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 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는 매우 오래된 토론의 주제이다. 전자(前者)가 더 옳은 상 싶다. 우리는 자칫하면 역사를 어떤 결정적 과정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렇게 이해하면 아주 간단명료한 이해를 가질 수 있다. 특히, 학문적 주장으로서는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 역사를 바로 인간들이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인간들 중에서도 그 시대에 적합한 자질을 가지고 끈질기게 노력하는 소수의 인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시대의 특징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트남의 현대 역사에 있어서 호치민(胡志明)의 역할은 이러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 민족은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국토의 규모로 볼 때 제3세계에서 그리 큰 국가가 아니다. 문화가 썩 뛰어난 종족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3세계의 주민들에게 관심의 대상되어왔다. 근대 제3세계의 역사에 있어서 오로지 이 민족만이 서양의 최강대국들을 둘씩이나 꺾고 자신의 독립과 통일을 쟁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역사를 주도하였던 호치민이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이 적을 수가 없다. 그는 외모로 보아 아무런 특징이 없는 평범한 시골 영감이었다. 염소 수염에 색이 바란 노동복, 낡은 타이어를 잘라 만든 샌들을 끌고 다녔다. 그러나, 이 시골영감이 바로 젊은 시절에 제3인터내셔널을 이끌어간 이론가 중의 하나이며, 60여년을 줄기차게 분열되어있고 피폐한 한 약소국가를 지도하여 두 강대국들을 항복시킨 바로 그 인물이었다. 아무래도 베트남의 통일은 호치민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다.
통일을 염원하는 한민족에게 정치적 지도력으로서 호치민의 존재는 매우 큰 의의를 던져주고있다. 한민족과 베트남민족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있다. 두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한 국가를 이루어 지냈다. 두 민족은 강대국들에 의한 식민지화와 남북분단의 고통을 겪었다. 가장 결정적으로 두 민족은 남북의 통합을 당연한 역사적 귀결로 믿고 있었다. 물론, 양 민족의 차이도 매우 많다. 우선 양 민족이 거주하는 지리적 위치가 크게 다르다. 남북 체제의 상호정통성에 대한 이해도 서로 다르다. 민족의 기질상의 차이도 크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를 말하자면 베트남민족에게는 호치민이 있고, 한민족에게는 아직 호치민 같은 인물이 없다는 점이다. 민족해방과 민족통일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적절하게 채택하는 분별력을 가짐으로써, 분단되어있는 양측 인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고있는 인물이 베트남에는 있었지만, 한민족에게는 아직 없다. 그 반대로 한반도에서는 강대국들이 설정해준 각자의 지리적 영역을 신봉하고 자신의 배타적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민족통일의 대의를 조자룡 헌칼 휘두르듯이 써먹고 있는 썩어빠진 정신을 가진 조무라기들만이 우글거릴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호치민의 지도력은 크게 참고해 볼 만 하다.
이 글의 목표는 한반도의 통합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호치민적 지도력의 유용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로 호치민의 지도력에 대한 소개에 촛점을 두고자 한다. 여기에서 나타난 서술의 대부분은 펜(Charles Fenn)의 책에 기초하고 있다. 펜의 호치민 전기는 특히 한국민에게 유용하다. 저자 자신이 오랫동안 호치민과 직접 접촉하였기 때문에 그의 서술은 일차자료적 정확성을 가지고 있다. 서술이 서구 전기 작가들의 전통에 따라 전방위적인 인간을 묘사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호치민의 공산주의라는 것이 가지는 성격을 규명함으로써 호치민을 "베트남 공산당의 수괴"식으로 알고 있는 한국민들에게 인식의 전환을 불러일으키는 데 공헌할 수 있다. 여기에 유인선 교수가 지은 {베트남史}와 호치민의 공식 전기인 {Ho Chi Min}의 내용도 특별한 언급 없이 포함시키고있다. 대부분의 공식 전기가 그러하듯이 하노이에서 발간한 공식전기의 내용은 베트남 공산당의 발전에 대한 호치민의 공헌이 주로 서술되어있다. 물론, 호치민을 엄격하고 열렬한 공산주의자로서만 그리고 있다. 현존하는 체제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펜의 전기는 우리에게 또 다른 진실을 보여주고있다. 남북베트남의 통합을 이룬 호치민 지도력의 비밀은 이데올로기적 엄격성이 아니라 민족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용주의적 분별력에 있다는 사실이다.
2. 베트남의 역사는 호치민 지도력의 원천이다
베트남 민족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은 동남아시아 대륙부에 속하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쪽이다. 북에서는 중국과, 서쪽은 쯔엉 산맥을 경계로 라오스, 캄보디아와 접하고 있다. 열대 지방에 속해 강우량이 많고 숲이 우거져있다. 소위 인도차이나라고 불리우는 지역의 동쪽 사면에 발달해 있는 산맥과 평야들을 따라 마치 호리병박 처럼, 혹은 베트남인들이 메고 다니는 가인(ganh)이라는 목대 처럼 늘어져 있다. 그리고, 그 목대의 한 가운데를 운명의 북위 17도선이 통과하고 있다. 대개는 북부, 중부, 남부로 구분하며,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통킹, 안남, 코친차이나로 나누고 있었다. 이 지역의 특징 중 하나는 전 지역이 연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전 지역이 남지나해와 접해있다. 남지나해는 동북아시아의 세력들이 남아시아와 인도 및 유럽으로 진출하는 남방무역의 주요 통로이다. 이 때문에 베트남 지역을 누가 차지하는 가는 매우 중요한 국제적 관심사이었다. 베트남에 해양세력과 내륙세력이 끊임없이 번갈아 진출하는 이유이다. 유명한 흥 부엉의 딸 미 느엉을 둘러싼 산정(山精)과 수정(水精)의 싸움 전설도 여기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 지역은 남중국의 산악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강물들로 비옥하다. 그중에서 중국의 운남성에서 출발하여 북베트남을 통과하는 홍하와 티베트에서 출발하여 남베트남을 통과하는 메콩강은 유명하다. 이 강들은 베트남인들에게 광대한 델타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델타 지역들은 비옥하여 미작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고온 다습한 기후조건으로 말미암아 1년에 두차례 이상 수확이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지역은 예로부터 세계 최대의 쌀 수출지역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산물도 종류가 많고 풍성한 편이다. 큰 강 유역에서는 면화, 코코아, 커피, 차, 사탕수수, 담배등이 생산된다. 참깨, 인디고, 카더멈과 같은 외래작물들도 재배되고 있다. 소, 말, 닭, 오리와 같은 가축을 기르기에 적합한 지역이며, 내륙으로 갈수록 열대우림의 호랑이, 검은 표범, 표범과 더불어 사슴, 멧돼지, 원숭이 등이 풍부하다. 코뿔소와 코끼리는 그들의 자랑스런 뿔 때문에 거의 멸종위기에 달해 있다. 반면에, 강에서는 아직도 수미터가 넘은 물고기가 잡힐 정도로 어족자원도 풍부하다. 980년경 레(黎)왕조 시절에는 송나라 사신들을 대접하기 위해 레 호안 황제가 직접 강에 나가 작살을 들고 물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인종도 다양하다. 인구의 85% 이상을 차지는 베트남인들 말고도, 크메르족과 참족, 중국인 화교가 많이 살고 있고, 산간지대에는 므엉족, 메오족, 만족, 눙족, 바나르족, 자라이족, 라데족 등 극소수의 산지민족이 살고 있다. 이들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갖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후반에 몽고족의 침입을 겪으면서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쩐(陳)왕조는 강력한 정치제도와 군사조직에 힘입어 세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입을 물리쳤다. 이 때 부터 민족의 신화를 창조하는 설화집 {嶺南?怪}를 편찬하게되었다.
