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5가해34-2-1.zip
야부:한 손은 들고 한 손은 잡고 왼쪽으로는 불고 오른쪽으로 치도다.
줄(거문고) 없이(相 없음)도 남이 없는 음률(樂:지혜작용)을 퉁겨내어야
음계(宮商)에 매이지 않고도 가락이 새롭나니
음을 아는 이가 안 후에는 한갓 이름은 아득하도다.
설의:반야가 곧 반야가 아님이여! 한 손은 들고 한 손으로 잡으며 왼쪽으로 불고 오른쪽으로 치도다. 들고, 잡고, 불고, 치는 것이 좋기는 좋으나, 오히려 좋은 솜씨는 못되니 줄 없는 거문고로 남이 없는 곡을 퉁겨내어야 비로소 좋은 솜씨라 이름할 만 하니라. 만약 이 無生曲이라면 들고, 잡고, 또한 불고, 치는 것에 매이지 않으리니 비록 그렇게 저 음계(宮商)에 매이지 않으나 격조가 청신하여 별다른 음계이니라. 이 곡은 예로부터 화답하는 이가 드무니 지음자(鍾子期)의 밝은 들음도 오히려 아득하도다.
청봉착어:들어 설하되 흔적을 지우고
임의자재 하되 함이 없어라
설해도 설함이 없음이여
이치는 문자에 있지 않아 자취를 쓸었도다.
圭峰:三은 佛無異說勝이라.
규봉:㉢은 부처님은 다른 말(異說)이 없음으로 뛰어난 것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인가 如來有所說法不하느냐 須菩提가 白佛言하되 世尊이시여 如來無所說이나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말씀하신 바가 없사옵니다.”
淸峯:그럼 지금까지 설하신 것은 무엇인가? 설해도 설함이 없는 도리를 알아야 한다.
첫째:법은 말에 있지 않으며, 말로써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문자나 언어로써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문자나 언어 밖의 존재이기 때문에 본래 있는 그대로를 삼켰다 토했을 뿐, 조작하거나 스스로 만들어 하신 말이 아니기 때문이며,
둘째:여래(法身)는 어떠한 것을 나툴지라도 부동하여 적요(寂寥)한 것이니 설함으로서도 조금도 변화가 없음이다.
이를테면 다만 뿔을 보고 소를 아는 것이고 꼬리를 보고 호랑이를 아는 것이라. 소를 잡아 보여줄 수 없음에 소뿔을 가리켜 소를 알게 함이요, 호랑이를 잡아 보여줄 수 없음에 호랑이 꼬리를 보여 호랑이를 알게 하는 방편인 것이니, 유위의 것으로 무위의 법을 이른 것이다. 그래서 “법으로는 바늘 하나 통할 수 없으나 사사로이는 거마도 통한다” 했으며, 또한 “부처가 말이 없음을 알면 입에서 연꽃이 피리라”한 것이니 유와 무를 떠남인 것이다.
따라서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것이니, 설해도 말함이 없고 들어도 들음이 없는 것이다. 남(生)이 없는 도리를 깨달아 위없는 도를 이루게 하고자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을 설하신 것이니,
“지혜(智慧)가 밝아지면 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고, 미혹한 이는 말에 쫓아 밖으로 찾는 것이다.”
知佛無言口生蓮 지불무언구생연 하리니
流水靑山共一家 유수청산공일가 이라
以法裁官不容針 이법재관불용침 이어도
法外私通車馬行 법외사통차마행 하니라
부처가 말이 없음을 알면 입에서 연꽃이 피리니
흐르는 물 청산은 한 집안 일이라
법으로는 바늘 하나 통할 수 없어도
사사로이는 거마도 통하는 것이니라
說誼:佛稱空生善解空하시니 果能知佛本無言이로다 然雖如是나 自從阿難結集來로 名句文身의 差別言詞가 布在方策하여 溢于西乾하고 盈于東震하여 ?至于今하니 黃面老子가 若都無說이라면 如是法藏은 夫誰說來인가 須信道하라 有言이라면 皆成謗이요 無言이라면 亦不容하리라.
설의:부처님께서는 수보리가 空을 잘 이해한다고 일컬으시니, 과연 공생은 부처님께서 본래 말이 없으심을 잘 알았도다. 그러나 비록 이와 같으나 아난이 경을 결집함으로부터 이름과 구절, 문장의 차별 언사가 경전(方策)에 펴 있어서 인도(西乾)에 넘치고 중국(東震)에 가득 차서 지금까지 이르렀으니 부처님이 모두 설함이 없다고 하면 이 같은 대장경은 그럼(夫:대체) 누가 설하였는가? 모름지기 믿을지니, 말이 있다 하면 모두를 비방함이 되고 말이 없다하면 역시 용납하지 못하리라.
