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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구지 소식“ 제17호 주후2004년 11월 10일
<<폐광지 "돌구지"의,, 늙은 전도사의 이야기>>
하늘은 스므 천평쯤으로 유일한 열린 창입니다.
폐광지 돌구지의 삶을 살아오기가 한 해를 더해 가는 십 일월입니다.
그러그러하게 살아온 햇 수가 여섯 해를 채웁니다.
계절의 바람이 진폐의 기침처럼 쿨럭일때 마다 예배당 언덕길로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쏱아 놓습니다.
아무리 굴려 보아도 주머니에 잡히는게 없습니다.
계절은 그 풍성했던 여름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아 겨울의
찬바람 속으로 동안거(冬安居)를 요구합니다.
초달입니다 바람의 갈기 찟기고 부서지고 나서야 비로서
한줄 나이태로 새겨질 하늘의 은총이 있습니다.
우리의 날 계수함을 주신 하늘 앞에
이 한 해의 명세표를 쓰듯
이 “돌구지의 소식”을 내려 놓습니다.
부끄럼, 개으름, 어리석음, 유약함, 남의 탓하기,회피,
비루하고 누추한 자아가
나를 욱박지르는 내 안의 소리가 나를 욱박지릅니다.
습관적인 익숙함의 罪性(죄성)
그 러고도 개선되지 않은 채로 자신에게는 후한 배려를 서슴치 않는
민망한 나를 붓들어 씨름이라도 해얄까 봅니다
이 무슨 심뽀입니까.
필경 그 날에 땅을 치며 재를 뿌리고 머리털을 뽑으며
알면서 지은 죄들이 나를 고발할 것입니다.
지금 나는 하느님의 시간을 , 은혜와 사랑을 훼손하며 사느게 아닌가.
부단한 참회의 나를 띄우며 오늘도 나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앞에서 긴 목을 늘이고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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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가을입니다
예배당 오르는 길로 지난주부터
산벗이 물든 잎새를 내려놓기 시작입니다.
그 푸름으로 정갈한 몸 냄새를 뿜어 올리던 들깨 가지에
깻주머니가 송극송글합니다.
슬적 지나는 바람결에도 깻주머니를 열어 바람 속으로 씨를 묻습니다.
“주여 가을입니다.
마지막 잎새들이 더욱 여문 열매를 맺도록
마지막 南國(남국)의 볕살을 더하여 주시고,,,,“
얼추 이런 내용의 라이나 마리아릴케의 싯귀를 외우던 시절이
어제인것만 같은데 어느새 늦 풀처럼 세월의 지진아로 남아
마지막 볕살의 한 웅큼이 이토록이나 그리운 저문 날의 아쉬움으로
서성이는 성취도 깨친것도 없이 이렇게 헛헛함의민둥산 같은,
마른 잎새 서걱이는 계절의 가을 저녁 바람 속에서
인생의 가을로 내 몰리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가을은 살아 온 날의
自己(자기) 몫의 결산을 새겨 보는 시간입니다.
금 주머니를 열어 찬란한 금돈을 쏱아 내는 고추의 가을은
황홀 그 몸체입니다.
우리가 익힌 知識(지식)이, 思惟(사유)가, 삶의 울타리가
한없이 초라합니다.
시나이 반도의 모래 바람에 청춘을 묻고 난 모세의 고백은
비로소 자기의 無益(무익)함과 矮小(왜소)함임니다.
그 때 야훼는 말씀하십니다.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일 하라함이 였습니다
주님의 힘으로 하여 자랑이 접어지게 하시고
주님의 그릇이 되어 쓰임 받는 순종의 도구 되어 살게 하소서.
주후 2004년 시월 초 사흘에
예수님을 깨우라
마태복음8장23-27
바람부는 산 위에 올라 보라.
초록의 물결이 초록이 파도로 휘몰아 가고,,
자연의 위대한 현상이 우리를 壓倒(압도)할 것입니다.
파도가 휘모는 바닷가에 서 보라.
그 거대한 물줄기와 흉용함이 인간의 연약함을 폭로할 것입니다.
