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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읽기 (24회)
이태호 (통청아카데미 원장)
Ⅰ. 도덕경 42장
(1) 원문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人之所惡, 唯孤寡不穀, 而王公以爲稱. 故物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人之所敎, 我亦敎之. 强梁者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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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負) : 지다. 등에 짐을 지다.
포(抱) : 안다. 품다.
충(沖) : 비다. 공허하다.
고(孤) : 외롭다. 홀로. 고아(외롭게 됨)
과(寡) : 적다. 임금이 자신을 칭하는 말(덕이 적음)
곡(穀) : 곡식. 양식. 양식을 채우다. 착하다. 기르다. 불곡(不穀) : (복이 없음)
물(物) : 물건. 만물. 사물.
혹(或) : 혹. 혹은. 있다. 늘. 언제나
손익(損益) : 손실과 이익, 덜기와 더하기, 줄기와 늘기
양(梁) : 들보. 징검다리. 교량. 강량자(强梁者) : 강하고 들보처럼 중심에 서는 사람
교부(敎父) : 가르침의 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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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역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으며,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젊어지고 양을 안고 있는 셈이며, 충기를 통하여 조화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외롭게 되는 것’(孤)이나, ‘덕이 적은 것’(寡)이나, ‘복이 없는 것’(不穀)인데, 임금들은 그런 것으로서 자신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만물이란 언제나 덜어버리면 더하여지게 되고, 더하면 덜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훈하고 있는 말로서 나도 역시 교훈을 해볼까 한다. 강하고 세력(勢力)의 중심에 서는 자는 제 목숨에 죽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교훈의 아버지로 삼으려 한다.
(3) 해설
1)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
42장에는 도가 낳은 숫자 하나, 둘, 셋이 나온다. 이 숫자들은 각각 무엇을 말하는가? 이 숫자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가 달라진다. 우선 이 장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셋이라는 숫자이다. 셋이 만물을 낳는다고 했으니, 만물은 셋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셋은 본문의 해석에 따라 충기(冲氣)와 음기(陰氣)와 양기(陽氣)이다. 물론 이때의 충기는 비어 있는 기운으로 음기와 양기가 움직일 수 있는 터전이다. 이때의 셋은 세 기운이 모두 있지만 아직 만물을 만들기 전이다. 왜냐하면 셋이 만물을 낳는다고 했으니 셋 자체는 만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가 하나를 낳는다고 할 때의 하나는 충기이며 무로 추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40장에 만물(萬物)은 유(有)에서 나오고, 유(有)는 무(無)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에서 무가 나오고 무에서 유가 나온다는 도식이 그려진다. 그러면 둘과 셋이 모두 유가 되든지 최소한 셋은 유가 된다. 그런데 둘에서 셋이 나온다고 했으니 둘과 셋을 무엇으로 보아야만 노자의 전존재(全存在)를 설명하는데 무리가 없는가?
둘을 음기와 양기로 보면 42장 문맥상으로 봤을 때 무리가 없어 보인다. 둘이 결정되면 다음과 같이 하나, 둘, 셋이 모두 결정된다. 하나는 충기(沖氣) 즉 무(無)이고, 둘은 음기+양기이며, 셋은 충기+음기+양기이다. 그래야 “삼이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안고 있으며, 충기로서 조화를 이루어낸다.”(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는 말과 일치한다. 필자도 ‘음양이론에 의한 존재론적 구조’가 맞다고 생각하여 지금까지 발표한 글이나 강의에서도 둘을 음기와 양기로 보았다. 그러나 이제 이 관점을 수정하고자 한다. 수정하고자 하는 이유는 존재론적 지위에 따른 부정합성이 발견되었고, 그 부정합성을 해결하기 위해 음양이론에 의한 존재론적 구조 방식을 거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42장의 뒤에 나오는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음양 중에서 음이 양보다 존재론적 지위가 높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고아가 되는 것’(孤)이나, ‘덕이 적은 것’(寡)이나, ‘복이 없는 것’(不穀)인데, 임금들은 그런 것으로서 자신을 일컫는다.”에서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고(孤), 과(寡), 불곡(不穀)이 모두 음양이론으로 보면 양보다는 음이다. 왕이 이런 음에 해당하는 것들로 자신을 일컫는데 사용한다. “강하고 세력의 중심에 서는 자는 제 목숨에 죽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교훈의 아버지로 삼으려 한다.”에서 노자는 강하고 억센 양의 기운으로 사는 것보다 음(남들이 싫어하는 고(孤), 과(寡), 불곡(不穀))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가르침으로 삼겠다고 한다.
