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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에세이
―《國民日報》연재 칼럼―
이정림
바다와 인정
지난 월말, 틈을 내어 갔다 온 안면도의 ‘장꽁농원’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반듯하게 터를 잡은 7천여 평의 땅에 커다란 그늘을 꿈꾸며 심었다는 홰나무와 팽나무들이 소년처럼 키가 자란 모습도 보기 좋거니와, 유리를 만든다는 고운 규사(硅砂)가 집 앞으로 너르게 깔린 백사장은 바라보기만 해도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농원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그런 자연 경관 때문이 아니다. 주인 부부의 따뜻한 마음씨가 그 곳을 아름다운 집으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년퇴임을 한 후 고향 근처에 새 터전을 마련한 주인은 그 농원을 만들 때 꿈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작으나마 남을 위해 봉사하면서 사는 것이었다.
그 꿈의 하나로, 그들 내외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들을 4년째 바다로 초청하고 있다. 대부분이 불법 노동자들이어서 처음엔 밤중에 몰래 왔다가 다음 날 새벽에 일찍 돌아가곤 했지만, 이젠 관할 경찰서의 공식 허가까지 받아 떳떳하고 즐겁게 여름휴가를 보내고 간다고 한다.
해마다 그들을 인솔하고 오는 필리핀 수녀는 젊은 나이에 우리나라에 와서, 불우한 여성들에게 직업 교육을 시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 준 분이다. 그런 분이 이제는 자기네 사람들의 권익을 위해 일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향수까지 달래 주는 어머니의 역할을 떠맡고 있는 것이다.
섬에서 태어나 섬에서 자란 필리핀 사람들에게 바다는 모천(母川)이나 같다. 떠나 있기에 더 그리운 바다를 서해안 안면도에서 다시 안아 볼 수 있도록, 그리고 남의 땅에서 겪는 그 숱한 서러움을 바닷물에 시원히 풀어 버릴 수 있도록, 그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펴 주는 사람들이 돌아보면 의외로 많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어려워 서독으로 브라질로 일자리를 찾아 나갔을 때, 우리의 향수를 달래 준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듯이, 이번에는 우리가 그들의 어려움을 겸허하게 이해하고 따스한 가슴으로 함께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산재(産災) 사고로 손목을 잃고 보상금마저 도둑맞았던 어느 방글라데시인이 그 딱한 소식을 듣고 답지한 온정에 감사하며 활짝 웃는 사진이 오늘 아침 신문에 실렸다. 그는 “한국 사람은 전부 나쁜 줄 알았는데,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기뻐하는 그의 소박한 얼굴이 우리의 양심을 부끄럽게 만들고, ‘나쁜 한국 사람’ 중의 하나일 수도 있는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장꽁농원’에서는 올 여름 필리핀 손님들을 위해 그들의 국가와 민요를 틀어 줄 예정이다. 캄캄한 밤중에 도착한 사람들이 자기네 국가를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주인 내외는 그것을 상상하며 그들이 올 날을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다. (1999. 8. 3)
분노하라 그리고 기억하라
나흘간의 전쟁은 끝났다. 6․25전쟁은 난리도 아니라는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았을 만큼 무섭고 끔찍했던 물난리. 8백 밀리 호우가 폭격이나 하듯 집중적으로 퍼부어 댔던 경기 북부 지역 사람들에게 이제 남은 것은 폐허 같은 삶의 터전과 쓰레기밖에 없다.
평생을 모아 장만한 집이었다. 하나하나 사들일 때마다 기쁨이 덤으로 따라온 세간들이었다. 며느리가 해 준 그 물색 고운 이불도 쓰러진 장롱 속에서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있다. 날마다 쓸고 닦던 것들이 흉측한 쓰레기로 변한 모습 앞에서 사람들은 의외로 표정이 없다.
두 번씩이나 수재로 집을 날린 어느 노인이 흙구덩이 속에서 사진 한 장을 주워 들고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언뜻 훔쳐본 사진 속에는 누가 잔칫상을 받고 있는 모습이 찍혀져 있다. 그 날은 얼마나 평화로웠던가. 노인은 기어이 손등으로 주름진 눈가를 문지른다.
