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무리들은 그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껏 놀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을 뿐입니다.
마13:53 이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이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똑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런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왔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뇨? 그 모친의 이름은 마리아요, 그 형제들과 자매들도 우리가 다 잘 아는 사람이 아니뇨?"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배척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놀란다고 해서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바람직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리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 있는 마8:1입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처음에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놀라서 예수님의 뒤를 많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요6:66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결국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예수님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는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향하여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들도 나를 떠나려느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 있사온데 우리가 뉘게로 가오 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다 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우리가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살펴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더욱더 분명하고 확고하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해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29절 상반부입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은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베풀었던 잘못된 가르침을 6가지로 실례를 들어서 우리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당시의 서기관들은 옛 사람, 곧 자기들에게 유전을 전해준 장로들의 권위를 의존해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가르침을 베풀 때 이러한 표현을 썼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또는 "랍비 ○○○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이렇듯 그들은 불완전한 사람의 권위에 의존해서 무리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무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신적인 권위로 권세 있는 가르치심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요1:1을 잘 알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우리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또 모든 선지자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주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뿐만 아니고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처럼 불완전한 인간의 권위에 의존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신적인 권위로서 절대적인 진리를 권세 있게 가르치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히 멸하십니다. 이러한 권세를 가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는 예수님이 반석이 되어 주십니다. 그는 심판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어엿이 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반석이 되시고, 예수님이 피난처가 되셔서 그를 든든히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듣고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 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 날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밝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우리는 히9:27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두 가지 문제, 곧 죽음과 심판의 문제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분이 계십니다. 오직 한 분,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미국의 어떤 법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아가씨가 즉결 재판을 받기 위해서 법정에 섰습니다. 그는 교통법규를 위반해서 경찰에 붙들려 왔습니다. 재판관이 그 아가씨에게 물었습니다.
"Guilty or not guilty? 죄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죄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 아가씨는 순순히 자백했습니다.
"Guilty. 예, 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이렇게 판결을 내렸습니다.
"All right. 그럼 됐구먼. 3일 구류 혹은 벌금 100달러. 땅땅땅."
그리고 난 뒤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재판관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기의 법복을 벗었습니다. 그리고는 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자기의 지갑을 열어서 그 아가씨 대신에 벌금 100달러를 꺼내서 지불했습니다. 왜 그러했겠습니까? 바로 그 아가씨가 그의 사랑하는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딸일지라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값을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사랑하는 딸이니까, 아버지는 자기가 대신해서 그 죄값을 치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잠시 하늘 보좌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권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죄를 다 씻어 주셨습니다. 깨끗하고 정결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는 심판 날 자기의 죄값을 자기 자신이 치러야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이미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어엿이 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반석이 되시고, 우리의 피난처가 되셔서 우리를 든든히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날마다 감사와 존귀와 찬미를 그에게 돌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그것을 다 베껴 써야만 되었습니다. 그 일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손으로 베끼는 일을 하다보니까 성경 지식에 관한 한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우선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본 대로 권세 면에서 천지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권세 있는 가르치심을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인 권위로 가르치셨습니다. 반면에 서기관들은 기껏해야 장로들, 옛사람들의 권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가르침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그 내용면에서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여러분,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큰 잘못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모든 성경의 근본적인 정신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습니다. 예컨대 서기관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보상법의 원리도 역시 사랑이라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사람들에게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서기관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온통 미움과 복수심을 조장시켜 놓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성경의 근본원리가 사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치느냐? 왼편 뺨도 돌려대어라. 누가 속옷을 달라고 하느냐? 겉옷까지 주어라. 억지로 오 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는 십 리까지 가주어라."
또 서기관들은 이웃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정신도 망각해 버리고 백성들을 왜곡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이웃만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사랑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미움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습니까?
