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히 자작시를 불신하고 모독했던 이유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 1952∽ )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황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거리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로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1.
80 번째 시집 읽기. 초대 손님은 복 받은 시인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다. 첫 페이지 自序의 고백이 우리를 당황케 한다. 작시를 불신하고 모독한다? 아니 한번 쓴 시는 두 번 다시 보기 싫다? 도대체 이런 자아분열적인 괴변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 불신과 모독과 증오를 가져오는 시인으로서의 자화상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기에 이토록 황당할까? 말미에 풀어 놓는 진실의 폭로에 눈길이 닿는 순간, 우리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시가 떨고 있는 바늘이 그리는 그래프라는 것을, 波動의 力學이라는 것을 제발 알려 달라는 것이다. 시는 시인의 손을 떠나면 이미 독자의 것, 그러므로 그 주인들에게 간절한 부탁의 상소를 올린다. 정형적인 기존의 시의 길을 잃어버리려고 몸부림치고 있다고 부언하면서. 그가 그토록 갈구하는 시인으로서의 고독한 몸부림은 곧 우리가 시적 형식이라 믿어 온 그런 쾌쾌묵은 ‘시적 보고서’를 산산조각 내고자 하는 그의 물결치는 힘이 똬리치고 있는 내면의식을 발견하게 될 때 ‘황지우’ 라는 이름을 다시한번 되새기게 될 것이다.
2.
그러므로 황지우의 시를 읽어내고자 하는 독자에게는 무엇보다도 그의 분신인 ‘波動의 力學’의 본질에 대한 동의가 요구된다. 즉, 그가 시도하는 시적 형식(정통적인 시 관념)을 파괴하는 시문학적 실험과 그의 지론대로 ‘말 할 수 없음을 양식으로 파괴’하는 전위적인 예술 대한 공감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애기다. 황당한 요구조건이지만 그렇지 않다.적어도 그가 미술을 전공한 학도였다는 점에서 그가 갈구하는 시의 길 즉 그 ‘波動의 力學’으로서의 새로움은 어찌 보면 전통적인 형식과 관념을 그림(이미지)으로 대담하게 대체하려는 전위적 실험으로써 그가 뿌린 씨앗은 현대시류의 모퉁이에서 당차게 새로운 波動의 물결을 예고하며 꼼지락거리고 있기에 그리 낯설지 않음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3.
40년 전에 시문단에 충격을 준 실험적이도 전위적인 波動의 力學,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는 그가 서울대 미대를 졸업(1979)하고 이듬해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1980)되며 문단에 나온 직후 세상에 내보낸 첫 작품이다(1983). 40년이 지난 오늘까지 65쇄의 기록적인 발행을 거듭하며 독자들의 애장시집으로 서재의 중앙 골드라인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를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황지우는 에리트 미술학도답게 활자들을 마음대로 쏠리는 대로 미적(美的)으로 배열하고 비문자(非文字) 기호들로 과감히 채용하고 있다. 저 미학적(美學的)사유의 시인으로 유명한 프랑스 기욤 아플리네르가 시도했던 ’아름다운 그림이나 글자로서의 시‘의 세계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4.
이러한 그의 波動의 力學을 음미하면서 표제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속으로 세상을 떠나보자. 전통적인시 시적 구조를 대담하게 파괴하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기전에 화면에 차려지는 애국가 소리와 동영상을 그대로 시에 옮겨 놓고 있되 '파동의 역학'을 가미한다. 이를테면 시를 관념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으로 보는 것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의 波動은 그의 시 세계답게 자주 등장하는 ’물결‘일터. 이 파동(波動)으로서의 물결인 역동(逆動)은 이 세계 밖으로 나아가는 통로로서의 시인의 밖의 세계에 대한 희원(希願) 속으로 스며드는 힘이다. 그 세상 밖으로 나가고자 낄낄대고 깔죽거려야 하는 우리들은 역설적으로 이 세상 안으로의 부대끼며 파고들어가고 주저 앉아야 하는 우리들의 고통스런 몽타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유와 몽타쥬는 황지우 시강(詩江)의 두 물 줄기를 이루는 파동적인 시적 도구가 되고 있음을 여기서도 목도한다.
5.
어쩌면 이 시집이 발간된 80년대 이후 대한민국 시문학계에 신선하고 전위적인 화려함을 보탰지만,40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 화려함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그충격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도드라져 보이고 있는만큼, 그것은 ’황폐한 화려함‘이 아닐까? 필자는 이를 감히 ’화사한 폐허 !‘라고 명명하며 느낌표를 하나 더 덧붙이고 싶은 이유는 왜일까? <悳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