이번 비로 깨 농사를 망친 할머니는 흙이 잔뜩 묻은 깻송이를 말없이 쓰다듬고 또 쓰다듬는다. 할머니는 그것이 아파 누운 자식처럼 보였을까, 그저 마음이 쓰리다고만 했다. 수재로 세 번씩이나 집이 부서졌는데 이제 네 번째로 집을 다시 짓게 되었다는 한 할아버지가 “내일의 고생을 보지 말고 모레의 희망을 보고 살자.”고 동네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한다. 험하고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노인은 철학자가 된 모양이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런 아름다운 말로 문제를 덮으려 해서는 안 된다. 같은 지역에서 같은 물난리가 몇 년에 걸쳐 연거푸 일어나는 현상을 더 이상 기상 이변이라 돌릴 수만은 없다. 코미디언도 같은 동작을 두 번 거푸 하면 사람들은 웃지 않는다. 하물며 그때그때 적당히 넘기기에만 급급하는 당국의 무성의한 태도와 거짓 약속을 더는 그런 아름다운 철학으로 넘겨서는 안 된다.
이번 물난리에도 신속하게 대처하여 인명 피해를 줄인 것은 바로 그 마을에 사는 주민들 덕분이었다. 자신도 수해를 당했으면서 이웃을 돕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 함께 수해를 당하지 않은 것이 죄스럽고도 미안했다는 자원봉사자들, 자신들도 피해자이면서 총 대신 삽을 들고 찾아오는 군 장병들. 그들이 있었기에 수재민들은 이번에도 재기의 희망을 물속에서 건져 낼 수 있었지 않은가.
당하기만 하는 것을 누가 슬픈 숙명이라 했는가.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체념이 아니라 분노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모르면, 우리는 내년에도 이와 똑같은 수재를 또 당해야 할 것이고 아기들은 분유가 없어 또 울어야 될 것이다. 빈 우유병을 물고 힘없이 누워 있던 아기들의 모습과 거친 손으로 눈물만 훔쳐 내던 노인들의 모습을 우리는 커다란 통곡으로 기억해 두어야 한다. 기억하는 자만이 내일을 개선할 수 있는 것이므로.
(1999. 8. 11)
아름다운 황혼
저녁 무렵, 책상에서 잔글씨를 보다가 눈이 피로해지면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가까이에는 철길이 있고 그 너머에는 푸른 숲이 있으며 멀리로는 산들이 주름을 이루며 무채색으로 바라보이는 풍경. 거기에 홍시처럼 붉은 서녘 하늘이 있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의 황혼을 향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미국 앞에는 언제나 밝게 빛나는 아침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지금 알츠하이머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94년 말, “사랑하는 국민들께”라는 친필 서한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무도 동행할 수 없는 여행길을 홀로 걷고 있다. 자신이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레이건이지만, 미국 국민들은 잃어버린 미국인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준 그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 그는 배우 출신 대통령답게 개인으로서나 공인으로서 마지막 인사를 멋지게 하고 무대 뒤로 사라진 것이다.
금세기 세계 최고의 정치 지도자라 하는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도 퇴장의 미학을 훌륭히 보여 준 분이다. 그는 27년 동안이나 감옥에 있었지만 자신에게 핍박을 가한 백인들에게 오히려 용서와 화해의 미덕을 가르쳐 준 대인이었다. 인종을 초월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만델라도 겸손으로 가득한 퇴임사를 남기고 물러났다.
“나는 내 국민과 내 조국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의무를 조금은 해냈다고 느끼며 이만 물러갑니다.”
미국에 영원히 빛나는 아침이 오기를 기원한 레이건, 뿌리 깊은 인종 갈등을 포용과 화합의 정신으로 녹여 낸 만델라. 이 두 분의 고별사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진한 감동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왜 우리에겐 그런 멋진 대통령이 없을까. 우리에겐 정말 그런 훌륭한 대통령을 가질 자격이 없는 것일까. 그 나라 국민 수준에 맞는 대통령이 나오게 마련이라는 말이 요즘처럼 모욕적으로 들린 적은 없다.