루사의 물줄기가, 매미의 물줄기가
둑을 허물고 비탈을 자르고
강가의 집들을 밀어 내고 제 몫의 길을 따라
오염과 패역의 쓰레기를 대불고 바다에 이르러
하나님 금 그어 놓으신 해변에 짐 내리고
조개와 海草(해초)와 물고기 농장을 耕作(경작)하며
海潮音(해조음)의 노래를 우주로 뿜어 올리고 있습니다.
바닷 바람에 살갖이 그슬은 어부들인 제자들이
그 밤의 요동치는 갈릴레아의 바다에서 죽음의 파도를 몸으로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게 되었구나.“
영락없는 죽음의 문턱에서 잠드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인간의 카드는 바닥이 들어났습니다.
살아 온 날 만큼의 노련한 물질도 익숙한 처세도 폐기되는 순간에
예수님을 깨워야 삽니다.
예수님게서 우리 삶의 키를 잡는 순간에 인생이 뒤집힙니다.
야곱아!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빈손 하나들고 목숨 扶持(부지)를 위하여 도주하는 야곱을 찾으신
야훼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후 2004년 시월 9일에
기도를 들으시는 여호와
이사야 38장1-8절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그리고 죽어갑니다.
이 길이 이 땅에 생을 부여 받은 모든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의 간섭이 이루어지십니다.
어느 날 유다의 왕 히스기야에게 병듦이 왔고
고통 중에 이사야의 문병이 이루어졌습니다.
첫째로 너는 이병으로 죽으리라 입니다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경고 멧시지를 이사야가 중보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의 사명이 이것입니다..
생존 세계를 향해, 불의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합니다.
그것이 축복이든 저주이든 나의 구미에 맞추어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의 자리를 지켜 내야합니다.
둘째로 통곡하는 히스기야의 모습입니다
이 불행한 경고에 접한 히스기야는 저주를 향한 절망이 아니라
여호와의 부름 앞에 준비되지 못한 자기를 보았습니다.
히스기야의 심령은 물같이 풀어지고 후회의 벽을 향하여
회한의 눈물로 이불과 베게를 적십니다.
“여호와여. 내가 구하오니
제가 주의 앞에서 眞實(진실)과 全心(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目前(목전)에서 善(선)하게 행한 것을 追憶(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痛哭(통곡)하니...“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날이 하나님 앞에 준비되고 있는지 이 결실의 계절에
돌이켜 봅니다. 주후2004년 9월 19일 돌구지에서
이처럼 사랑하였습니다. 말씀 요한복음서 3장 16절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교회를 향하여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일깨웠습니다.
삶의 중심에는 내가 있고 나의 중심에 내 몫의 삶이 있습니다.
결실의 계절입니다.
한 해 동안의 비와 바람과 했빛속을 살아 온 결산의 시간이
이 가을이라는 계절이 주는 물음입니다.
생명의 열매들은 사랑이라는 풀무간 안에서만 익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생명의 구원이 얻어지는 것이라면
그 사랑의 비밀이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과의 공유된 은총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열매로 나타나 짐으로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합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찾으시는 하늘 앞에
이 가을의 우리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뿌리지도 아니하고 가꾸지도 아니 한 채 거두려던 우리의 허위와
뻔뻔함을 두고 이 가을에 참담한 돌이킴이 있게 하소서.
나름의 열심이 뿌린것도 심은 것도
돌아보면 無益(무익)한 부끄러움만 산으로 남았습니다.
이처럼,
한 알의 씨앗이 스스로 썩어 짐으로 새 생명으로 나듯이
예수님은 스스로를 포기 하셨습니다.
그리고.이 처럼,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예수님은 자기를 버리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처럼 서로 사랑하라셨습니다.
내가 건너온 삶의 바다가 검은 파도로 넘처 우리를 삼켜 갑니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나타낼것입니다. 주후 2004년 9월 첫째주,,,돌구지--
초청 받은 사람
누가복음14장 1-11절에서
금년엔 유난히도 볕살이 뜨거워
예배당 마당의 꽃들이 흐지게 피었습니다.
그 중에 보라색 달리아가 한껕 자태를 뽐내었습니다.
土卵(토란)의 넓은 잎이 밤이면 이슬을 모아 뿌리로 보냅니다.
겹 봉숭아 붉은 꽃이 온 예배당 뜨락으로 가득히 피었습니다.