"이웃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내용은 한 마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천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천국에는 아무래도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10번 정도 읽어서는 천국에서 명함도 낼 수 없습니다. 100번 정도 성경을 통독해야지, "꽤 읽었구나!"라는 소리를 겨우 들을 수 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자신은 성경을 300번 읽었다고 은근히 자랑했습니다. 그러다가 천사가 그를 불러놓고 성경인물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을 했지만, 그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무안을 당했습니다. 또 한 번은 성경을 500번 읽었다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자랑스럽게 성경 말씀을 암송하다가 그만 중간에 막혀버려서, 얼굴이 새빨개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예수님이 허허 웃으시면서 큰 소리로 칭찬하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세상에 성경을 이렇게 잘 아는 사람은 내가 처음 보는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사람은 아마도 신학교 교수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적어도 1000번 이상은 읽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사람은 주일학교 1학년인 어린 아이였습니다. 중국 연변에 있는 한 조선족 교회의 유년부 1학년인 그 아이는 성경을 겨우 한 번 읽었을까 말까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학교에서 오는 길에 그 아이는 교통사고를 만나 천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아이에게 물으셨습니다.
"얘야, 성경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보아라."
그러자 그 아이는 더듬거리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성경은… 고조… 사랑입네다."
예수님은 그 아이의 말을 들으시고, 성경을 제대로 알았다고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기특한 듯이 크게 칭찬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읽거나 성경 말씀을 많이 암송한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정신은 사랑임을 알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말씀에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서기관들처럼 머리로만 아는 지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마십시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리들처럼, 그저 "좋은 말씀이다, 은혜로운 말씀이다, 놀라운 말씀이다"라는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맙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실천적인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우리가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살펴봅니다.
흔히들 가르침, 곧 교육에는 세 가지의 차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이른바 교육의 ABC라고 합니다. A는 Add입니다. 지식을 더함으로서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B는 Broaden입니다. 시야를 넓히고, 이해를 넓혀주는 것입니다. C는 Change입니다. 잘못된 관점을 바로 잡아주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올바른 삶의 태도로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그들은 기껏 놀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A와 B의 단계에 머물고 만 것입니다. 삶이 바뀌어지는 C의 단계에까지 그들은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르치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습니까? 새로운 지식을 통해서 그들을 단순히 놀라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실제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야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넓은 문과 넓은 길의 삶에서 이제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의 삶으로 변화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무리들은 기껏해야 놀라는 정도의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고 만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주일 그 교회에서는 새가족 초청 전교인 전도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분들이 많이 왔습니다. 그 교회의 어떤 여집사님도 믿지 않는 남편을 간신히 이끌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날 설교가 끝난 뒤에 목사님은 새로 온 분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시는 분은 잠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그 여집사님의 남편은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집사님은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여보, 어서 일어나세요. 당신도 일어나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작정하세요."
그러나 그의 남편은 한사코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여집사님은 남편에게 서운한 듯이 물었습니다.
"여보, 왜 일어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이 일어나서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해 주기를 바랬어요."
그때 남편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여보, 그동안 당신은 교회를 다니면서 신자로 살아왔고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 불신자로 살았소. 그러나 그동안의 생활을 보면 당신의 삶이나 나의 삶이나 무슨 차이점이 있소? 생각해 보시오. 내가 화를 낼 때 당신도 화를 냈지요? 내가 큰 소리 치면 당신은 언제나 나보다 더 큰 소리 치지 않았소? 내가 일요일 야외에 나갈 때, 당신도 언제나 나를 따라서 나서지 않았소? 이와 같이 당신과 나의 생활이 똑같은데, 내가 새로 믿겠다고 작정해야될 이유가 무엇이오? 나는 믿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서지 않은 것이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서기관들처럼 그저 머리로만 아는 지식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습니까? 무리들처럼 "좋은 말씀이다, 오늘 좋은 말씀을 들었다"라는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실천적인 반응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라십니다.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삶의 변화가 있기를 요구하십니다. 이런 올바른 반응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 208장입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
머리털 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 눈보다 더 희어졌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이 찬송이 우리의 고백이요, 우리의 간증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교육 형태와 방법
마 7:28-29 / 김윤기 목사
2월은 교육의 달입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새로운 교육 계획들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주 5일제 근무 실시와 인터넷 그리고 과학과 신문화에 의한 갈등 등에 대해 교회는 대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는 어린이에 맞는 예배, 청소년은 청소년에 맞는 예배로 예배를 갱신하여 합니다. 우선 교육의 계획에 앞서 과연 예수님의 교육은 어떠했는지를 먼저 알아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의 교육형태
예수님의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형태는 설교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의 생활과 함께 그 현장 한복판에 찾아가셔서, 그곳에서 대화하면서 가르치셨고, 가르치실 때마다 인간의 삶 전체를 설교의 장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비유(parable)를 많이 사용하시었습니다.