얼마 전, 제럴드 포드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미국 최고 시민훈장을 받았다. 카터는 세계 평화를 위한 외교 활동으로, 포드는 정치의 정직과 품격을 회복시킨 공로로. 정직과 품격―우리 정치판에선 사라져 버린 지 오랜 이 아름다운 말을 그들은 그렇게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부러울 뿐이다.
저급한 독설이나 원색적으로 내뱉고 있는 우리네 전직 대통령을 대할 때마다 나는 남의 나라 큰 대통령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목수처럼 망치를 들고 ‘사랑의 집’을 짓고 있을 카터와 고향 언덕을 한가로이 거닐고 있을 만델라를 생각하며, 아름답게 저무는 하루의 모습을 바라본다.
(1999. 8. 19)
단종(斷種)
한동안 홀트아동복지회에서 모집하는 문예 작품 심사를 한 적이 있다. 대상이 시설 아동들이고 보니, 응모자는 자연 맹인․정박아․정신장애아․고아 들이었다.
나는 이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새로운 사실에 놀랐다. 점자로 꼭꼭 눌러 쓴 맹인 아동들의 시에서는 뛰어난 감성이 놀라웠고, 떨리는 손으로 삐뚤삐뚤하게 쓴 정박아들의 산문에서는 그 순수한 영혼에 큰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내 편견을 버려야만 했다. 보이지 않으면 지각 능력도 떨어질 것 같고, 지능이 낮으면 사고 능력도 모자랄 것 같은 편견이 실은 얼마나 무지하고 오만한 것이었는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요즘 정신 지체 장애인들에 대한 강제 불임 시술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그러면서 ‘인종 잡초 뽑기’니 ‘인종 청소’니 ‘인간 개량’이니 하는 살벌한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잔인한 말들을 만들어 낸 사람은 자신은 신의 ‘선량(善良)’이라고 생각했을까. 누가 잡초이고 누가 금잔디인가. 이 사회에서 비로 쓸어 버려야 할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백인의 눈에는 흑인이 잡초였고, 미국인의 눈에는 인디언이 잡초였으며, 나치 독일인의 눈에는 유태인이 잡초였지 않은가.
나는 그런 낱말들을 대하면서 심한 사고의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맹목적인 선민의식에 두려운 마음마저 인다. 그런 선민의식 앞에 그 동안 아기를 낳고 싶은 사람들의 권리가 남 몰래 박탈되어 오지 않았던가.
아기를 갖고 싶어 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부모가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 아무도 아빠가 되고 싶고 엄마가 되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인 행복권을 빼앗을 수는 없다. 어떤 선(善)도 인권의 무덤 위에서 꽃을 피우지는 못한다. 본인도 모르게 시술한 그 범죄 행위를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불행한 이들을 위한 자선 행위”라고 미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자신의 아기를 안아 볼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한다. 그런 다음의 문제는 국가와 사회가 떠맡아야 할 몫이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평등하게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 이 복지국가의 건설은 결코 선거용 포스터에만 쓰이는 일회용 구호에 그쳐서는 안 된다.
스웨덴에서는 한때 정신 장애인뿐만 아니라 반사회적 행위자에게까지 불임 수술의 대상을 확대 실시한 적이 있다. 우리네 사회에서 반사회적 행위자를 꼽는다면 누가 될까. 남의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가정 파괴범들, 믿음을 헌신짝처럼 짓밟는 사기 협잡꾼들, 제 주머니만 불리기에 급급한 부정부패 공직자들, 테러를 당하고도 정신 못 차리는 한심한 정치인들, 이런 자들이야말로 먼저 단종(斷種)시켜야 할 대상이 아닌가. (1999. 8. 30)
쇼핑과 존재
옛날 사진관에는 사진의 배경이 되는 그림이 벽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주로 푸른 바다와 흰 돛단배, 그리고 갈매기가 몇 마리 등대 위로 날아가는 그림이었다. 그 앞에서 친구와 사진이라도 찍게 되면, 사진관 아저씨는 “영원한 우정을 기리며”라든지 “석별(惜別)의 정을 나누며”와 같은 문구를 꼭 집어넣어 주었다. 나는 그 사진들을 들여다볼 때마다 전학 간 친구보다는 사진의 배경 그림이 주는 애잔한 정서에 더 마음이 끌렸었다.
