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새 국이 넘쳤다. 한소끔 끓여내려고 했는데 바쁜 마음에 가스렌지의 밸브를 슬쩍 높여놓았던 게 화근이었다. 냄비 바닥을 밀고 나와 날름대는 불길이 마치 한순간도 자신에게 소홀하지 말라는 경고인 듯싶다. 불 조절이 음식 맛에 한 몫 한다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음식 만들기에 서툰 내겐 늘 버겁다. 그래서인지 조림반찬은 더 어렵다. 뿐이랴, 내가 끓이는 곰국은 어머니가 끓여주던 것과는 달리 진득하니 고기 맛이 우러나지 않는다. 처음에 나는 그것을 고기의 차이라고 여겼는데 요즘 들어서야 불의 조절에 있다는 걸 눈치챘다. 불은 꽃을 피운다. 그래서인지 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게 비단 불이 지닌 온기 때문만은 아닌 성싶다. 겨울철 교실에서 피우던 난롯불이며 모닥불을 둘러싼 야외 캠프장에서의 일들이 아름답게 기억되는 건 그 속에서 피어나는 꽃의 아름다움을 더한 때문이 아닐까. 전깃불이 귀한 시절, 밤중에 뒷간에라도 갈라치면 촛불을 들고 다녔는데 그 작은 불꽃이 사위를 밝히고 무섬증을 걷어냈던 걸 보면 불의 속성인 밝기 뿐만 아니라 불꽃의 아름다움이 더욱 마음의 위로가 됐던 게 아닌가 싶다. 불은 담는 그릇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할머니 방에 있던 화롯불엔 구수한 옛날이야기와 함께 먹거리가 숨겨져 있었고, 어머니 방에 있던 등잔불 곁엔 미처 끝내지 못한 바느질감들이 있었으며 처마 기둥엔 귀가하지 않은 가족을 기다리는 호롱불이 있었다. 친구는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했는데 우리는 그녀의 결혼을 번갯불에 콩 볶아 먹었다고 놀렸다. 또한 노점 상인들의 곁불 쬐기는 이름만으로도 온기를 나눈다. 그런데 불이 늘 그렇게 따뜻하고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숭례문을 한 줌의 재로 태운 불은 국보 제 1호인 것도 아랑곳 하지 않았고 천년 세월의 노송을 한순간에 꿀꺽꿀꺽 삼킨 산불도 있었으니 오죽했으면 화마라 불렸을까. 이렇듯 불꽃도 한결같지 않은 걸 보면 사람의 심성과 다름없나 보다. 원시인의 부싯돌에서 비롯됐던 불이 오늘날 우주시대를 열게 한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견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니 이래저래 불은 또 하나의 판도라 상자인 셈이다. 칼은 얼마나 강한 불길 속에서 얼마나 담금질을 했느냐에 따라 품격이 달라진다고 한다. 불길이 주는 보답이다. 삶의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속이 깊은 이유이리라. 이따금 불같이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삶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작열하는 불길, 그 뜨거움을 사랑하는 마음, 그러나 그건 삶에 대한 순응일까 반발일까. 한때 불같은 삶을 꿈꾸었던 적이 있다. 비록 승화되지 못한 삶이었다 해도 열정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으로 여기고 싶었다. 그때 우리는 세상엔 온통 이기심과 냉소만이 가득해서열정을 받아들이는 여유가 없다며 울분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런 열병을 앓는 아이들을 보면 그들을 방관하는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다. 불경에는 인체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고 음양오행설 또한 木火土金水로 세상살이를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몸에도 불길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저마다 불같은 삶으로 쇠를 달구어 명검을 만들 수도 있으나 오히려 나무를 태워 시커멓게 잔재로 남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 얼마 전 전임 대통령의 장례식을 중개하는 텔레비전에서 살풀이춤을 보았다. 이승과 저승을 잇는 하얀 천의 움직임들이 크고 작은 불꽃으로 다가왔다. 때로는 맞불로, 때로는 꺼질 듯한 불씨만 안고 가는 춤 동작에서 회한을 다스리는 건 사랑의 불씨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움을 삭이고 마침내 원수조차 용서하게 하는 사랑의 불씨, 춤은 그것을 지피고 있었다. 불현 듯 시골에서 군불 피우던 생각이 났다. 재만 남은 듯이 보이던 아궁이 속에서 새삼 피어나던 불씨, 그건 할머니 방의 질화로로 옮겨져 고구마를 구워내고 마침내 할머니의 사랑을 구워내지 않았던가. 외롭고 지쳐가는 내 가슴에도 진정 불씨 하나 지피고 싶다. 그것이 쇠를 녹이는 일이든 나무를 태우는 일이든 열정을 피울 수만 있다면 말이다. 서쪽 하늘의 노을이 유달리 짙어 보인다.
(김윤선 님의 수필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