그리고 교육의 대상은
①첫째, 바리새파사람, 서기관들이며 이들은 율법을 절대적 가치 규범으로 삼고 예수님의 말씀에 비판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하신 교육은 논쟁적 성격, 변증적 언어를 사용하시었습니다.
②둘째, 대중들입니다. 이적을 기다리는 무리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하신 교육은 기적과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었습니다.
③셋째,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직접 부른 사람들과 함께 다니시면서 행하시며 바리새인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었던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고난 받는자의 종으로서의 자기 정체를 알려 주셨습니다.
쉐릴(Lewis Sherrill)교수는 예수님의 교육형태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청중들에게 맞추어 적응된 것이며 예를 완벽하게 들고 있습니다. ②둘째, 간단하지만 논리적입니다. ③세째, 자연에서 나왔습니다. ④네째, 진리를 고양시키고 나아가서는 진리를 강화시키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⑤다섯째, 진지할 뿐 아니라 동정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특성을 조심 있게 그리고 다양한 접근을 하셨던 예수님의 교육 형태는 모든 계층에 대한 복음을 증거 하실 수 있었습니다. 에수님의 교육의 형태는
1)권위 있는 교육 형태입니다.
예수님의 교육은 무엇보다도 권위가 있었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추측이나 불확실한 상징적인 내용들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교육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 "아마", "그럴 것이다" 혹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등의 자신 없는 표현은 없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25회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라고 하는 확신이 있게 말을 했습니다.
(마7: 28-29)"무리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 함이니라"
예수님이 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말하는 권위 있는 태도에 군중들이 감동을 받고 그의 체험을 통한 사실과 진리의 말씀에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는 분을 만났다(요 3: 2; 4: 29)"고 믿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처음엔 비웃고, 놀리고, 비판하던 산혜드린 회원도 결국 그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요3:1-2)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요4:29에서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라고 말했습니다.
2)인내를 가진 교육 형태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쳐야 할 대상들에게 놀랄만한 인내력을 가지고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강제성을 띠고 군중을 이끌기를 거절하고, 자기의 의지대로 강요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매우 존중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베풀 수 있는 기적의 힘을 아무렇게나 쓰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에 현혹을 주거나 판단을 그르치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강요의 방법을 쓰시지 않고 권유로 "나는 진리이니 나와 함께 있으면 너는 진리를 발견하리라"(요 7: 17)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예)(요2:18-22)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3)인격존중 교육 형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가 자기의 결정을 자기가 하도록 하는 것이 예수의 교육원칙이었습니다. 이것은 개개인의 인격존중이며 자아인식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실 때에 세계가 일찌기 경험한 사실을 상기하게 하고 또 의문을 가지도록 크게 자극을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문제에 해답을 주기보다는 세계의 문제를 제시하고 세계로 하여금 거기에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 자신의 영적 통찰력과 실제에 대한 지각력을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예)요8:1-11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4)모본의 교육 형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실천하여 본을 보여 줌으로 교육의 진실성을 나타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애매하거나 추상적이거나 불확실하지 않고, 분명하고도 뚜렷하게 본을 보여주는 사랑의 방법으로 교육받았습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교사 자신의 존재로서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교육학에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인격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사람은 인격을 지닌 사람들과의 만남으로부터 배움을 갖게 됩니다. 동기유발적 암시나 모방의 이름이 붙은 모든 것은 한 인격이 다른 인격과 더불어 만남을 갖게 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예)요13:1-11 (예수님이 유월절 잔치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교사와 성도님들은 예수님의 교육의 형태를 잘 익히어서 어린이들에게 좋은 교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예수님의 교육 방법.