여름내 산 매암이 숲 속의 예배당을 노래의 바다 가운데로 띄워 보냈
습니다. 논 메뚜기가 이곳에서 자 치기를 합니다
섶을 뒤지면 달팽이가 점잖은 귀를 빼어 들고 숲의 여행을 즐깁니다.
산새들이 두 행보식이나 사택의 처마끝에
새끼 내이를 하였습니다.
가끔식은 인적이 없는 틈을 타. 새들을 향해 휘파람을 붐니다.
“함께 노랠 부르자꾸나”
새들의 소리를 어림 잡아 흉내 내어 보지만 발치 저만큼에서
할끔 거리며 접근의 기회를 주지않습니다.
새들의 두려움은 뿌리가 깊습니다
그들은 압니다. 인간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 인지를,,,
다스리고 돌보라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은 인간들이 허물고 오염
시키고 살육하고 도륙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동산으로 보내심을 받아 돌보며
사랑하며 살도록 은총 가득함으로 채워주셨는데
새들의 두려움이 되고 자연의 훼손자가 되어 허물고 부수고,
자기선의 바벨을 쌓으면서 하나님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사랑과 선을 무덤속에 폐기해 두고는
저 좋을데로 형식과 조문(條文)에 매어 달려 정죄하고 판단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참 뜻이 생명이요 그 누림에 있음이며 구원이어야만 했는데
우리는 거짓과 위선의 하찮은 文明(문명)을 을구며 살았습니다.
이 가을 주님의 부름 앞에 우리 무엇을 드려야 합니까.
내 가정 , 내 교회, 내 신념(자기 선)의 이즘(ism)에 결박되어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주후 2004년 9월에--
<문제를 푸는 열쇠> 열왕기 하 1장1-4절
경쟁 사회를 사는 아픔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인격의 현장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경쟁을 통해서
왜곡된 삶의 질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피나는 검투사의
그 싸움을 의식없이 전개해가는 오늘의 문화 현상입니다.
그래서 패배가 굴욕이되고
세상을 향하여 증오와 미움을 들이 붓는 형국입니다
한 꺼풀 표피를 벗기고 나면 남는 것은 상처이고 피흘림입니다.
힘의 우등생들이 세상을 점령하고
식민화 한지는 인간의 역사가 증언합니다,
지아비를 먼저 보내고 두 아들과 함께 황량한 생존의 벌판에 버려진
세 모자의 이야기가 오늘의 주제입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약자에게 너그러울 수 없는 세상 인심입니다
빚이 새끼를 치다보면 신용 불량자가 되고 빚의 올무에 질식할 밖에
무슨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빚 막음으로 자식이 종으로 끌려가야했습니다.
1), 부르짖어 구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방법입니다. 신앙인의 최후 처방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저를 들으십니다.
2), 기름 한병이 남아 있습니다.
기름 한 병 만큼의 삶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이 기회 입니다.
우리의 내면을 성찰하여 불신앙과 불의가 공개 되어야 합니다.
회개와 눈물이 우리를 바꾸게 할것입니다.
3), 기름을 부으라,
여인은 선지자의 명령을 가감없이 순종하여
샘 솟는 기름병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좀더 순박해져야합니다. 단순해져야합니다.
합리성의 아귀 맞음에, 거래와 보상에 익숙한 세상의 논리를 뛰어 넘어야합
니다. 주 후 2004년 9월 넷째주 돌구치에서,
이 나라를 창성케하소서 말 씀 이사야9장2-5
중국이 작심하고 歷史(역사) 歪曲(왜곡)에 나섰다.
남의 나라 역사를 자기의 것으로 편입시키겠단다.
제것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얕 보임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일시적 감정 처리에 매달려 비분 강개하다가 또 얼마쯤이나 갈 것인가.
힘이란 무엇일까. 자기의 자존을 지켜내는 능력이다,
정치 사외 경제 도덕 윤리 외교 법치 등등 한 사화가 존재하는 복합적
응집 능력이다,,
진이 가장 약한 나라이면서도 춘추전국 시대의 나라들을
통일 할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법치주의가 그 기저에 있었다고 한다면
국가라는 집합된 백성의 계약들이 올바로 작동하느냐에
오늘 이 나라의 오늘과 내일이 있다.
대학을 나와도 일 자리가 없단다, 일하고 싶어도 일 자리가 없으
니까이다. 노동자의 이익은 보장하면서 기업의 이익은 뒷전이고 보면
소수의 기술 집약 산업외에는 모두 임금이 싼 외국으로 탈출?할 수 밖에,
일자리를 지워 버리는 개혁은 개악이다.
