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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사 9:1-7)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시리아는 2011년부터,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내전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정부군과 반군 그리고 IS와 쿠르드족, 더 나아가, 터키, 이스라엘, 사우디, 이란 등 중동의 강자들이 직접 개입하고, 러시아와 미국이 그 뒤를 받치는 국제전으로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8년째 이어지는 내전으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제구호단체인 유니세프는 “어떤 말로도 고통을 제대로 담을 수 없다”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시리아의 15살 소년은 “여러분의 아이들이 이런 곳에 산다고 상상해 보세요, 용납할 수 있겠어요”라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했습니다.
전쟁은 참혹합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전쟁을 직접 겪은 나라입니다.
다시는 그런 아픔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강대국인 앗수르는 영토 확장을 위해, 정복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하여, 북이스라엘과 아람은 반앗수르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남유다는 이 동맹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것은 북이스라엘에서 볼 때, 배신행위였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은 남유다를 공격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에, 같은 민족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아람과 연합하여 남유다를 침략하였고, 남유다는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과 아람을 멸망시켰습니다.
이렇게 하여, 남유다는 일단 위기는 넘겼지만 앗수르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백성들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그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강대국 로마에 의해, 이스라엘은 주권을 잃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저항을 했지만, 모든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핍박과 학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일어설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로마에 의해 세워진 유대의 왕들은 하나같이 부정한 사람들이었고, 로마의 앞잡이였습니다.
헤롯 왕은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세례 요한마저도 끔찍하게 처형하는 악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제사장들도 자기들의 이득만 생각하였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교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정말 희망이라곤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암담한 상황이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둠뿐이었습니다. 절망과 낙심뿐이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사야 9장을 보면, 그들이 당하던 고통과 좌절을 드러내는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1절에 “고통, 흑암, 멸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2절에는 “흑암, 사망, 그늘진 땅”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4절에는 “무겁게 멘 멍에, 어깨의 채찍, 그 압제자의 막대기”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5절에는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 백성들의 삶은 전쟁과 압제, 고통과 절망으로 얼룩진 삶이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참된 자유와 평화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크나큰 절망과 고통이 그들을 짓눌렀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아멘.
이 말은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옛적에는 주님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받게 버려두셨으나, 그 뒤로는 주님께서 서쪽 지중해로부터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어떻습니까?
참 살기 좋은 사회입니까?
아무 염려도 없고, 걱정거리도 없고, 좋은 일들만 일어납니까?
돌이켜보면, 국내외적으로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도 세계 구석구석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와 미국의 학교에서의 총기 난사들, 나쁜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납니다.
굶주림 때문에 수많은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죽어 가고 있습니다.
환경오염은 심각합니다.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늘 쓰고 다녀야 합니다.
아무 물이나 마실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덕과 윤리는 땅에 떨어져, 심각한 성적 타락과 가치관의 혼돈으로 세상이 무질서해져만 갑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희망적인 일보다는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둡고 쓸쓸한 이이야기들을 들으면, 우리 마음도 어두워집니다.
여러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흑암의 세력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어디에서 우리는 희망을 찾아야 합니까?
여러분! 북이스라엘의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앗수르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살던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 끌려갔습니다.
학대와 굶주림과 학살을 당하였습니다.
그것은 고통이었고, 흑암이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스불론, 납달리 땅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 지역은 전쟁의 피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모든 땅들이 황폐화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파괴되었습니다. 죽음과 절망뿐이었습니다.
더 이상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며, 강대국을 의지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목이 곧아, 스스로를 의지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죄의 결과였습니다.
불신앙과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벼랑 끝에 놓여 있는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절망에 빠진 유대 백성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 주었습니다.
3-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아멘.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 주님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주님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입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아멘.
이 말은 “침략자의 군화와 피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추수하는 즐거움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투에 나가서 승리하는 즐거움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대적의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무겁게 맨 짐을 내려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어깨에 지워진 멍에와 채찍과 막대기를 꺾어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제하여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은 흑암 가운데서 고통받고 있는 그들에게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모든 절망과 죽음이 물러가고 소망과 생명의 역사가 있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은총의 메시지였습니다.
여러분! 가장 큰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한 아기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아멘.
