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문학기행(2)아리랑 문학관과 금산사

버스에 타자 우리들은 시원해 진 것을 발견했는데 김 시인이 에어컨을 작동시켜 시원한 실내가 되었다. 우리들은 그 곳에서 보이는 아리랑 문학관을 보면서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음에 감사했다. 아리랑 문학관도 서정주 시문학관처럼 폐교에 건축이 되어있었다. 안내를 받아 우리들은 일층부터 조정래 선생님의 자취를 밟았다.
일층부터 나는 입이 벌어지며 다물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눈에 보이는 김제 들녘을 배경으로 시작해서 우리 민족 수난과 투쟁의 현장들을 두루 담은 소설 '아리랑'을 기념하는 조정래 아리랑문학관이 왜 문학인들이 꼭 거쳐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곳이었다. 김제 들녁을 `징게맹게 외배미’라 부른다고 한다. 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김제와 만경을 채운 논들은 모두 한 배미로 연결돼 있다는 뜻인데 그만큼 넓다는 얘기라고 한다. 호남평야의 중심 김제 만경평야. 일제는 이미 1903년부터 이곳에서 침탈을 시작했고, 이곳의 착취는 해방될 때까지 가장 극심했다. 그래서 소설 '아리랑'은 이곳에서 시작됐다. '아리랑'의 주인공들은 김제 내촌 외리 사람들인데 그들은 일제 강점기에 살아남기 위하여 하와이, 만주, 북간도, 서간도, 연해주, 아시아 및 중앙아시로 이산해 나가야 했던 조선 민중들을 대변한다.
소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슬픈 이주사이자 독립운동사이며 민중운동사로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생생한 언어적 조형물로 구현했다고 생각이 된다. 1층에서 우리들은 내 키보다 높은 '아리랑'의 원고들이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원고 더미를 보면서 대하소설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36년 동안 죽어간 민족의 수가 400만. 200자 원고지 1만 8000매를 쓴다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수는 고작 300여 만자.'라는 스스로 다짐을 적은 조정래의 글이 가슴에 와 닿으면서 내 스스로의 부끄러움에 젖어 보았다.
제1전시실에는 '아리랑'의 소설 주인공들의 험난한 이주사가 줄거리와 함께 시각자료 및 영상자료로 전시돼 있어 소설 '아리랑'을 읽지 않았더라도 대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도록 꾸며져 있었다.
제2전시실엔 조정래 작가가 글을 쓰는 과정에 사용했던 취재수첩과 필기구, 취재사진 등이 전시돼 있었는데 취재수첩에 그려진 빼곡한 취재지의 세밀한 그림들은 작가적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소설을 쓰는데 사용했던 586개의 세락믹펜의 심을 보면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소설 '아리랑' 집필을 위해 수집한 각종 노트들을 보면서 치열한 작가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글을 쓴다는 말을 하면서 그저 머리로만 쓴 것이 후회가 되었다. 대하소설인 '아리랑'을 쓰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한 모습이 다른 작가들에게 채찍이 되리라 생각했다. 취재여행을 통해서 소설을 더욱 살찌우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3전시실은 작가 조정래가 아닌 인간 조정래의 인간적인 모습들도 엿볼 수 있다. 아내가 찍어준 자신의 사진을 보며 그 감각을 칭찬하는 내용을 보면서 인간애가 느껴졌다. 부인 김초혜씨와의 기념사진, 아들 도현씨의 결혼사진, 손수 그린 자화상, 아내에게 선물했던 펜화 등이 전시돼 있었다. 옆의 영상실은 아직 완성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문학관을 나오면서 나는 조정래 작가의 투철한 작가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들은 버스에 오르면서 모두가 느슨했던 끈을 조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버스 안에서 '참 좋았고 오기를 잘 했다'는 문자를 보내는 하 시인의 미소와 잔잔한 감동에 젖은 신 시인과 신 지부장님의 모습에서 새로운 각오의 눈길을 발견했고 박 선생님과 전 선생님의 공감하는 모습이 진지하기까지 했으며 최 시인과 원 시인 김 시인의 눈망울에는 이미 조정래 소설가의 뒤를 이을 준비를 하는 눈빛이 고여 있었다. 임 시인과 안 시인 김 시인의 온몸에서는 조정래 작가를 본받을 준비가 다 되어있었다.