베트남(越南)이란 국호는 중국과의 교류에서 생겨난 오랜 명칭이었다. 중국의 중앙부로부터 매우 멀다는 뜻의 비에트(越)와 방향을 말하는 남(南)은 중국의 남부 지역과 더불어 1세기 전에 사용되었었다. 현재의 국호인 베트남(越南)은 1800년경에 베트남을 통일한 구엔 푹 아인이 청나라에 사절을 보내어 책봉을 요청했을 때 얻은 명칭이다. 원래는 남비에트(南越)의 국호로 승인을 얻으려 했으나, 청나라에서는 중국의 남부에 있는 南越국과 혼동이 된다는 이유로 현재의 국호를 강요하였다고 한다.
국제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베트남의 역사는 외적에 대한 대항과 투쟁 그리고 토착화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주로 역사의 대부분을 걸쳐 베트남의 외적은 중국에 성립한 중앙집권적 국가이었다. 송, 원, 명, 청, 등 중국대륙을 통일한 강력한 국가들은 남방무역의 주요 거점인 베트남을 복속시키려 들었다. 근대에 들어서면 프랑스가 유럽식민주의라는 유행에 편승하여 베트남을 장악하였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북부의 통킹과 중부 연안 지대인 안남 및 동남부의 코친차이나로 분할하여 통치하였다. 베트남이란 국호의 사용을 금하고 인도차이나의 여타 2개 지역--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합쳐 5개 지역으로 식민지를 통합한 다음 이들 사이의 상호 증오감을 부채질하였다. 세계 제2차대전기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잠시 차지한 적도 있었지만 프랑스는 끈질기게 베트남에서의 위치를 고수하려들었다.
1954년 5월의 디엔비엔푸 전투를 끝으로 프랑스가 패퇴하자 이제는 미국이 이 지역을 인수하려 들었다. 전후에 형성된 냉전구조와 세계적 패권을 만끽하면서 방대한 국력으로 미국은 이 보드라운 살코기 같은 지역을 한숨에 삼킬듯이 달려들었다. 실제로 베트남인들은 표면적으로 공격적이지 않고 온순하다. 육체적으로는 섬세하다고 해야할 정도이다. 낯선 사람들 조차도 항상 웃는 낯으로 대하고 결코 우락부락하게 대들 것 같지않다. 그러므로 외부침략자들에게는 잘하면 한 입에 삼켜도 결코 뒷 탈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 숨에 삼켜버리기는 커녕 볼상사납게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살코기에는 단단한 뼈다귀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이 뼈다귀는 고기의 모든 부분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요소가 있었다. 그래서 이 고기를 삼키려는 포식자들이 함부로 삼키게에는 너무 질기게 만들었다. 뿐 아니라 도리어 무릇 모든 삼키려는 자의 목구멍을 날카롭게 찔러 항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베트남의 뼈대는 바로 호치민의 지도력이었다.
3. "구엔 신 쿵"의 좌절과 반항, 그리고 방황
호치민은 1890년 5월 19일 북부 안남의 비니 시 부근에 있는 킴 리엔에서 구엔 신 삭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구엔 신 삭이었다. 비천한 출신이었지만 그의 성실함은 그를 행운으로 이끌었다. 마을 머슴으로 일하다가 그를 가르쳤던 마을 선생님의 딸과 결혼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선생으로 부터 자그마한 논과 대나무로 지은 오두막도 물러받았다. 여기에서 만족하지않고 그는 공부를 계속하여 1894년에 관료 계급에 들어갈 수 있는 첫 시험을 통과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구엔이 다음 시험을 치러 타니호아로 가있는 사이에 호치민의 어머니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가족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출세를 위해 어머니를 돌보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아버지에 대해 반감을 품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흥미있게도 이들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유년기의 반항을 베트남을 괴롭히는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승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아버지조차도 부인을 잃은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이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아버지 구엔은 짧은 관료 생활을 끝으로 아이들을 조부모들에게 맡기고 남베트남 각지를 유랑했다.
호치민이 겨우 열 살의 막내로서 엄마를 잃었다는 것은 그로서도 매우 큰 충격이었다. 더구나 부친이 그들을 차분히 보살피기는 고사하고 자신도 정처없이 객지를 떠도는 상황이어서 그의 충격은 더욱 심화되었다. 호치민 뿐만 아니라 호치민 보다 서너살 터울로 나이가 많았던 그의 형과 누나도 보다 더 반항적인 기질을 갖게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형 키엠은 젊어서부터 자신에게 발길질을 한 프랑스인 관리를 땅바닥에 꿇어 앉히는 자못 '심각한 반역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 후 그의 위법행위는 더욱 파괴적이어서 그의 생애는 투쟁과 투옥으로 점철되었다. 그의 누나 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일찍부터 프랑스 주둔군 소속의 베트남인 부대에서 무기를 훔쳐 항불 민족주의자들에게 넘겨주는 일을 했다. 이러한 작업은 매우 위험한 것이어서 오빠에 못지않게 빈번히 투옥당했다. 더구나 그녀는 프랑스가 베트남의 외딴 섬에 설치한 유명한 포울로 콘도르 감옥에 투옥된 한 젊은 남자를 사랑했는데 그가 옥사하자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고 한다.
원래 사물이란 양면을 지닌 것이어서 엄마를 잃고 아빠조차도 사실상 잃게된 개인적 역사가 호치민을 더욱 더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요즘의 심리학 이론들은 어떤 개인이 잘못되면 거의 일백프로 조상 탓을 하게 만들고 있다. 확실히 어떤 이에게는 유년의 혹독한 경험이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똑같은 경험이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 만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까지도 책임지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마치 똑 같은 이슬을 마시지만 독사는 독을 만들고 벌은 꿀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개인의 어리석음과 잘못된 판단을 거의 항상 조상 탓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려는 이론들은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개인에 대한 우상화 경향도 조심해야한다. 예를 들면, 호치민의 공식 전기는 이들의 투쟁을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겨우 열 몇 살짜리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고매한 이상과 분석력을 가지고 그것도 한 사람도 예외없이 민족해방에 헌신할 리가 있겠는가? 이는 필시 어려서부터 엄마와 아빠를 사실상 동시에 잃게된 사실로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호치민의 독립성은 그의 교육과정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부친의 허무주의 때문에 호치민은 어려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뛰어난 독서능력에도 불구하고 유학(儒學)의 정규과목을 읽는 데 소홀했다. 대신에 그에게는 다른 통로로 지식이 주어졌다. 하나는 여행이었다.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각지를 여행하였고 그 자신이 평생을 여행하며 지냈다. 다른 하나는 독서였다. 그는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닥치는 대로 독서하며 폭넓은 이해를 증진시켰다. 성장하면서 4년간 중학교 과정에 들어간 적이 있으나, 그 자신의 술회에 의하면, 어떤 과정보다도 자신의 독서가 그의 영혼을 알차게 만들었다고 한다.