이사야 선지자는 한 아기가 태어나 장성하여 평강의 왕으로 유대를 다스릴 때가 온다는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 때에 유대의 위기는 사라지고, 성군 다윗이 다스릴 때처럼, 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언은 흑암의 권세에 억눌리며, 사망의 그늘의 땅에 살아가고 있는 유대 백성들에게는 너무나 희망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이 아기는 그 당시에는 유다왕 아하스의 아들인 히스기야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등장은, 곧 유다의 회복과 외세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다윗 왕국의 재건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의 놀라운 희망적 메시지의 선포였고, 그 시대에 이루어지는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하스 왕 시대에는 어둡고 그늘진 시대에 빛을 비춰 줄 “한 아기”를 히스기야 왕의 등장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4:12-16절을 보면,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직접 이사야를 통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히스기야 왕이 위대한 왕이었지만 이사야가 예언한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사9:6)고 하기에 너무나도 부족한 왕이었습니다.
“기묘자”라는 말은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는 신비로우신 분, 훌륭하신 분, 놀라우신 분, 설명할 수 없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저 “놀랍다”라는 말 밖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사”라는 말은 “놀라우신 지혜를 가지고 문제를 잘 풀어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언제나 분별력을 가지고 백성의 이익을 위해 조언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을 아시고, 그 고통을 해결하여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우리의 문제를 도와주시고,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 주시고,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도와 주고 싶어도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으며, 우리를 고통과 환난 가운데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각종 병든 자들과 장애인들을 다 고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셨습니다.
주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일은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히스기야 왕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영존하신 아버지”라는 말은 아버지처럼 자신의 백성들을 부양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큰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의 우리를 돌보시고 사랑하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로서, 주님은 변함없이, 영원히,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평강의 왕”이라는 말은 백성에게 평화를 보장해 주는 왕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이루실 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과의 사이에, 화해를 이루시려고 오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스스로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평화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고, 이웃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사야의 예언은 히스기야 왕에게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하게 다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사망을 물리쳤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어두움을 물리쳤습니다.
이미 다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빛 가운데 사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어둡고 캄캄하고 그늘진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8:12절을 보면,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빛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어둠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빛이 아닌 어둠을 따라가다 보면, 앞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넘어지기도 하고, 온갖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세상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아닌 세상을 따라가다 보면, 무질서와 혼란 속에,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만 만날뿐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따라가던 사람들은 빛으로 오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습니다.
어둠 속을 헤매던 백성들은 큰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
요한복음 1:9-12절을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죽음과 공포와 절망의 역사는 더욱 짙어만 가고, 희망의 빛은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된 사상과 거짓 영성으로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고 있습니다.
이단들은 더욱 활개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흑암 중에 거하는 우리에게,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우리에게 큰 빛이 비취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둠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결코 빛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음으로 인하여, 참된 자유를 누려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날로 우리의 상황이 어려워진다고 해도 절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경제적인 상황이 어렵다고 모든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께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건강하고,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빛이 비추어지는 곳에 즐거움이 있고, 풍성함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의와 공의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살아가기 힘든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흑암에 거한 모든 백성들에게 빛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여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더하여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고통을 거두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복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심으로 이 땅의 모든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즐거움을 성령 안에서 넘치도록 누리게 하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나라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누가 이 세상의 질서를 회복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핵 위험을 막아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에이즈와 우리 시대의 다른 전염병을 박멸시킬 수 있겠습니까?
누가 홀로 세상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
그 유일한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7절 말씀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아멘.
이 말씀은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열심이나 노력의 결과에 의하여, 이 세상은 좋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셔야 합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행복을 주시고, 풍성한 복을 주셔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의 심령 속에, 우리의 가정 위에, 우리 교회와 민족 위에 살아 계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새 일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도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여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주님은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참 자유와 평강, 기쁨을 이미 주셨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열심히 이루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도와주시면 사는 길이 있고, 축복받는 길이 있고, 극적인 역전승의 길이 있습니다.
주님은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새 일을 행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자 하오니
우리를 붙들어주옵소서.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여 주시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여 주시고,
잘못된 길로 나아가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죄악에 굴복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늘 승리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