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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간 호남 회화 500년사에서 조명되지 않은
잊혀진 화가들을 발굴'한
한국화가 박종석.
학포 양팽손의 <부러진 대나무>로부터
염재 송태희의 <세한을 기약하고>,
석현 박은용의 삶과 예술을 그린 <검은 고독 - 푸른 영혼>
그리고... 오늘 <사생취의>의 김도숙.
항일지사이자 서화가이기도 했던 김도숙을 축으로
호남의병장들을 그린 기획이다.
2022. 11. 24일에서 12. 10일까지
무등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
기간이 다 지나서야
한 번 가겠노라던 약속을 못 지킨 것에 미안해 한다.
대신 이번 <월간 전라도닷컴> 12월 호에 잘 소개된
글과 그림을 만나보면서
그리고,
때마침, 오늘 아침, 한송주 기자가 박종석 화백을 썼던
옛 글이 내 메일 편지함에 도착했으니
이 자리를 빌려
그 아쉬움을 털고 혹 서운함을 달래기로 한다.
"의를 취하고 삶을 버린다"
......
늦깎이 역사공부 중인 내 귀에도 잠언이다.
20160823전라닷컴[한송주 길 인연] 산꾼화가 박종석
고산 오지를 더투며 시원의 삶을 그린다
그의 화실은 광주시 진월동에 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작업실은 산에 있다. 아니, 고원과 오지에 사는 원시족들 사이에 있다.
언젠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 직업은 도대체 뭐여?” 씩 쪼개더니 더듬거렸다. “긍께라 잉...”
화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지독한 산꾼이요, 산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지독한 화가다. 거기에다 녹록찮은 한학쿵푸를 모탕한 저술도 거들먹하다. 한 30년간 철철이 산을 더투어 히말라야 14좌를 비롯 세계의 한다하는 지붕마다 발짝을 찍었고 현장에서 그린 스케치만도 2만 점이 넘는다(2천 점이 아니고).
전시회는 개인전 16회, 초대전 6회, 단체전 200회를 했다. 저서로 양팽손 평전 <부러진 대나무>, 송태회 평전 <세한을 기약하고> 등이 있다. 당연히 주목을 받아 광주미술상, 서암문화상 등이 주어졌다.
석주 박종석화백과 기자와의 인연은 송광사성보박물관 초대전을 계기로 한결 깊어졌다. 2009년 8월의 일이다. 그 절집에서 놀고 있던 기자는 당시 이런 썰로 기꺼이 여리꾼 노릇을 한 기억이 새롭다.
‘석주화상이 자재한 선필을 들고 시방천지를 만행한 지 20성상입니다. 아주 낮고 어두운 곳을 심방하며 수고중생들의 행주좌와를 동체대비의 화폭에 또박또박 새겼습니다. 그가 향리에 돌아와 때묻은 걸망을 풀어놓습니다. 그가 펼쳐 보이는 만다라에는 현세의 극락과 지옥이 활구로 요동치고 있습니다. 석주화상은 설합니다. “빙 한 바퀴 돌았지만 결국은 고향이더이다.” 隨處皆故鄕인가 萬處歸故鄕인가. 석주가 탁발해 온 염색공양을 흠향하며 외지에 만발한 고향소식을 살펴보는 것도 한 즐거움이 되리라 싶습니다. (헛소리, 마음이 떠돌고 있는데 고향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그때 송광사 스님네들은 석주화상의 광폭한 행보에 어안벙벙해 했다. 실제로 2~3m를 넘나드는 화폭도 광폭했거니와 외진 이웃들의 무애생을 넓게 끌어안은 자비행이 매우 넉넉했다.
새벽예불의 잔 광명이 아련히 어린 송광사 대웅보전을 묘사한 대작도 그때 선보였는데 화가는 겨울에 냉방에서 3개월동안 작업 하느라 엉치에 동상을 입었다. 이 간절한 정진 사연을 듣고 스님네들은 또 한 번 혀를 내둘렀던 것이고...
고학 투병 담금질.. 창작 통한 자유 찾아
광주 진월동 ‘삼만재(三萬齋)’. 석주의 화실이자 서재다. 날이 좀 푹해선지 넓잖은 방에 선풍기 3대가 돌아간다. 그림 말림용, 사람용, 독서용이다. 그래도 부채가 좋지요, 했더니 시원한 비폭이 선면된 방구부채를 한 쌍을 내놓는다. 면화에 ‘수처쾌활당(隨處快活堂)’이라 도서되어 있다.
“호도 많으시네, 무슨 추사라고..”
“아니, 거.. 내가 하도 찡찡하다고 해싸서 쪼까 명량해 볼라고 자호해 봤소. 성.”
“아우님, 안 찡찡해, 쪼까 심각허긴 허지만서도...”
“치, 그말이 그말이재이.” 하면서 쾌활하게 웃는 쾌활당.
“그나저나 그림 한나 준 담서, 어째 지금까지 꿩궈묵은 자린가.”
“아따, 전에 한 점 드린당께 자네 그림 걸어놀 벽짝이 없다고 마다했소 안.”