결국 42장은 음양이론으로 보았을 때, 만물은 세 가지 기운(충기, 음기, 양기)의 조화로 만들어졌으며 그 존재론적 지위가 높은 것부터 들면 충기, 음기, 양기 순이다. 그런데 이것이 25장과의 부정합성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제 25장과 어떤 부정합성 문제가 발생하는지 25장을 살펴보자. 통행본 25장은 죽간본에서는 11장에 나타나고, 백서본에서는 98장에 나타난다. 이들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여기서는 통행본 중 왕필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뒤섞여 이루어진 것이 있어 천지보다 먼저 생겼으니, 적막하고 쓸쓸하게 홀로 있어도 바뀌지 않고, 두루 주행하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니 천하의 어미가 될 수 있다. 나는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하여 그것에 도라고 이름 붙이고, 억지로 크다고 이름 붙였다. 크다는 것은 간다는 것을 말하고, 간다는 것은 멀어지는 것을 말하고, 멀어진다는 것은 되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도가 크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왕도 크다. 그러니 우주에는 네 개의 큰 것이 있고, 왕이 그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그리고 도는 저절로 그렇게 됨을 본받는다.(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蓼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우선 25장의 첫 구절은 천지보다 먼저 생겼으며 뒤섞여 이루어져 무질서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보면 노자가 말하는 천지(天地)는 뒤섞여 있지 않고 질서 잡혀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플라톤의 우주론과 닮아 있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에 보면 데미우르고스 신이 뒤섞여 있는(무질서한, chaos) 것을 질서 잡힌 우주(cosmos)로 만들어간다. 즉 데미우르고스 신이 질서 잡기 전에 뒤섞여 있는 무엇이 있다는 말이다. 데미우르고스 신이 ‘질서 잡기 전의 우주’와 ‘질서 잡은 후의 우주’를 구분하듯이 도덕경도 질서 잡힌 천지와 천지보다 더 앞선 것으로 뒤섞여 있는(무질서한) 우주를 상정하고 있다.
노자는 천지보다 앞서 있는 것은 홀로 있다(獨立)고 했다. 그렇다면 천지는 홀로 있지 않다는 것이 전제(前提)된다. 천지는 홀로 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42장과의 부정합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음양이론으로 살펴보자. 42장에서 천지(天地)는 음양(陰陽)이 함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때의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다. 노자의 존재론은 질서 잡힌 우주라면 음양이 함께 작동해야 하는데 비해 질서 잡히기 전의 우주는 음은 음으로서 양은 양으로서 그 역할에 맞는 작동을 하지 못하고 뒤섞여 있는 상태로 있다고 보아야 한다.