예수님의 생애 중 가르치시고, 전도하시고, 병을 고쳐 주신 일을 통해서 예수님을 일반적으로 선생님으로 부른 사실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능력에 있어서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현명한 교사는 교회의 기본 신앙 안에서 그들 자신이 경험하고 발견 될 수 있도록 올바른 행위의 내적 근원과 만나도록 학생을 돕는데 힘써야 한다". 고 했는데,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을 찾아 나서 제자들을 스스로 깨닫도록 유도하셨습니다.
1)구전 교육방법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는 데 입으로 전하는 구전 교육을 중심으로 하였습니다(마5:1-12). 글로 쓰거나 쓰기 하면서 가르치지 않고 이야기로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글씨를 쓴기록은 한번 군중에게 잡혀온 여인을 구하기 위해서 땅에 쓴 것(요8: 8) 밖에는 없습니다. 그가 가르친 국언, 명구, 신앙과 도덕 등 결정적으로 지은 모든 말씀 곧 " 하나님의 신학"은 모두 갈릴리 농부와 어부들의 기억을 정리하여 문자로 기록된 말입니다. 구전식 교육방법은 위험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는 농부가 곡식이 결실 할 때까지 계속 돌보는 것처럼 예수도 가르친 말씀에 대해 계속 돌보아 주셨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목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예)마5:1-12 - 산상수훈
2) 사건과 현장중심 교육방법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의 대부분은 충분한 원인을 가진 사건과 현장에서 추출되어 나왔습니다. 어떤 특수한 사건에도 미리부터 생각하고 목적한 사실을 말하고 진실을 설명하였습니다.
①회당에서 반신불수를 만난 일(마 12: 8-11)
②제자들의 돌연 논쟁(눅 9: 46)
③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바리새인들의 질문(마 22: 17)등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자기가 목적하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 대부분은 분명히 어떤 특별한 사건에 관련하여 준 것이지만 지금도 그 교훈은 진리입니다.
3) 질문과 답변형식 교육방법입니다.
질문의 형식은 사람들에게 생각을 하게 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특별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많은 질문을 청중들에게 던지셨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질문을 하도록 권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분석해 볼 때 몇 개는 단순히 알기 위하여 물어 보신 것이 있었으나(막 6: 38, 8: 23, 눅 8: 30), 대부분은 명확한 교육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유할꼬?"(막 4: 30)하는 물음 후에 그가 바랐던 생각을 이야기 (비유)로 차근차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질문에 대하여 항상 친절하며 조심성과 동정심을 가지시고 답변하셨습니다. 항상 묻는 말에는 진지한 태도로 임했으며 진실한 질문에 대하여는 결코 경시하지 않으셨으며 조롱에 대해서도 방임하지 않고 결과는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①(막6: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 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②(막8: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 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③(눅8: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④(막4:30)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그리고 예수님이 쓰시는 말씀은 청중들에게 맞는 단순하고도 직접적이며 박력 있는 용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듣는 이로 쉽게 이해하고 감동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급하거나 조급하게 말하지 않고 차분히 단계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월은 교육의 달입니다. 인동 교회의 부흥은 장기적으로는 교회 학교가 살아난야되고 또 부흥이 되어야 희망이 있습니다. 교사와 성도님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교육 방법을 알아 훌륭한 교사가 되시고 교회학교 부흥에 일익을 담당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