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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her... nobly born... 스크랩 나와 네가 다른 것이 아니다 - 다석 유영모 어록
blueSpirit 추천 0 조회 107 14.11.11 07: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나와 네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두 다 한 나무에 핀 꽃이다. 우리는 다만 그 사람의 긋(얼의 나타남)을 알면 그만이다. 곧 그 사람의 인격, 그 사람의 정신,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의 말씀을 알면 그만이다. 그 말씀 속에서 또 내 얼(참 나)을 내 긋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다석 유영모 어록> 15쪽 

유영모  






    지금은 진화의 새 단계가 나오려고 한다. 유인원의 어느 한 가지에서 돌연변이에 의해 엉뚱한 '사람'이란 것이 껑충하고 뛰어 나왔듯이 이 종교라는 것에서 엉뚱한 새 사람이 나오고야 말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나와서 '내가 만물의 영장'이라 하고 이 세계를 통일했듯이 그 엉뚱한 것이 나옴으로써 이 우주가 어지러움, 허투루임을 면하고 건짐을 받을 것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28쪽

함석헌





   마음 속에 영원한 생명의 씨(얼)를 지닌 이는 그 씨가 자란다. 그러므로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가 아닌데 밤낮 같은 소리만 할 까닭이 없다. <다석 유영모 어록> 18쪽 

유영모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에게는 바쁜 것이 없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언제나 유유하다. 그래서 생각도 유유하고 노래도 유유하다. <다석 유영모 어록> 20쪽 

유영모  





   모든 문제는 마침내 하나[一]에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언제나 하나(전체)인데 하나[一]로 참 살고 하나[一]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다석 유영모 어록> 40쪽 

유영모  






    지금으로부터 2천 년 내지 3천 년 전쯤에 와서 비로소 개인의 종교가 시작되었다. 영혼의 자각이 되었다. 위대한 종교는 다 이때 나왔다. 이것은 인류사의 한 큰 시대다. 그리하여 2, 3천년을 이끌어 왔다. (근세에 이르러) 서로 자유를 주장하는 동안에 인류를 오리가리 찢어진 꼴로 만들었다. 바퀴는 석가, 공자가 돌리던 그 인생의 그 바퀴지만 역사의 길은 도저히 전에 꿈도 꾸지 못했던 데로 가고 있다. 아니다. 바퀴도 그 바퀴가 아니다. 지금은 과거의 세계관이 거의 해체되어 버리고 새것은 아직 얼거리도 잡지 못한 때다. 보편적 세계사상의 결핍, 이것이 현대가 당하는 비참의 원인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33~35쪽

함석헌






씨알순례길... 남한산성


< 11월1일 남한산성 안내 >

일시 : 2014년 11월1일 아침 10시
장소 : 8호선 산성역 2번출구(2호선:잠실역/5호선:천호역 환승)

        
진행 :

산성역 -(9번버스)- 남한산성행궁 - 수어장대 - 서문 - 마천역 (총거리 약 5Km) 

* 성골마을 맛집거리에서 점심을 합니다. 
   여기서 마천역까지 약 800미터입니다.


< 이번 씨순길에는 ...넷째 글>

『마치 둑을 쌓아 강물을 막으면 강물은 흐르지 못하고 차차 불어올라 골짜기에 차고 산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다. 물이 깊어짐에 따라 생명의 물고기가 뛰고 하늘에 솔개가 날아오른다. 인생도 자기 생애의 한계를 정하면 물 속에 물고기 뛰듯 머리에 새로운 생각이 솟아오르고 하늘에 솔개 날듯 가슴에 호연지기가 울려퍼진다.』 <"실" 유영모, 제소리 53쪽> 

우리가 씨순길을 걷는 것은 둑을 쌓는 일입니다. 개인이나 단체나 언젠가는 소멸되는 생애를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그 생애의 한계를 정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다석은 다시 말합니다. "실오라기 같은 제한된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이며...쓸데없이 오래 살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짧막한 인생을 빛나게 살기를 바랄 것이다. 빛나는 인생은 사명을 가지고 사는 실오라기다" 

씨순길을 걸으며 생각합니다. 우리 씨순길이 쌓는 둑이 여러 갈래 분열의 강물을 막아 커다란 호수를 만들어 다양한 생명의 물고기가 뛰고 새로운 생각들이 솟아오르고 씨알 가슴 가슴마다 호연지기가 울려 퍼지는 꿈을 꿉니다.



< 이번 씨순길에는 ...셋째 글>

단풍/이상국

나무는 할 말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잎잎이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다

봄에 겨우 만났는데
가을에 헤어져야 하다니

슬픔으로 몸이 뜨거운 것이다.

그래서 물감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곡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11월 남한산성의 단풍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답게 단풍든 나무의 말을 들으러 우리는 남한산성에 갑니다. 최근 발굴로 남한산성 행궁터에는 백제시대의 주거지와 다양한 백제토기가 출토되었습니다. 또한 통일신라 시대 주장성(晝長城)무기고 유적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초석과 대형 기와도 벌견되었습니다. 남한산성은 우리의 장구한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

남한산성에는 이상국의 시 처럼 옛 씨알이 만나고 헤어진 수 많은 봄과 가을, 단풍처럼 낙엽처럼 슬픔으로 뜨거워진 몸으로 물감 같은 붉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곡에 몸을 던진 우리의 역사가 묻혀 있습니다. 