천지보다 앞서 있는 것은 독립해 있을 뿐만 아니라, 불개(不改)라 하여 고쳐지지 않은 것이라 했다. 이것은 천지는 고쳐진(改) 것이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즉 이것은 음과 양이 합쳐져서 함께 작동하면 음의 기운과 양의 기운이 따로 있을 때와 다른 새로운 존재로 고쳐진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존재(질서 잡힌 우주인 천지)는 주행(周行)하면 죽는 위태로움(끝남)이 있게 되는데 비해 질서 잡히지 않은 우주는 주행해도 위태로움이 없다.(周行而不殆)
여기서 질서 잡힌 상태로 주행한다는 것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 진행됨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위태로움이 있게 된다. 거기에 비해 질서 잡히지 않은 상태로 주행한다는 것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위태롭지 않기 때문이다. 주행은 이루어지만 생성소멸의 과정이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이고, 이것 때문에 이 세계가 천하의 어머니가 된다고 도덕경 25장은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때의 주행은 어떤 주행인가? 노자는 이 주행을 도(道)라고 말하며, 주행 중에 가장 큰 주행이기 때문에 대(大, 크다)라 할 수 있다고 한다.
가장 큰 주행인 도(道)를 노자는 간다는 것(逝), 멀어진다는 것(遠), 되돌아온다는 것(反)이라고 말한다. 도를 알기 위해 다음과 같이 질문을 바꾸어 할 수도 있겠다. 가는 것 중에 가장 크게 가는 것은 무엇인가? 멀어지는 것 중에 가장 멀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되돌아오는 것 중에 가장 크게 되돌아오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크게 가고 가장 크게 멀어지고 가장 크게 되돌아온다고 한다면, 도대체 그곳이 어디인가?
분명한 것은 그곳에는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어서 어떠한 한정형식으로도 질서가 잡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한정형식으로 질서 잡혀 있는 것은 그 사물이 생성되었다가 소멸됨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정형식이 있는 세계는 유(有)의 세계이다. 거기에 비해 한정형식이 없는 세계는 무(無)의 세계이다. 그래서 가장 큰 도의 주행은 모든 유의 세계가 무의 세계로부터 나오고, 다시 무의 세계로 돌아가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가장 크게 간다는 것(逝)은 생성해서 소멸되어(죽어) 가는 것이다. 가장 크게 멀어진다는 것(遠)은 생성(탄생)에서 가장 멀리 간다는 것이다. 가장 크게 되돌아온다는 것(反)은 다시 무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무의 세계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것은 없다. 그래서 도는 억지로 말하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노자는 25장에서 도도 크지만,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도 크다고 말하면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저절로 그러함을 본받는다고 말한다. 도는 앞에서 진술한 것처럼 무의 세계에서 유의 세계로 나왔다가 다시 무의 세계로 돌아가는 과정 자체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보다 더 큰 과정이 없으니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늘은 양기 중에서 가장 큰 것이고, 땅은 음기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 중에서 가장 큰 것인가? 만물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왕필본에서는 사람대신 왕이 나온다. 이것은 왕이 사람을 대신한 것이며, 왕은 사람 중에서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만물은 음기와 양기가 충기와 합쳐져서 만들어지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크게 만들어 진 것이다.
25장에서 천지보다 앞선 것은 유물혼성(有物混成)이었다. 이때의 천지(天地)는 양기와 음기가 충기와 조화를 이루어 나타난 것이다. 즉 유이다. 그러면 유에 앞선 것이 무인데, 이때의 무(無)는 뒤섞인 상태로 이루어진 무질서한 것(有物混成)이다. 여기에 한정형식이 들어가서 질서를 잡으면 유가 된다. 25장에서는 유를 천지로 보았다. 천지로 보면 사물을 양과 음으로 대비시켜 보는 것이 된다. 다르게 말하면 음과 양으로 대비시켜볼 수 있기 때문에 유의 세계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왕필은 둘을 음과 양으로 보지 않고 한정형식만 넣어서 풀이하고 있다. 그는 물론 한정형식이라는 용어 대신에 ‘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 둘, 셋에 대한 왕필의 주석을 살펴보면서 하나, 둘, 셋에 해당하는 존재 용어들을 정리해보자. 다음은 42장에 대한 왕필의 주석이다.