이해 집단의 상충하는 충돌을 조정 통합하고 일하고 싶은 이들에게
일자리를 주어야 사회의 힘이 충전되어질 것이다.
독도를 제 나라 땅이라고 막무가냄으로 우기는 왜 나라와
남의 나라 역사를 훔처 가려는 오랑케 나라의 사이에서,,
형제에게 지도곤을 안겨 주고도 그걸 주체라고 강변하는 굴절된 역사를
부끄워 아니하는 이 땅의 반쪽과 이 백성이 아닌가.
“나는 저희 하나님이되고 저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히브인 노예들은
가나안의 삶을 위하여 40년의 광야의 시련을 견뎌야 했습니다.
저들의 정체성이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차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
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 하오니,” 이사야 9장3절
주후 2004년 8월 15일에
가나의 혼인 잔치
요한의복음서2장1-11
태풍 메미가 휩쓸고 간 물난리 속에서
진흙탕 물에 주질러 않아 통곡하는 중년 여인의 모습이 TV화면을 넘처
나와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이번 태풍에 집과 전답이 물에 잠긴 영동 지방의 눈 시린 장면이였
습니다. 거푸 삼년을 내리 물난리를 겪고 있는 강원도 아낙의 슬픔이
루사와 매미와 메기의 빗물이 되어 나의 가슴을 후비고 갑니다.
삼년을 겪었으니 남은 세월 또 얼마나 겪어야하는 아픔인가.
앞의 파도가 밀고 오면 이제는 평화의 세월로 갈것인가
그런데 말입니다. 앞의 파도를 밀어제끼고 온 뒤쪽의 파도가 더욱
사납고 살벌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 땅의 삶의 실존적 모습이 이러합니다.
어니스트 훼밍훼이의 소설의 주인공이 카리부 바다에서 무려 석 달간
이나 싸워 얻은 소득이 상어에 뜯긴 청새치의 거대한 뼈들 뿐입니다.
우리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강을 메우고 산 허리를 잘라 길을 내고
거기 집을 지었습니다. 다스리고 가꾸어야 할 하나님의 동산을 금
그어 두고는 팔고 사고 찢고 멍들게 했습니다.
철저히 자연을 훼손하고 뭉게었습니다.
고통의 한 가운데 널부러져 땅을 치며 통곡하는 아낙네와,
살점은 이미 상어 밥이된 다랑어 뼈를 거둔 주름진 늙은이에게 꿈을
꾸며환상을 보게 하려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 주시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
하늘 나라의 기쁨을 회복시키려고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집으로 오셨습니다.
“나와 함께 기뻐하잣꾸나“ 주후 2004년 8월 22일 주일에
복 있는 사람
시편 1편1-6절
베겟잇에, 여인네의 옷 고름에, 밥상 머리에,
대문 기둥에, 숫가락끝에 새겨 넣어진 복 복 복,,,,,,,
복 받기를 소원하는 우리네 삶의 모습들이 일상의 도처에 있습니다.
복은 누가 주는 것이며
어떤 이들이 받는 것이며
복을 누리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궁중 연속극에 등장하는 여인네들은 시샘의 저주와의 푸닥거리로
증오하고 멸망시킴으로 자리를 지키거나
선악에 상관 없이 푸닥거리를 한다거나 푸짐한 굿을 통하여
遷都(천도)의 복을 시현하는 탐욕의 極致(극치),
싱앙과 하늘 조차도 자기 충족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과정을 도외시 한체 결과를 두고 복의 果實(과실)로 치부하는,
악과 선이 하나의 신앙으로 받아지는 그것이 복이라면
그런 복은 아주 저급한 복이다.
악한자의 형통과 승리가 그의 것이라면
그런 복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격과 긍정을 담부 한다.
주린 자를 먹이며 벗은 자에게 입히며,,가난한자에게 관심하고
어리석고 누추한 자에게도 인격적 대접이 주어지는,, 그리고
죄와 상관이 없는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 남으로서 누리는,,
복있는 사람은 야훼의 말씀을 즐거워 하며
그 말씀을 밤 낮으로 묵상하는 자들입니다.