남자들은 아잇적에 빨래판을 포개 놓은 이발소 의자에 앉아 벽에 걸려 있는 풍경화를 바라보며 자랐다고 한다. 그 이발소 그림에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하는 푸슈킨의 시가 으레 적혀 있었다. 내남없이 가난하던 시절, 그 시구(詩句)는 현실의 고달픔을 잊게 해주는 희망의 암시가 되어 우리를 위로해 주었었다.
그러나 현대 화가들은 이제 그런 촌스런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 ‘미술로 보는 대중문화’라는 강의를 듣고 있다가 이 시대에서는 더 이상 그런 순박하고 아름다운 정서를 자아내는 그림은 나올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한 메시지를 여과 없이 표현하여 마치 포스터와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들 가운데에서 어느 여성 화가의 작품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생각할 때만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들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 화가는 현대인들은 쇼핑할 때만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는 상징성을 표현하고자 한 모양이었다.
얼마 전,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고관 부인들을 불러다 놓고 소위 ‘고급옷 로비 사건’이라는 희극적인 청문회를 연 바 있다. 그런데 거기에 나와 앉아 있는 증인들을 보며, 이 여인네들이야말로 쇼핑할 때만 자기의 존재를 느낀 사람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몰지각하게 써 댈 수 있었겠는가. 나는 그 여인네들이 한없이 가엾게 여겨졌다. 내세울 것이라곤 돈밖에 없는 정신의 소유자들이라면 지탄이 아니라 동정을 보내야 하는 게 마땅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옷으로 사회가 떠들썩했던 한 구석에서 옷 장사로 깨끗이 번 10억 원이라는 돈을 기꺼이 사회에 헌납한 할머니가 있었다.
“사회가 베풀어 준 은혜를 갚기 위해 전 재산을 기탁했습니다. 돈이 없어 발을 구르는 환자들에게 작은 희망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할머니는 철학이 빈곤한 이 사회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정신의 존재자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1999. 9. 7)
어머니
마침내 재일 동포 무기수 권희로(權禧老) 씨의 어머니가 돌아왔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 땅 부산에,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들의 품에 안겨 한 줌 유골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유골함을 건네받고 늙어 버린 아들은 “어머니, 불효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눈물로써 절규했지만 어머니에게는 이제 그 피맺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유골함을 목에 걸고 고국 땅을 밟는 그 숙연한 모습을 보며, 이 땅의 불효자들은, 아니 이 땅의 자식들은 잠시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려 보았을 것이다. 나는 내 어머니에게 어떤 자식일까. 끝없이 아픔과 서러움만 안겨 드리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식들이지 않은가.
유골함을 덮은 태극기의 선명한 빛깔이 내겐 웬일인지 그 서러움의 상징처럼만 보였다. 남의 땅에서 슬픈 인생을 마친 한 여인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위로는 태극기로 그 지친 영혼을 싸안는 것밖에는 없을지 모른다. 조국의 깃발이 간고(艱苦)한 삶을 마친 한 여인의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달래 줄 수 있다면 우리가 무엇은 못하리.
차별을 이겨 낸다는 것이 굴종보다 더 어려웠던 환경에서도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도록 깨우치시던 어머니, 비겁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던 그 어머니는 어느 투사보다도 강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이 살인을 당하면 잠들 수 있지만, 아들이 살인을 하면 잠들지 못 한다.”는 아라비아 속담처럼 그분은 아들과 함께 31년 세월을 교도소 밖에서 죄수 아닌 죄수로 형(刑)을 살아야 했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일념으로 3천 리 길을 지척인 양 찾아가면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거기에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이 보이더라고 한 말에서 그분의 가슴속에 불었을 바람을 생각한다. 그때 그 어머니가 느꼈을 허허로움은 누가 무엇으로 채워 드릴 수 있을까. 아무리 “어머니의 눈물을 닦을 수 있는 것은 어머니를 울리게 한 아들뿐”이라는 말이 있다 해도, 자식은 어머니의 그런 외로움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한다.