호치민이 15살 되던 해에 그의 향후 생애를 좌우할만한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된 것이다. 이 계기는 판 보이 쩌우라는 민족주의자가 일본의 후원으로 진행한 소위 [동두 운동(東遊運動)]에 기초를 두고 있다. 판은 그의 [월남패망사]와 [신월남] 등의 책자를 통해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서는 많은 인재를 양성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일종의 근왕(勤王)정신을 강조하였는데, 역사적 단계로 보아 베트남에는 입헌왕정이 알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한 때 대대적인 호응을 얻었다. 베트남인의 모금운동과 일본의 조력을 통해 한 때는 2백명 이상의 유학생을 일본에 유치하기도 하였다. 호치민도 이 운동에 초대를 받았다. 이 초대는 여러모로 보아 그를 위해 훌륭한 기회였다.
놀랍게도 호치민은 이 기회를 거절하였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이 기회가 부친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부친은 판과 친구였고, 그의 부친이 이 유학을 추천하고 있었다. 그의 입장으로 보면 일본유학이 나쁠 것은 없으나 부친이 추천한 일이라서 싫었을 것이다. 호치민은 무책임한 부친이 그의 운명에 개입하는 것을 극히 싫어했다. 10년 뒤의 일이지만, 아버지가 판 추 트린을 소개했을 때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벌어졌다. 판 추 트린은 프랑스에서 [인권옹호연맹]을 이끌고 있는 독립지사였다. 그리고, 호치민은 무일푼으로 프랑스에 도착한 신출내기였다. 당연히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일단 접촉을 했으나 그의 친프랑스적 사고를 비판하면서 호치민은 두번 다시 아버지조차도 만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일의 양상으로 보아 단순히 부친에 대한 반감만이 호치민의 일본유학 거부에 작용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보여진다. 그의 엄청난 독서는 이미 그에게 판 보이 쩌우나 판 추 트린의 노선이 뭔가 베트남 독립에는 적합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여겨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근왕적이고 대외 의존적인 이들의 노선이 정신적으로 빨리 성숙한 호치민에게 크게 거리낌을 주었을 것이다.
대신에 호치민은 당시의 수도인 위에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4년을 지내면서 그는 프랑스외인부대 출신인 로지우 교장에게 많은 시달림을 당했다. 로지우 교장은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에게 포로로 잡혀 혼이 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저분한 베트남 아이들을 휘하에 거느리게된 것을 자신의 원한을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간주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호치민은 더욱 더 적극적으로 독립투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1908년 6월에 판 보이 쩌우가 주도한 반란이 일어났다. 호치민이 어렴풋이 예측했던 것 처럼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막상 호치민 자신은 이 반란의 외곽 부대로서 열심히 참여했다.
호치민의 청년기는 2년간의 세계일주를 통해 더욱 더 알차게 성숙했다. 호치민의 세계일주는 1911년에 발생하였다. 1909년에 더 이상의 학교 공부를 단념한 호치민은 판티에트라는 어촌에서 교사로서 봉직하였다. 그러나 부임 8개월 후 호치민은 판티에트에서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1911년 10월의 어느 아침이었다. 아마 그즈음에 발생했던 신해혁명(辛亥革命)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 해 크리마스 경에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프랑스 국적의 아미랄 라토슈 트레빌 호의 견습 조리사가 되어있는 호치민을 발견했을 것이다. 갑자기 사라졌다가 갑자기 어디에선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의 행적은 일생을 거쳐 계속되었다. 아마도 인도차이나의 역사에서 주변국들에게 가장 위험한 인물로 꼽혔던 그의 운명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미랄 라토슈 트레빌 호를 통한 세계일주는 만 2년 동안 계속되었다. 노예노동이나 진배 없는 선상노동은 매우 고달펏지만 호치민은 이 배의 여행을 통해 아프리카와 유럽과 아메리카를 방문하였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여행은 젊은이를 스스로 교육시키는 데 있어서 최고의 도구였다.
4. 사회주의자 "구엔 아이 쿠옥(阮愛國)"
2년여의 세계여행을 마치고 프랑스에 정착한 호치민은 그의 이름을 구엔 아이 쿠옥(阮愛國)으로 바꿨다. 호치민의 부친은 호치민을 구엔 타트 탄으로 바꾼적이 있다. 이때의 개명은 비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프랑스에서의 개명은 그의 과거를 비밀경찰의 추적으로부터 감추려는 목적과 동시에 그의 존재를 규정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야곱이 이스라엘로 개칭하면서 개인에서 민족으로 그 존재가 바뀐 것 처럼, 호치민은 자신의 역사적 단계에 따라 적절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호치민의 이름은 수시로 바꿨으며 그것을 일일이 나열하는 것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구엔 아이 쿠옥은 그 중에서도 호치민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이름 중의 하나가 되었다. 호치민이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닦은 갖가지 수련이 본격적인 항불베트남독립운동으로 나타난 성과와 동일시되는 바로 그 이름이기 때문이다.
런던을 거쳐 파리에 도착한 호치민은 곧 그의 예리한 통찰력과 성실성, 그리고 놀라운 문장력으로 프랑스의 좌익계 인사들의 관심을 끌었다. 처음에는 '변소를 치는 인부로 고용된 베트남 쿨리 노동자들의 통역이 되기 위해' 파리로 갔다. 그러다가 사진 만드는 일을 배워 파리의 {노동자의 생활}신문에 "가족의 생애를 기념하고 싶으신 분들은 구엔 아이 쿠옥에게 사진 수정을 맡기십시오"라고 광고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직업은 좌익적 사상을 퍼트리는 직업적 저널리스트 혹은 직업혁명가였다. 구엔 테 트루엔과 만드는 {르 파리아(Le Paria)}와 베트남인 선원들의 도움으로 만드는 {베트남 혼(Viet-nam Hon)}이 그의 주요 무대였다. 이러한 경력은 프랑스 공산주의의 대명사격인 {뤼마니떼(l'Humanite)}의 주필 폴 바이앙-꼬뚜리에나, 20년후 프랑스의 수상이 된 사회당의 레온 블룸, {르 뽀뿔레르(Le Populaire)}의 편집자이자 맑스의 조카인 샤를르 롱게, 프랑스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가된 마르셀 카샹, 등이 강력히 지원하므로서 가능했다.
호치민이 맑스주의에 몰두하게된 것은 당시에 그가 처한 상황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때로 지나칠 정도로 독립적인 호치민으로서는 일정한 한계를 그어놓고 베트남의 독립을 부르짖는 우익적 인사들과 배짱이 맞을리 없었기 때문이다. 입헌왕정을 꿈꾸던 판 보이 쩌우의 노선은 두말할 것도 없고, 당시 {인권옹호연맹}운동과 같은 항불운동을 하면서도 프랑스와의 협력이 가능하다고 믿는 판 추 트린과 같은 사람과도 어울릴 수가 없었다. 반면에, 프랑스의 좌익인사들은 호치민으로 하여금 민족으로서의 프랑스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게 할 정도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물론 그들이 완전히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그들은 프랑스인 주인과 베트남인 노예라는 낡은 이분법이 아니라 양국의 자본가와 양국의 노동자들로 나눠지는 새로운 이분법을 주장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이 제시하는 맑스주의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 호치민은 그 이론이 가지는 명쾌함과 보편성을 만끽하였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차후로 맑스주의라는 대의에 헌신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의 좌익이 호치민을 필요로 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프랑스 전체로 볼 때 세계제1차대전에서 승리하려면 해외식민지의 협조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외식민지는 식량과 군수물자와 병력의 주요 공급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프랑스의 우익이 해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미 충분하리만큼 식민지를 경멸했으며 그만큼 식민지의 반감을 얻고있었다. 프랑스 해외식민지의 반발을 무마하고 협조 분위기를 북돋우는 것은 좌익의 몫이었다. 따라서, 프랑스의 사회당 인사들은 부쩍 모든 아시아인 동지들에게 각별한 호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호치민은 프랑스의 좌익들에게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다. 그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사회주의적 이해와 열정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베트남어와 프랑스어와 영어를 자국어처럼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베트남인 중의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엄청난 독서와 세계여행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매우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안목을 갖게해주었다. 프랑스의 좌익 지성인들이 베트남 토착민들에게서는 쉽게 발견하지 못한 일종의 동질감을 호치민에게서 발견했다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호치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프랑스 좌익 사이에서 '극동문제 전문가'로 부각되었다.
