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의 아버지 회상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大盜 조세형이나 신창원을 떠올린다. 남들이 꺼리는 죄수들을 변론하며 사람들에게 많이 듣는 질문 중에 하나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변호할 수 있습니까?”이다. 이런 때에는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는 경우도 있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보람도 많이 느끼지만 때때로 곤란한 경우가 이럴 때이다. 누구나 다 올바른, 제대로 된 ‘삶의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으면 좋겠지만, 성경에 나오는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사람들도 실수하지 않았는가? 오직 성령의 조명을 받는 사람들만이 제대로 된 프로그래밍이 될 수 있다. 내 안에도 죄성이 많은데 그들과 나는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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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들어올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 그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움직인다. 가끔씩 인간적으로 이해도 안 되고 미워서 대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상익아, 네가 가야하지 않겠니?”라고 하시면 “네” 하고 움직이게 된다. 나이 어린 여신도들과 말썽을 일으킨 ‘JMS선교회’의 정명석 교주 사건으로 법정 공방을 벌일 때 사무실로 협박 전화가 많이 왔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주겠다’는 전화를 받으니 정말 두려웠다. ‘하나님 어떻게 하나요? 저 솔직히 무섭습니다. 제가 얼마나 겁이 많은지 하나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기도를 하는 중에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 나이 오십인데 본전은 찾지 않았냐? 어차피 한번 왔다 가는 인생, 저 사람들 때문에 죽는 거라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겠지.’ 갑자기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바위 하나가 없어졌다.
얽매이지 말고 살아라 “야 상익아, 머리 아프고 골치 아픈 게 판사, 검사인데 뭐 하러 그런 일 하려 하냐? 돈이나 권력을 찾아 가는 삶도 그렇고 그런 사람들과 지내는 것도 재미없다. 그냥 평범하게 네 생활 즐기면서 사는 게 최고다.”
내가 법대에 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하셨던 말이다. 희랍인 조르바처럼 아버지는 참 자유로웠다. 유명 일간지 사진기자였던 아버지는 말없이 즐기는 분이셨다. 렌즈를 통해 아버지가 만나는 세상은, 허세를 부리며 겉껍데기에 연연해하지 않아야 비로소 그 아름다움이 보이는 곳이었다.
함경북도 회련에서 월남한 우리 집은 한약재상을 하시는 할아버지 밑에서 서울에 정착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보다 더 자유로운 분이셨다. 하얀 바지저고리에 맥고모자, 허리엔 전대를 차고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셨는데 언제나 당당하셨다. 가끔 나를 데리고 시골로 사향을 사러 다니셨는데 어린 나에게 진짜 사향 냄새를 맡게 하고 가짜를 가려내게 했다.
할아버지는 어디를 가셔도 거침이 없는 분이었다. 돌아다니다 배고프시면 노점이나 허름한 식당 가리지 않고 아무데나 들어가셔서 식사를 하셨다. “할아버지, 창피하게 이런 데서 어떻게 먹어요?” 하고 투정을 부리면, “상익아 남자는 뭐든지 먹을 수 있고 누구든지 만날 수 있어야 해. 저기 양복 입은 신사들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속빈 강정이란다. 남자는 속이 꽉 차야 진짜 남자야. 너, 할아버지를 봐라. 할아버지가 못할 게 뭐 있냐? 얼마든지 쓸 돈이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남자는 자유로워야 해. 너는 커서 정치 같은 거 하지마라.”
어린 나를 친구 삼아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평소에도 본인을 위해서는 돈도 잘 쓰지 않으셨지만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는 몰래 대주시던 할아버지셨다. 이런 할아버지의 가치관은 그대로 아버지에게 대물림된 거 같다. 아버지 역시 여지저기 돌아다니시며 사진 찍으시고 우리들에게 늘 재미있게 살고 눈치 보지 말고 당당하게 자유로워야 한다고 가르치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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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하면 자유할 수 있다 아버지는 나를 친구대하시듯이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말씀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2, 3학년 무렵,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의논하시듯이 ‘4.19’ 이야기를 하셨다. 시위가 일어난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나갔는데 경찰들이 카빈총을 들이대며 성난 시위대와 싸우고 있었다. 피범벅이 된 아수라장, 혼란한 중에 보니 한 경찰이 구두닦이 소년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지만 말릴 수도 없었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와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고 한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려던 손을 내리고 가만 골목길에 숨어서 그 끔찍한 광경을 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내가 비겁했지, 그냥 무서워서, 사진도 못 찍고 그건 비겁한 행동이었어.” 너무나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아버지에게 충격을 받았다. 아버진 너무나 솔직하셨다. 난 내가 맡은 사건들을 소설로 쓴다. 법대를 안 갔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까? 내가 글을 쓰도록 유도한 건 아버지다. 초등학교 땐 어린이 세계명작 동화전집 같은 책을 읽히며 독후감을 쓰라고 하셨다. 싫은 줄도 모르고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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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버지는 날 데리고 어린이백일장 대회에 가셨다. 대회장 입구에서 “상익아, 글 쓸 때 멋 부리지 말고 네가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걸 쓰는 거야. 잘 쓸 생각하지 말고 진실한 글을 쓰면 되는 거다. 알았지?” 아버지는 백일장이 끝날 때까지 나를 기다리셨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솔직한 글을 써서 입상을 했던 것 같다. 글쓰기를 즐기다보니 변호사가 되어 만난 사람들의 기막힌 이야기를 더하거나 보탬이 없이 소설로 썼다. 많은 독자들이 생겨서 참 즐겁다. 아버지는 아마도 이런 기쁨을 아셨나보다. 작은 것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는 기쁨을….