만물은 가지각색으로 드러나지만 그 귀착점은 하나(一)이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하나에 이르게 하는가? 없음(無)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없음으로 말미암아야 하나가 되니, 하나를 없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無)을 하나라고 말해버리고 나면,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말이 있고 하나가 있으니, 둘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가 있고 둘이 있으니 마침내 셋이 생겨난다. 없음(無)에서 있음(有)으로 가는 셈은 여기에서 다하니 이 다음부터는 도의 갈래가 아니다.
왕필은 하나인 무(無)를 무라고 말해버리면, ‘하나인 무(無)와 말로 표현된 무’ 둘이 된다고 했다. 말로 표현된 무는 한정형식이 들어간 무이다. 왜냐하면 한정형식이 들어간 무는 한정형식이 들어간 무 아닌 모든 것과 구분되면서 한정되기 때문이다. 한정형식이 들어간 무는 유이다. 왜냐하면 무라고 말하기 전에는 질서 없이 뒤섞여 있는 상태라서(獨立不改) 무이지만, 무라고 말하는 순간 질서 잡혀 있는 상태로 바뀌어(對立改) 유가 된다. 여기서의 대립은 한정되지 않는 것과 한정되는 것의 대립이 성립되면서 원래의 무에서 개조(改造)된 무로서 유가 된다. 왕필은 둘이 나오는 이유를 명쾌히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가 있고, 둘이 있으니 마침내 셋이 생겨난다”는 말은 무엇인가? 이때의 하나는 무이다. 둘은 말해지지 않은 상태의 무와 말해진 후의 무이다. 이때의 하나로서의 무와 말해지지 않은 상태의 무는 다른 무인가 같은 무인가? 같은 무라면 둘을 벗어날 수 없어 셋이 아니다. 다른 무라 해야 셋이 된다. 그럼 다른 무라 하고,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보자. 하나로서의 무는 하나이기 때문에 상대자가 없는 ‘절대무’이고, 말해지지 않은 무는 말해지는 무와 상대적이기 때문에 ‘상대무’로 지칭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상대자가 없는 절대무 한 개, 말해지지 않은 상대무 한 개, 말해지는 무(한정형식을 지니기 때문에 사실은 유) 한 개로 세 개가 되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해결하지 못한 것이 남아 있다. “셋은 만물을 낳는다.”(三生萬物)와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안고 있으며, 충기로서 조화를 이루어낸다.”(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는 구절에 대한 해석을 통해 도에서 시작하여 만물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존재론적 흐름을 밝혀내는 일이다. 왕필도 충기(沖氣)가 하나라는 것은 인정한다. 이것은 왕필도 충기를 ‘하나로서의 무’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42장의 글이 일관성을 지니려면, 셋 속에 음기와 양기가 들어가 있다는 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충기와 음기와 양기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만물을 낳는지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한다. 왕필은 이것들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왕필이 노자의 존재론을 음양이론으로 풀이하는 위의 구절(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을 신뢰하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 통행본 도덕경 81장 중에 음과 양을 언급한 곳은 42장뿐이다. 기(氣)를 언급한 것은 통행본 10장, 42장, 55장이다. 이 중에서 10장과 55장은 기를 음과 양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55장은 죽간본에도 있지만, 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왕필이 음양이론을 신뢰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이것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할 것 같은데 지금의 주제를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정도의 언급에 머물겠다.
