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적 관념이란 무엇인가?
모든 드라마는 인생이
마치 기승전결로 이루어진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전제하에 드라마는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
물론 어떤 드라마는 끝이 없는 것처럼 드라마를
끝내기는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고
모든 드라마는 결국은 그 결말이 어디로 가느냐에 귀착된다.
(그러나 진정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제대로 자신의 삶을 결착짖지도 못하면서...)
이는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마치 우리 인생이 어떤 결말을
가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모든 드라마는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드라마 작가나 대중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마치 자신의 삶이 어떤 결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에 빠져서 드라마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 어떤 결말이 있기는 하는 것일까?
그러나 드라마 작가나 드라마를 보는 대중이나
마치 우리 인생이 어떤 기승전결의 어떤 형태를 취하고
기어코 그 결말을 보고야 말겠다는 착각아닌 착각과 신념아닌 신념에
빠져서 드라마에 몰입하고 있다.
이런 드라마의 결말과 인생의 결말의 상동성은 무엇인가?
이는 마치 우리가 그 드라마의 결말을 모르면 마치 우리는 그 드라마와
그 드라마에 나온 그 사람의 인생을 모를 것처럼
우리는 드라마의 결말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들듯이,
또한 마찬가지로 어떤 인간이 그 인생의 결말을 모르면
우리가 그 인생에 무지하고,그 인생의 완성을 못본 것처럼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는 드라마처럼 기승전결로서의 결말이 아닌 삶의 진실안에서 결정결말을 가져야한다.)
그래서 모든 드라마의 생명력은 다음은 다음은 어떻게 될까?될까?의 여운을 남기면서,
드라마 관객 대중을 어떻게든 그 드라마의 결말의 종착점까지 어떻게 잘 끌고 가느냐에
달려 있는데,이는 근본적으로 당신의 인생이 다음,다음은 어떻게 될까?될까?라는
관념과 상상에 모든 드라마는 의존하고 있다는 것과 상동성을 갖는다.
당신이 당신의 다음 인생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다면,
왜 굳이 드라마에서 결말을 쫓으면서 대리만족을
취하며 시간을 죽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우리의 행복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고 즐기기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즐겁지 않다면
그는 지금 현재 행복하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을것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인생은 드라마적인가? 극적(시)인가?
아니면 어떤 인생인가? 한번 진지하게 캐묻길 바란다.
그리하면 굳이 드라마처럼 다음,다음을 기대하지 않고도,
바로 현순간에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시간에,사건에 충실하며 살아갈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되면 그 현순간에 현실에 충실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당신의 실존삶이야 말로 정말로 참말로 어떤 드라마 보다도 더 드라마틱 하지 않은가?
정말 시적이지 않은가?그렇지 않은가?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아름답지 않은가!!^^
제9장 왕지식과 왕신비
Chapter 9: Supreme Knowledge and the Big Mystery
/ The Most Confidential Knowledge
/ The Yoga of the Kingly Science & the Kingly Secret
/ Of Religion by the Kingly Knowledge and the Kingly Mystery
제9장 : 지고의 지식과 커다란 신비 or 가장 은밀한 지혜
카르마 요가(실행에 의한 요가)를 닦으면 최고의 주재자(파라메슈바라)를 완전히 깨닫게 되므로 그 결과로 어떻게 혼의 평화 혹은 구원을 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즈나나 비즈나나(정신적 지혜와 경험적 지식)에 대한 해설이 7장에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불멸 불변의 영(靈)의 모습을 묘사해주었고, 또 앞장에서 크리슈나는 신자가 죽는 순간에도 마음속에 최고의 주재자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기 위해서, 파탄잘리 요가에 의하여 정신을 통일한 후, ‘아옴’ (aum)의 거룩한 말을 외어야 한다는 것을 말했다.
그러나 불변의 브라만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는 그 일 자체가 매우 어려운 것이고, 거기다가 정신 통일을 반드시 하여야 한다고 하니, 그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길이다. 그 점을 생각하여서, 크리슈나는 여기 새 가르침으로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특별한 길을 내놓는다. 이 길은 신앙의 걸, 즉 박티 마르가(bhaktimarga)다. 이 길에서 우리는 최고의 주재의 모습을 사랑에 의하여 실현할 수 있고 현실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9장, 10장, 11장, 12장은 그 인식할 수 있는 가지가지의 모습을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 그렇지만 이 신앙의 길은 결코 독립된 어떤 것이 아니고, 7장에서 서술되기 시작한, 카르마 요가를 닦는 데 필요한 즈나나 비즈나나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래서 이 장은 앞에서 한 즈나나 비즈나나의 설명의 계속으로 시작된다. ―틸라크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 너는 샘하지 않는 사람이므로, 내가 네게 가장 신비로운 영적 지혜를, 분별적인 지식과 아울러 일러주리라. 그것을 앎으로 인하여 너는 악에서 벗어나리라.
The Supreme Lord said: I shall reveal to you, who do not disbelieve, the most
profound secret of Self-knowledge and Self-realization. Having known
this you will be freed from the miseries of worldly existence. (9.01)
지고(至高)의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제 의심하지 않는 너에게 진정한 자아 인식과 참된 자아 실현의 가장 심원한 비밀을 드러내 보여주리라. 이 비밀을 깨우치게 되면 너는 세속적인 존재의 고통들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리라.
The Supreme Personality of Godhead said: My dear Arjuna, because you are never envious of Me, I shall impart to you this most confidential knowledge and realization, knowing which you shall be relieved of the miseries of material existence.
1. I shall now declare to thee who does not cavil, the greatest secret, the knowledge combined with experience (Self-realization). Having known this, thou shalt be free from evil.
내가 이제 쓸데없는 이론(異論)을 제기하지 않는 너에게, 가장 위대한 비밀을, 참된 자아 인식 경험과 결합되어있는 지혜를 분명히 말해주리라. 이것을 알아 지님으로써 너는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리라.
샘하지 않는(anasuyave) 비평하기 좋아하지 않는(not cavil, uncensorious), 트집하지 않는, 비의(批議)하는 일 없는(unenvious).
영적 지혜, 분별적 지식에 대해 첫째 것을 형이상적 진리라 한다면 둘째 것은 과학적 지식이다. 우리는 서로 다르면서 서로 보충이 되는 이 두 가지 수단을 다 잘 이용하여야 한다. 진리를 획득하려면 인간의 마음은 직관적으로도, 또 지적으로도 넓어져야 한다. 우리는 지혜와 지식을 다 얻어야 한다. 즉 실재에 뚫고 들어가기도 해야 하고, 만물의 천성을 풍부히 알기도 해야 한다. 철학자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만, 그들의 지식은 간접적인 것뿐이다. 선견자(先見者)가 자기 혼의 밑바닥에서 신의 실재를 느꼈노라고 하는 그것은 직접적인 것이다. ᅳ라다크리슈난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태」(25: 29∼30)
이 절에 있는 아나수야베(샘하지 않는, 비평하기 좋아하지 않는)라는 말이 매우 중요하다. 일반으로 모든 주석가들은, 아무리 큰 학자라 하더라도, 크리슈나가 최고의 신격(神格)이라고 하는 데 대해 샘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크리슈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2. 이것은 왕지식이요 왕신비요 가장 높은 정결이며, 직접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진리이며, 가장 쉬이 행할 수 있고,영원한 것이니라.
This knowledge is the king of all knowledge, is the most secret, is very sacred,
it can be perceived by instinct, conforms to Dharma, is very easy to
practice, and is imperishable. (9.02)
이 지혜는 가장 비밀스럽고 아주 성스러운, 모든 지혜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지혜이니라. 이 지혜는 직관에 의해 바로 인지할 수 있고, 법[眞理]에 잘 들어맞으며, 아주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불멸의 지혜이니라.
This knowledge is the king of education, the most secret of all secrets. It is the purest knowledge, and because it gives direct perception of the self by realization, it is the perfection of religion. It is everlasting, and it is joyfully performed.
2. This is the kingly science, the kingly secret, the supreme purifier, realizable by direct intuitional knowledge, according to righteousness, very easy to perform and imperishable.
왕지식 라쟈비쟈(raja-vidya), 최대 지혜, 지식의 왕.
왕신비 라쟈구얌(raja-guhyam), 최대 신비. 모든 신비의 왕.
‘직접 체험되는’ 이라 함은 토론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직접 체험에 의하여 증명되는 것이다. 이것은 친숙에 의해 되는 지식이지, 서술이나 돌아가는 말, 보고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스스로 빛을 발하면서 제 자리에 있어서 방해하는 장막이 벗겨지기만 하면 우리에게 발견되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최고의 주재는 사람의 성장되고 정화된 직관에 의하여 그 사람의 자아로 발견된다. ―라다크리슈난
3. 오, 파란타파야, 이 길을 믿지 않는 자는 내게 이르지 못하고 다시금 죽음의 세상 길로 돌아가느니라.
O Arjuna, those who have no faith in this knowledge follow the cycle of birth
and death without attaining Me. (9.03)
오 아르쥬나여, 이 법[眞我 認識의 知慧]에 대해 전혀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나에게 이르지 못하여 삶과 죽음의 수레바퀴를 따르게 되리라.
Those who are not faithful in this devotional service cannot attain Me, O conqueror of enemies. Therefore they return to the path of birth and death in this material world.
3. Those who have no faith in this Dharma (knowledge of the Self), O Parantapa (Arjuna), return to the path of this world of death without attaining Me!
