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서스 3국
캅카스산맥(러시아어) 또는 코카서스산맥(영어)은 캅카스 지방의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산맥으로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이룬다. 최고봉은 해발고도 5,642m의 엘브루스산이다.
캅카스산맥은 크게 북측의 대캅카스산맥와 남측의 소캅카스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캅카스산맥은 러시아 소치 부근에서 아제르바이잔 바쿠에 이르기까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길게 이어지며, 소캅카스산맥은 대캅카스보다 약 100km 남쪽에서 대략 평행하게 이어진다.
캅카스산맥의 주변 지역을 캅카스라고 한다. 캅카스의 언어·민족구성은 다양성이 매우 높으며, 크게 캅카스의 토착민족(조지아인, 압하스인, 아디게인, 체첸인, 인구시인, 레즈긴인, 아바르인, 라크인, 체르케스인, 카바르딘인 등), 인도유럽계 민족(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 오세트인, 쿠르드족 등), 튀르크계 민족(아제르바이잔인, 카라차이인, 발카르인, 쿠미크인, 노가이인)으로 나눌 수 있다.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정복 이후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20세기 동안 소련의 일부였다. 오늘날 북캅카스는 러시아의 일부로 남아 있으며, 남캅카스에는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가 독립국으로 존재하는 한편 일부 지역은 이란, 터키의 영토로 있다.
캅카스 3국은 서아시아 캅카스산맥에 위치한 세 나라로,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3국은 19세기 초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러시아 혁명의 혼란기에 잠시 각국은 독립했으나 1922년 소비에트 연방 결성 때 소련을 이루는 하나의 단위로 통일되어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전까지 이들 3국은 러시아 그리고 러시아 문화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3국은 모두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인 캅카스산맥에 위치하여 지리상으로는 아시아로 분류되지만, 문화적,역사적으로 아시아보다는 동유럽에 더 가깝다.
한편, 종교적으로 조지아는 동방정교(東方正敎),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 정교(正敎),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교이다.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의 연안국이자 남캅카스에 위치한 국가로 수도는 바쿠(Baku, Bakı)이다. 본토 외에 나흐츠반 자치공화국이란 월경지가 있는데 소련 치하의 행정 체계를 그대로 답습했다. 산유국이기 때문에 땅속에서 자연적으로 분출하는 천연가스로 만들어진 불기둥들이 잘 알려져 있다. 열린 바다는 아니지만 세계 최대의 호수인 카스피해와 접하고 있으며 이 바다를 통해 다른 몇몇 국가와 해로로 연결된다. 수도인 바쿠도 카스피해 서쪽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영토의 20% 가량이 지리적으로 동유럽에 속한다. 각종 정치적 국제 기구도 유럽 소속 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다. 고대와 중세에는 그리스 동로마 문화권, 근현대에는 동유럽 문화권에 속해 문화적으로 유럽에 가까운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와 달리 아제르바이잔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페르시아·튀르크 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에 서아시아·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접점이 크다. 그럼에도 아제르바이잔을 오늘날에는 동유럽으로 보는 이유는 19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영향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동유럽에 속한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류 종교는 이슬람인 나라이지만, 세속국가이며, 이슬람 극단주의와 같은 종교적 광신을 적극 규제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인구는 약 1천만명 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란의 소수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인은 약 1500만 명이다. 아제르바이잔 본국보다 이란의 소수민족으로서의 인구가 훨씬 더 많다.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90% 이상은 튀르크계 아제르바이잔인(아제리인)이다.
‘바람의 도시’ 바쿠
바쿠는 한때 실크로드 대상(Caravan)들의 주요 교역로였다. 그러다 석유가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작은 항구도시에서 단숨에 동서양의 문물이 어우러진 화려한 도시가 되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Heydar Aliyev Center)
서울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를 디자인한 이라크계 영국인 여류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한 복합건축물(박물관·갤러리 등이 들어있다)로 1993년부터 2003년까지 대통령을 지낸 ‘헤이다르 알리예프’에게서 이름을 따왔다. 이밖에도 바쿠에는 국제공항 등 그의 이름을 딴 시설들이 많이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2013년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해오고 있는 아들 일함 알리예프가 효심을 발휘했다. (현 대통령은 사업을 하다가 아버지 부름을 받아 대통령직을 인계 받았다.)
바쿠에는 저렇게 독특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는 건물들이 많다. 석유가 고갈될 미래의 먹거리를 두바이처럼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만드려는 계획을 세워서 바쿠 곳곳에 특이하고눈길이 가는 건축물을 세우려고 한다.
‘불꽃 타워’라 부르는 플레임 타워(Flame Tower)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인 불을 형상화한 이 건물은 푸른빛을 띤 세 동으로 이뤄져 있는데 바쿠의 또 다른 ‘랜드 마크’이다.