필자도 이번 연구가 진행되기 전까지 음양이론을 노자의 존재론에 적용했었다. 그래서 42장의 “도가 하나를 낳고” 라고 할 때의 하나는 충기(沖氣, 無)로 왕필과 같이 보았다. “하나가 둘을 낳고”라고 할 때의 둘을 ‘무’와 ‘무라고 말해진 무’의 둘로 본 왕필과 달리 음기와 양기로 보았다. 그리고 둘이 셋을 낳고 할 때의 셋은, 하나인 무와 둘로 갈라진 무를 합쳐 셋으로 본 왕필과 달리 충기, 음기, 양기로 보았다. 그래서 삼기(충기, 음기, 양기)가 조화를 이루어 만물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하면 42장의 구절인 “셋은 만물을 낳는다.”(三生萬物)와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안고 있으며, 충기로서 조화를 이루어낸다.”(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는 구절에 대한 해설을 포함하여 무난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보다 깊이 있게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를 검토하는 이번 연구를 통해 이렇게 하면 노자의 존재론적 구조에 부정합이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노자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것은 도이다. 40장에서 노자는 천하만물은 유에서 생기고, 유는 무에서 생긴다고 하였다. 42장에서 도가 하나를 낳는다고 하였는데 이때의 하나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무이다. 40장과 42장을 함께 분석하면, 도에서 무가 나오고, 무에서 유가 나오고, 유에서 만물이 나온다고 보아야 한다. 42장에서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42장의 하나를 충기로 보고, 둘을 음기와 양기로 보면, 셋은 충기(沖氣), 음기(陰氣), 양기(陽氣)이다. 이렇게 해도 40장과의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하나인 충기는 무(無)이다. 셋은 유(有)이다. 왜냐하면 충기와 음기와 양기의 세 가지가 있으면 구체적인 사물이 되기 때문이다. 셋의 세 가지가 어떻게 조화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사물이 만들어져 만물이 된다. 이렇게 되면, ‘셋이 만물을 낳는다’는 42장과 ‘유(有)에서 만물이 나온다’는 40장과는 정합성이 확보된다. 이제 둘이 남는데 둘은 무와 유의 중간 정도로 보면 된다. 즉 음기는 무에 가깝고 양기는 유에 가깝기 때문이다.
위 문단의 내용을 42장의 순서대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은 구조가 된다.
도 → 하나(一, 무, 충기) → 둘(二, 무와 유의 중간, 음+양) → 셋(三, 유, 충기+음기+양기) → 만물(萬物, 충기+음기+양기의 다양한 조화)
위의 구조를 25장과 비교했을 때 부정합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5장에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그리고 도는 저절로 그렇게 됨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고 했을 때, 음양이론을 적용시키면 땅은 음의 대표이고, 하늘은 양의 대표이며, 사람은 만물의 대표이다. 그래서 25장에서 도도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혹은 사람의 대표인 왕)도 크다고 했다. 그리고 음은 무에 가깝고 양은 유에 가깝다.
위 25장의 “도는 저절로 그렇게 됨을 본받는다.”(道法自然)에서 자연은 ‘저절로 그러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도가 저절로 그러하지 더 이상 어떤 것을 본받는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25장의 내용을 본받는 순서대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은 구조가 된다.
사람(만물) → 땅(음, 무에 가까움) → 하늘(양, 유에 가까움) → 도(무)
25장의 구조는 42장의 구조를 반대방향으로 말한 것이다. 그래서 이 방향을 바꾸어 본받음의 대상이 되는 것을 앞에 두면 다음과 같이 된다.
도(무) ← 하늘(양, 유에 가까움) ← 땅(음, 무에 가까움) ← 사람(만물)
25장의 구조를 42장의 구조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25장 : 도(무) ← 하늘(양, 유에 가까움) ← 땅(음, 무에 가까움) ← 사람(만물)
42장 : 도 → 일(一, 무, 충기) → 이(二, 무와 유의 중간, 음+양) → 삼(三, 충기 +음기+양기) → 만물(萬物, 충기+음기+양기의 다양한 조화)
노자의 사상에서 양보다 음이 도에 가깝다. 이것은 42장의 “강하고 세력의 중심에 서는 자는 제 목숨에 죽지 못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강하고 세력의 중심에 서는 양보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음을 강조한다. 노자가 양보다 음을 강조하는 것이 옳다면 42장의 순서는 일치하지만, 25장의 순서는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늘(양)과 땅(음)의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부정합성을 해결하려면 노자가 생각한 하늘은 음양이론에서 말하는 양이 아니거나, 음양이론에서 하늘을 양으로 보는 경우 노자가 음양이론을 따르지 않거나 이다. 아마 왕필은 후자를 택한 것 같다. 노자의 사상에서 음이 도에 가까운 것은 통행본 40장을 보면 확실하기 때문이다.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 유약한 것이 도의 작용이다. 천하 만물은 유(有)에서 나오고, 유(有)는 무(無)에서 나온다.”(反者, 道之動. 弱者, 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40장에 따르면 약자가 도의 작용이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나아갈 것을 강조하는데 비해 노자는 반대방향인 약한 쪽으로 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노자는 음양이론을 적용했을 때 음을 강조했다. 동서고금 중에서 독특하게 유약한 여성을 강직한 남성보다 존재론적 지위를 우위에 둔 사상가이다.