파란타파(Parantapa) 대적을 괴롭히는 자, 용자.
왕지식은 화신의 주인 크리슈나와 만유의 근본인 브라만의 일치다. 사람이 지식을 가지고 그 화신을 공경하면 궁극의 깨달음에 이른다. 절대를 직접 명상하기는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아르쥬나는 신앙의 사람이므로 이 비밀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는 해탈을 얻지 못하고 다시 생사유전(生死流轉)의 길로 돌아간다. 요구되는 그 신앙은 구원의 지혜의 실재와, 인간이 거기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음이다. 거룩한 자유에 들어가는 첫걸음은 우리 속에 신성이 내재함을 믿는 일이다. 그 신성이 우리의 존재와 행동을 지지해주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 계시는 그 신 앞에 굴복할 때에 요가 닦는 일은 아주 쉬워진다. ―라다크리슈난
인격적으로 계시는 신을 예배할 것을 이하 석 절에서 권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두 절들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역리(逆理)들은 대주재의 인격적 비인격적 두 면에 다 적용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 무한은 뵈는 것 위에 초월해 선다. 그것은 나타남이면서 나타나 뵈지 않는 것이요, 그러면서도 뵈지 않는 것은 그 속에 있지 않고, 그것을 초월한다. 창조주의 창조로서의 이 우주는 ‘그이’를 나타내기는 하지만, ‘그이’를 그 속에 가지고 있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그 창조보다는 위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모든 것이 진주가 실에 꿰여 있듯이 ‘그이’ 에게 매달려 있기 때문에, 실(絲)이신 ‘그이’는 그 모든 것을 꿰뚫고 있으며 지지하고 있다. 그것들이 ‘그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그것들은 ‘그이’ 안에는 있지 않다. 대주재가 “나는 그것들 속에 있지 않다” 했을 때, 그것은 아마 그것을 싸고 있는 육체적인 형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해 있는 아트만을 가리켜서 한 말일 것이다. 도덕적으로는 물론 간디가 말했듯이, “‘그이’는 모든 예배자의 심정 속에는 계시지만, 비웃는 자들 속에는,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계시지 않는다.” 아트마보다(Atmabodha)가 말했듯이 “아트만은 언제나 어떤 것 속에나 다 계시지만, 모든 것 속에서 빛을 내시지는 않는다. 그것은, 마치 표면을 잘 갈아야 물건이 비치듯이, 맑은 이해 속에서만 빛이 난다”는 경우이다. 아니면, 「코란」경의 말처럼 “내 땅과 내 하늘은 나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내 충성된 종의 심정은 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어거스틴의 말로 한다면, “어떤 것도 완전히 당신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당신께서는 완전히 어디 가나 계십니다”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4. 모든 것은 나의 나타나 뵈지 않는 몸에 의하여 두루 뚫려 있다. 모든 있음이 다 내 안에 있지만 나는 그것들 안에 있지 않느니라.
This entire universe is pervaded by Me, the unmanifest Brahman. All beings
depend on (or remain in) Me (like a chain depends on gold). I do not
depend on them. (See also 7.12) (9.04) ( From a Dvaitic or dualistic view
point, waves depend on the ocean, the ocean does not depend on the
waves. But, from a Advaitic or non-dualistic point of view, as stated in verse
9.05 below, the question of wave abiding in the ocean or the
ocean abiding in the wave does not arise, because there is no wave or ocean.
It is water only. Similarly, everything is a manifestation of
Brahman only. (Gita 7.19))
표명할 수 없는 창조주 '브라만'인 나는 나타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이 우주에 가득 차고 고루 퍼져있는 존재이니라. 금목걸이가 금에 의존하듯, 모든 존재는 나에게 의존하고 내 안에서 살고있지만, 나는 내가 창조한 존재계에 의존하지는 않느니라.
By Me, in My un-manifested form, this entire universe is pervaded. All beings are in Me, but I am not in them.
온 우주는 표명할 수 없는 실재인 '브라만[창조주]'인 나에 의해 두루 충만해 있으니, 모든 존재들은 나에게 의존하고 있고 내 안에 있지만, 나는 존재들에 의존하고 있지 않느니라.
4. All this world is pervaded by Me in My un-manifest aspect; all beings exist in Me, but I do not dwell in them.
COMMENTARY: (From a Dvaitic or dualistic view point, waves depend on the ocean, the ocean does not depend on the waves. But, from a Advaitic or non-dualistic point of view, as stated in verse 9.05 below, the question of wave abiding in the ocean or the ocean abiding in the wave does not arise, because there is no wave or ocean. It is water only. Similarly, everything is a manifestation of Brahman only. : Gita 7.19)
(원저자주)
이 이중적인 관점은 물결은 바다에 의존해 일어나지만, 바다는 물결에 의존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래의 9장 5절에서 언급된 비 이중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의 문제나 파도 속의 들어있는 바다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바다도 파도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의 근원은 오직 물일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창조주 '브라만'의 드러난 모습이다. (7장 19절을 참조하라)
5. 그러나 또 그 있음은 내 안에 있지 않다. 나의 알 수 없는 신비의 능력을 보라. 나의 아트만(自性)은 만유의 원동력이로다. 만유를 지지하는 것은 바로 나지만 내가 그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니라.
And yet beings, in reality, do not remain in Me. Look at the power of My divine
mystery. Though the sustainer and creator of all beings, I do not
remain in them. (In reality, the chain does not depend on gold; the chain is
nothing but gold. Also, matter and energy are different as well as
non-different). (9.05)
실재 속에 존재하고 있지만 하지만 내 속에 실재란 없으니, 보라 이것이 신성한 나의 신비이니라. 비록 내가 만물을 창조주이며 유지하는 자라 하더라도 내가 창조물 속에 남아있지는 않느니라. (실제로 금목걸이가 금에 의존하지는 않지만, 금목걸이란 금에 지나지 않는다. 그처럼 물질과 에너지는 별개지만 마찬가지로 별개가 아닌 것이기도 하다.)
And yet everything that is created does not rest in Me. Behold My mystic opulence! Although I am the maintainer of all living entities and although I am everywhere, I am not a part of this cosmic manifestation, for My Self is the very source of creation.
5. Nor do beings exist in Me (in reality): behold My divine Yoga, supporting all beings, but not dwelling in them, is My Self, the efficient cause of beings.
신비의 능력 요가.
6. 마치 안가는 곳이 없는 저 큰 바람이 언제나 공간에 의지하고 있듯, 그렇듯이 모든 있음이 내 안에 있느니라. 너는 그것을 알라.
Consider that all beings remain in Me (without any contact or without
producing any effect) as the mighty wind, moving everywhere, eternally remains
in space. (9.06)
마치 그 어느 곳에서나 부는 저 큰바람이 늘 허공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그대는 모든 존재들이 (그 어떤 접촉이나 영향을 받아 일어남이 없이도) 늘 내 안에 기대고 있음을 알아야 하리라.
Understand that as the mighty wind, blowing everywhere, rests always in the sky, all created beings rest in Me.
6. As the mighty wind, moving everywhere, rests always in the ether, even so, know thou that all beings rest in Me.
유한의 현상적인 우주의 기원을 절대의 신성 속에서 찾는 이 설명은 그 원천을 그이의 거룩한 신통력에 두고 있다. 최고의 주재는 모든 현상의 원천이지만 그는 조금도 그것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신통력의 요가다. 그가 존재를 창조하지만, 그는 완전히 그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그 안에 거하신다고조차 말할 수 없다. 엄정하게 말할 때 신의 내재(內在)라는 생각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모든 존재가 그의 이중적인 성격에서 나오지만, 그의 보다 높은 자성은 프라크리티의 작용과 관련되어 있지 않는 아트만이므로, 존재가 그이 안에 있지도 않고 그가 그것들 안에 있지도 않다는 말도 역시 진리다. 그것들은 하나면서 또한 서로 따로따로다.