-- 주후 2004년팔월29일에 --
솔로몬의 잠언에서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記憶(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음으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 질 것이며
길거리의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 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敬畏(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審判(심판)하시리라.
전도서 12장에서, 주후 2004년 7월 18일에
< 詩 > 아내 곁에서.
임 건 택
당뇨 합병증으로
눈이 시린 아내다.
몇 날의 검사와 진찰에
마음 조이며
곁을 지킨다.
편식과 식 습관탓에 얻은 병이라는데,,
야속한 아내를 힐란하다가 문득,
나의 허술한 울타리가 미안타
미안해,
우리가 지켜 온 둥우리로 속
날개를 달아 날아 간 아이들
어제는 뒤뚱이며 걸음마 타는
손주놈 보러 여섯 시간 길 아스팔트를 탓다.
첫 장미보다 더 고운
스믈 둘 나이의 그녀가 내게로 와 40여년,
오늘은 그가 나로 젖게 한다.
주름진 얼굴, 손, 야윈 눈 빛의 나의 동무
환갑 나이의 그녀를
진찰실 문 안으로 밀어 넣고
나의 시간은 초침의 계기판에 올라
피노키오의 창을 휘두른다
환상의 적들을 향해
승패를 반복한다.
상한 잎새들 바람에 날고
소리들은 가지끝에서 기돗말을 고른다.
주여.
주의 얼굴을 제게서 돌리지 마소서.
나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인
사랑하는 나의 신부여.
주후 2004년 시월21일 강릉 아산병원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직, 신명기25: 1-13
학용품이 필요한 아들이 용돈은 요구합니다 .
저녘까지 기다려라.
그날 저녘에 아들은 엄마에게 졸라 문방구에서 사온 예쁜 자와 백노지를
아빠에게 자랑합니다.
그런데 아빠의 표정에서 잔득 화가 묻어납니다. 아빠도 가방에서 주섬 주섬
사무용 자와 백노지를 꺼내 놓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이 저녘까지 기다리렸는데,,,,
아빠는 회사에서 서무일을 보는 행정가였습니다.
직무중에 사용하는 비품을 가저 온것입니다.
아주 작은 액수의 것이지만
아빠는 대수롭지 않은 생각으로 공공의 회사것을 생각없이 횡령한것입니다.
가난한 시대의 유산입니다.
진리를 모르던 옛사람 때의 죄의 익숙한 습성입니다.
일하는 시간에 개인의 용무로 만나고,, 노닥거리는
텔레비죤 화면에서의 사건 전개들은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귀중한 급료를 지불하고 고용한 시간들이
지불된 가치의 요구 이외에 낭비되는 것은 부도덕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훔치며 허물며 마비된 罪(죄)성으로
시간을, 물질을, 재간을 낭비하며 삽니다.
돈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으면
아직 완전한 회개가 아니라할시면 같은 선상에서
시간의 의미도 새겨야합니다.
“노동은 祈禱(기도)다”라고한 말을 나는 좋아합니다
“노동은 찬송이며 기쁨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살아있는 생명은 그 살아 있슴의 표현을 합니다.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正直(정직)하게 善(선)하게 그안에
하나님 사랑을 담고 살아야합니다. 주후 2004년 시월16일에
화진포 초상 17,
< 버리고 싶은 유산,>