2) 42장의 생활철학
노자는 42장에서 강한 상태로 세력(勢力)의 중심에 서지 말라고 권고한다. 그 이유는 제명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强梁者, 不得其死) 한다. 노자가 ‘강양자(强梁者)’라고 했을때, 양(梁)자는 ‘들보’를 말한다. 들보는 집을 지을 때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을 건너지르는 나무를 말한다. 이 나무(들보)가 집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 들보를 조직사회에 적용하면 그 조직의 중심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해석 가능하다. 대부분의 조직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 조직의 중심에 서고 싶어한다. 그러니 그 자리를 탐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무너뜨릴 타켓이 되어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위험해진다.
그래서 노자를 이해하는 현명한 사람들은 중심 자리에 갈 정도의 실력과 힘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굳이 그 자리를 사양하고 2위나 더 낮은 자리에 머문다. 그래서 예봉(銳鋒)을 피한다. 굳이 중심에 서겠다는 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낮은 자리에 머무르는 사람을 바보취급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천수(天壽)를 누린다. 혹시 어쩔 수 없이 밀려서 조직의 중심에 있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못난 사람이라고 칭한다. 어리석게도 낮은 자리에 머물 수 있는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랫사람을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으로서 인정하고 존경한다.
어쩔 수 없이 조직의 중심에 서게 된 사람이 제명대로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 자신을 낮추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이 방식 이외에는 없다고 노자는 본다. 내가 이 자리에 있으니 나에게 득 보려는 사람들은 굽실거리면서 아부하고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까지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니 외롭고 힘들다. 그리고 나는 원래 이런 자리에 있을 만큼 덕이 풍부하지 못하니 통치해나가기 힘들다. 나는 원래 재물복이 없는 사람인데 이런 과분한 지위에서 영광을 누리니 불편하다. 그러니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있지만 기회가 되면 빨리 그만두고 싶다는 심정으로 있으면 제명대로 살뿐 아니라 오히려 그 자리에 오래 있게 된다고 노자는 본다.