그 어머니가 이제 모든 아픔과 한(恨)에서 놓여나 법당에서 한 줄기 향연(香煙)으로 피어오르고 있다. 그 앞에 어머니가 지으신 한복을 입고 백발의 자식이 머리 숙여 절을 올린다. 혁명가의 어머니에게도 양심범의 어머니에게도 자식이란 그저 영원한 아픔이요 애물이라는 것을 그는 알까.
가람 이병기(李秉岐)는〈젖〉이라는 시조에서 이렇게 어머니를 노래했다.
“나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누우시던 날/쓰린 괴로움을 말로 차마 못하시고/매었던 옷고름 풀고 가슴 내어 뵈이더라/까만 젖꼭지는 옛날과 같으오이다/나와 나의 동기 어리던 팔구 남매/따뜻한 품안에 안겨 이 젖 물고 크더이다.” (1999. 9. 15)
추 석
내일은 추석, 길은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차로 또 가득해질 것이다. 빨간 미등(尾燈)을 켜고 줄줄이 서 있는 귀성 차량들을 볼 적마다 나는 늘 목이 메는 감동을 느끼곤 한다. 부모님을 찾아뵈러 ‘교통 전쟁’을 각오하고 길 떠난 사람들―그런 이들이 있기에 이 사회는 아직도 건전하게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손에 작은 선물 꾸러미를 들고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걸어가는 젊은 내외의 모습이 아름답다. 그들은 적어도 사람의 도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이들처럼 보인다. 힘들 때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용기를 얻고, 유혹에 흔들릴 때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거절할 수 있는 자식들이 된다면 이 사회가 이토록 부패의 늪에서 허덕이지는 않을 게 아닌가.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는 오늘 마음이 분주하실 것이다. 며느리들이 일찍 내려와 일손을 거든다 해도, 미리미리 음식 장만하느라 굽은 허리 펴실 새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즐거우시리라. 자식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생각만 하면 없는 힘도 금방 솟는 것 같고, 아픈 허리도 가뿐하게 여겨지시지 않을까.
그러나 자신을 기다리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올 추석에도 고향에 내려갈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있다. 작년에는 나라가 어려워져 모든 인사를 생략하고 미루었어도 덜 죄송스러웠는데, 올해는 조금 경제가 나아졌다곤 하나 서민들의 삶은 여전히 힘들고 고달프기는 마찬가지다.
경기(景氣)도 재래시장에는 대목의 열기가 일지 않고 백화점에만 손님이 몰린다고 하니, 이래저래 어려운 사람들은 IMF 한파에서 벗어날 날이 요원하게만 보인다.
거리에는 아직도 실직의 후유증을 안고 헤매는 사람들이 있고, 지난 물난리에 집과 가재도구를 잃은 사람들에게는 명절은 그저 부담스러운 날이기만 할 뿐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 하던 이 민족 최대의 명절에 아직도 웃음을 찾지 못한 이웃들이 우리 곁에 있음을 생각해야만 한다.
올 추석에는 꾸벅 절만 하지 말고, 어머니의 주름진 두 손을 한번 쥐어 드리자. 그리고 모처럼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얼굴을 올려다보자.
세월의 풍상에 몰라보게 늙으신 어머니, 언젠가는 우리를 남겨 두고 떠나가실 내 어머니, 당신이 계시기에 내가 있음을 왜 우리는 자주 잊고 사는 것일까. 이번 추석만은 모든 자식들이 ‘품안의 자식’이 되어 마른 꽃 내가 나는 어머니를 안아 드리자.
“하고픈 이야기가 많았습니다./아주 오랫동안 저는 타향에서 지냈습니다./그래도 저를 가장 잘 이해해 주시는 이는/언제나 어머님 당신이었습니다.”(H. 헤세 ‘나의 어머님에게’) (1999. 9. 23.)