부샘이 할머니는 호랑이 할머니였다. 그래서 부샘이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다. 어쩌다 부삼이가 울고 들어오는 날에는 난리가 난다. 부샘이를 울린 아이의 집을 찾아 그예 분푸리를 하고야 만다. 그 부삼이 아버지가 마을의 인민 위원장이 되고 그가 사회주의자였는 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마을에 필요한 직책들을 맡기다 보니 그리되었슴이 분명하다. 농민위원장에 윤씨 아저씨 였고 세포위원장엔 누구였든지 기억이없다. 그러나 국방군(국군)이 진주하고 나서 이 떼어 맡겨진 직책들이 그 이름값을 지불해야만 했다. 전에 기술했던 처럼 9,28수복 한 달여 전에 폭격으로 인하여 이미 마을은 풍지박산이 되었고 낙동강 전투에서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 패잔병들이 태백산 줄기를 타고 이미 북진하여 간 국방군의 뒤를 따라 북상하여 왔다. 10월 쯤일게다. 국방군은 간 곳 없고 마을에 선발대 인민군 척후병 두 명이 왔다. 마을의 젊은 이들이 따발총으로 무장하고서 그 두명을 생포하여 소위 마을 빨갱이?들로 하여 총살하도록, 그것으로 빨갱이의 전력을 사면해 준다는 겁박이 였었다. 내가 살기위하여 어린 인민군 두 병사가 마을에서 사살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뒤미처 온 인민군에 의해 마을은 살얼음판이 되었었다. 미친 바람이 불고 있었다.그 전후하여 어머니의 외 사촌 오라버니가 그들에게 끌려가 쑥고개(금강산 가는길 명파리 2키로미터 남쪽쯤)에서 피살되어 시신을 수습하여 오고 마을의 불안은 눈 불을켠 이웃간의 증오와 두려움그것이 였었다. 지난 7월 금강산 가는 길에 지났던 쑥고개, 우리의 아픈 상처가 상기도 생생한 상처로 남아 있음을 어쩔수가 없었다. 평등의 가치와 인간 존엄의 가치는 그 퀘가 엄연히 같은데 다르게 이용한다. 다섯 평의 집에 사는 사람이 열평의 집사람을 다섯평에 살게 하는 것이 평등은 아니다. 그가 열평이든 스므평이든 자기 능력의 실현을 통해서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창조성을 부여해야 한다. 각자의 능력을 인정하고 뒤 처진 이들을 끌어 올려주는 안전 장치가 사회요 국가의 몫이다. 인민군은 인민의 군대 답게 깨끗한 군대였었다. 마을에서의 횡포나 후생 사업이나 부녀자를 괴롭히는 일따위 없었다. 그러나 자의적 평등이나 소수의 통치자들에 의한 시혜적 한계속의 민주나 정치 체제는 본원적 인간 존엄성을 심히 훼손하고 모욕하는 것이다.그것은 하느님이 주신것이기에 이데올로기의 산물은 아니다.
마을에 진주하자 부녀자를 희롱하고 물건을 탈취하고 집들을 헐고, 그게 국방국의 모습이였으나 우리는 그 속에서 절제되지 못한 자유와 성숙되지 못한 새로운 정치체제를 보게 된 것이다. 자유는 원래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란다. 천하 보다 귀중한 인간의 가치가 누구에게나 골고루 평등하게 미치도록하는 것이 오늘 이 시대의 과제이다. 나의 자유와 이기심이 너의 자유를 해하지 못하도록 오늘의 이 누림을 소중히 지켜 가야 할 것이다. 하늘도 우리의 선택을 선물하셨다.
<<구원을 누리는 삶,,>> 에베소서 2장 8절
돌구지 교회당을 둘러선 산들이
그 푸름의 옷을 벗고 장엄한 황갈색으로 입은지 몇 몇일
오늘 아침 닥아 온 산은 그 가을의 옷도 벗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들은 그 몸 안에 여름의 나이태 한 줄 감고 겨울로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앞에
순결한 계절의 발걸음 소리가 들립니다.
여름의 표정이 풍성이라면
가을의 매무새는 정갈함임니다.
우리는 많이 소유하고 많이 누리는 것이 축복이요
은혜라고 다잡으며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가을이라는 계절이 주는
고요와 沈黙(침묵)과 서늘함은 흐렸던 우리의 심중을 소스라쳐
일어나게 합니다.
찬물 한 바가지 머리로 받은 마음은 비로서
누더기 같은 소유와 누림의 잃어졌던 내가 찾아 지고
겨울 바람부는 가나안의 메마름과 무 소유의 초달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소유의 모두임이 찾아져야합니다.
하나).주머니의 회개를 통한 구원의 누림을 이루어야합니다.
재주, 재능, 능력, 건강, 시간, 재물의
소유 개념이 바뀌어야합니다.
나의 목숨이 하나님의 것임이 고백되어야 합니다.
두울), 얼굴의 회개가 이루져야합니다.
얼굴은 창입니다. 먼지와 죄의 오염이 말끔이 제거된
거룩한 순결의 영혼이 얼굴의 창으로 빛으로 나타나 어둠속에서 길을 보여줍니다.
세엣), 말(언어)의 회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는 구원의 표입니다.
