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환인은 천부인 세 개를 환웅에게 주어 인간 세계를 다스리도록 했다.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턱에 있는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한다. 그리고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고 이른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 왕검조선] 중에서
하늘이 넓고 산이 많은 이 땅에서 흔하디 흔한 것이 구름이다. 하늘이 높으면 높은 대로, 산이 낮으면 낮은 대로, 구름은 이 땅이 시작할 때부터 그렇게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다. 천가지 만가지로 변하는 것이 구름인지라 그것을 나타내는 모양도 한 두 가지일 수 없었다. 일단 구름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과 문양화 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후자는 다시 유운(流雲), 점운(點雲), 비운(飛雲), 완자운(卍字雲), 보운(寶運) 등으로 나뉘어진다. 유운 문양은 흘러가는 구름의 모양을 나타낸 것이고, 점운 문양은 점점으로 흩어진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비운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와 한대(漢代)에 걸쳐 발생한 용당초문(龍唐草紋)에서 발전한 것으로 바람에 날리는 구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완자문은 일만을 뜻하는 ‘萬’의 고식 표현인 ‘卍’자로 문양화 된 모습을 말하며, 보운은 통일신라 이후 서역의 보상당초문(寶相唐草紋)의 영향으로 꽃무늬 형식을 띤 구름문양을 가리킨다.
그 의미도 단순히 하늘을 나타내는 것부터, 천상계를 상징하는 것,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를 뜻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천상계의 신비함을 상징하며 동시에 하늘과 땅을 왕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도구로서의 의미가 가장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천장에 나타난 구름이 그러하며, 북부여의 건국시조 해모수가 유화와의 사이에서 주몽을 잉태한 후 하늘로 타고 돌아갔다는 붉은 구름이 또한 그 예이다.
예부터 사람들은 구름을 보고 하늘의 뜻을 헤아리고 그를 통해 한 해의 운을 점쳤다.
또한 자신들이 사용하는 그릇과 의복에 그 문양을 새겨 넣음으로써 구름의 상서로움이 자신에게 미치기를 기도하였다. 있는 듯 하면서도 없고, 멈춰선 듯 하면서도 끊임없이 흐르는 구름의 모습을 통해 삶의 이치를 배워갔던 것이다.
글_김형진
꽃구름무늬(積雲紋)
완자구름무늬(卍字雲紋)
쌍꼬리여의구름무늬(寶雲紋)
꽃구름무늬(積雲紋)
덩굴구름무늬(唐草雲紋)
창덕궁 주합루 앞 돌계단
쌍꼬리여의구름무늬(寶雲紋)
구름(雲) 2-1-1
제주도 천지개벽 신화에서 구름은 하늘과 땅이 열리는 1차 개벽에 이어 2차 개벽이 시작할 때 오방(五方)의 시작을 열어준다. 즉, 동으로 청구름, 서로 백구름, 남으로 적구름, 북으로 흑구름, 중앙으로는 황구름이 내리운다.
2-1-2 신라 헌강왕이 개운포에 놀러 나왔다가 처용을 만날 때도 구름을 통해 하늘의 뜻을 헤아리는 장면이 나온다.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서 길을 잃게 되자 헌강왕은 옆에 있던 일관에게 그 뜻을 점치게 하는데 일관(日官)이 ‘이것은 동해 용의 조화’라고 대답하자 왕은 용을 위해 그 자리에 절을 지을 것을 명한다.
봉황 鳳凰 성인의 출현. 태평성세. 경사. 왕. 황후. 여인
봉황무늬 암막새. 통일신라시대
이날 사염리에 있는 알영정 가에 계룡이 나타나서
왼쪽 갈비에서 어린 계집애를 낳았다. 얼굴과 모습이 매우 고왔으나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에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져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 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중에서
봉황은 용과 학 사이에서 나왔다. 그 생김새는 닭의 주둥이,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 모양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도상에 나타나 있는 모습은 제각각이다.
확실한 것은 상서롭고 아름다운 상상의 새라는 것이다. 그러나 봉황은 어떤 생물이 신령화된 것이라기보다는 용과 마찬가지로 자연현상, 특히 바람이 의인화되어 생긴 상징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봉황의 기원을 풍신(風神)에 두는 이유는 봉(鳳)자가 풍(風)자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봉황은 태양을 마주하는 조양(朝陽) 골짜기의 단혈산(丹穴山)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해(四海)의 밖을 날아 곤륜산(崑崙山)을 지나 지주(砥柱)의 물을 마시고, 약수(弱水)에 깃을 씻고 저녁에 풍혈(風穴)에서 잔다. 그리고 5색의 깃털 무늬를 지니고 울음소리는 5음을 내며, 오동나무에 깃들이고, 대나무의 열매를 먹고 산다고 한다.