고르비의 눈물
손수건을 눈에 대고 눈물을 닦는 한 장의 보도 사진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여자가 아닌 남자의 눈물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젊은이가 아닌 노인의 눈물이라서 그럴까. “눈물은 슬픔의 말없는 언어”(볼테르)라고 하는데, 남자의 가슴속에 흐르고 있을 그 슬픔의 강은 대체 얼마나 깊을까 헤아려 본다.
옛 소련의 마지막 퍼스트레이디인 라이사 여사의 장례식장에서, 남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이 취재 기자의 앵글에 잡혔다. 젊음도 영화(榮華)도 모두 잃은 고르바초프가 이젠 인생의 동반자마저 잃고 한 사람의 약한 노인의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 사진을 대하고 있자니, 또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의 모습이 떠오른다. 1974년 8월, 부인 육영수 여사의 영구차가 흰 국화에 싸여 청와대를 떠나던 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문설주에 한 손을 대고 소리 죽여 오열하던 모습. 그때 국민들은 그렇게 강한 대통령에게도 그런 약한 일면이 있었던가 싶어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았던가.
남편의 야망과 절망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여인, 남편의 고독과 아픔을 끝없는 애정으로 감싸 안았던 여인은 이제 가고 없다. 남편 앞에 가는 것을 여자의 행복이라고들 하지만, 뒤에 홀로 남아 있는 지아비의 모습은 너무나 쓸쓸해 보인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내의 병상을 지키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고르비, 그러나 아내 라야가 그의 간절한 기도를 저버리고 끝내 숨을 거두었을 때 그의 희망 또한 모두 거두어진 것은 아닐까.
고르비의 눈물에서, 나는 한없이 약한 한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영욕(榮辱)이 부침하는 세월 속에서 든든한 동료이자 반려가 있었기에, 그는 힘을 얻고 또 일어서곤 했을 것이다. 그런 아내가 가고 없는 지금, 그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그에게는 더 이상 재기할 수 있는 여력도 없어 보이고, 고독을 이겨 낼 수 있는 젊음 또한 없어 보인다. 그는 이제 바람받이에 홀로 서 있는 노인처럼 추워하면서 외로워하면서 서서히 생명의 근원으로 잦아들어 갈지 모른다.
중국 청나라 때 선비 심복(沈復)은 “아내가 죽은 후부터 나는 근심뿐이고 즐거움이 없었다. 봄날 아침이나 가을날 저녁, 산에 오르거나 물가를 거닐어도 눈에 띄는 것은 모두 나를 상심케 하는 슬픔이 아니면 한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장자(莊子)는 자기 아내가 죽었을 때,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했다고 하지만 어찌 정을 참으로 잊었으랴? 어찌할 수 없으니까 도리어 달관한 것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홀로 남겨진 사람들의 고독과 아픔이 이 가을을 더욱 쓸쓸하게 하는 요즘, 내게 가장 소중한 이는 누구일까, 진지한 마음으로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다.
(1999. 10. 4)
성(性)과 생존
지난 초여름, 노동부와 한겨레신문사에서 주최한 ‘실업 극복 수기’를 심사하면서 나는 참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우리나라가 IMF 체제에 들어가면서 가장들은 졸지에 직장을 잃었고, 그 가족은 하루아침에 생계가 막막해진 상황을 신문 보도로 대하면서도 그 심각성이 절실하게 피부에 와 닿지 않았었다. 그러나 여러 편의 수기를 훑어보면서 나는 그네들이 처했던 그 절망감이 얼마나 컸던가를 조금은 알게 되었고, 실업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이 노력했던 그 필사적인 삶의 태도가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다웠는가를 또한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던 것이다.
“실업은 홍수를 동반한 A급 태풍처럼 우리 가정을 산산이 부서뜨리려 했다. 그러나 남편과 나는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물뿐인 막막한 대홍수 속에 잠기지 않은 채 솟아 있는 희망 나무 꼭대기 위에서 두 딸의 팔을 꽉 붙잡고는, 물이 다 빠져 나가고 햇볕이 쨍쨍 나 다시 두 발로 세상을 딛고 걸어다닐 수 있을 때까지 안간힘을 다해 버텨야만 했다.”