“그때는 셋방 살 때라 진짜로 내 벽짝이 없었재.”
“나는 그까짓 작품은 안 걸어논단지 알고 아조 서운했는디.”
“인자는 벽짝은 있응께 하나 챙겨봐. 이 팩트대로 잡지에 공개해 불랑게 짠돌이 소리 들을라면 알아서 허시고.”
“근디 나는 공껏으로는 선고(先考)가 돌아오셔서 주라고 한데도 안 준디.”
“나도 사임당 같은 선비(先妣)가 화조 준다고 해도 공것으로는 안 받아, 지미.”
책장 한 켠에 작은 공책이 꽂혔는데 ‘작업일지’다.
차를 열탕으로 올려 이열치열하면서 일지를 톺아보니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
‘..고교 졸업 후 10년 동안 빈둥빈둥 한국화와 한학을 익히다가 본격적으로 화업에 뜻을 세우고 늦깎이로 호남대학교 미술과에 진학하고 조선대학교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니 남보다 백배 노력하는 각오로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기를 또 10여년 과로 탓인지 심신이 피폐해지더니 병마가 덮쳐 40대 초반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다행히 섭생과 산행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화필을 되잡았으나 수 백 번 붓을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에 부대껴야 했다. 그때마다 스승들의 독려와 지도로 마음을 다잡아 주어진 길을 내쳐 걸었다. 호남회화사에 관련된 5권의 집필을 계획하고 60세까지 기초 공부를 마친 후에 나의 그림을 그리겠다고 다짐도 했다. 벌써 귓가에 서리가 앉아 약속한 기한이 도래했으나 내 가을 들녘은 텅 비어있다...’
밖에서 보기로는 누구보다 곳간이 그득한데 장자의 욕심이란 이렇다. 아니면 겸허인가, 하심인가.
이런 대목에 와 그의 수행 성적이 드러난다.
‘예술의 본질은 무엇이고 왜 화가의 길을 가는가에 대해서 아직도 확고한 신념이 없다. 그저 소박한 자유인으로, 순수한 영혼의 날개를 쉼 없이 저어서 추락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을 할 뿐이다.
정성을 다한 내 작품을 보는 이들이 영혼의 작은 울림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더 없이 행복하다. 하지만 그도 바라지 말고 물 흐르듯 인연 따라 가면 좋을 것이다. 더 열심히 창작의지를 불태우되 허공같은 마음으로 생활의 불편을 받아드리며 깨달음의 길을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하리라.’
고통의 무게=행복의 크기
내친 김에 사바이력을 더듬었다.
“중학교 때부터 미술반에서 활동했지만 빈한한 가세로 인해 집안에서 환대받지 못했고 화구를 빌리거나 얻어서 몰래 눈치를 봐가며 그림을 그리고 공작을 하고 했습니다. 5교시 수업을 마치고는 시내 가구점에 나가 허드렛일을 해서 가용을 보탰어요. 몹시 힘들었지만 가구점에서 틈틈이 목조각 기술을 익히는 소득도 있었지요.
고등학교 진학해서 가외로 한문과 서예를 배우면서 목운 오견규 선배와 인연으로 잠시나마 아산 조방원 선생님의 산수화를 공부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1974년부터 호남한문학원에 나가 일했는데 거기에서 월담 김창선선생에게서 3년간 고문을 공부하고 오지호화백과 의재 허백련선생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고교를 마치고 형편상 대학진학 꿈을 접은 채 해군에 자원 입대했습니다. 복무 중 불의에 사고를 당해 국군통합병원에서 8개월 넘게 입원했는데 그 기간에 300여권의 책을 읽고 독후감과 일기를 쓰는 좋은 경험을 쌓았지요. 제대 후에도 별다른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안 월북한 내력 때문에 공직에 나아갈 기회도 제한되어 있었고요. 이래저래 내가 갈 길은 화업 밖에 없다는 현실을 절감하고 마음을 다잡았지요. 그림그릴 공간을 제공받는 조건을 호남한문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만취 위계도선생 아래서 4년 동안 사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석성 김형수화백에게 사사하고 연진미술원에서 수묵화를 연마했어요. 뒤늦게 대학 진학의 기회가 생겨 고교 졸업 11년만에 호남대학교 문턱을 밟았고 이후 붓과 함께 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적잖이 시고쓴 여정을 밟았는데 이런 신산이 자양이 되어 예의 단단한 투지가 여물었을 법하다.
대자연의 무서운 침묵 속에서 처절한 고독과 사투를 벌이는 산꾼의 모습이 절절이 묘사된 산행일기도 일별할 만하다.
‘...대원들이 히말라야 산군의 한가운데에 있는 타르푸출리(5663m)라는 아담한 설봉 정상에 서 있다. 전 대원이 함께 한 시간에는 거친 숨소리도 힘든 표정도 없다. 서로 부둥켜안고 고생했다는 축하인사를 나누고 경건하게 둘러싸인 연꽃과 같은 설산의 파노라마를 감상한다. 나는 정상에서 감각이 무디어진 손으로 사방의 산세를 스케치했다. 나는 지금 살아서 생동하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되돌아보니 이곳에 오기까지 도움을 준 많은 분들이 정말 고맙다. 특히 포카라에서 카라반이 시작될 때부터 10여일 넘게 30킬로그램이 넘는 짐을 늙은 포터를 잊을 수 없다.
