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英祖) 왕비 정순왕후(貞純王后)
영조는 64새 때 왕후 서씨를 잃었다. 인군은 비록 춘추가 높아도 중궁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법이므로 다시 왕후 간택을 하였다. 그리하여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따님 김씨를 맞아 가례를 지내니 때에 왕의 춘추는 66세 였고 왕후의 춘추는 15세 였다.
이가 곧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위에서 중궁 간택한다는 전교가 내려 들어 갔을 때에도 범절이 매우 아름다웠다. 여러 재상 딸들과 같이 들어가 앉게 되었는데 그 깔고 앉는 방석에 아버님 이름이 쓰인 것을 보고는 비켜 앉았다.
왕이 까닭을 묻자
"방석에 아버님의 이름이 쓰였기로 감히 깔고 앉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했고, 사찬을 내려 먹이시며,
"너희들은 무슨 음식이 제일 맛 있느냐?"고 물었을 때도 소금이라고 대답하여 다른 처녀들이 떡이니 국수니 하는 것과는 판이하였다. 왕은 그 언행을 자못 기특하게 여기며 다시 물었다.
"무슨 꽃이 제일 좋은고." 그러자 여러 처자들은 다투어 매화니 국화니 모란이니 연꽃이니 했다.
그러나 왕후는
"면화(棉花)이옵니다." 라고 아룄다. 면화는 사람 의복을 만드는 무명(文永)옷감인 것이니 꽃중에서 제일 이라는 것이다. 다시 왕이 물었다.
"세상에 무엇이 제일 깊은고." 다른 처녀들은 물, 산, 정(情)입니다하고 별별 소리가 다 많았다.
그런데 차례가 왕후에게 돌아가자,
"사람의 마음이옵니다." 라고 했다. 그리하여 왕은 크게 감복했고 결과는 왕후가 된 것이다.
또 왕후에 봉해진 후의 일이다. 장복을 지으려고 상궁이 와서 앞으로 옷감을 견주어 보고 뒤로 돌아 앉으라고 했다. 그러자 왕후는 천연히 앉아서 서릿발이 서는 한마디를 했다.
"상궁은 뒤로 돌아가지 못하느냐?" 그리하여 상궁은 등골에 땀이 쭉 흘렀다고 한다.
왕후는 다시 추운 겨울 아버님을 따라 시골에서 올라 올 때 호피를 벗어 주어 추위를 면케 해 준
이사관(李思觀)을 각별히 존경하여 왕께 청해 좋은 벼슬을 시켜 주기도 했다. 영조가 83세 까지 살았으니 중궁 자리에는 18년을 있었던 셈이지만 소생은 없었다. 영조가 돌아가자 그 손자님 정조를 도와 수렴 정치를 할 때 일인데, 기왕 쓸 바에는 가까운 사람을 쓴다고 그 친정 척속 김노갑(金魯甲)으로 총계사(總戒使)를 시킨 적이 있었다. 그걸 경연관(經筵官)인 정일환(鄭日煥)이 알고 대간에 붙였다.
"조정대관의 공론도 아니요, 어의(御意)도 아닌데 자전(慈殿)의 뜻대로 벼슬을 내리니 부당하오이다. 정사에 사정(私情)은 금물인 줄 아룁니다." 그 말에 왕후는 조금도 싫어하는 빛이 없이,
"너의 말을 들으니 내 잘못을 알겠다. 내가 사과하마." 라고 했다 한다.
이야기 도중에 무명을 한자(漢字)로 "문영(文永)이라고 썼음은 백제 때 문영(文永)이란 사람이 처음 우리나라에 면화를 얻어다 심은 것을 기념해 그렇게 부른 때문이다. 또 면화를 짜는 기계를 물레라 함도 그 손자 "문래(文來)가 그것을 만든 까닭이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
방문,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질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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