이 글은 사무직에 종사했던 가장이 실직당한 후,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쓴 아내의 글이다. 어제까지 펜대를 놀리던 사무원이 하천의 쓰레기를 치우는 공공근로사업을 하면서 자신을 격려하는 글은 유명한 잠언과도 같았다.
“물에 빠졌다고 익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죽었다고 포기할 때 익사자가 된다. 죽을힘을 다해 움직이자. 죽을힘을 다할 때 살 힘이 생긴다.”
한 편 한 편이 감동적이었던 그 수기들 가운데에서 아직도 내 마음에 비수처럼 박혀 있는 글 하나가 있다. 그것은 전직 수학 교사로서 지금은 부동산 소개업소를 운영하는 여성의 글이었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주부들이 매춘에 나선 일을 사회가 큰 병이라도 든 것처럼 보도하는 것을 보며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절박한 경제 위기 속에서 성(性)은 이미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라고 날카롭게 사회의 비난을 맞받아친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가족의 생계 문제를 해결하는 그들에게 박수라도 쳐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TV 앵커나 기자 너희들은 밥걱정은 하지 않겠지?” 하고 냉소적으로 힐난한 글이었다.
이 수기를 읽고 잣대의 기준이라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것이 엊그제인데, 오늘은 우리의 어린 딸들이 ‘영계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는 기사를 대한다. 그 애들의 탈선은 생존이 아니라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잘못된 성문화 의식은 자신들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든다는 것을 모르고 있음이 안타깝다. 나는 사형폐지론자이지만, 그 어린아이들을 성의 노리개로 삼는 어른들은 사형이나 궁형(宮刑)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1999. 10. 12.)
로버트 김의 외로움
96년 12월, 광화문 조선일보 미술관 앞에는 눈발이 날리는데도 사람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50~60년대의 못살았던 시절을 인형과 소품으로 꼼꼼하게 재현해 놓은 이승은․허헌선 부부의 인형전 ‘엄마 어렸을 적엔…’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성공회 앞길까지 늘어서 있던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다.
그 인형들 가운데에서 ‘어머니 방’이라는 작품이 기억에 남는데, 그것은 늦은 시각 어머니의 방에 모여 앉아 아이들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전구(電球)를 넣어 양말을 꿰매고 있는 어머니 옆에는 수저가 하나 내보이는 밥상이 상보에 덮여 있고, 무쇠 화로에는 된장 뚝배기가 부젓가락 위에 놓여 있다. 두 사내아이와 고명딸은 나란히 앉아 군용 담요 속에 발을 들이밀고 만화책을 보는데, 아이들이 꼼지락거려서일까 그 밑에 넣어 둔 밥주발이 뚜껑이 열린 채 모로 쓰러져, 밥풀이 담요 안자락에 몇 개 붙어 있는 모습이 퍽 재미있었다.
5남매와 어머니가 자지 않고 아버지를 기다리는 모습은 매우 평온해 보였다. 아이들은 어쩌면 아버지가 사 들고 오실 막과자를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빈손으로 돌아오신다 해도 아이들은 아버지의 옷자락에 매달리며 서로 안기려 들 것이다. 아버지는 그 존재만으로도 의미요 힘이지 않은가.
국가는 국민의 아버지다.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절대적인 의미요 힘이듯이, 국민에게 국가는 절대적인 의지처요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96년에 한국 정부에 미(美) 국방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현재 복역 중인 로버트 김(한국명․金采坤)이 우리 정부에 공개 질의서를 보냈다. “제가 대한민국의 스파이였습니까, 아니었습니까?”
조국이 얼마나 자기 일에 침묵하고 있었으면 이런 질의서를 보냈을까. 그리고 그는 그 침묵에 얼마나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을까.
정부 측 입장은 이 사건을 “법적으로 볼 때 미국에서 발생한 미국 시민권자의 개인적 행위에 대해 미 사법부가 실형을 선고한 사안”이라고 규정을 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미국 시민권을 가졌다 해도 그는 한국인이다. 또 그의 ‘개인적 행위’는 그가 한국인임을 부정할 수 없는 애국심의 발로였지 않은가.
