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모에게 왕관을 바치는 루이 13세≫, 필립 드 샹파뉴, 1638.
1638년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신교도의 편에서, 다시 말해 가톨릭국가에 대항하여 30년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은 프랑스의 이러한 반 가톨릭적인 정치적 결정에 나름대로의 대의명분을 제시해야 했고, 그들의 결정이 가톨릭세계의 이익과 평화를 위한 것임을 선전할 필요가 있었다. 1637년 12월 파리 노트르 담 성당에서 엄숙히 거행된 이 행사는 리슐리외 추기경과 죠세프 신부(the father Joseph, capucin)가 치밀하게 준비한 한 편의 정치적 연극이었다. 다른 한편 샹파뉴의 그림은 신성화를 지향하는 프랑스 절대왕정의 의지를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왕위의 상징을 헌사받는 성모는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둔 예수를 안고있다. 루이 13세의 지휘봉이 가리키는 방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승리의 관을 쓰는 루이 13세 >
절대주의는 일종의 예외적 상황의 장기화라고 할 수 있으며, 예외적 상황이란 무엇보다도 전쟁이었다. 전쟁은 복종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효과적인 무기였고, 절대주의의 생존수단이기도 하였다.

루벤스, ≪루이 13세≫.
프랑스 왕실이 주문한 회화 중에서 거센 파도가 이는 바다위에서 항해하고 있는 선박의 알레고리는 흔하게 이용되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국가에 대한 선박의 비유는 진부한 담론이 되어 버렸다. 국왕은 이 프랑스를 상징하는 선박을 이끄는 선장으로 묘사된다.
루이 13세
앙리 4세와 마리 드 메디시스의 아들로 퐁텐블로 궁전에서 태어났다. 1610년 9세 때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을 하였다. 1615년 에스파냐 왕 펠리페 3세의 딸 안 도트리슈와의 결혼 후에도 섭정이 계속되고 모후의 신임을 받은 재상 C.콘치니의 전횡이 심하자, 1617년 C.뤼네(1578∼1621)와 모의, 콘치니를 암살하는 궁정쿠데타를 감행하여 친정체제(親政體制)를 수립하였으나 왕과 뤼네에 대한 모후의 반란, 신교도의 반란 등 국내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수년 동안의 내전으로 대립하였던 모후와 화해한 후, 모후가 중용하였던 리슐리외를 고문으로 등용하였으며 그의 협력으로 1628년 라로셸을 근거지로 한 신교도의 마지막 반란을 평정하였다. 그 뒤 사부아 원정 때 궁정 내에서 또다시 모후를 중심으로 한 대귀족들의 음모가 있자 귀국 후 관계자들을 추방 또는 엄벌하고 리슐리외를 재상에 임명하여 프랑스 절대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1635년 독일의 30년전쟁에 간섭하고 독일 황제를 원조하는 에스파냐와 대전하였으며, 1642년에는 자신이 직접 에스파냐의 루시용에 원정하였다. 리슐리외가 죽은 지 5개월 만에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