순백의 한가운데에서 둘러보는 안나푸르나 남봉과 마차푸차레, 히운출리, 강가푸르나, 간다르바출리 등 장엄한 산군들은 신들의 정원같은 느낌이다. 눈 연꽃의 중심인 타르푸출리는 산군 중앙의 내원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전망대와 같다. 1시간 가량 머물렀다가 대원들의 환호와 감탄의 자취를 미련 없이 지우고 하산을 시작한다. 설원을 건너 강팍한 바위와 돌이 섞인 눈밭을 힘겹게 내려가니 무릎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정상에 오른 셀파 밍마는 발목을 접질려 나와 함께 조심스럽게 동행한다. 오후 1시에 하이캠프에 도착해서 마시는 레몬티가 꿀물이다. 곧바로 캠프가 철수되고 홀로 뒤쳐져 소걸음으로 하산하니 4시간이 걸렸다.
등정 전 날에 긴장되어 2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해 하루를 거의 뜬눈으로 걷다보니 피로가 겹쳐 온몸이 철판에 짓눌린 듯했다. 내려오다 보니 타르푸출리와 여타 산군은 이미 구름에 가려 운무천지가 되었고, 지는 태양에 요술을 부린 구름은 멋진 수묵화로 변했다. 포터의 등짐과 어우러진 운무는 천근같은 피로를 잊게 하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걸음은 거의 기어가듯 하고 등짐의 배낭은 짓누르지만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오후 5시,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니 따뜻한 온돌방이 있을 것 같은 훈훈한 느낌이다. 도착 즉시 양말을 벗고 소금을 넣은 뜨거운 물에 발을 담구니 피곤이 사르르 풀린다. 어김없이 석양의 해는 지고 밤기운은 싸늘해졌다. 그러나 아늑하기만 하다.
세상일은 너무 평탄하면 재미가 없다. 힘들고 아슬아슬한 역동성이 있어야 뒷맛의 여운이 오래 간다. 반추해 보니 눈 연꽃 밭에서 그윽한 향기를 마시고 온 느낌이다. 그 향기는 잠시라도 사바에 붙들린 삿된 마음을 청정하게 씻어주었다...’
여기에서 환쟁이 산꾼 박종석을 재는 산우들의 시각을 엿보자.
탐험가 박철암씨. “나는 언젠가 박 화백과 함께 티베트 무인구(無人區)를 탐험하면서 해발 고도 4700m 호반에 유일하게 유목민 한 집이 있어 그곳에서 함께 지낸 적이 있는데 주먹 같이 큰 별들이 온 하늘을 덮고 있는 신비스러운 밤, 지구 태초의 땅에서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인양 신비를 그림에 담고 있었다. 그의 그림은 상상이 아닌 실기(實記)이며 그의 화폭을 보고 있노라면 웅응(雄鷹)하는 실물을 대하는 듯 감동을 주는 정신이 들어 있다.”
광주전남 히말라야클럽 윤장현 회장. “히말라야 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오랜 기간 고산과의 힘겨운 여행을 통해 기록하고 체감하며 느낀 창작품으로 희망원정대의 14좌 완등 성공과 기쁨의 이면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밟고 이루어졌듯이 예술작품 또한 혼의 정화를 위한 고뇌가 담긴 결정체라 믿는다.”
그래도 무등산이 제일 좋아
화가와 함께 ‘무등산전’이 열리고 있는 무등산 자락 무등현대미술관에 들른다. 전시장 한 쪽 벽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대작 ‘무등산도’ 앞에 화가와 함께 서서 사진을 찍는다.
“수많은 세계의 명산을 두루 올라봤지만 역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산을 우리의 무등산입디다.”하며 쾌활하게 웃는 그.
그는 현재 고 박은용화백의 평전을 집필하고 있으며 오는 11월 금봉갤러리에서 17번째 개인전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그가 여러 차례 다녀온 티베트에는 이런 속담이 전한다고 한다. '고통의 무게와 행복의 크기는 같다.’
글 한송주대기자 사진 박갑철기자
첫댓글 오늘 아침 문득 화장실에 앉은 <참전계경, 62사 捨己 편>에서 만난 글귀 하나 옮긴다.
捨己者 不分其身也 旣許心禦人 仍蹈患難 身義
不可俱全 衆人 捨義而全身 哲人 捨身而全義
사기捨己란 그 몸을 분별하지 않고 버리는 것이다. 이미 남에게 마음을 허락하고 그로 인하여 환난을 겪게 되면 몸과 의리를 함께 보전하지 못한다. 뭇사람은 의리를 저버리고 자기 몸을 보전하지만, 밝은이는 자기 몸을 버리고 의리를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