우리의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와는 다르게, 명백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던 유태계 미국 시민 조너선 폴라드를 위해 이스라엘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구속되자마자 국적과 시민권을 부여했는가 하면, 당시 총리 네타냐후는 다음과 같은 친필 서한을 그에게 보냈다. “당신은 외롭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신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왜 그런 지도자가 없는 것일까. 로버트 김의 외로움이 겨울 추위처럼 옷섶으로 파고든다. (1999. 10. 20)
초심(初心)
얼마 전에 젊은 의사들이 자신의 몸과 장기(臟器)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의대생들이 해부학 실습을 하려면 네 명당 시신 한 구(具)가 이상적이라고 하는데, 현실은 시신 하나에 수십 명의 학생이 매달리다 보니 실습 아닌 ‘구경’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실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의사들이기에, 사후에 시신을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곤 하지만 이게 어디 쉽게 결심할 일인가. 그러나 이들은 사경을 헤매는 환자와 후배들이 이어 갈 의학 발전을 위해 자기 몸이 쓰인다면 기쁜 일 아니겠는가 반문하면서 “이웃을 위한 의술에 몸 바치겠다는 초심(初心)을 확인하는 뜻에서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초심, 이 얼마나 순수한 낱말인가. 흰 가운을 입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던 날, 그들은 정녕 환자를 위해 책임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흰 가운에 조금씩 때가 묻어가듯이 날로 의사의 사명감은 옅어지고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안주하려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처음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부부도 한 사람과 백 년 해로하리라 마음먹었던 그 순간에는 상대방의 단점은 사랑으로 덮어 주며 살리라 생각했지만, 살다 보면 그 결심은 얇아지고 변치 않을 것 같던 사랑마저 퇴색해 감을 느끼게 된다. 요즘 ‘황혼 이혼’이 늘어간다고 하는데, 이런 현상도 처음의 마음을 잊어버린 탓이 아닐까.
사범대학을 나와 처음으로 교단에 설 때 교사라면 누구나 페스탈로치 같은 스승이 되리라 마음먹는다. 아이들을 편애하지 않고 매일 아침 화초에 물 주듯이 어린 동량(棟梁)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도 세월에 점차 빛을 잃으면서 타성(惰性)은 교육의 참 정신마저 좀먹어 들어가게 하지 않던가.
한 똑똑한 지성인이 정치에 입문할 때, 자신은 기존 정치인과는 다른 선량(選良)이 되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막상 정치판에 뛰어들고 보면 개인은 조직의 일개 성원(成員)에 지나지 않음을 인식하게 된다. 거대한 조직도 하나 하나의 구성원으로 구성된다는 원칙은 어디까지나 원칙에 그칠 뿐,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보다는 기득권 세력의 눈치를 먼저 살펴야 하는 또 한 사람의 ‘낡은’ 정치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작가는 처음 글을 쓸 때 쓴다는 것 외에는 아무 욕심이 없다. 영혼을 짜내어 언어의 집을 지으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수한 엑스터시에 몰입할 뿐이다. 그러나 일단 원고의 끝을 맺고 나면 슬며시 딴 생각이 든다. 내 글이 좋은 반응을 얻었으면, 그래서 책이 많이 팔렸으면…. 초심, 그 단어 앞에 나는 오늘 많이 부끄럽다. (1999. 10. 28)
● 작가 소개 : 이정림 (李正林)
『수필문예』로 등단(1974).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1976)
계간『에세이21』 발행인 겸 편집인(현재)
수필집 『당신은 타인이어라』『산길이 보이는 창』『숨어 있는 나무』『당신 의 의자』
평론집 『한국수필평론』『한국수필평론개정판』
이론서 『인생의 재발견-수필쓰기』
수상 : 현대수필문학상(1992) / 신곡문학상본상(1999)/ 조연현문학상(2012)
첫댓글 수필의 한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들이다. 수필의 길이? 단편소설 같은 내 이야기? 신변잡기에 문학성과 예술성을 입힌 글? 사유가 깊어야한다? 잘 모르겠다. 배울수록, 쓸수록 부족함만 느껴진다.
사회수필로 씌어진 수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