이 시기에 나타난 호치민의 맑스주의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발견되는 그러한 '교조주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의 대표적인 논문인 [프랑스의 식민주의화에 대한 규탄]이라는 논문에는 어디에서도 맑스나 레닌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은 프랑스 식민주의의 성격을 철저히 해부하고 있다. 이 논문이 지적하는 몇가진 골자를 알아보자. 호치민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영구히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해 갖가지 교묘한 타락의 방법으로 착취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컨대, 프랑스는 모든 식민지에 징병제를 실시하고 징병에 응한 보상으로 아편 판매 특허장을 주고 있었다. 아편 보다 더 실질적 위험을 미치는 것은 음주를 조장하는 행위였다. 토착민들이 술을 빚는 행위를 엄격히 금하고 프랑스 회사에 주류독점권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주류를 강제적으로 대량 공급하므로서 과거에는 음주의 습관을 모르던 원시 부락들에 까지 알콜 중독자를 만들어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논문에서 호치민은 베트남인들에 대한 프랑스의 노골적인 경멸, 지역 언론에 대한 엄격한 규제, 교회의 탄압적 기능, 수없이 발생하는 베트남 여성들에 대한 성범죄 등을 다루고 있었다. 호치민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인도차이나로 가는 긴 여행에서 거친 바다 때문에 정의의 여신은 손에 쥔 칼을 제외환 나머지는 다 잃어 버렸다."
단순히 말로만 떠든 것이 아니라, 호치민은 자신의 최선을 다한 행동으로 베트남인들의 신뢰를 얻었다. 1919년 베르사이유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베트남 해방의 8개 강령을 제출한 것이다. 이 회의는 마침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 14조가 낭독되는 중이었다. 이러한 때에 호치민은 구엔 테 트루엔과 함께 "베트남인의 자결권, 입헌정부, 법적 평등, 정치범 사면, 출판 및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폐지, 염세의 강제징수폐지 및 주류 강제 소비 폐지," 등의 항목을 들고 회의장을 방문하였다. 비록 윌슨 대통령을 만나거나 프랑스 측으로부터 의미있는 고려의 약속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호치민의 과단성있는 행동은 베트남인들의 흥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했다.
여기에서 한번쯤 베트남의 독립을 추구한 호치민과 대한독립을 추구한 한민족의 지도자들을 비교해 볼 만하다. 예컨대, 미국에서의 이승만씨와 프랑스에서의 호치민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입장은 이승만씨가 훨씬 유리하였다. 왜냐하면, 호치민은 식민의 당사자격인 제국 내에서 발버둥치고 있었는 데 비해, 이승만씨는 그 식민제국과 전쟁 중에 있는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은 그 국가의 일부 세력에게나마 존경을 받거나 다양한 지원을 받고 있는데 반하여, 이승만씨는 그러한 기록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양상은 이승만씨 뿐 아니라 안창호씨나 기타 인물들도 유사한 경우이다. 주로 한민족 사회 내에서 지지자를 얻고 있었으며 그나마도 지도자들 끼리 서로 많은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심각히 대립하고 있었다. 혹평하자면 호치민에 비해서 한민족의 지도자들은 이불 속의 활개짓이나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5. 국제공산주의자 "브옹"
호치민은 한 때 국제공산주의의 전성기 조직인 [제3차 코민테른]에 투신했었다. 1889년에 결성된 [제2차 코민테른]은 세계제1차대전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붕괴하였다. 국제노동자의 대의에 헌신해야할 공산주의자들이 각각이 속해있는 조국의 부름을 받고 참전하였던 것이다. 공산주의는 민족주의에 격퇴당했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레닌이 보다 강화된 [제3차 코민테른]의 결성을 주장하였다. [제3차 코민테른]은 명목상 각국 공산당으로 이루어지는 조직이었으나 실제로는 모스크바의 엄격한 통제와 지도하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호치민은 사실상 붕괴한 [제2차 코민테른]의 조직 보다는 현실성이 높은 [제3차 코민테른]에 적극 참여할 생각이었다.
더구나 레닌주의는 호치민이 찾고있던 민족독립의 대의를 가장 유효하게 설명하는 도구 처럼 보였다. 레닌은 공산주의 혁명이 왜 산업화가 가장 발달한 영국이나 독일에서 발생하지 않고 러시아와 같은 후진국에서 발생했는가를 설명했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는 식민지를 착취하므로서 본국내의 계급모순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자본주의적 모순이 발생하는 곳은 제국주의적 본국에서가 아니라 식민지이다. 그러면서도 식민지에서의 자본주의적 국가기구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하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모순이 극대화되고 있는 식민지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먼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식민지의 독립은 국제공산주의의 대의와도 일치한다. 왜냐하면 식민지의 독립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착취 고리를 가장 약한 데서부터 단절하므로서 여기에 의존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전체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호치민은 국제공산주의에 헌신하기 위해 그동안 파리에서 쌓았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로서의 입장을 청산하였다. 특히 1920년에 뚜르에서 열린 프랑스 사회당 전당대회는 그를 실망시켰다. 이제는 공산주의의 종주국이 되었고 제3세계 인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할 각오가 되어있는 소련의 동지들과 협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1923년 11월에 소련으로 들어가 [동방근로자대학]에 입교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레닌의 실천적 지도력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다. 맑스도 "혁명은 하나의 기술이다"고 서술한 적이 있다. 레닌은 이를 받아 더욱 실천적인 5가지 명제로 개발했다. 첫째, 최후의 승리를 보장할만한 준비가 되기 전에 혁명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둘째, 혁명지도자들은 가장 적절한 장소, 인물, 환경, 시기를 택할 줄 알아야 한다. 셋째, 적들이 분열되고 사기가 떨어지고 부주의해질 때를 기다려야한다. 넷째, 사기는 필수조건이므로 선전은 항상 활기가 넘쳐야 한다. 다섯째, 일단 공세에 들어서면 수세로 돌지 말아야 한다. 레닌은 자신의 지도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그것은 역사상 어떤 시점 에서 실현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알아차리는 능력이다. 호치민은 여기에 중요한 요소를 첨가하였다―그것은 자기가 관계하는 인간의 능력 및 한계를 고려하는 능력이다.