< 이번 씨순길에는 ...둘째 글>

“ 이놈들이 이때 임(경업)장군에게 넉넉한 군사를 주지 않은 것은 그의 세력이 커질까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이놈들이 무서운 것은 외국이 아니요, 나라 안에 큰 인물이 생기는 일이다....오직 올바르고 위대한 어떤 사람이 나서 자기네 세력을 뺏을까봐 그것만 걱정이었다. 그러므로 군사를 많이 안 주는 것이다.”(뜻으로 본 한국역사 328쪽)

홍타이지가 조선을 친 이유 중 하나 모문룡이라는 명나라 장수가 있습니다. 모문룡은 요양성의 지휘관으로 후금이 요동을 장악하자 조선으로 도망해 들어와 행패가 심했습니다. 당시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백성에게 미치는 행패를 줄이고 후금과의 관계도 고려하여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島)에 들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19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실각합니다.

인조는 반정 이후 공신들의 훈공(勳功) 다툼으로 이괄의 난을 겪게 됩니다.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인조는 한양을 떠나 공주로 피난길에 올랐고 임진난의 분함도 잊은 채 왜관의 일본인의 도움까지 요청하려고 했습니다. 이 내란은 결국 평정되었으나 서북방을 지켜야 할 정예 병력의 2/3나 손실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가도로 들어간 모문룡은 조선조정에 과도한 재정을 요구하여 한 해 조정 예산의 1/3에 해당하는 양곡이 그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때로 육지로 들어가 관아를 털고 민간인을 약탈하고 살육도 서슴없이 살육도 자행했습니다. 모문룡은 결국 1629년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원숭환에 의하여 12가지 죄목으로 주살됩니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처단하고 조선에도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모문룡을 처단하게 된 전말을 설명하고, 과거 모문룡과 부하들이 조선에 끼쳤던 피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며 ‘앞으로는 동강진의 명군이 조선에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손자병법에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승리를 확보한 후 싸움을 한다(勝兵先勝而後求戰)고 합니다. 전쟁은 피 흘리며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한 결과물을 취하는 절차일 뿐입니다. 병자호란으로 청(靑)은 이미 이긴 전쟁의 결과물을 얻은 것이며 명(明)이나 조선은 이미 진 전쟁의 참혹한 결과를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이리 같은 세계 최강국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총성은 없지만 그들은 은밀한 전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근세사에서 우리는 그들 전쟁터의 객체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강(自强)하여 다툼의 주체로서 자리매김을 해야겠습니다. 한(恨)의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인조가 명나라 떨거지(一毛; 모문룡)에게는 그토록 많은 지원을 하면서도 임경업에게 군사를 내주지 못한 것은 자신의 반정이나 이괄의 예(例)와 같은, 삼한(三韓) 조선 좁은 땅 안에서의 ”내부패권“에 대한 도전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 이번 씨순길에는 ...첫째 글>

고난의 역사, 이것이 함석헌의 역사관입니다. " 고난의 역사라니 고난 전에 또 무엇이 있고 고난 후에 또 무엇이 온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고난의 역사가 스스로 나타났을 뿐이다. 제[自]가 곧 까닭[由]이다. 그러므로 자유(自由), 곧 스스로 함이다. 그러므로 고(苦)는 생명의 근본원리다. 고를 통해 자유에 이른다. 고를 면치 못할 것이요,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려는 사람은 영원히 선을 보지 못할 것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1965, 넷째판에 부치는 글> 22쪽

세계문화유산이기도한 남한산성은 우리 '고난의 역사'의 상징과도 같은 곳입니다. 1636년 12월8일 청의 홍타이지 군사는 조선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의주성에 입성합니다. 의주부윤 임경업은 적은 수의 병사로 많은 청군과 맞서기 위해 백마산성에서 농성(籠城)합니다. 성내 백성 씨알들에게 촛불을 들게하고 허수아비를 세워 허장성세합니다. 청군은 백마산성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군사를 돌려 빠른 속도로 남하하여 불과 일주일만에 한양에 들어 닥칩니다. 미쳐 강화로 피난한 조선임금 인조는 남한산성에 들어가 40일간 버티다가 청에게 항복합니다.

 "그리하여 임금 자신이 삼전도(三田渡)에 쌓아놓은 항단(降檀) 밑에 엎디어 여태껏 북로라고 업신여기던 만주 되놈 앞에서 그들의 풍속대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하고, 임금과 나라를 위해 화친을 반대하였던 내 팔다리 같은 충신을 잡아 그들의 요구대로 그 손에 붙여 죽을 땅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부끄럼을 당했으니, 이것이 타주지 않은 시대의 말의 뒷발로 차던지는 역사의 복수였다. 잡혀갔던 윤집.오달제.홍익한은 모두 만주에서 죽었으니, 이것이 유명한 삼학사(三學士)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330쪽

중국대륙에 명.청 세력의 교체기에 제대로 국제정세를 읽지 못해 스스로 자초한 고난이었습니다. 연산군의 페위 명분은 "패륜"이었으나 광해군을 물러나게한 인조반정의 명분은 "부모의 나라 명을 배신하고 오랑케 후금과 화친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멍청한 일입니다. 참으로 얼이 빠진 일이었습니다. 당시 반정의 명분이 약했던 인조는 명 황제의 인준을 받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반정의 명분이 친명사대(親明事大)였으니 파국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계획은 강화도로 피난하는 것이어서 남한산성에는 식량과 물자 등 장기전의 준비가 되어 있지않아 임금조차 겨우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기근과 추위로 오래 버틸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임금이 그러했는데 일반백성 씨알들은 어떻겠습니까? 병자 호란 때 임경업의 백마전투 등 조선군의 승전으로 기록된 전투가 여럿 있었으나 의미 없는 우리 스스로의 위안일 뿐입니다.




사진설명 : 남한산성 성문과 행궁, 수어장대, 성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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