“지바(jiva) 혹은 몸으로 있는 자아는 몸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지지 하고 있기 때문에 아함카라 혹은, 자아 감각에 의하여 끝까지 거기 매달려 있다. 지바와는 달리 나는 모든 있음을 지고 있고 지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안에 남아 있지는 않다. 나는 아함카라 혹은 자아 감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슈리다라
「기타」는 이 세계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통해서 된 것이고, 그 뒤에 위에 앞에 하나님을 가지고 있다.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는데, 하나님은 세계 없이도 조금도 자기에서 덜함이 없이 그대로 계신다. 하나님과는 달리, 세계는 자기 독자의 존재는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한한 것이요, 절대적인 것이 못된다. 가르쳐주는 이는 모든 만물이 다 신이라는 의미의 범신론에는 기울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 밑에 있다는 의미의 범신론을 가지려 한다. 우주 과정은 절대의 완전한 나타남은 아니다. 비록 이 세계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나타남이기는 하지만, 어떤 유한한 과정도 궁극적으로 완전히 절대를 나타낼 수 는 없다. —라다크리슈난
이 명백한 모순의 말들은 최고의 주재자는 무성격이면서 또 성격적이기 때문인 데서 나오는 것이다……이와 같이 하면서 놀라운 자기의 모습을 그려 아르쥬나의 호기심을 자극해 일으켜놓은 다음, 크리슈나는 다시 어떻게 이 우주가 그로 인해 창조되었나 하는 것을 설명하는데, 그것은 7장에서 말한 것과는 약간 다른 것이다. 요가라는 말을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 혹은 방법이라는 뜻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이 요가 혹은 방법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마야(maya)에서 다른 것 아니다. 이 요가는 최고의 주재자에게는, 아니 그의 종들에게까지도, 매우 쉬운 것이기 때문에 그를 요가의 주(Lord of yoga)라고 한다. ᅳ틸라크
에테르(空)는 다섯 원소 중 가장 미묘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가는 것이 대기 혹은 바람이다. 움직이는 대기(안 가는 곳 없는 큰 바람)는 언제나 모든 것을 두루 뚫고 있는 에테르 안에 있다.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접촉도 없고, 대기의 어떤 격동도 에테르에 하등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있음은 ‘그이’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침이 없이 ‘그이’ 안에 있다. ―마하데브 데자이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바람은 불고 싶은 방향으로 불어댑니다……성령으로 난 사람도 누구나 이와 마찬가지입니다……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우리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습니다……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합니다……하나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새로’라는 말은 또 위로부터라는 뜻이 있다. ‘바람’이란 말과 ‘영’이 란 말은 같은 말 곧 푸뉴마다. ‘우리가 알고 있는’이라 한 앎은 경험적인 지식이 아니라 직접적인 체험, 직관의 지식이다. 아들에 사람을 붙여 ‘사람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을 붙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하나다. 초월적인 면을 강조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요, 내재적인 면을 강조하면 사람의 아들이다. ‘외아들’이란 하나, 둘 하는 수의 외가 아니다.「히브리서」첫머리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하나님과 꼭 같은 본성을 갖고”라고 한 뜻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씨로 주어진 아들 곧 내재의 그리스도, 영원한 그리스도 아니고는 우리는 역사적으로 화육(化育)으로 주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 또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계시가 아니고는 우리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씨를 깨워 싹 트게 할 수도 없다. ―함석헌
7. 쿤티의 아들아, 겁 끝에 가면 모든 피조물이 내 바탈 속으로 들어오고, 다시 새 겁이 시작되면 나는 그것들을 다시 지어 보낸다.
All beings merge into My Prakriti at the end of a Kalpa (or a cycle of 4.32
billion years), O Arjuna, and I create (or manifest) them again at the
beginning of the next Kalpa. (9.07)
오 아르쥬나여, 한 겁(劫)의 마지막이 되면 나는 모든 존재들을 내 자성(自性) 속으로 녹여 들이고, 그 다음 겁이 시작되면 나는 존재들을 다시 창조하여 내 보내느니라.
* 칼파(Kalpa, 劫波) : 겁(劫), 오랜 시간, 우주의 생성과 멸망 사이의 아주 긴 시간 (day of Brahma), 43억 2000만년.
O son of Kunti, at the end of the millennium all material manifestations enter into My nature, and at the beginning of another millennium, by My potency, I create them again.
7. All beings, O Arjuna, enter into My Nature at the end of a Kalpa; I send them forth again at the beginning of (the next) Kalpa!
겁(劫) 주기적으로 돌아가는 천년 길이의 시대(8장 17절 참조).
바탈 프라크리티, 자성(自性).
8. 나는 내 바탈 속에 들어 있어 모든 피조물의 무리 전체를 다시금 다시금 나타낸다. 프라크리티의 지배 아래 있는 그것들은 아무 힘도 없다.
Using My Prakriti I create, again and again, the entire multitude of beings that
are helpless, being under the control of (the Gunas of) Prakriti. (9.08)
나는 그 어떤 도움 없이도, 생명의 숨결인 나의 자성(프라크리티 : 自性)을 사용하여, 모든 존재들이 각자 지은 업(業)과 공덕(功德)에 따라 인과응보를 맞추어, 이 모든 수많은 존재들을 거듭 창조해 내느니라.
The whole cosmic order is under Me. Under My will it is automatically manifested again and again, and under My will it is annihilated at the end.
8. Animating My Nature, I again and again send forth all this multitude of beings, helpless by the force of Nature.
바탈 속에 들어 있어 프라크리티를 붙잡아 가지고, 혹은 자성에 의하여.
9. 그러나 가멸음의 소유자야, 이 모든 일들에서 나를 얽어매는 것이 없으니, 나는 언제나 일에 무관심, 무집착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These acts of creation do not bind Me, O Arjuna, because I remain indifferent
and unattached to those acts. (9.09)
오 아르쥬나여, 그렇다 하더라도 이 창조의 행위(카르마의 법칙, 인과응보의 법칙)가 나를 얽매지는 못하나니, 그것은 나는 결코 이러한 행위에 집착하여 물들지 않는 별개의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니라.
TO Dhananjaya, all this work cannot bind Me. I am ever detached from all these material activities, seated as though neutral.
9. These actions do not bind Me, O Arjuna, sitting like one indifferent, unattached to those acts!
오, 아르쥬나여,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나를 옭아맬 수가 없으니, 그것은 내가 그러한 행위에 대해 집착 없는, 전혀 별개의 상태로 머무르기 때문이니라.
가멸음 넉넉함, 부(富).
10. 쿤티의 아들아, 나의 굽어 살핌에 따라 프라크리티는 움직이는, 또 움직이지 않는 이 모든 만물을 지어내고, 또 그로 인하여 이 세계는 돌아가는 것이니라.
The Prakriti or nature, under My supervision, creates all animate and
inanimate objects; and thus the creation keeps on going, O Arjuna. (See also
14.03) (9.10)
오 아르쥬나여, 관리자인 나의 주도아래 순수한 자성(프라크리티 : 自性)은 움직이는 또는 움직이지 않는 모든 만물에게 삶을 주고, 이로 인하여 이 세상이라는 수레바퀴가 돌아가는(Samsara) 것이니라.
This material nature, which is one of My energies, is working under My direction, O son of Kunti, producing all moving and non-moving beings. Under its rule this manifestation is created and annihilated again and again.
10. Under Me as supervisor, Nature produces the moving and the unmoving; because of this, O Arjuna, the world revolves!
나타나 뵈지 않는 자연(성질)이 ‘나타나 뵈지 않는 자아(혼)’에 의하여 비쳐질 때 가지가지의 경계를 갖는 물질적 우주를 낳아놓는다. 그전개의 순서와 성격은 자연 속에 들어 있는 씨에 의하여 결정된다. 다만 ‘거룩하신 자아(혼)’ 만이 그것을 주장할 수 있다.
낱나(個我, ego)는 카르마(業)의 법칙에 매여 있는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몸을 가지고 우주 속에 태어난다.
4장 6절에 이런 말이 있다. ‘거룩하신 이’는 자기의 마야(maya), 곧 ‘아트마마야’(atmamaya)에 의하여서 태어난다고. 인간의 혼은 자기 행동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자연에 속해 있지만 ‘주재자’는 자연을 주장하시는 이이므로 무지 때문에 프라크리티에 몰려다니지 않는다. 어느 쪽에 있어서나 창조의 수단은 마야다. 그러나 거룩하신 이가 태어나시는 경우는 요가마야(yogamaya), 아트마마야, 곧 주재자의 빛과 즐거움이 충만하여 있어 ‘그의’ 지도에 따라 행동하는 프라크리티이고, 인간이 태어나는 경우는 아비쟈마야(avidhyamaya)다. 인간의 혼은 무지에 얽혀 있으므로 프라크리티에 매여 있어서 제 행동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다.
주재자는 그 영이 되고 지도가 되어 창조와 무너짐을 다 주장하기는 하나, 그는 그 속에 버물려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우주적 사건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 일을 하는 자연은 하나님에 속해 있는 것이므로 ‘그이’ 가 그 속에 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의 초우주적인 면에서 생각하면 ‘그이’ 는 우주적인 사물을 초월하시는 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곤함이 없이 우주극의 연출을 하시면서도, 그러면서도 우주 위에 초월해 계시고 그 법칙에서 초연해 계신다. ‘참 나’ (혼)는 자기가 내놓는 우주적 바퀴에 말려들지 않는다. 이루 헬 수 없는 낱나가 되고, 자라고, 애쓰고, 고통하고, 죽으면서, 나고 또다시 나고 하지만, 참 나는 영원히 자유다. 그들은 자기네 행동의 열매를 거두면서 자기네가 과거에 한 일에 얽매이지만, ‘그이’는 언제나 자유다. 이 진화는 우주적 새벽에 시작되어 우주적 저녁에 물러간다.