그는 곧 소비에트공산당 내에서도 아시아 전문가로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소수민족 문제를 맡고있는 스탈린과 우호관계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트로츠키, 디미트로프, 라덱, 부하린, 등의 제1급 혁명가들과도 친교를 맺었다. 1924년의 코민테른 제5차대회에서 그는 제2차 코민테른의 개량주의 그룹과 그의 대부격인 프랑스 공산당을 비판하는 임무를 맡았었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이 식민지 문제를 무시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소련측의 식민지 문제 경시도 질책하였다. 국제공산주의의 유럽중심적 사고 경향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금하지 않았다. 여하튼 호치민으로서는 국제공산주의의 방향이 자신의 목표와 완전히 합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있었다. 단지 국제공산주의에 대한 충성 및 규율에 대한 절대 복종이 현실세계에서 그의 목표를 달성시켜주는 중요한 도구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호치민과 같은 유력한 국제공산주의자는 요청되는 곳이 많았다. 1925년 1월에 코민테른은 호치민을 "브옹"이란 가명으로 중국에 파견나가있던 보로딘의 사절단에 배속시켰다. 보로딘의 사절단은 신해혁명으로 집권한 쑨원의 군사력을 강화시켜주기 위한 소련측의 배려였다. 호치민은 매우 적절한 인물이었다. 이 지역에서 극히 필요한 꽝뚱어와 영어와 프랑스어와 베트남어를 유창히 말했다. 국제공산주의에 충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국제공산주의적 시각으로 이 지역 정세를 판단할 수 있는 전문가였다. 더구나 "구엔 아이 쿠옥"시절부터 성장해온 그의 명성은 베트남 지역에서 탈출한 "팜 반 동"이나 "레 만 트린"과 같은 젊은이들을 모으는 데 매우 적절했다. 그는 "탄 니엔(靑年)"이란 조직을 만들고 국민당이 개설하고 초우 언 라이가 정치지도위원으로 있는 [황포군관학교]에 이들을 입교시켜 혁명의 실제적 기술들을 배우게 했다.
사물의 진실에 대한 접근이야말로 호치민 지도력의 핵심이었다. 예를 들면, 이들 베트남 청년들의 공산주의 교육에서도 호치민은 이데올로기적 논쟁을 즐기기보다는 각자가 수행해야할 작업에 도움이 될 내용들을 강조했다. 이 시기에 호치민에게서 배운 적이 있는 레 만 트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브옹은 항상 모든 사물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고, 각종 통계 숫자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더러 항상 통계의 가치에 주의하라고 설명하면서 브옹은 레닌을 인용했다. '농부들은 이론보다는 사실이나 숫자를 더 믿는다'."
호치민의 국제공산주의 활동은 중국 정세로 인해 수시로 변화하였다. 1927년에 발생한 치앙 카이 섹의 쿠테타를 간신히 피한 호치민은 당시 방콕에 있던 코민테른 남아시아국 소속의 요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인도차이나 각지를 다니면서 베트남인들을 조직하고 공산주의적 혁명의 대의를 전파하였다. "탄 니엔"으로부터 시작한 인도차이나 지역 공산당이 세종류의 조직으로 분열되었을 때 홍콩에서 그들을 규합하여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는 소련의 소치에서 휴양하는 기회를 가졌는가 하면 중국공산당을 따라 옌안까지 행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비니 시를 중심으로 하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거의 자생적인 소비에트운동이 발생하였다. 이 운동은 프랑스의 가혹한 탄압으로 진압되었으나 호치민이 주도하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사업활동이 비밀스러운 만큼 그의 비밀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1932년에는 그의 사망기사가 소련 신문은 물론 프랑스의 [뤼마니떼]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의 유명한 이름 중 하나인 [구엔 아이 쿠옥]은 이 때에 완전히 공식기록에서 사라졌다. 물론 "브옹"조차도 곧 사라졌다.
6. 민족주의자 "호 치 민"
마침내 그가 사용한 이름 중 가장 유명했고 가장 오랫동안 쓰인 "호치민(胡志明)"란 이름이 나타났다. 호치민의 지도력이 국제공산주의적인 것에서 보다 민족주의적인 것으로 전환하던 1940년 초기와 일치하고 있다. 사실상 코민테른에 대한 호치민의 인식의 전환은 1936년의 독소 불가침 조약부터 시작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조약은 공산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이 일정한 동맹관계에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했다. 뿐만 아니라 이 조약 때문에 소련이 지도하는 코민테른은 일본에 대해서도 일단 중립을 표방해야했다. 호치민에게 있어서는 프랑스 대신에 베트남을 점령한 일본은 반드시 타도해야할 실질적인 적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국제공산주의는 베트남의 통일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물론, 그는 매사를 주로 맑스-레닌주의의 틀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맑스-레닌주의는 민족해방의 이론으로 사용되는 한에서 정당한 이론이었다. 수단에 집착하다가 마침내 목적을 망각하는 어리석은 행위란 호치민 지도력의 속성이 아니었다.
1940년 부터 호치민은 그가 그동안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이룩해놓은 베트남 혁명가들의 조직을 독자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941년 5월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박보의 동굴에서 창설한 [베트남독립동맹(Viet Nam Doc Lap Dong Minh : 후일에 베트민으로 불린)]이 바로 그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호치민이 지도하는 십여명의 혁명가들을 지도부로 하는 민주적 조직체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고려하여 각종 조직사업과 투쟁사업에서는 농민구국회니 청년구국회니 하는 다양한 민족주의적 구국단체를 앞세웠다. 여하튼 이 조직은 호치민의 현실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지도력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조직력, 그리고, 자신들의 해방염원에 힘입어 몇년 안에 박보, 까오방, 박깐, 랑썬 지역을 중심으로 해방구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남부 중국에 주둔한 중국의 군벌들도 주요한 동맹자로 간주되었다. 쾅시 군벌인 창파귀(張發奎)나 이 지역의 치앙 카이섹군 사령관 리치센(李濟琛) 등이 그러한 대상들이었다. 이들도 인도차이나의 일본군 주둔을 극히 싫어하고 있었다. 이들은 호치민과 그의 베트남 조직을 일본군을 교란시킬 유용한 도구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그들은 박보에서 가까운 칭시와 같은 중국국경지역을 베트남인들에게 개방해주고 있었다. 물론, 호치민에게 그들이 안정적인 동맹자라는 뜻은 아니다. 1942년에 호치민이 창파귀에 접근하여 동맹을 강화시켜하였을 때 창은 도리어 호치민을 체포하였다. 이 때부터 시작된 14개월의 감옥생활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는 데 실제로 호치민의 안내자역을 했던 "레 쾅 바"는 옥사할 정도였다. 그러나, 호치민과 그가 지도하는 베트민이 없이는 인도차이나에서의 공작이 어렵다고 판단한 창은 부득불 호치민을 석방하였다. 물론 호치민이 창에게 그가 새로 만든 친중국적 [베트남혁명동맹회]에 협력할 것을 맹세하였다.
일본군을 인도차이나와 중국에서 몰아내려는 미국도 중요한 동맹자가 되었다. 미공군의 조종사 구출작전에 참여함으로써 꾼밍에 주둔한 미제14공군과 연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 협력 관계에서 베트민은 베트남에 주둔한 일본군을 교란하고 미공군을 위한 제반 정보를 수집하고 혹시나 추락당한 미공군 비행사들을 구출하는 임무를 맡았다. 대신에 미공군과 미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는 재고품으로 남아있는 무전기와 의약품, 기기류, 기본 무기류 등을 베트민 측에 공급하였다. 이러한 제휴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1945년의 여름에는 베트민의 정보망이 베트남 지역에 격추된 미군조종사 17명 전원을 구출해주었다. 심지어 그들의 해방구에 L-5연락기를 위한 활주로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세상일이다. 1945년에 미군 조종사를 구출했던 조직이 1960년대 내내 미군 조종사를 체포하는 조직으로 활동했으니 말이다. 두 시기를 견주어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베트민의 지도자가 여전히 호치민이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군 비행기가 떨어뜨리는 보급물자가 여전히 베트민측의 주요 보급통로였다는 점이다.