자유롭게 살다가 당당하게 죽어라 사실,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삶에 대해 담담하셨다. 그래서 죽음을 대하는 태도도 담담하셨다. 할아버지의 임종을 직감한 아버지가 친척들을 부르려 했을 때도 할아버지는 그냥 놔두라고 하셨다. “바쁠 텐데 놔둬라. 별일 아니다!” 조용히 임종하셨다. 심장이 안 좋은 아버지는 63세 되시던 해에 감기몸살이 심해 병원에 입원하러 들어가셨다. 입원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버지는 담담하게 “야, 상익아 나도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증세가 아무래도 안 좋아, 나 죽을 거 같다.”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입원실에 들어가셔서는 “집에 가서 눈 좀 붙이고 와라. 아직은 괜찮다.” 하고 아들인 나를 안심시키셨다. |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병원에 갔을 땐 혼수상태에 들어간 아버지를 전기충격으로 다시 깨운 후였다.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괜찮다고 말씀하셨지만 아버지의 등과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침대시트까지 젖어 있었다. 의사가 와서 다시 혼수상태에 들어가면 전기충격을 한 번 더 쓰자고 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며, “야 그거 못할 거더라. 어차피 한번 죽는 거 괜히 호들갑 떨 거 없다. 난 그냥 갈래….” 의사가 화를 냈지만 아버진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할 수 없이 어머니와 동생들이 달려올 동안, 십자가를 쥐고 기도하는 아버지에게 진짜 궁금해서 물었다.
“아버지 어떠셨어요? 진짜 좋은 곳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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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진짜 천국이었어. 내가 거기 들어가려고 하는데 다시 깼다. 이왕 갈 거면 빨리 가고 싶다.”
급하게 달려온 가족들이 유언을 듣기 위해 주욱 늘어섰다. 동생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시고 인사하시더니 어머니에겐 “자, 악수 한번 해!”하고 어린아이같이 손을 내미셨다. 힘없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은 어머니에게 “40년 동안 고생 많았어. 내가 미워서 그런 거 아닌 거 알지? 많이 수고 한 거…. 나도 알아….”
모두 눈물이 났지만 울진 않았다. 어머니도 울지 않으셨다. 그 순간 가슴이 시원해지면서 아버지한테 섭섭했던 게 싹 사라졌다고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잠자듯이 편안하게 천국에 가셨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이 보여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는 내게 충격이었다. 난 늘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죽음에 대해 담담한 태도를 가지려 애쓴다. 그래서 날마다 기도한다. “하나님 죽을 때 죽더라도 비겁하게 죽지 않게 해주세요. 당당하게 살다가 부르실 때 편안하게 가겠습니다.”
대담한 동반자 아내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많은 말들은 그대로 내가 아들에게 하고 있었다. “조직에 가서도 돈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라.” 23세인 아들과 27세인 딸은 아버지가 바라던 대로 자유롭고 진취적인 것 같다. 미국에 가 있는 아들 정욱이는 아내의 말을 빌리자면 ‘아버지를 그대로 빼다 박은’ 아들이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유학생활을 했는데 햄버거 가게 점원으로 아르바이트하며 아버지인 나한테 신세지지 않으려 했다. 지금은 LA에서 공부하는데 의류가게 숍 매니저를 할 정도로 독립적이다. 나도 아들이 이리저리 얽매이지 않고 소신껏 살아가기를 바란다. 큰 딸 정아가 남자친구를 데려와 인사를 시켰다. 평소에 돈이나 체면 같은 거 따지지 말고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 됨됨이 하나만 보라고 말했는데 딸아이의 눈에 들어온 남편감은 내게도 흡족했다. 정장을 입지도 않고 편안한 차림으로 들어온 딸애의 남자친구에게 물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자네 양복은 몇 벌인가?” “네? 저…, 한벌 밖에 없는 데요.”
요즘 청년답지 않게 수더분하고 진실해 보이는 인상도 맘에 들었지만, 양복 한벌 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이 더 맘에 들었다. 딸아이와 남자친구를 보니 아내와 내가 아무것도 가진 거 없이 결혼 했을 때가 떠올라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미술대 조교로 대학 강사하면서 촉망받던 아내는 20대 초반에 나와 결혼하면서 전업주부가 되었다. 가난한 고시생과 결혼한다고 친정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서, 강원도 전방의 장교 관사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애를 키웠다. 고시생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 예술가의 꿈을 접으면서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다. 사실 아내가 아니었으면, 돈에 대한 유혹도 뿌리치고 난데없는 협박에 시달릴 때 의연하게 대처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아내는 나보다 더 대담하게 그런 일들에 휘둘리지 않고 나를 응원해주었다. 얼마 전 오랫동안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길을 접었던 아내가 ‘갤러리 행’을 열었다. 20여년을 한결같이 해준 아내와 가난하지만 재능이 있는 화가들을 지원하고 예술에 대한 비전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하다. 평소에 아버지가 나에게 말한 대로 얽매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나 역시 내 아이들이 그렇게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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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1954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해, 고려대 법대를 나온 엄상익 변호사는 대도 조세형, 신창원의 무료변론으로 친숙하다. '갤러리행'의 대표이며 조각가인 아내 신정행, 큐레이터인 딸 엄정아,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들 엄정욱의 아버지이며, 재소자들을 위한 '담안 선교회'에 헌신하고 있다. <하나님, 엄변호삽니다.>, <임종연습>, <신창원, 907일의 고백>, <엄변호사가 쓴 대도 조세형>, <변호사와 연탄구루마>, <욕심그릇이 작을수록 자유롭다.>,<겨자씨 자라 큰 나무되매>등 다수의 책을 통해 풀어낸 많은 이야기로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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