여기서 크리슈나는 온 우주를 꿰뚫고 만물을 지지하면서도 초월하여 불변하시는 대주재의 참 나를 나타낸다. 아난다기리(Anandagiri)는 창조의 목적은 무엇이냐 하는 의문을 일으켜서는 안된다고 우리에게 경고했다. “우리는 이것(창조)을 주재자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주재자는 사실로 무엇을 즐기시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순수의식, 하나의 단순한 증거일 뿐이다. 또 다른 어떤 즐거워하는 이가 있을 수도 없다. 그것은 또 다른 의식하는 실재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또 창조의 목적이 모크샤(해탈)일 수도 없다. 그것은 모크샤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창조가 주재자의 마야에서 나왔다고 하는 데 대해서는 질문이나 대답을 할 수도 없고 또 할 필요도 없다.「리그베다」 는 말하기를 “누가 능히 이것을 바로 볼 수 있으며, 누가 능히 이 변화무쌍한 창조가 어디로 쫓아났으며 왜 됐다는 것을 말할 수 있으리오”라고 했다. —라다크리슈난
샹카라(Shankara)는, “내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 우주는 끊임없이 움직여가고 있다. 내 마야는 세 구나(三性)로 되어 있어서 움직이는, 또 움직이지 않는 모든 우주를 지어내고 있다”고 했다. ᅳ마하데브 데자이
앞장에서 말한 것에 의하면 인식할 수 있는 우주는 인식할 수 없는 프라크리티에서 나와서 존재하기 시작한 것으로서, 브라마데바(Brahmadeva), 즉 천년시대(kalpa)의 낮이 열리기 시작할 때에 시작된다(8:18). 그러나 최고의 주재자는 각 사람에게 좋고 혹 나쁜 생(生)을 줄 때에 그 사람의 카르마에 따라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리슈나는 여기서 그 자신은 이 카르마의 건드림을 받지 않는다는 것, 즉 다시 말해서,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한다. 지식적인 해설에서는 이 모든 원리들을 단번에 다한 데가 있지만,「기타」에서는 교리 문답식으로 하기 때문에 필요가 생길 때마다 한 제목의 한 부분을 여기서, 혹은 다른 부분을 저기서 다루고 있다. ᅳ틸라크
여기서 분명히 말하는 것은 최고의 주는 물질적 세계의 모든 활동에서 떠나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최고의 지도자로 있다는 것이다. 최고의 주는 최고의 의지로 모든 물질적 나타남의 배경이 된다. 그러나 그 실행은 물질적 자연에 의하여 행해진다. 크리슈나는 또「바가바드기타」안에서 각양각종의 산 실체들을 말하면서, “나는 그 아버지”라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얻기 위해 어머니의 자궁 안에 그 씨를 넣는 것인데, 그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주는 다만 한번 바라봄에 의하여 물질의 자궁 속에 생체의 씨를 쏘아넣는다. 그러면 그것들은 각각 그 임종시의 기원과 행동에 따라 각양각종의 생체들로 태어난다.
태어나는 이 모든 생체들은 최고의 주의 바라봄으로 인해 세상에 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것들은 과거의 행동과 기원에 따라 서로 다른 몸을 가지고 나게 된다. 그러므로 주는 직접으로 그 물질적 창조에 관계되어 있지는 않다. 그는 다만 물질적 자연을 바라봤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물질적 자연은 산 힘을 얻고 만물은 즉시로 창조된다. 그가 물질적 자연을 바라본 것이므로 틀림없이 최고의 주 편에서 활동이 있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그 물질적 우주의 나타남과는 직접으로는 아무 상관도 없다.「스므리 티」(Smriti) 안에서는 이런 비유를 들었다. 어떤 사람 앞에 향기로운 꽃이 있을 때 향기는 그 사람의 냄새 맡음으로 인해 건드림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냄새 맡음과 꽃은 서로 떨어진 것이다. 물질세계와 최고 신성의 인격 두 사이도 마찬가지 관계에 있다. 실지로 ‘그’ 는 이 물질세계와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는 바라봄으로써 창조하고 명령하고 있다. 한마디로, 최고 인격의 감찰하심 없이는 물질적 자연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최고의 인격자는 모든 물질적 작용에서 떨어져 있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11. 내가 사람의 형상을 취하면 어리석은 자는 나를 업신여긴다. 나의 만유의 대주재로서의 초월적인 성격을 알지 못한다.
The ignorant ones, not knowing My supreme natures as the great Lord of all
beings, disregard Me when I assume human form. (9.11)
어리석은 자들은 내가 인간의 형상에 의탁하고있으면, 모든 존재들의 위대한 주님인 초월적인 존재로써의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등한시하느니라.
Fools deride Me when I descend in the human form. They do not know My transcendental nature as the Supreme Lord of all that be.
11. Fools disregard Me, clad in human form, not knowing My higher Being as the great Lord of (all) beings.
12. 희망도 없이, 행동함도 없이, 지식도 없이, 생각 없는 그들은 귀신과 악마의 현혹적인 성격에 빠져 있다.
The ignorant persons having false hopes, false actions, and false knowledge,
possess the delusive (or Taamasika) qualities (See 16.04-18) of fiends and
demons. (9.12)
그런 무지한 자들은 헛된 희망과 허망한 행위와 그릇된 지식과 아무런 생각도 없이, 다만 귀신[羅刹]과 악마[阿修羅]의 미혹적인 무명(無明)속에 빠져있는 자들이니라.
Those who are thus bewildered are attracted by demonic and atheistic views. In that deluded condition, their hopes for liberation, their fruitive activities, and their culture of knowledge are all defeated.
12. Of vain hopes, of vain actions, of vain knowledge and senseless, they verily are possessed of the deceitful nature of demons and undivine beings.
귀신 나찰(羅刹), 타마스(闇性)의 지배를 받아 잔혹한 행동을 하는 것들.
악마 아수라(阿修羅). 라쟈스(動性)의 지배를 받아 탐욕을 부리는 것들.
13. 그러나 프리다의 아들아, 위대한 혼을 가진 자는 나의 거룩한 성격에 귀의하여 마음의 빗나감 없이 나를 섬기니, 내 가 만유의 불멸의 근원임을 알기 때문이니라.
But great souls, O Arjuna, who possess divine qualities (See 16.01-03) know
Me as the (material and efficient) cause of creation and imperishable,
and worship Me single-mindedly. (9.13)
오, 아르쥬나여, 하지만 위대한 영혼을 깨달아 지닌 사람은 나의 이 거룩한 프라크리티(요가 마야와 아트마 마야)를 알기 때문에, 내가 모든 존재에 있어서 그 불멸의 근원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흔들림 없는 확고한 마음으로 나를 섬기느니라.
O son of Prtha, those who are not deluded, the great souls, are under the protection of the divine nature. They are fully engaged in devotional service because they know Me as the Supreme Personality of Godhead, original and inexhaustible.
13. But the great souls, O Arjuna, partaking of My divine nature, worship Me with a single mind (with the mind devoted to nothing else), knowing Me as the imperishable source of beings!
위대한 혼 마하트마(mahatma).
14. 끊임없이 나를 찬송하며, 굳세게 맹세를 지켜 노력하며, 언제나 요가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은 신념을 가지고 내 앞에 엎드리어 나를 예배한다.
Persons of firm resolve worship Me with ever steadfast devotion by always
singing My glories, striving to attain Me, and prostrating before Me. (9.14)
그는 언제나 나의 영광을 노래하며,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헌신적으로 섬기며 명상을 통하여 나와 하나되기만을 정진할 뿐이니라.
Always chanting My glories, endeavoring with great determination, bowing down before Me, these great souls perpetually worship Me with devotion.
14. Always glorifying Me, striving, firm in vows, prostrating before Me, they worship Me with devotion, ever steadfast.
15. 또 다른 사람들은 지식의 희생을 마쳐서 나를, 혹은 홀로 하나인 것으로, 혹은 둘인 것으로, 혹은 여럿인 것으로 간 곳마다에서 볼 수 있는 이 나를 예배한다.
Some worship Me by knowledge sacrifice. Others worship the infinite as the
one in all (or non-dual), as the master of all (or dual), and in various other
ways. (9.15)
또 다른 사람들(즈나나 요기들)은 그 지식을 바쳐 나를 여러 가지 형태로, 즉 유일하게 혹은 둘인 것으로 혹은 여럿인 것으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 나를 섬기느니라.
Others, who engage in sacrifice by the cultivation of knowledge, worship the Supreme Lord as the one without a second, as diverse in many, and in the universal form.
15. Others also, sacrificing with the wisdom-sacrifice, worship Me, the all-faced, as one, as distinct, and as manifold.
샹카라는 여기 세 종류의 예배자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라마누쟈와 마드바는 한 종류를 말했을 뿐이라고 하며, 틸라크는 비이원론자와 이원론자와 제한 일원론자를 말하고 있다고 한다. ―라다크리슈난
나는 간디지의 번역을 글자 그대로 옮겼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간디지는 분명하게 샹카라와 그밖의 사람들을 따르고 있지만, 나는 힐(Hill)과 한가지로 거기 대해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거기 선택 접속사가 없고, 또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의 다양성에 집중시키는 것이 도저히 ‘지식의 희생’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이미(4:10) 크리슈나가 자기는 모든 존재와 하나인 동시에 또 그것에 얽혀들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사람들이 그를 예배하는 것은 바로 이 지식, 즉, 모든 존재와 하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또 그것에서는 떨어져 있다는 생각, 두 가지를 다 가지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 절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14절은 인격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이고, 15절은 비인격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비인격적 예배자는 ‘그’를 하나로, 즉, 내재하는 것으로도 보고 떨어진 것으로, 즉, 초월적인 것으로도 본다. 그래서 그것을 6장에서부터 8장까지에서 설명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차라리 이렇게 번역하고 싶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지식의 희생을 가지고 나를, 그들이 가는 곳마다에서 볼 수 있는 이 나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혹은 내재적으로, 혹은 초원적으로 예배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것조차도 임시적으로 하는 설명일 뿐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신앙적인 사람과 비신앙적인 사람에 대하여 여기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 다음 16장에서는 더 자세하게 전개될 것이다. 전에도 말한 것과 같이, ‘지식의 희생’이란 “최고 주재자의 형상을 지식으로써 이해함으로써 해탈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최고 주재자에 대한 지식은 여러 가지로 될 수 있다. 이원론적으로 혹은 비이원론적으로 등등. 그러므로 지식의 희생도 여러 가지로 될 수 있다. 그래서 15절에서는, 지식의 희생은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최고의 주재자는 모든 면으로 보시는 얼굴이기 때문에 ‘그’는 온갖 희생을 다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종합 적인 기초위에서” “분석적인 기초 위에서” 하는 말들로 보아 매우 오랜 옛날부터 이러한 사상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물론 후대에 와서는 이원론이니 비이원론이니 하는 체계들이 생기기는 했지만, 크리슈나는 이제 이 절에서 언급한 최고 주재자의 하나이신 성격과 여럿이신 성격을 더 자세히 다루고, 나아가서 또한 여럿 속에 어떻게 하나 됨이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 설명한다. —틸라크
16. 나는 의식이요, 나는 희생이요, 나는 조상 제사요, 나는 약초요, 나는 진언(眞言)이요, 나는 맑아진 버터요, 나는 불이 요, 나는 살라드림이다.