여하튼, 호치민의 현실주의적 지도력은 그의 입장을 크게 강화시켰다. 사실상 박보시절의 초기까지만해도 호치민이란 인물은 베트남 독립운동의 여러 지도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후로도 호치민은 항상 집단지도체제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중국측의 필요에 의해, 미국측의 필요에 의해, 공급되어진 주요 물자와 전략적 협력관계는 호치민의 위치를 부동의 일인자로 만들었다. 호치민 자신이 이 점을 잘 알고있었다.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사건들을 효율적으로 엮어서 자신의 지도력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미제14공군의 센노트 장군과 관계된 매우 유명한 일화가 있다. 호치민은 소위 '날으는 호랑이들(Flying Tigers)' 편대를 이끌고 있는 센노트 장군의 명성이 자신의 지도력 확장에 매우 유용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센노트 장군을 만나려고 무척 노력하였다. 마침내 쿤밍에서 미군조종사를 구출한 '베트남 토착민' 중의 하나로 센노트를 만났다. 센노트가 아무런 호의를 표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센노트 장군의 명성을 찬양하고 마치 오빠부대의 소녀 처럼 센노트의 서명이 든 사진을 요구하였다. 방문을 마친 다음 그는 동행했던 OSS의 장교--후일에 호치민의 전기를 쓴 펜--에게 포장을 뜯지않은 6자루의 신품 콜트45구경 권총을 요청하였다.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이 선물들을 미국측이 마다할 리가 없었다. 사실상 그 순간까지만해도 이 두 선물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다. 그 선물들의 효용은 호치민이 박보의 동굴기지에 도착하였을 때 나타났다. 호치민은 센노트의 서명이 든 사진을 보여주고 연이어 "그가 호치민을 통해 선물한" 신형 권총을 베트민의 지도자들에게 나눠줬다. 그럼으로써 미국이 지지하는 베트남의 지도자가 누구인지를 결정지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일본이 참으로 미묘한 역사적 시기에 미묘한 방법으로 호치민을 돕게 되었다. 1945년 3월 인도차이나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베트남에 있는 프랑스의 식민지 당국을 폐지하고 아직까지 남아있던 바오 다이 황제를 중심으로 한 구엔왕조를 명목상으로나마 부활시켜주었다. 일본으로서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자원의 보다 더 효율적인 동원과 통제를 위해 그 때까지 간신히 유지해온 프랑스 식민당국과의 공존관계를 청산해야 했다. 일본군의 쿠테타는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 관료구조를 순식간에 붕괴시켰으며, 베트남인들에게 비록 친일적이긴 하지만 베트남 독립의 희망을 불어넣었다. 저명인사들에 의한 독립축하 강연회와 독립열사들을 추모하는 집회가 각지에서 열리고 수많은 정치단체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났다. 심지어 까오다이교(敎)나 호아호아교(敎), 혹은 다이베트당(大越黨)과 같은 친일단체들은 일본군당국에게 대해 가능한한 많은 권력을 자신들에게 이양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물론, 호치민의 지도력하에 있는 베트민이 일본의 쿠테타가 베트남의 독립을 가져다줄 것이란 기대를 가질리가 만무했다. 그들은 일본에 대해서 아무런 환상도 가지지않았다. 이미 지적한 바 처럼, 그들은 도리어 연합군측과의 연대를 더욱 강화하였다.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하려는 연합군측으로서는 프랑스측 정보망의 붕괴로 인해 베트민의 정보망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베트민은 일본군이 만들어준 예기챦은 기회를 적극 활용하였다. 일본군은 프랑스 식민당국의 지방행정망을 붕괴시켰다. 베트민은 이러한 프랑스 식민당국의 붕괴로 인해 발생한 농촌지역의 행정을 장악하고 이 지역들을 해방구로 만들어갔다. 일본군은 중국에서 처럼 도시와 철도망을 연결하는 '점과 선'의 지역에만 관심을 갖고있었다. 이러한 일본군의 전략은 농촌지역에서 베트민이 실질적인 행정체계를 조직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제 베트민은 베트남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조직이 되었다.
7. 대통령 "호치민"
1945년 8월 30일 구엔왕조의 바오 다이 황제는 그를 방문한 베트민의 대표에게 베트남의 지배를 상징하는 황금의 보도(寶刀)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3일 후인 9월 2일에 호치민은 하노이에서 그를 국가의 수반으로 하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베트남의 독립선언 이전에 보 구엔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은 이미 사이공까지 진주하였다. 사실상 베트남은 완전히 통일되었다. 전국토가 베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로써 베트남 민족에게 고난의 시대는 끝나고 영광의 시대가 시작되었는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인간 보다 훨씬 더 신중한 성격이어서 어떤 민족이 자신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지를 적어도 한 백년쯤은 시험해보신다. 백년은 인간에게 매우 긴 시간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눈 깜짝할 사이이다. 그러니 그를 원망할 일도 아니다.
연합국의 열강들은 1945년 7월에 열린 포츠담회담에서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할하기로 결정하였다. 중국군이 북부를 점령하고 영국군이 남부를 점령하여 일본군을 무장 해제한다는 명분이었다. 그 다음에는? 그 다음 베트남은 다시 프랑스에게 반환한다는 결정이었다. 윌슨의 민족자결권 선언서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나눠먹기를 위해 트루먼은 윌슨의 14개조항을 자신의 4개조항으로 대치하였다. 이 조항들에는 "자치 준비를 갖춘" 민족만이 스스로의 통치형태를 선택할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있다. 강대국들은 베트남의 경우 토착민들이 아직 자치준비를 갖추지 못했다고 합의했다.
실질적인 정부로서 자체의 군대와 행정망을 소유하고 대일본 투쟁에서 연합군과 공동전선을 수행하였던 베트민의 존재는 아예 무시되었다. 남북한 분단의 사례와는 사뭇 다르다. 1945년 8월 당시에 한민족의 정통성있는 정부는 한반도 밖에 있었다. 독립군이 한반도로 진주한 것도 아니다. 커밍스의 연구 이래로 '실질적 정부' 구실을 했다고 주장되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이란 것도 항복을 선언한 일본 제국의 양해와 협조 아래에서만 가능할 뿐이었다. 여기에 비해 베트남은 누가 보아도 "자치 준비를 갖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대국들은 독립준비가 부실한 것으로 낙인찍었다. 따라서, 이 베트남 경우야말로 강대국의 호의를 통해 자국의 독립을 획득하려는 사고는 꿈에 불과하며 오직 이 강대국들의 횡포를 저지할만한 실력을 키워야 독립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미 이 연합국측 강대국들은 상호 간에 상대국가의 식민지 영유권을 지지하는 쌍무협정을 맺고 있었다. 참으로 어리석고 유혈적인 난장판이 시작되었다. 북으로 진주한 중국군은 치앙 카이 섹의 허가 아래 약탈과 폭행을 일삼았다. 남쪽으로 진군한 영국군은 병력을 보강한다는 명분 아래 일본군을 재무장시켰다. 프랑스의 르 끌레르끄 장군이 프랑스군 5만을 구성하여 남부에서 북부로 진군하고 있었다.