그 곳을 떠나서 우리들은 예약한 한 식당을 향해서 가다가 중간에서 다른 길로 접어들어 조금 늦어졌지만 그 만큼 더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낚지 버섯전골과 삼계탕을 먹었는데 맛깔스런 반찬을 본 우리들을 그 순간부터 입안에 침이 고여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회원들은 어떤 문학기행의 식사보다도 맛깔스런 점심식사를 했다는 말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마당으로 자리를 옮겨 원두막에서의 생산적인 대화는 왜 우리들이 예산문학의 회원인지를 잘 알 수 있게 했다.
포만감을 느끼며 우리들은 금산사로 향하면서 버스 안에서 끝말잇기를 했고 잘 넘어가는 듯 하던 박 시인이 걸려서 벌로 즉석에서 노래를 했고 모두 박수로 함께 했지만 금산사에 곧 닿아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운 끝말잇기를 접어야만 했다. 금산사 입장료를 내고 사찰 가까이 가서 주차를 했다. 개울에서는 지난번 내린 비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막바지 무더위가 우리들을 어렵게 만들었지만 우리들은 서점에 들려 한참동안 머물렀고 원 시인과 김 시인은 책을 사서 독서의 폭넓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금산사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백제 법왕 때 에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치 않고, 신라 혜공왕 때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1626년(인조 4)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이 절은 935년 후백제의 신검이 그의 아버지 견훤을 가두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을 비롯하여 보물로 지정된 석련대와 석종, 오층석탑, 육각다층석탑 등이 있다.
그 곳을 나와 잠시 계곡 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고 있었고 이 시인이 시작한 물장난은 더 시원한 여름을 만들어주었지만 '물장난을 하지 마세요' 라고 쓰여져 있는 경고문에 우리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물장난을 그만두고 하산해야만 했다.
우리들은 거의 모든 사찰로 오르는 길이 그러하듯 길옆에 자리잡은 한 가게를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막걸리와 파전 그리고 묵무침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고 회원들은 그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평상에 둘러앉았다. 해물 파전으로 배를 달랜 후 우리들은 얼음이 살살 떠 있는 막걸리를 마셨다. 조 껍데기 막걸리를 의도적인 발음으로 안해서 웃음과 함께 여름도 흘리고 있었다.
역시 막걸리는 술술 내려갔다. 막걸리가 몸 안에 자리잡으면서 우리들은 숨겨놓았던 가슴을 열었고 아껴두었던 언어로 가슴을 맞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이할 만한 것은 원 시인이 막걸리를 마셨다는 것이었는데 그 모습이 보기에 참 좋았다. '막걸리가 은근히 취한다'는 말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두 맑은 미소로 함께 했다. 그 곳에서 우리들은 시를 노래했고 문인들의 길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우리들의 가슴을 모았다.
그 곳을 내려오면서 우리들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신 시인의 협찬으로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초행길이라 잠시 곁길로 가기도 했지만 서김제 IC에 이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중간에서 겨우 멈춰서 계절의 별미 복숭아와 수박 그리고 시원한 맥주를 준비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우리들은 맥주잔을 나누었고 달콤한 복숭아가 안주가 되었으며 우리들의 이야기가 향기가 되어서 버스 안에 웃음이 머물게 하였다.
버스는 회원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서 군산 휴게소에 들렸고 맥주를 많이 마신 회원들은 화장실로 달려가기 바빴다. 그 곳에서 우리들은 딸기와 키위주스로 더위를 식히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곳을 출발한 버스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렸고 나는 찾아오는 졸음으로 잠시 눈을 감기도 했다. 중간에서 신 시인이 내리고 버스는 광시를 거쳐 예산으로 향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운전한 김 시인이 저녁식사까지 준비해 주었다. 24일 개업하는 '꽃잎네 오찬과 만찬'에서 식사를 했는데 메뉴는 된장찌개였고 우리는 참 맛있는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한 후에 우리들은 각자의 집으로 향하면서 모두 행복한 모습들이었고 다음 문학기행을 기다리는 모습이 역력했다.
200507142155

첫댓글 기행문이 슬라이드 같아서 다시 다녀온 듯 합니다. 재미있고 상세한 기행문에 감사.
문학기행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도 눈에 선하리만큼 자세히 쓰셨군요.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