I am the ritual, I am the Yajna, I am the offering, I am the herb, I am the
mantra, I am the Ghee, I am the fire, and I am the oblation. (See also 4.24)
(9.16)
나는 베다 경전의 의식행위요, 나는 희생이요, 나는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요, 나는 약초요, 나는 진정한 말(眞言)이요, 나는 깨끗하게 걸러진 버터요, 나는 불(火)이요, 또 나는 바침(布施)이니라.
But it is I who am the ritual, I the sacrifice, the offering to the ancestors, the healing herb, the transcendental chant. I am the butter and the fire and the offering.
16. I am the Kratu; I am the Yajna; I am the offering (food) to the manes; I am the medicinal herb and all the plants; I am the Mantra; I am also the ghee or melted butter; I am the fire; I am the oblation.
의식 크라투(), 공양(供養),「스루티」(Srutis, 들은 것, 직접 받은 계시)에서 말하는 야즈나(yajna)
희생 야즈나.「스므리티」(Smriti, 기억한 것)에서 말하는 야즈나.
조상 제사 수바다(svadha), 조상제사에서 바치는 음식.
약초 아우샤다(aushadha), 희생으로 드리기 위해 준비한 식물성 음식.
맑아진 버터(ajyam) 양념으로 쓰이는 녹인 버터.
크라투와 야즈나는 본래 같은 뜻의 말이었는데, 후에 와서 야즈나를 가정에서 섬기는 여러 신들에 대하여 씀에 따라 그 의미가 넓어져서, 불숭배, 나그네 대접, 숨조절, 기도문 윔, 그밖에 여러 가지 의식 행함에 쓰이게 됐고, 크라투는 변천이 없었다……그러기 때문에 샴카라바샤(Samkarabhasya)에서는 여기 쓰인 크라투를「스루티」에서 말하는 야즈나의 뜻으로 취해야 한다고 한다. ―틸라크
17. 알지어다, 나는 이 세계의 아버지요, 어머니요, 지지하는 자요, 조상이다. 또한 나는 알아야 하는 대상이요, 정결케 하는 자요, ‘아옴’ 이다. 또 나는「리그베다」요,「사마베다」요, 「야쥬르베다」다.
I am the supporter of the universe, the father, the mother, and the
grandfather. I am the object of knowledge, the purifier, the sacred syllable OM,
and also the Rig, the Yajur, and the Sama Vedas. (9.17)
알지어다. 나는 이 세계의 아버지요, 어머니요, 그 할머니로다. 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지식의 대상이요, 모든 것을 정화시키는 자요, 나는 옴(Aum)이라는 거룩한 소리이다. 그리고 또 나는 리그 베다요, 사마 베다요, 야주르 베다이니라.
I am the father of this universe, the mother, the support and the grandsire. I am the object of knowledge, the purifier and the syllable om. I am also the Rg, the Sama and the Yajur Vedas.
17. I am the father of this world, the mother, the dispenser of the fruits of actions, and the grandfather; the (one) thing to be known, the purifier, the sacred monosyllable (Om), and also the Rig-, the Sama- and Yajur Vedas.
역자주 :
리그 베다(Rig Veda) : 詩句의 베다, 찬미가에 대한 지식이 들어있는 경전
사마 베다(Sama Veda) : 詩歌의 베다, 노래에 대한 지식이 들어있는 경전
야주르 베다(Yajur Veda) : 제물 봉헌사의 베다, 제사 법에 대한 지식이 들어있는 경
18. 나는 궁극이요, 붙드는 자요, 주요, 증거요, 거처요, 피난처요, 친한 벗이다. 나는 본원이며, 종멸(終滅)이며, 기초며, 안식처며, 씨며, 불멸이다.
I am the goal, the supporter, the Lord, the witness, the abode, the refuge, the
friend, the origin, the dissolution, the foundation, the substratum, and the
imperishable seed. (See also 7.10 and 10.39) (9.18)
나는 지극히 높으신 이(至高者)의 최종 목표요, 이 세계의 지지자요, 주인이요, 나는 원인이며 결과이며 안식처이며 불멸의 씨앗이니라.
I am the goal, the sustainer, the master, the witness, the abode, the refuge, and the most dear friend. I am the creation and the annihilation, the basis of everything, the resting place and the eternal seed.
18. I am the goal, the support, the Lord, the witness, the abode, the shelter, the friend, the origin, the dissolution, the foundation, the treasure-house and the imperishable seed.
19. 나는 열을 준다. 또 비를 거두고 주는 것도 나다. 나는 죽지 않음이요 또 죽음이다. 아르쥬나야, 나는 있음이요 또 안 있음이니라.
I give heat, I send as well as withhold the rain, I am immortality as well as
death, I am also both the Sat and the Asat, O Arjuna. (Brahman is
everything, See also 13.12) (9.19)
오 아르쥬나여, 나는 태양으로 열을 주는 이요, 나는 비를 머금고 내리게 하는 자요, 또 거두는 자요, 나는 영생이요, 또 죽음이니라. 또한 나는 우주적 존재미면서, 절대적 존재이니라.
TO Arjuna, I give heat, and I withhold and send forth the rain. I am immortality, and I am also death personified. Both spirit and matter are in Me.
19. (As the sun) I give heat; I withhold and send forth the rain; I am immortality and also death, existence and non-existence, O Arjuna!
있음 사트(sat), 유(有).
안 있음 아사트(asat), 비유(非有).
사트는 절대적 실재, 아사트는 우주적 존재, 지극히 높으신 이는 두 가지 다다. ‘그’가 나타나시면 있음이요 아니 나타나시면 안 있음이다.
라마누쟈는 사트는 현재의 존재요 안 있음은 과거와 미래의 존재라고 “설명한다. 말하는 주지는, 지극히 높으신 주는 우리가 어떤 형식으로 예배를 하거나간 우리 기도를 다 들어주신다는 뜻이다. ―라다크리슈난
이 역리적인 말의 근본이 되는 본문은 유명한「리그베다」의 나사디야 수크타(Nasadiya Sukta)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때에 아사트도 사트도 없었다.” 그 이후 만유의 맨첨은 어떤 때는 사트로 어떤 때는 아사트로 설명되어, 거기서부터 ‘아사트’ ‘사트’ 는 시작됐다. 예를 든다면「타이 티리야 우파니샤드」(Taittiriya Up.) 2장 7절에는 “맨첨에 ‘아사트’가 있어서, 거기서 ‘사트’가 나왔다” 했고,「챤도갸 우파니샤드」(Chandogya Up.) 6장 2절에는 “맨첨에는 참으로 모든 것이 ‘사트’였고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했다. 맨첨을 아사트라 했을 때는 그것은 존재(나온다거나 된다는 의미임) 이전 상태를 강조하여 말하는 것이고, 그것을 사트라 했을 때는 실재의 양상, 즉 그것만이 참이고 그밖의 모든 것은 그것 때문에 있게 된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하는 것이다.「기타」는 그 두 가지 생각을 다 통합해서 말한다. 그리고「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Brihad-aranyaka Up.)에 보면 죽음을 만물의 기원으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죽지 않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있음, 안 있음에 대한 다른 말일 뿐이다. 한말로 해서. 하나님은 모든 상대적인 것의 총합이요 온갖 반대를 다 결합하는 이이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대로 “브라만은 진실로 두 모습을 가지고 있다. 즉, 구체적인 것과 구체적 아닌 것, 죽음과 안 죽음, 움직임과 가만 있음, 이것과 저것, 그것은 모든 실재의 실재다. 모든 것이 다 실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궁극의 실재다. —마하데브 데자이
최고의 주재자들의 모습을 이런 식으로 그리는 것이 10장, 11장, 12장에 가서 더 자세하게 나온다. 그 둘의 서로 다른 점은, 여기서는 단순히 그 모습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 특히 주장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최고의 주재와 모든 피조물의 관계는 아버지, 어머니, 친구 등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런 시점에서 볼 때 이 19절의 사트, 아사트 하는 말은 또 선, 악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17장(26~28절)에 한번 그렇게 쓰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말들의 보통 의미로 한다면 사트는 ‘불멸’, 아사트는 ‘가멸’(可滅)의 뜻으로 쓰여 있다 해야 할 것이다……「기타」에서는 사트는 최고 주재자에, 아사트는 보이는 이 세계에 쓰고 있다. 말의 차이는 있지만, 사트, 아사트를 동시에 쓸 때는 그것은 분명히 최고 주재자와 보이는 세계의 둘을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사트와 아사트가 다 최고주재자의 모습이란 것을 밝히기 위하여는, 사람들은 말의 차이에 따라 이것은 사트다 저것은 아사트다 하겠지만, “나는 사트인 동시 또 아사트다” 한 말을 생각하여, 거기 분명하게 정의는 아니하여도, 그 뜻을 밝힌 것이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틸라크
20. 세「베다」를 통하고, 소마 즙을 마셔 죄에서 깨끗해짐을 얻은 사람들이 희생을 바쳐 나를 공경하며, 하늘 위에 오르기를 원한다. 그들은 거룩한 인드라의 나라에 올라 하늘에서 신들의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The knowers of the three Vedas and the drinkers of the juice of Soma (or
devotion), whose sins are cleansed, worship Me by Yajna for gaining
heaven. As a result of their good Karma they go to heaven and enjoy celestial
sense pleasures. (9.20)
세 가지 베다서에 정통한 사람들은 소마즙(제사에 쓰이는 일종의 환각음료)을 마심으로써 자기 죄를 깨끗이 하고, 헌신적으로 나를 섬기며 천국에 오르기를 원하느니라. 그리하여 인드라의 거룩한 세계에 이르러 천상의 쾌락을 누리게 되느니라.