구원의 능력과 은총이 거기 담아집니다. 그래서
야훼의 말씀엔 이룸과 지음의 창조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 나타난 성도의 삶이 교회요
가정이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주후 2004년 시월 24일에
2004년의 추석 보내기
백도 해수욕장에 사는 셋째 처제네가 햅쌀을 보내왔다.
논 농사가 없는 태백에 사는 언니네가
퍽이나 안쓰러웠는가 봅니다.
이 햅쌀이 금년 철암남부교회의 큰 기쁨이 원천이 되었습니다.
한가위 사흘을 남겨 놓고
이 쌀을 물에 불려서 고운 가루로 빻아서
교회의 성도들을 불러 함께 송편을 빚은 것입니다.
가정이래야 아들레 집으로 간 임집사님네와
형편따라 못 오신 이집사님네를 빼고
일곱 가정이 모여 송편을 빚었습니다.
일흔이넘어 팔십을 더위 잡아 넘으신
이 집사님의 예쁜 송편
맘씨처럼 투박한 모양새의 김집사님의 송편,,,,
저녁 내 송편을 빚으시며 잃었던 아름다운 꽃 시절을
예배당 가득히 꺼내 꺼내 놓으며 화목했습니다.
익은 솜씨가 살아있는 집사님은 130여개,
솜씨가 세월에 곰삭은 김집사님은 100여개씩
그예 사택 몫으로 십시일반으로 남겨두고
100개식의 송편이 주는 환희를 가지고
이번 추석을 흐므하고 넉넉한 행복으로 그득히 채웠습니다.
행복은 나눔에 있습니다.
기쁨은 더불어 사는데 있습니다.
내년에는 한 가마니쯤의 쌀로 예배당 밖의 이웃들과도
돌구지 마을 모두가 함께 하는 행복을 가꾸어 보렵니다.
2004년 구월 25일에 돌구지
임건택 전도사
남은 이야기들.
휘도는 바람에 예배당 오르는 언덕의 은행 나무의 노란 잎새들이
새 떼가 되어 땅으로 내립니다.
그리고 새 떼로 덮힌 大地(대지)는 싱싱한 생명의 환희로 물결집니다.
살아 있다는 것의 행운이 온 몸으로 전율케 합니다. .
단풍과 산벗은 빨강색
은행과 싸리는 노랑땟갈,,
무엇이 저들로 하여 계절의 옷을 입게 하는가.
흙의 갈피로 地心(지심)의 어디에 이런 크레파스의 물감이 숨겨져 있다는 말인가.
검고 투박한 돌과 모래와 흙의 그 속에서 길러 올려진 생명의 은총이
잎새와 꽃과 열매를 우리 앞에 보내 주었습니다.
지난 한 해에도 여전히 사랑의 눈길과 따뜻함을 샘으로 퍼내어
나누도록 기도하고 기억해 주신 이들의 배려를 깊히 감사드립니다.
연탄을 보내어 주신 이권사님
돌구지 소식지의 발간을 위하여 종이를 보내주신 이양일전도사님,
설탕과 밀가루를 보내어 주신 중앙교회 여전도회원님들.
김치, 고등어 호박을 나누게 하신 이들.
기쁨으로 함께 나누고 섬겼습니다
받는자 보다 주는 자가 행복하다는 얘기는
손해의 아픔보다는 너의 유익이 행복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비밀입니다.
집 사람의 수고가 작지 아니합니다.
세상 물정에 둔한 나를 데리고 살아주어서 고맙습니다.
당뇨의 수척한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내 허물이 결코 작지 아니합니다.
~~~~~~~~~~~~~~~~~~~~~~~~~~~~~~~~~~~~~~~~~~~~~ “ 돌구지의 소리” 짓고 만들고 나눈 이 전도사 임건택.
곁에서 군불 잽히며 기도하는 이, 빈민 운동가 대전“평화의 마을“ 권술용님
235-210, 강원도 태백시 동점동 산1-3(돌구지 마을)철암남부교회.
033)582-8346, 011-9058-4103강원동노회카페 돌구지
<생명바구니, 연탄100장25,000, 쌀10k,28,000,기타,
우체국,201178-02-018965
첫댓글 카페에서 돌구지소식을 보게 되니 또 새로운것 같습니다....사모님 건강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돌구지소식17호의 발간을 축하 드립니다! 사모님의 건강이 회복 되시길 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