호치민은 식민지하의 투쟁 때 보터 더 복잡하고 위험한 투쟁을 수행해야 했다. 이번에는 중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프랑스와 협상을 벌여야했다. 협상에 관한한 좌우 양측에서 반발을 사기 마련이었다. 우측은 잡다한 이유를 내세워 무조건 호치민의 정책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좌측은 어떠한 협상도 결국은 매국적 결과를 낳게될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실제로 프랑스와 베트남 간의 회담은 시간이 지날 수록 프랑스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호치민은 힘겨운 협상 끝에 프랑스가 베트남을 자유 국가로 승인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은 프랑스연방 내에 남아있어야 하고 남북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국민투표라는 방법에 의존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1946년 2월 프랑스와 베트남 간에 제1차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남베트남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지위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매국적 조약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사태는 매우 유동적이었다.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공화국은 베트남 전역에서 사실상 세금을 징수하고 군대를 모으고 있었다. 1946년 1월에 베트남 전역에서 실시된 총선 결과로 호치민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약속과 달리 베트남 전역의 국민투표를 용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2만명의 상한선을 설정하였던 식민지 주둔군을 15만으로 확장하였다. 비록 호치민을 프랑스로 맞아들이긴 하였지만 정식 국가수반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제네바협정이 서명된지 몇달도 안된 12월 19일에 프랑스 군은 하노이의 대통령관저를 포위하고 호치민과 보 구엔 지압을 체포하려 들었다. 이를 깃점으로 프랑스군과 베트남군은 베트남 전역에서 새로운 전투행위에 돌입하였다. 점차 미국이 프랑스군을 원조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운명은 항상 가혹한 것만은 아니어서 호치민에게 예기치않았던 새로운 지원세력이 생겨났다. 중국대륙을 마오 쩌 뚱의 군대가 석권했다. 호치민의 친구인 초우 언 라이는 공산주의적 베트남이 가진 전략상의 가치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상, 호치민은 중국 공산당의 만리대장정에 수레를 끌어가며 참여한 전우였다. 중국을 석권한 중국 공산당은 호치민의 정부를 즉각 승인하고 국교를 수립하였다. 뒤늦게 외교상의 실책을 깨달은 소련도 호치민의 정부를 승인하였다. 그야말로 우군이 하나도 없던 일개 반역도에서 8억의 우군을 거느린 대통령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1954년 5월 7일, 베트남군의 대승으로 막을 내린 디엔 비엔 푸 전투의 결과조차도 호치민에게 해방과 통일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종결되고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일 뿐이었다. 디엔 비엔 푸에서 프랑스가 항복하자마자 미국이 강력히 개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미국의 개입은 위력적이었다. 소련과 중국은 한반도에서 발생한 군사적 대결의 위기가 간신히 가라앉은 때에 인도차이나에서 또 강대국간의 대결이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우방국들은 도리어 호치민에게 양보할 것을 강요하였다.
1954년 5월에 시작된 제네바회담은 강대국들의 합의에 의해 약소국의 분수에 넘치는 승리를 책망하고 사태를 원점으로 돌리는 내용의 합의를 최종안으로 채택하였다. 이 협정에 따르면, 베트남은 남북으로 다시 분할되며, 베트남군은 남부에서 그리고 프랑스군은 북부에서 철수해야한다. 남베트남은 [베트남]으로 국제적 승인을 받지만 북베트남은 그렇지 않는 상태로 놓아둔다. 이런 상태라면 북베트남은 국제법상 반란집단으로 남아있는 셈이었다. 남북 간의 통합을 결정하는 국민투표는 2년후에 실시하며 프랑스가 그 일을 맡는다. 국제법상으로 이 모든 합의에 미국은 당사자가 아니었다. 따라서, 미국이 책임질 일도 없었다. UN은 호치민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베트남 인민들 조차도 호치민에게 반발하는 일이 늘어났다. 레 두안은 호치민의 대리인인 팜 반동이 지나치게 양보했다면서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1956년에 발생한 게안 성의 농민봉기처럼 호치민을 괴롭힌 것은 없었다. 강력한 토지개혁운동에 반발하여 봉기한 10여만에 이르는 농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1개 사단 병력을 동원해야 했다. 약 2천명에 가까운 농민들이 학살당하거나 추방당했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의 지도력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인격에 대한 베트남 인민들의 신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국제적 협상에서 나타난 결과로만 보자면 호치민의 지도력은 크게 의심을 받을만 했다. 그가 상대한 강대국들은 이러한 협상에서 너무도 냉혹하고 이기적이어서 베트남 인민들이 피땀흘려 얻은 승리가 이러한 협상 테이블의 전투에서 속절없이 사라져갔다. 강대국들의 위협과 공갈을 극복할만한 여유를 얻기 위해 호치민은 부득이 다수가 납득하기 어려운 양보를 하곤 했다. 1, 2차에 걸친 인도차이나 전쟁은 호치민의 생전에만도 거의 25년을 지속하였다. 특히, 1965년 이후에 진행된 소위 '북폭'은 온 북베트남 땅을 초토로 만들고 있었다. 열대 우림 기후라는 도움이 있었지만 삶의 조건은 최악이었다. 프랑스와 미국의 선전기관들은 호치민과 그의 공산주의가 없어지면 평화가 올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었다. 호치민의 국내 정책들이 항상 성공적이기만 할 수도 없었다. 특히 마오주의적 오류에 의한 농업정책의 실패는 심각한 것이었다. 베트남의 정치권력을 놓고 호치민에 대항하려는 내부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 아저씨]가 우리에게 나쁜 일을 할리가 없다"는 인민들의 믿음은 거의 언제나 호치민의 지도력을 가능하게 한 원천이었다.
이러한 믿음은 그의 오랜 투쟁 경력뿐만 아니라 호치민 자신이 보여주는 절제된 권력에 크게 힘입고 있었다. 역사상 많은 혁명가들이 권력을 잡은 후에는 급속히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혁명과 해방 그리고 통일이라는 대의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들이 권력을 잡은 후에는 급속히 그 자체가 목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도력의 신격화, 일당 독재의 추구, 권력의 집중, 심지어는 권력의 세습에 이르기까지 소위 "권력의 부패"라고 불리워지는 증상들이다. 호치민은 이러한 권력의 부패에 빠져들지 않은 보기 드문 지도자 중의 하나였다.
펜이 지적하듯이, 호치민은 생전에 맑스-레닌주의 이외에 자신의 무슨 "…주의"를 내세우지않았다. 아마도 생전에 자신의 "…주의"를 내세우지않은 거의 유일한 공산주의 지도자였을 것이다. 스탈린주의, 모택동주의, 김일성주의, 카스트로주의, 티토주의, 등을 보아서 알 수 있다. 호치민이 발행한 문서들은 간결하고 실제적이었다. 호치민의 생애 자체가 한가롭게 책이나 쓸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다. 레닌의 저작이 14권에 이르고, 마오의 저작은 40여권에 달하며, 김일성의 저작도 35권에 달하지만, 호치민의 저작은 겨우 4권에 지나지 않았다.
호치민은 권력이 초래할 수 있는 친인척 비리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차단하였다. 사실상 호치민의 가족은 일찍 사별한 모친을 제외하면 전 가족이 독립혁명의 전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형님과 누나는 호치민에 못지않은 독립투쟁 경력을 지녔으며, 그가 경원하던 부친조차도 온건파 독립운동 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형과 누나를 결코 권력의 중심부로 유인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그가 대통령이 될 때까지 그의 형과 누나는 '구엔 아이 쿠옥,' 혹은 '브옹,' 혹은 '호치민'이란 그들의 지도자가 그들의 동생인 '구엔 신 쿵'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1945년 베트남이 독립했을 때 형 키엠은 동생 호치민을 30년 만에 하노이에서 만났다. 호치민은 그를 대통령 관저가 아니라 근처 친척집에서 만나 한 시간 가량 회포를 풀었다. 형 키엠은 그 때조차도 동생이 그가 존경하는 '대통령 호치민' 그 자신인 줄 몰랐다고 한다. 누나는 뒤늦게 신문에 난 새 지도자의 얼굴과 동생의 얼굴, 대통령의 출생 가문이 자신의 가문과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깜짝 놀란 그녀는 '오리 두마리와 달걀 20개'를 싸들고 하노이로 갔다. 대통령은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였다. 대통령 관저에서 누나가 가져온 선물을 함께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을로 돌아갔다.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자신의 마을에서 안락하게 살았다.