청봉착어:부처님이 말씀하신 바가 있다 하면 부처를 비방함이 되고,
圭峰:無所說者는 無別異增減之說이고 但如證而說이니 旣如其證이니 則無所說이니라 三世諸佛이 皆然이니 故로 云無異說이니라 故로 論에 云하되 無有一法唯獨如來說이고 餘佛不說하다 無着이 云하되 第一義는 不可說이라하니라
규봉:無所說이란 별달리 늘고 주는 것이 있는 말씀이 없다는 것이고, 다만 증오한 것을 설한 것으로 이미 증오한 것과 같으니 곧 말한 것이 없는 것이다. 삼세제불이 모두 그러하므로 다른 말(異說)이 없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論에 이르되 “한 법도 오로지 다만 여래(석가모니)도 설한 것이 없고 나머지 부처님들도 설하지 않으셨다” 했다. 무착은 이르되 “구경의 진리(第一義)는 가히 설하지 못하는 것이라” 했다.
청봉착어:부처님이 설하신 바가 없다 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비방하는 것이니라.
六祖:佛이 問須菩提하시되 如來說法이 心有所得不인가 須菩提는 知如來說法이 心無所得이니 故言無所說也하니라 如來意者는 欲令世人離有所得之心이니 故說般若波羅蜜法하시어 令一切人聞之하시어 皆發菩提心하여 悟無生理하여 成無上道也니라
육조: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물으시되 “如來의 설법이 마음에 얻는 것이 있는가?” 하시니 수보리는 여래가 설한 법이 마음에 얻는 것이 없음을 알므로 말하기를 “설한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여래의 뜻이란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얻은 것이 있는 마음을 여의게 하고자 하시므로 반야바라밀법을 설하셔서 모든 사람이 듣게 하시어 모두 보리심을 내어 無生의 이치를 깨달아서 위없는 도를 이루게 하신 것이다.
傅大士:名中에 無有義요 義上에 復無名이니 金剛喩眞智하여 能破惡堅貞이로다 若到波羅岸하면 入理出迷情이리니 智人은 心自覺하고 愚者는 外求聲이니라
부대사:이름 가운데는 뜻이 없고 뜻에는 다시 이름이 없으니
금강으로 참다운 지혜에 비유하여
능히 악의 굳고 곧(편견에 국집)은 것을 깨뜨렸도다.
만약 저 언덕에 이르면 이치에 들어가
어리석은 情에서 벗어나리니
지혜 있는 사람은 마음을 스스로 깨닫고
어리석은 사람은 밖으로 소리를 구하니라.
冶父:低聲低聲하라.
說誼:佛無所說하니 是則固是나 無言도 亦非佛本心이니 故로 云하되 低聲低聲하니라.
又 莫謂一向無所說하라 人天耳裏에 鬧浩浩이요 鬧浩浩이니라 伏請하노니 低聲低聲하라
야부:소리를 낮추고 소리를 낮추어라.
설의:부처님께서 설한 바가 없다 하니 옳기는 진실로 옳으나 말 없다 함도 또한 부처의 본마음이 아니니 그러므로 소리를 낮추고 소리를 낮추라고 하시니라.
또는 한결같이 설한 것이 없다 라고만 하지 말라. 사람과 하늘의 귓속에 시끄럽기가 광대한 물결소리(浩浩) 같고 시끄럽기가 광대한 물결소리 같으니라 엎드려 청하노니 소리를 낮추고 소리를 낮추어라.
청봉착어: 무심에도 관문이 격해 있으니
말없을 땐 말 없다는 것도 없으니
소리를 낮추고 낮춤이여
낮춘다는 그 마저도 여의어라
冶父:入草求人不奈何하니 利刀斫了手摩?로다 雖然出入無?迹인데 紋彩全彰을 見也?인가
說誼:要識黃面老?인가 此老는 本不愛草시며 亦不厭草시니 不愛草故로 入草로는 見此老不得하고 不厭草故로 出草로도 覓此老不得이니라 所以로 道하되 雖復不依言語道나 亦復不着無言說하니라 看看하라 黃面老子가 現也이니 摩醯眼前에서 藏身無地로다
야부:풀숲에 들어가 사람을 구하기엔 어찌하지 못하니
예리한 칼로 깨끗이 베고야 손으로 어루만지도다.
비록 그렇게 그 出入에 자취가 없는데
무늬가 온전히 드러남을 보았는가
설의:부처님(黃面老)을 알고자 하는가? 이 노인은 본래 풀을 사랑하지 않으며 또한 풀을 싫어하지도 않으니, 풀을 사랑하지 않으므로 풀숲에 들어가서는 이 노인을 볼래야 볼 수 없고 풀을 싫어하지 않으므로 풀을 벗어나서도 이 노인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느니라.
그런 까닭으로 말하되 “비록 다시 언어의 길을 의지하지 않고 또한 다시 말로 설함이 없다는 데도 집착하지도 않아야 한다"하시니라. 보고 보아라.
부처님이 드러냈으니 마혜수라(大自在天神)의 눈앞에서 몸을 숨길 곳이 없도다.
청봉착어:俗에서도 찾을 수 없고 眞에서도 찾을 수 없으니
알음알이를 모두 떠나야 참을 보리라
비록 그러하나 진속(眞俗)이 둘 아니라
일체에 두루한데 알 수 없는 물건이로다.
무애심:
끝부분 야부스님 일부부터 음성법문자료가 잘려서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