Those who study the Vedas and drink the soma juice, seeking the heavenly planets, worship Me indirectly. Purified of sinful reactions, they take birth on the pious, heavenly planet of Indra, where they enjoy godly delights.
20. The knowers of the three Vedas, the drinkers of Soma, purified of all sins, worshipping Me by sacrifices, pray for the way to heaven; they reach the holy world of the Lord of the gods and enjoy in heaven the divine pleasures of the gods.
‘세「베다」를 통한 사람’ 이란 삼명(三明) 곧「리그」,「야쥬르」,「사마」의 세 베다를 공부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은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다.
‘소마 즙’ 지금은 알 수 없어진 소마(soma)라는 식물의 즙인데 옛날 베다 종교의식에서는 반드시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 줄기를 맷돌로 눌러 짠 다음 양털에 걸러 물과 우유를 섞어서 쓴다. 먼저 신에게 바친 다음 남은 것은 승려와 공양자가 마신다. 그것이 그렇게 소중한 여김을 받았던 것은 그 가지는 환각적인 흥분 작용 때문이었다. 소마를 인격화하여 식물의 왕이라 했고, 병을 고쳐주고 제물을 가져다주는 이로 믿었다.
소마 숭배는 옛날 이란 사람들에게 있었던 하오마(haoma) 숭배와 서로 같은 점이 많고, 고대 인도유럽어족에게 공통되었던 신앙으로 보인다. 하오마도, 소마도 산에 나는 식물이었지만, 그 진정한 기원은 하늘에 있으며 독수리가 그것을 지상으로 가져왔다고 믿었다. 소마를 눌러 짜는 것을 모든 생명을 낳고 자라게 하는 비에다 붙여서 생각했다. 후대에 와서는 소마를 달로 생각하여 신들이 그것을 마시면 줄어버렸다가 다시 불어난다고 했다. —「대영백과사전」
‘인드라’(Indra)란 베다 시대 신들의 우두머리, 전쟁을 좋아하는 전형 적인 아리안 신으로서 모든 대적을 정복하는 그의 힘은 희생으로 바치는 소마를 마신 데서 나왔다고 믿었다.
21. 그들은 광대한 천상계를 누리다가, 그 공덕이 다하면, 다시 인간세상으로 내려온다. 그와 같이 하여 세「베다」의 교훈을 따라 애욕을 쫓는 자들은 생사의 바퀴를 왔다 갔다 함을 얻을 뿐이니라.
Having enjoyed the wide world of heavenly sense pleasures they return to the
mortal world upon exhaustion of their good Karma (or Punya). Thus
following the injunctions of three Vedas, the fruitive workers take repeated
birth and death. (See also 8.25) (9.21)
그런 그들은 천상에서 기쁨을 누리고 살다가 그 공덕이 다하면 다시 생사가 있는 인간세상으로 떨어지느니라. 그러므로 세 가지 베다의 형식을 확실히 지키며 복락을 원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생사의 바퀴에서 왔다 갔다 할 뿐이니라.
When they have thus enjoyed vast heavenly sense pleasure and the results of their pious activities are exhausted, they return to this mortal planet again. Thus those who seek sense enjoyment by adhering to the principles of the three Vedas achieve only repeated birth and death.
21. They, having enjoyed the vast heaven, enter the world of mortals when their merits are exhausted; thus abiding by the injunctions of the three (Vedas) and desiring (objects of) desires, they attain to the state of going and returning.
스승은 여기서 규정된 의식을 행함으로써 죽은 후에 천상의 복락을 얻는다는「베다」의 교훈에 대하여서 그것을 가지고는 최고의 목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런 사람들은 아직도 카르마의 법칙에 매여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도 애욕, 즉 사랑을 사랑함(kama-kamah)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도 자기중심적이요 따라서 아직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 우주과정 속에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우리가 천상의 갚아줌을 받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받기는 하겠지만, 우리가 인생의 진정한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이상, 우리는 이 생사의 세계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인생이란 불완전한 물질적인 데서 거룩한 영적인 데로 자라 나갈 수 있는 하나의 기회다. 이 세상 것이거나 장차 오는 천당의 것이거나 간, 쾌락을 찾고 있는 한은,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의식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22. 그러나 다른 아무것도 없이 다만 나만을 생각하며, 나를 예배하여 항상 전념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소득의 안전을 가져다주리라.
To those ever steadfast devotees, who always remember or worship Me with
single-minded contemplation, I personally take responsibility for their
welfare. (9.22)
하지만 오직 나만을 섬기며, 생각하며, 언제나 나에게 헌신하는 사람에게, 나는 그가 얻지 못한 것은 얻게 해주고, 이미 얻은 것은 온전히 지니게 해줄 것이니라.
But those who always worship Me with exclusive devotion, meditating on My transcendental form - to them I carry what they lack, and I preserve what they have.
22. To those men who worship Me alone, thinking of no other, of those ever united, I secure what is not already possessed and preserve what they already possess.
‘소득(所得)의 안전’ (yoga-kshema)이란 얻지 못한 것을 얻게 하고, 이미 얻은 것을 온전케 함을 이른다.
이와 같이 참된 요기의 틀림없는 세 가지 표적이 있다. 평등심과 행동의 숙련과 신앙심이다. 요기가 되려면 이 세 가지가 완전히 조화되어 있어야 한다. 신앙심 없이 평등심은 있을 수 없고, 평등심 없이 신앙심이 있을 수도 없으며, 행동의 숙련이 없이는 신앙도 평등심도 거짓 꾸밈에 지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간디
나는 이미, “그들이 얻지 못한 것을 얻게 하고 그 얻은 것을 지켜준 다” 대신, (문법적으로는 그것이 충실하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얻게 한다”라고 했다.「마태」6장 33절의 “그러나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그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주시리라”를 참 고하라. 또,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있는 말을 보라. “그는 너를 위해 준비해주실 것이요, 모든 일에 있어 너의 신실한 대리인이 되실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사람을 의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스승은 여기서「베다」의 길은 최고의 경지를 향해 정진하는 자에게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올무가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자기 신자의 모든 짐과 걱정을 다 져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하여서는 다른 모든 사랑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그의 자비 앞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기만 하면 그는 우리의 모든 근심과 슬품을 다 져주신다. 우리는 그의 구원의 돌보심과 힘주시는 은혜에 매달릴 수 있다. ―라다크리슈난
라비아(Rabia)를 보고 누가 묻기를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했더니, 그녀는 “그렇습니다” 대답했다. 다시 “당신은 악마를 미워하십니까?” 했더니 그녀는 대답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마를 미워할 겨를이 없습니다. 내가 꿈에 예언자를 만났는데, 그가 내게 말하기를 ‘오 라비아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해서 나는 대답하기를 ‘오, 하나님의 사도시여, 누가 감히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 마음을 온통 점령해버렸기 때문에 제 가슴속에는 다른 어떤 것을 사랑도 미워도 할 여지가 없습니다, 했습니다” 했다. ―라다크리슈난
23. 쿤티의 아들아, 비록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도, 온전한 믿음으로 하는 이상, 그들도 나만을 공경한 것이니라, 바른 길을 따라 한 것은 아니라도.
O Arjuna, even those devotees who worship demigods with faith, they too
worship Me, but in an improper way. (9.23)
오 아르쥬나여, 혹시 사람들이 다른 신을 믿으며, 그 신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섬기더라도, 그것이 비록 잘못된 지식에서 행한 것일지라도, 그들 또한 유일자(唯一者)인 나에게 그들 나름대로 희생하고 있는 것이니라.
Those who are devotees of other gods and who worship them with faith actually worship only Me, O son of Kunti, but they do so in a wrong way.