호치민의 소박함과 친절함 또한 유명했다. 하노이의 대통령 궁은 화려했지만 막상 그 곳의 주인은 검소했다. 그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언제나, 상대방 국가원수를 만날찌라도, 보통 셔츠에 카키색 바지, 고무로 만든 하얀 샌들을 신고 있었다. 보다 못한 비서가 그에게 파티에 적당한 복장을 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자, 호치민은 말했다. "여보게. 나는 패션쇼에 나가는 게 아닐세." 확실히 그는 어떤 혁명의 지도자들처럼 강인한 인상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로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니어서 자주 몸져 누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사람을 대할 때 설득하려들기 보다는 상대방에게 친절을 베푸는 정도에서 만족하곤 하였다. 프랑스측의 사절로서 오랫동안 호치민과 교섭에 임했던 쌍뜨니는 호치민의 지도력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호치민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언제나 자신의 경쟁자들 보다 적게 취하면서 상대적 독립에 만족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소박함과 친절함은 그가 인민들의 "호 아저씨"로 머물 수 있게 만든 지도력의 원천이었다.
이러한 호치민의 성실한 지도력은 많은 사람들, 특히, 베트남 인민 자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예컨대, 1960년대에 김일성은 전쟁 중에 있는 호치민에게 공산주의적 연대를 표시하고 자신의 지도력을 과시하기 위해 베트남 청년들을 일년에 수백명씩 평양으로 불렀었다. 당시 평양으로 유학 갔던 베트남 청년들은 김일성을 찬양하기는커녕 경멸하는 마음을, 상대적으로 호치민을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돌아왔다. 김일성 체제의 지나친 개인숭배와 그 가족들이 보여주는 지저분한 타락상은 그들로 하여금 '이건 공산주의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산주의적 모델은 호치민이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타락한 지도력은 호치민의 고결하고 솔직한 지도력의 가치를 너무도 생생하게 부각시켜주었다.
물론 호치민의 지도력이 신성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가 저지른 자질구레한 인간적 과오들이 이 짧은 글에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완벽한 인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떤 점에서 보면, 호치민 지도력의 행로는 너무 약삭빠르고 뼈대가 없어서 고결한 이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추천할만한 내용이 되지못한다. 특히, 그가 말년에 저지른 마오주의적 과오와 그에 따른 베트남 농민의 희생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지와 독단에 빠져들면서도 온갖 이유를 대며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자들에 비하면 호치민의 지도력은 거의 완벽한 것이나 다름없다. 예컨대, 남북한의 통일을 둘러싸고 벌어진 남북한 지도자들의 행태를 잘 아는 한국민들로서는 이 민족이 아직도 두 체제로서나마 생존한다는 것 자체가 신의 각별한 은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호치민의 지도력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지도력을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나라의 지도력과의 비교를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8. 대단원
1969년 9월 2일에 호치민의 지도력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는 79세의 노인으로 와석종신하였다. 전쟁은 아직도 격렬했지만 승리의 서광이 비치고 있었다. 강대국들이 억지로 갈라놓은 것을 약소국의 인민 자신들이 합치고 있었다. 남베트남 국민들이 호치민의 베트남 정부에 보여주는 신뢰와 참여는 베트남의 통일을 위한 밑거름이었다. 호치민의 후계자들은 유능했고, 베트남의 해방과 독립의 전망은 점차 견고해지고 있었다. 호치민은 거의 은퇴하다시피 하였지만 호치민의 지도력이 손상될만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중국과 소련은 점차 경쟁적으로 원조물자를 제공하고 있었다. 베트남이 차지하는 비동맹진영에서의 위상도 높아지고 있었다. 호치민의 생애로 보아서는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은 1968년 1월 30일에 있었던 베트남측의 [구정대공세]를 분깃점으로 종결국면에 접어들었다. 음력설인 테트를 기념하여 베트콩과 베트남군은 남베트남 지역에 있는 36개 주요 도시와 촌락들을 점령하였다. 이 공세로 베트남 측은 약 3만3천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미국측은 더 큰 타격을 입었다. 수천억 달러를 쏟아 넣었고 54만명에 가까운 군대를 진주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사이공 시내에서 전투를 치루게 될 정도라면 결코 군사적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대세는 전쟁을 종결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점령군 사령관인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의 추가파병을 요청하자 존슨 대통령은 점령군 사령관 교체와 북폭금지 및 파리종전협상의 시작으로 응답하였다. 호치민은 "저 경애하는 칼 맑스나 레닌 및 혁명의 선배들과 합류하기 전에" 미군 중 2만5천명이 철수를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호치민은 베트남 체제가 실용적 사고로 무장한 집단지도체제에 의해 이끌어가기를 기대하였다. 박보의 동굴 시절 부터 국가의 중대사는 8명 내지 10여명의 유능한 정치국 지도자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호치민이 국가의 수반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베트남 내에 있는 다양한 세력들이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를 원했다. 1960년대에 호치민은 정치일선에서 거의 물러나 있었다. 그대신 보 구엔 지압, 레 두안과 같은 친소련파와 트루옹 친, 레 둑 토와 같은 친중국파, 그리고 중개자로서 자신의 대리인격인 팜 반 동과 같은 인물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각기 베트남에 대한 충성을 경쟁하도록 하였다. 어려운 맑스주의 이론보다는 누구도 쉽게 알 수 있는 간결하고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도록 격려하였다. 그럼으로서, 베트남의 지도자들이 일순간의 성공이나 이데올로기적 완전성에 몰두하여 범하는 극좌주의적 오류를 피하게 만들었다. 특히, 남부지역에서 활동할 때는 공산주의자임을 내세우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점을 주지하곤 하였다.
호치민은 그의 유언에서조차 소박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내가 죽더라도 거창한 장례식 등으로 인민의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하지 말기 바란다"고 썼다. 현재의 상황으로 보아 그의 후계자들은 그 유언을 지키지 않았다. 장례식을 거창하게 한 것은 물론이고 호치민의 미이라를 만들고 보관하는 데 엄청난 인민의 시간과 돈을 낭비하였다. 또 그들은 헌법에조차 "호치민 사상"의 존재를 명시하였다. 몇몇 공산주의 국가들에서처럼 죽은 혁명 지도자의 정통성을 살아남은 공산주의 체제에 유용(流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래도 호치민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호치민의 지도력에 대한 그들의 흠모를 생각하면 크게 나무랄 일도 아니다.
호치민의 지도력에 대한 찬사는 전세계적이었다. 그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그의 적들이 그의 사망시에 보여준 조의(弔意)를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사이공은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을 조상하기 위해 완전 철수하였다. 구엔 반 티우 남베트남 대통령 조차도 호치민에 대한 정중한 조사의 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뉴욕타임즈는 긴 조사(弔辭)에서 정치적 이유로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조차도 호치민에게는 숭배와 경애의 정을 금할 수 없었다고 썼다. 타임지는 그를 표지인물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현재 살아있는 민족주의자 가운데 그만큼 불굴의 정신으로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 버티고 서 있었던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