노자는 권력, 지위, 명예, 재산보다 제명대로 사는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것을 교훈의 아버지로 삼는다(吾將以爲敎父)고 했다. 제명대로 사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짧게 살더라도 큰소리 한번 쳐보고 죽는 것이 낫지 않는가. 즉 ‘짧고 굵게 사는 것’이 ‘가늘게 길게 사는 것’보다 좋지 않는가. 무기력하게 제명대로 살면 무엇하는가. 노자는 곧은 나무는 쓰일 데가 많아서 일찍 잘리지만, 굽은 나무가 쓰일 데가 없어서 오래산다고 말한다. 우리들은 모르는 사이에 여러 욕심(재물욕, 권세욕, 명예욕 등)에 사로잡혀 있어 재물, 권세, 명예들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노자는 이런 것들에 대해 24장에서 배부르게 먹고 난 뒤의 잔밥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소박하게 오순도순 제명에 사는 것을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발끝으로 서 있는 자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황새걸음으로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스스로 나타내는 자는 밝게 빛날 수 없고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는 자는 남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자기의 공적을 자랑하는 자는 공이 무너지고 자기를 칭찬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을 도의 견지에서 볼 때는 잔밥이라고 한다. 모든 생명들이 미워하고 배척할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아는 사람은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企者不立, 跨者不行,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其在道也曰餘食贅行.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자기를 드러내려고 한다. 이것은 오늘날 정신의학적 측면에서는 억압감정이 분출된 것으로 본다. 억압강점은 어릴 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남들에게 눌렸던 경험이 있었는데 그 때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가, 무의식 속에 감춰져 있던 감정이 분출되는 감정이다. 이것 때문에 남이나 사회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하는데 노자는 이런 행위를 하면 만물이 싫어한다고 말한다. 만물이 싫어하기 때문에 드러내려는 자는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 도를 행하는 사람은 이런 행위는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전혀 필요치 않는 잔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런 곳에 처하지 않고 그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
도를 행하는 자는 이런 행위를 전혀 하지 않는데 저절로 권세를 갖게 되고, 재물이 쌓이고, 명예를 얻게 되며 조직의 중심에 서게 되는 원리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모두 갖춘 왕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런데 그 왕이 그런 위치에 있는 자신을 만물이 싫어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을 철저히 낮게 칭한다. 낮게 칭하면 칭할수록 높아진다는 것이 도의 묘한 원리이다. 이 원리를 노자는 “만물이란 언제나 덜어버리면 더하여지게 되고, 더하면 덜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원리는 세상의 현자들도 알고 있는 원리라고 하면서 자신은 이 원리를 삶의 가장 중요한 원리로 삼겠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0년째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의 불명예스러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조선 말기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6.25동란 등을 겪으면서 억압되어 있던 감정들이 분출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된 나라이다. 그런데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앞서 남보다 더 잘 살아야 못나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쓸데없이 너무 많이 갖고 있다. 노자 식으로 말하면 잔밥에 쓸데없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현자들의 지혜가 필요한 시기이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세계 속에 리드국가로서 중심에 서기 위해서는 이 원리(덜어버리면 더하여지게 되고, 더하면 덜어지게 되는 것)를 교훈의 아버지로 삼아야 할 것이다.
(4) 문제 제기
1. “만물이란 언제나 덜어버리면 더하여지게 되고, 더하면 덜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손 해 보는 쪽으로 결정하면 결과적으로 이익이 되고, 이익이 되는 쪽으로 결정하면 결과적으 로 손해를 본다는 것으로 해석가능한가. 해석가능하다면 예를 들 수 있는가?
2. “강하고 세력에 중심에 서는 자는 제 목숨에 죽지 못한다는 것이다”고 했는데, 세상에서 가 장 강하고 세력의 중심에 서는 자가 왕이 아닌가. 그런 왕이 스스로를 고아(孤兒), 과덕(寡 德), 박복(薄福)이라고 해서 유약하고 세력의 변두리에 있는 것처럼 칭하는 것은 속임수 가 아닌가?
< 다음 주 강의 예고 >
통청아카데미 通 靑 Academy |
231회 |
주제: |
아리랑을 아시나요? (아리랑의 연원) |
유대안(음악학 박사, 뮤지컬 작가) | |||||
일시: |
2014. 7 9. (수) pm 7:00~
9:00 |
장소: 대구시립수성도서관 제1 강좌실 |
문의 |
010-3928-2866 | |||||
h.p. |
cafe.daum.net/tongchungdg |
다음 주부터는 음악학 박사이며, 뮤지컬 작가이신 유대안 교수의 ‘아리랑’에 대한 4주 연강이 있습 니다.
231회(7/9) : 아리랑을 아시나요?(아리랑의 연원) 232회(7/16) : 아리랑을 아시나요?(구한말의 아리랑) 233회(7/23) : 아리랑을 아시나요?(일제시대의 아리랑) 234회(7/30) : 아리랑을 아시나요?(경상도의 아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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