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선생의 출생지는 기록마다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예컨대 함남 안변군 영풍사(永豊社)·함남 고원군 산곡면(山谷面)·강원도 통천군 자산(慈山)·평남 순천군(順川郡)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짐작컨대 선생이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지역이 출생지로 잘못 알려지지 않았나 한다. 선생은 평남 성천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황해도 곡산군 미야골로 이사했다고 한다.
그러면 선생이 의병에 투신하기 전에는 무엇을 했을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선생은 해산군인 출신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반면에 일제 군경 자료에서는 ‘파락호(破落戶)의 두목으로서 도박(賭博)을 전업’했다든가, ‘농가에서 태어나 협객(俠客)으로 도처를 배회’했다거나 또는 ‘원래 농부(農夫)’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또한 《매일신보》 1914년 12월 2일자 「적괴채응언」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적괴 채응언은 순천군 소농가에서 성장하여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하고 노름을 일삼고 기운이 남보다 건장하므로 그 근처 무뢰한의 두목이 되었고 위인이 총명하므로 항상 의협한 기운이 있는 일을 하고 빈민을 이용하여 부자를 협박하는 등 폭행이 무수하더니 일한합병할 때부터 자칭 의병이라고 노름군 백수십명을 수하에 거느리고 순천읍내를 노략질 ····
위의 인용문은 일제에 의해 편파적이고 악의적으로 왜곡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위의 내용 중에 기운이 남보다 건장하고 위인이 총명한데다 항상 의협한 기운이 있는 일을 하였다는 내용은 주목할 만하다. 선생이 성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곡산으로 이사하여 화전농사를 지었다는 점을 이러한 점과 함께 고려한다면 선생을 “협객적 농민(俠客的 農民)”으로 불러도 좋을 듯하다.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달리 군인 출신 아니며 ‘협객적 농민’으로 파악돼
한걸음 더 나아가 의병에 투신하기 전에 선생의 활동을 추론한다면 평남 성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한 선생은 건장하고 용기 있는 가난한 농민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향리에서 생활고에 찌든 그와 비슷한 처지의 빈농들의 이해를 대변하다가 고향을 등지게 되었으며 황해도 곡산으로 이주하여 화전농을 전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나마 선생은 실의와 좌절의 나날을 보냈을 것이나, 빈농의 처지를 마냥 비관하지만 않고 불의를 좌시하지 않은 ‘협객적 농민’으로 성장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로써 보건대, 선생이 해산군인 출신이라는 주장은 그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체포된 직후에 보도된 신문기사 중 ‘조선보병대 군조’출신이라는 내용에 근거하여 ‘육군 보병 부교(副校)’로 알려지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없으나, 선생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선 군대의 정교(正校)’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요컨대 선생은 의병에 투신하기 전 비록 생활고에 허덕이는 빈농출신이었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농민들이 지주들로부터 가혹하게 수탈당하면 그것을 해결해주는 등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협객적 농민’이었다고 판단된다.
선생이 태어나 활동하던 무렵은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다. 10세를 전후한 시기이긴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전국을 휩쓸었으며, 한반도를 둘러싸고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탈이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일제의 침략이 날이 갈수록 노골화하자, 선생은 의병에 나서기로 결심한 것 같다. 특히 을사조약 및 정미조약이 늑결되자, 매국대신에 대한 분노가 고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난신적자가 횡행하여 권세를 희롱하므로 송병준(宋秉畯)·이완용(李完用)과 같은 7적(賊)·5귀(鬼)의 살점은 2천만 동포가 모두 씹어 먹고 싶어 한다’며 격문에서 격정적으로 토로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의병을 일으킬만한 학문적 성망이 있거나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선생은 다른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활동하기로 한 것 같다.
그러면 선생이 의병에 투신한 시기는 언제일까. 아마도 1907년 중반을 전후한 시기로 짐작된다. 체포된 직후의 신문기사에 ‘군대해산이 된 후 폭도의 틈에 들어간 점’이나, ‘채는 명치 40년(1907)경 폭도의 거괴 김태묵(金泰黙)의 부하가 되어 이래 강원, 함남, 황해, 평남 각도를 횡행’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와는 달리 「판결문」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융희원년(1907)경 의병 대장 석유(碩儒) 유인석(柳麟錫)이 우리 태황제 ‘현금 이태왕’ 폐하의 의대조(衣帶詔; 임금의 비밀스런 명령)를 받들고 의병을 천하에 모집한 고로 사방에서 동지들이 향응하여 혈성으로써 봉기할 무렵, 피고는 그때에 강원도 북변에서 일어난 서태순(徐泰順)의 부하에 속하여 하늘께 맹서하고 국치(國恥)를 설원(雪冤)하기로 부하를 고무하여 독립국의 면목을 세우기로 할 것을 피로써 맹서한 뒤 각지로 돌면서 싸웠던 것이다. … 명치 40년 음력 7월경 적도 전병무(全兵武)의 권유에 의하여 그 무리에 참가하고 다음해 음력 3월까지 잡역에 복무하고 그 뒤에 앞서 전병무의 명령에 의해 모집한 포수 약 30명 및 전병무의 부하였던 전상모 외 1명을 피고의 부하로 하고 재물탈취를 기도하고 이래 이들을 인솔하여 총기를 휴대하고 각 지방을 횡행 중
위의 인용문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선생이 1907년 음력 7월경 의병에 투신했음을 알 수 있다.
1907년 유인석 계열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부대장이 순국하자 역할을 승계
다만, 문제는 선생이 최초로 가담한 의병부대를 누가 이끌었는지는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김태묵 의병부대일 수도 있고, 혹은 서태순 의병부대나 전병무 의병부대일 수도 있다. 특히 「판결문」에는 선생이 투신한 내용이 전혀 다르게 서술되어 있어서 당황스럽다. 여기서는 일단 「판결문」에 의거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서태순 또는 전병무와 관련된 내용이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서태순 혹은 전병무로 지칭되는 의병부대의 부하로 투신하였으나, 선생이 속한 의병장이 황해도 곡산에서 일본 수비대와 교전 중 전사하고 말았다.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 의병은 대체로 유생들이 일으켰는데, 그들은 군사상의 지식은 없으나 적개심만은 왕성하였다고 한다. 서태순 역시 그러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서태순은 유인석으로부터 받은 군율(軍律, 이른바 의병변수규칙) 등 제반 서류를 받아 활동하였는데, 그러한 문서들은 서태순의 순국 이후 의병장을 승계한 선생에게 인계되었다.
그리고 전병무의 권유로 의병에 가담하여 처음에는 잡역을 맡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모장(召募將)을 맡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선생이 가담한 의병부대에서 어떠한 임무를 수행했는지를 알려준다. 즉, 선생은 처음에는 가난한 농민의 한사람으로 인식되었으나 곧바로 능력을 인정받아 포수 등을 모집하는 소모장의 직책을 부여 받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의병장이 교전 중 전사하자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선생은 유인석 계열의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처음에는 잡역으로 활동하다가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소모장으로 활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이 격문에서 유인석의 거의를 특별히 언급하고 재판과정에서도 유인석의 거의를 높이 평가한 점은 그러한 관련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선생 역시 유인석의 의병봉기를 적극 지지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한편, 김태묵은 김진묵(金溱黙)과 동일인으로 추정되는데, 김진묵은 왕회종(王會鍾)과 더불어 의병장 허위(許蔿)를 경기도 삭녕(朔寧)으로 초빙하여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했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일제측 기록에도 자주 나오는데, 그는 주로 경기 북부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의병장이었으므로, 선생과도 일정한 관련 속에서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