23. Even those devotees who, endowed with faith, worship other gods, worship Me only, O Arjuna, but by the wrong method!
「기타」의 저자는 하늘 각 방면에서 오는 빛을 다 환영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빛은 빛이기 때문에 모든 방면을 비칠 권리가 있다. ―라다크리슈난
어떤 신을 붙잡았거나간 그것은 최고 주재자의 한 가지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원리는 아주 오랜 옛적의 베다 종교에서부터 널리 퍼져 있었다. 예를 든다면「리그베다」에는 이런 말이 있다. “최고의 주재는 하나이지만 성자들은 그에게 아그니(Agni)니, 야마(Yama), 마타리슈바(Matarishva)니 하는 가지가지의 이름을 붙여드렸다.” 그리고 그것과 일치해서, 다음 장에 최고의 주재자는 한 분이지만 그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또「마하바라타」안에도 네 가지의 신자 중에 고요한 가운데 행동하는 이가 가장 뛰어난 신자라는 것이 밝혀져 있다. 그런 다음,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즉, “브라마데바(Brahmadeva)나 시바, 그밖의 어떤 신을 섬기는 자들도, 결국에 가서는 내게 이르고 만다.” 그리고 그 사상이「바가바타 푸라나」(Bhagavata Purana) 속에도 받아들여져서, “여러 신들이나 조상들이나 지도자, 나그네, 브라만들, 암소 등을 섬기는 사람들도 간접으로는 오직 비슈누만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바가바타(비슈누 신을 섬기는 바이슈나바 신자들이 자기네의 신을 존경하여서 흔히 부르는 칭호)의 종교가 그와 같이 정성스런 신앙을 중심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 신의 가지가지 형상의 상징은 사소한 문제로 아는 데도 불구하고, 또 다른 말로 한다면, 예배의 형식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신앙은 오직 하나 최고의 주재자가 있을 뿐이라고 하는데도, 그 바가바타 종교와 시바 신앙(Saivism) 이 서로 싸운다는 것은 기막힌 일이다. 크리슈나는 한 걸음 나아가 어떤 신을 섬겼든간 예배는 결국 최고 주재자에 의해 받아지는 것이 참이지만, 예배자들이 하나님은 하나이시라는 것을 모르고 그 구원의 길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거룩하신 주 자신이 행동의 열매(果報)를 주신다는 것이다. —틸라크
24. 나는 일체의 희생을 받는 자요, 또 그 주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내 참 바탈에서 알지 못하고, 그러므로 마침내는 멸망하느니라.
Because I alone am the enjoyer of all Yajna, and the Lord. But, people do not
know My true transcendental nature. Therefore, they fall (into the
repeated cycles of birth and death). (9.24)
왜냐하면, 나는 모든 희생을 받는 자요, 또 그 희생을 주는 자요, 그 희생을 즐기는 자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그들은 실재 속의 참 모습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 또다시 이 세상에 떨어지고 마느니라.
I am the only enjoyer and master of all sacrifices. Therefore, those who do not recognize My true transcendental nature fall down.
24. (For) I alone am the enjoyer and also the Lord of all sacrifices; but they do not know Me in essence (in reality), and hence they fall (return to this mortal world).
25. 천신들을 섬기는 자는 천신들께로 가고, 조상을 섬기는 자는 조상께로 가고, 귀신을 섬기는 자는 귀신에게로 가고, 나를 예배하는 자는 내게로 오느니라.
Worshippers of the demigods go to the demigods, the worshippers of the
ancestors go to the ancestors, and the worshippers of the ghosts go to the
ghosts, but My devotees come to Me (and are not born again). (See also
8.16) (9.25)
귀신들을 믿는 사람은 귀신들에게로 가고, 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그들의 조상에게로 가고, 영(靈)을 섬기는 사람은 영(靈)들에게 갈 것이니라. 이와 같이 나를 섬기는 사람은 나에게 올 것이니라.
Those who worship the demigods will take birth among the demigods; those who worship the ancestors go to the ancestors; those who worship ghosts and spirits will take birth among such beings; and those who worship Me will live with Me.
25. The worshippers of the gods go to them; to the manes go the ancestor-worshippers; to the Deities who preside over the elements go their worshippers; My devotees come to Me.
인간 성장의 갖가지 단계에서 사람들은 빛나는 천신이나, 죽은 사람의 영이나, 심령계의 영들을 섬긴 일이 있었으나 그것은 다 최고자의 제한된 형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무한히 향상하는 인간의 혼에 신비의 평화를 줄 수는 없다. 예배의 결과는 예배하는 대상 속에 녹아듦인데, 유한한 대상이면 유한한 결과를 줄 수밖에 없다. 어떤 신앙도 가장 귀한 상급을 받는 법이다. 낮은 신앙은 낮은 상급을 받겠지만 최고자를 믿는 신앙은 최고의 상급을 받는다. 모든 진실된 종교적 신앙은 최고의 신성을 향한 찾음이다. —라다크리슈난
오직 하나이신 최고의 주재자가 만유 속에 충만해 있지만, 예배의 결과는 받는 자의 신앙의 정도에 따라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상급을 주시는 것은 그 신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최고의 주재자가 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처음에는 최고의 주재자를 부분적으로 예배하는 사람의 이르는 지경을 말하고, 나중에는 복되신 주 하나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자만이 참으로 복되신 주 속에 빠져든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복되신 주는 이제 신앙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 즉 그는 신자가 자기에게 바치는 그 물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신심과 헌신만을 보신다는 것을 말한다. ―틸라크
26. 누구나 믿는 마음을 가지고 나에게 잎새 하나, 꽃 한 송이, 과일 한 알, 혹은 물 한 잔을 바친다면 그 사랑과 경건을 나는 받을 것이다.
Whosoever offers Me a leaf, a flower, a fruit, or water with devotion; I accept
and eat the offering of devotion by the pure-hearted. (9.26)
만일 그 누구든지, 진실된 사랑과 헌신으로, 만약 나에게 잎새 하나, 꽃 한 송이, 과일 한 알, 혹은 물 한잔을 바친다면, 나는 그 사랑과 순수한 마음을 모두 받을 것이니라.
If one offers Me with love and devotion a leaf, a flower, fruit or water, I will accept it.
26. Whoever offers Me with devotion and a pure mind (heart), a leaf, a flower, a fruit or a little water - I accept (this offering).
바치는 물건이 아무리 빈약한 것이라도, 사랑과 정성으로 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신다. 최고자에 이르는 길은 깊고 묘한 형이상적인 것이나 번잡한 의식에 있지 않고, 오직 몸바침에 있다. 잎새, 꽃, 열매, 물은 그것의 상징이다. 필요한 것은 정성된 심정이다. ―라다크리슈난
우리가 섬기는 것은 말구유 속에 계시는 주님이다. 우리의 섬김을 받으시는 이는 그다. ―간디
27. 무슨 일을 하거나, 무엇을 먹거나, 무엇을 바치거나, 무엇을 보시하거나 또 어떤 고행을 하거나, 오, 쿤티의 아들아, 너는 그것을 내게 희생하는 것으로 알고 하여라.
O Arjuna, whatever you do, whatever you eat, whatever you offer as oblation
to the sacred fire, whatever charity you give, whatever austerity you
perform, do all that as an offering unto Me. (See also 12.10, 18.46) (9.27)
오 '쿤티'부인의 아들 아르쥬나여, 네가 무엇을 행하거나, 또 무엇을 먹거나, 또 무엇을 보시하거나, 또 어떤 고행을 행하더라도, 너는 그것을 나에게 바치는 것으로 알고 행하도록 하여야 하느니라.
Whatever you do, whatever you eat, whatever you offer or give away, and whatever austerities you perform -- do that, O son of Kunti, as an offering to Me.
27. Whatever thou doest, whatever thou eatest, whatever thou offerest in sacrifice, whatever thou givest, whatever thou practiseth as austerity, O Arjuna, do it as an offering unto Me!
「고린도전서」10장 31절에 보면,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그밖에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라는 말이 있다. ―마하데브 데자이
28.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좋다 언짢다의 행동의 열매에 얽어매임에서 벗어날 것이고, 네 마음을 굳건히 세워 내버림의 길을 닦음으로써 너는 내게 이를 수 있느니라.
By this attitude of complete renunciation (or Samnyasa-yoga) you shall be
freed from the bondage, good and bad, of Karma. You shall be liberated,
and come to Me. (9.28)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선과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모든 행동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니라. 만일 네 마음을 언제나 무소유의 요가로써 나와 하나되게 한다면 분명히 너는 나에게 도달할 것이니라.
In this way you will be freed from bondage to work and its auspicious and inauspicious results. With your mind fixed on Me in this principle of renunciation, you will be liberated and come to Me.
28. Thus shalt thou be freed from the bonds of actions yielding good and evil fruits; with the mind steadfast in the Yoga of renunciation, and liberated, thou shalt come unto Me.
이로써 보면, 복되신 주에게 몸을 바친 사람일지라도 하나하나의 행동을 크리슈나에게 바치는 정신으로 할 것이요, 또 행동을 내버려서도안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27절, 28절 두 절의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크리슈나는 3장에서 이미 아르쥬나보고 “네 모든 것을 내게 맡기고(내버리고)……싸워라!” 했고, 5장에서 다시 말하기를“자기의 모든 행위를 브라만에게 바치고 집착을 떠나 행동하는 자는 죄에 물듦이 없다” 했다.「기타」에 의하면 이것이 진정한 내버림이다. 그리고 모든 행동을 이렇게 하는 사람, 즉행동의 열매를 바라는 마음을 내버린 사람은 “영원한 내버림의 사람(니챠 산야시)이다.「기타」는 행동하기를 그만두는 식의 내버림은 찬성하지 않는다. 행동을 이런 정신으로 하는 것은 결코 해탈에 방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기타」에서는 다시금 다시금 말한다. (2: 16, 3 :19,4 : 23,5 :12,6 :1,8 : 7) 그리고 그같은 뜻을 여기 28절에서 말하는 것이다.「바가바타푸라나」에서는 니리시마(Nrisimha)의 형상을 쓰신 주는 프랄라다(Prahlada)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마음을 내게다 모으고 모든 행동을 하라.” 그리고 후에 가서는 열심 있는 신앙으로 하는 요가를 말하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복되신 주에게 헌신하는 사람은 모든 행동을 나라야나(Narayana)에게 바쳐야 한다”고. ―틸라크
29. 나는 모든 것에 대하여 평등이다. 내게는 미운 것도 없고 고운 것도 없다. 그러나 나를 정성으로 믿는 사람은 그는 내 안에 있고 나는 그 안에 있다.