‘메이든 타워’가 바쿠의 과거라면, 바쿠 어디서든 볼 수 있을 만큼 우뚝 솟아오른 플레임 타워는 바쿠의 현재 그 자체다. 현대적인 도시 느낌이 물씬 나는 세 개의 불꽃 모양으로 된 독특한 외모로 유명하다. 불을 숭배한다고 알려진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Zoroaster)’의 출생지, 그리고 석유와 천연가스가 풍부한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을 상징한다. 또 밤에는 빌딩 전체를 둘러싼 LED 조명이 형형색색으로 바뀌어 살아 있는 불꽃처럼 보인다.
12세기에 지어진 메이든 타워’(Maiden Tower)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요새는 직경 16.5m에 높이가 29.5m인 원통형이며 성벽의 두께는 5m나 된다. ‘메이든’이란 이름은 아제르바이잔의 다른 요새에서도 나타나는데, ‘정복되지 않는다' 또는 ‘확고부동하다’는 뜻을 의미한다. 이름대로 성채는 지금까지 부서지거나 외부 세력에 정복당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일명 ‘소녀의 탑’으로 불리는 이 탑은 12세기 건축된 800년 역사의 방어용 고탑이다.
볼바르 해변공원이 접하고 있는 카스피해는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 사이에 있는 내륙의 바다다. 남쪽으로는 이란고원이 펼쳐지고, 북쪽 러시아의 볼가강과 우랄강에서 민물이 유입된다.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은 해발 –1,023m. 하지만 댐건설과 산업화로 인한 물 사용량 증가 등으로 인해 수심이 계속 낮아지는 중이라고 했다.
카스피 해는 원래 바다가 아닌 ‘호수’였다. 그러다가 호수를 접하고 있는 국가들 사이에 공해·영해 문제가 불거지면서 바다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했다.
연꽃처럼 지어진 쇼핑몰 ‘파크 불바’(현 대통령이 영부인에게 선물. 영부인은 현 부통령)
둥글게 보이는 건물은 초승달을 형상화한 최고급 호텔 ( 이슬람에서 별과 초승달은 알라의 권능을 상징하는 증표이기도 하다.)
2. 고부스탄 암각화
6천이백여개의 암각화가 모여 있는 고부스탄 암각화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세계 최고의 선사시대 유적으로 사라져 버린 옛 삶의 방식에 대한 이례적인 증거라면서. 암각화는 오늘날보다 따뜻하고 습했던 당시의 사냥과 어업에 관한 활동들을 아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옛날 이곳은 카스피 해에 잠겨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바다의 융기로 육지화 되었고, 지진으로 부서지면서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서로 얽히고설켰다. 1930년대 채석장에서 일하던 인부가 그것을 우연히 발견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지구촌 나그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3. 셰키
수도인 ‘바쿠’에서 북서쪽으로 325㎞ 떨어져 있는 셰키(Sheki). 카프카스산맥 남쪽 능선의 해발 675m에 포근하게 자리하고 있다. 작지도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인구 7만의 도시는 낮은 산과 짙은 녹음이 둘러싸고 있어 거대한 숲 속에 들어선 듯 평온하고 싱그럽다.아제르바이잔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마을로 불리고 있다.
‘셰키 역사중심지와 칸의 궁전’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2019년)되었다.
화려함의 극치라는 칸의 여름궁전이다. 궁전은 1762년 칸의 집무실로 건축됐는데 주변에 겨울궁전과 가족 거주지, 하인의 집 등 건물 40여 채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여름궁전만 남아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프레스코와 스테인드글라스로 섬세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곳을 지나는 상인들은 카라반사라이라 부르던 숙소에 머물렀다. 실크로드 무역이 성황을 이루던 당시는 이곳 셰키에 카라반사라이가 다섯 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젠 두 곳만 남아 있다.
참고로 지역 영주들은 낙타가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인 30~40km마다 대상을 상대로 한 숙소를 만들어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면서, 대상들을 자신의 지역으로 통과하도록 했단다.
카라반사라이는 단순히 카라반들이 하룻밤 묵고 가는 장소가 아니었다. 각지의 카라반들이 서로 만나 문물을 교환하는 교역 장소이자 오가는 카라반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징세소(徵稅所) 역할을 했다. 또한 식량과 물을 비롯한 여행 필수품을 제공하거나 파는 공급소이기도 했다.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숙소의 안뜰. 카라반사라이는 2층 구조로, 상인들은 위층(객실의 수가 300개)에서 휴식을 취하고, 타고 온 낙타와 말, 가져온 물건은 아래층에 놓아두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