The Self is present equally in all beings. There is no one hateful or dear to
Me. But, those who worship Me with devotion, they are with Me and I am
also with them. (See also 7.18) (9.29)
나는 그 누구에게도 질투하거나 혹은 편파적이지도 않느니라. 나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대하느니라. 하지만 나를 믿음으로 깊이 섬기는 사람은 그가 누구일지라도 그는 나에게 있어서 한 친구이며, 나는 그에게 있어서 한 친구이니라.
I envy no one, nor am I partial to anyone. I am equal to all. But whoever renders service unto Me in devotion is a friend, is in Me, and I am also a friend to him.
29. The same am I to all beings; to Me there is none hateful or dear; but those who worship Me with devotion are in Me and I am also in them.
“내 안에 있으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으리라.” ―「요한」(15: 4)
하나님은 친구도 없고 원수도 없다- 그는 공평하시다. 그는 기분으로 누구를 저주하시지도 않고 누구를 택하시지도 않는다. 그의 사랑을 믿는 단 하나의 길은 믿음이요 정성이다. 그리고 누구도 다 제 발로 그 길을 걸어야 한다. ―라다크리슈난
하늘 길은 누구를 각별히 사랑하는 일이 없고, 언제나 그저 착한 사람으로 더불어 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 ―노자
이 장의 처음에서 믿음의 길은 즐겁고도 쉽다고 했다. 크리슈나는 여기서 그 길의 또 다른 하나의 독특한 점을 말한다. 믿음의 길은 또한 평등하다. ―틸라크
30. 어떻게 하여 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그가 만일 옹근 정성으로 나를 예배한다면 그를 성자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는 진실로 올바른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Even if the most sinful person resolves to worship Me with single-minded
loving devotion, such a person must be regarded as a saint because of making
the right resolution. (9.30)
비록, 일생 중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그가 만일 정성된 믿음으로 나를 섬긴다면, 나는 그를 성자(聖者)라고 할 것이니라. 그것은 그가 바른 결심을 하였기 때문이니라.
Even if one commits the most abominable action, if he is engaged in devotional service he is to be considered saintly because he is properly situated in his determination.
30. Even if the most sinful worships Me, with devotion to none else, he too should indeed be regarded as righteous, for he has rightly resolved.
옹근 정성은 제 애욕과 악행을 다 이겨낸다. ―간디
죄를 지은 후에 회개하면 죄에서 해방이 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결심하면 정결해진다. ―샹카라
죄악의 행동은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는 절대로씻어지지 않는다.「바우자야나 다르마 수트라」(Baudhayana Dharma Sutra)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날마다 마음속으로 회개하며, 잘못한 일에 대해 반성하고, 고행을 하며, 정신을 일깨우라. 그리하면 죄에서 놓여나리라.” 카르마는 결코 완전히 얽어매지는 못한다. 타락의 밑바닥에까지 떨어진 죄인도 설혹 저 스스로 덮어누르고 아주 도망쳐버리려 애를 써본다 해도, 제 힘으로는 도저히 꺼버릴 수 없는 빛을 속에 지니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타락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바탈에 의해, 우리를 붙들고 계셔서, 언제든지 자기의 빛을 우리의 캄캄하고 반역하려는 심정 속에다 보내주시려고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스스로 부족하다, 죄지었다 하는 바로 그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혼에 와 닿는 하나님의 압력을 뿌리치게 한다. 투카람(Tukaram)에 의하면 투카(Tuka)는 “타락자 중에도 타락자, 저는 세 번 타락한 놈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능력으로 저를 일으키셨습니다. 저는 마음의 정결을 가진 적이 없고, 당신 발을 붙드는 굳센 믿음도 없었습니다. 저는 나면서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이것을 얼마나 더 반복해야 합니까?”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저는 깨닫지도 못하고, 욕심쟁이고, 아니 욕심쟁이보다도 더 나쁩니다. 저는 제 마음을 걷잡지 못합니다. 쏘다니는 감각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노력을 하다 지쳤습니다. 평화와 안식이 제게서는 멉니다. 당신 앞에 온전한 믿음을 바칩니다. 제 목숨을 당신 발밑에 바쳤습니다. 당신 뜻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직 당신을 바라볼 뿐입니다. 오, 하나님, 저는 당신을 의지합니다. 당신 발에 매달려 놓지 않습니다. 제가 힘쓸 것은 당신을 향해서 입니다.” 이 비유 속에 있는 세리는 그 혼의 바닥에서 기도했다. “하나님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라다크리슈난
31. 그는 곧 의로운 혼이 되어 영원한 평화를 얻을 것이다. 오, 쿤티의 아들아, 알지어다.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멸망하지 않으리라.
Such a person soon becomes righteous and attains everlasting peace. Be
aware, O Arjuna, that My devotee never falls down. (9.31)
그는 곧 자신의 성품을 순수하게 하여 영원한 평화를 얻을 것이니라. 오 아르쥬나여, 그대는 확신하라.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
He quickly becomes righteous and attains lasting peace. O son of Kunti, declare it boldly that My devotee never perishes.
31. Soon he becomes righteous and attains to eternal peace; O Arjuna, know thou for certain that My devotee is never destroyed!
32. 프리다의 아들아, 내게 돌아오는 자는 비록 죄의 탯집에서 났더라도, 여자로, 바이샤로, 수드라로 났더라도 다 최고의 경지에 이를 것이니,
Anybody, including women, merchants, laborers, and the evil-minded can
attain the supreme goal by just surrendering unto My will (with loving
devotion), O Arjuna. (See also 18.66) (9.32)
오 아르쥬나여, 나에게 귀의하는 사람은 비록 죄의 탯집에서 태어난 창녀와 장돌뱅이와 백정일지라도 다 최고의 자아 실현에 도달할 것이니,
O son of Prtha, those who take shelter in Me, though they be of lower birth -- women, vaisyas [merchants] and sudras [workers] -- can attain the supreme destination.
32. For, taking refuge in Me, they also, who, O Arjuna, may be of sinful birth - women, Vaisyas as well as Sudras - attain the Supreme Goal!
33. 하물며 거룩한 브라만족, 신념있는 왕족의 선인들이겠느냐? 덧없고 괴로운 이 세상에 들어왔으니 너는 나를 믿으라.
Then, it should be very easy for the holy Braahmanas and devout royal sages
(to attain the Supreme state). Therefore, having obtained this joyless and
transient human life, one should always remember Me with loving devotion.
(9.33)
하물며, 진리에의 구도자와 신념 있는 나라의 어진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 않는가? 그대는 이 괴롭고 덧없는 세상에 이미 들어왔으니, 나를 깊이 믿을지어다.
How much more this is so of the righteous brahmanas, the devotees and the saintly kings. Therefore, having come to this temporary, miserable world, engage in loving service unto Me.
33. How much more easily then the holy Brahmins and devoted royal saints (attain the goal); having obtained this impermanent and unhappy world, do thou worship Me.
34. 네 마음을 내게 두고, 나를 믿고, 나를 예배하고, 내게 복종하라. 그리하여 나를 목적으로 삼고 네 혼을 오로지하면 너는 반드시 내게로 오리라.
Fix your mind on Me, be devoted to Me, worship Me, and bow down to Me.
Thus uniting yourself with Me, and setting Me as the supreme goal and
sole refuge, you shall certainly realize (or come to) Me. (9.34)
네 마음을 오직 나에게로만 향하고, 나에게 희생하며, 나를 섬기며, 나에게 순종하며, 오직 나와 하나됨만을 유일한 이상으로 삼는다면, 너는 반드시 나에게로 올 것이니라.
Engage your mind always in thinking of Me, become My devotee, offer obeisances to Me and worship Me. Being completely absorbed in Me, surely you will come to Me.
34. Fix thy mind on Me; be devoted to Me; sacrifice unto Me; bow down to Me; having thus united thy whole self with Me, taking Me as the Supreme Goal, thou shalt verily come unto Me.
COMMENTARY: The whole being of a man should be surrendered to the Lord without reservation. Then there will be a marvellous transformation. He will have the vision of God everywhere. All sorrows and pains will vanish. His mind will be one with Him. He will for ever have his life and being in the Lord alone.
「기타」의 교훈은 인종, 성, 계급의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이 절이 여자나, 농사 장사 공업 하는 계급이나, 노예계급에게 종교 경전을 못 읽게 하던 사회제도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기타」가 편집되던 그 당시 사회 일반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지만「기타」는 그것을 초월해서 정신적 가치를 강조한다. 이 사랑의 복음은 남녀, 모든 계급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 이르는「우파니샤드」의 제9장 왕지식과 왕 신비의 끝이니 이는 브라만의 지식에 있어 요가를 가르치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문답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