봉황은 동방 군자의 나라, 즉 우리나라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 고대에는 봉황의 상징이 중국처럼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라시조 혁거세의 왕후 알영이 계룡(鷄龍)의 딸인데, 혹시 이 계룡이 봉황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볼 뿐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나 삼국시대 전돌에 봉황이 보이기는 하지만, 성군의 상징으로 봉황이 본격적으로 많이 사용된 것은 고려조 이후, 특히 조선왕조가 열리게 되면서부터이다.
봉황은 성천자가 출현하거나 성군이 덕치(德治)를 펼쳐 천하가 태평할 때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는데, 모든 새들의 군주이므로 이 때 뭇 새들이 따라 모인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군왕은 자신의 치세 때에 봉황이 나타나기를 고대하였다.
또한 봉황의 생김새나 행동거지는 제왕의 속성과 같다 하여, 그 자체로 군왕을 상징하기도 한다. 궁궐 전각의 기둥이나 천장, 왕의 수레나 흉배 등 궁궐 장식에 봉황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현재 우리나라의 대통령 문장과 국새에도 봉황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금슬 좋은 부부, 혹은 여인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에 부인들의 머리장신구나 혼례복, 혼수장롱에도 많이 보인다.
글_유나영
봉황무늬 암막새. 통일신라시대
문자도(文字圖)
고구려 금동봉형장식. 삼국시대
봉선. 조선시대. 궁중유물전시관 소장.
봉황(鳳凰) 1-4-1
그래서 「시경(詩經)」에서는 “봉황이 우네, 저 높은 언덕에서. 오동나무가 자라네. 저 조양(朝陽)에서…”라고 노래하고 있다.
1-4-2 여기에는 약간의 까닭이 있다. 1998년 새로 국새를 제작할 당시 원래 유력한 후보였던 용이 기독교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힌 것이다. 진정서에 표시된 주된 반발 이유는 “하필이면 전형적으로 사탄을 상징하는 동물을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물에 넣느냐”였다. 이제 동양의 용과 서양의 용조차 구별할 수 없는 글로벌 시대가 된 것이다.
문양은 그 시대의 질서이자 얼굴 談笑 一
문양사 전반에 관한 책을 많이 집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책을 집필하셨습니까? ‘문양’의 한자어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紋樣’과 ‘文樣’이 있지요. 말 그대로 문양이란 말에는 순수한 ‘패턴(Pattern)’으로서의 의미와 ‘픽토그라피(pictography)’의 의미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제가 83년에 처음 「한국문양사」를 출간할 때 접근한 방식은 미술양식사적인 방향이었습니다. 유물에 새겨진 문양은 그대로 기록과 마찬가지 역할을 하지요. 편년정리에 중요한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의 성격을 탐구하는 데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전통문양에 나타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성격이라면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요?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민족 고유의 문화라고 할 때 ‘고유’란 말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문화든지 순수하게 ‘고유’란 말은 없습니다. 지역마다, 또 시대마다 나름대로 주변 문화를 받아들이고 또 전해주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의 경우도 ‘고유’보다는 ‘토착’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민족의 경우 북방민족이나 단군신화에서 영향을 받은 ‘곰’ 신앙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보기에는 ‘태양’과 그것을 상징하는 ‘새’의 이미지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물에도 많은 이미지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태양 이미지는 태극, 더 나아가 우주를 상징하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연꽃 문양의 경우도 원래 태양 모티브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에 그 쓰임새를 보면 문양에서 우리 문화의 성격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원형이 파괴되어 버린 것도 많지요.
전통 문양의 변형이나 현대적인 표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하지만 지금까지의 문양도 고정된 형태로 남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변해오지 않았습니까? 물론 동일한 문양을 표현하는 데도 시대마다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재료나 그 시대의 종교, 사회의 성격에 맞게 달라졌을 뿐입니다. 같은 문양이라도 돌에 새기느냐, 도자기에 그려 넣느냐에 따라 기법이 달라지고 그에 맞는 형태가 있기 마련입니다. 즉, 추상성, 생략 등에 있어 그 정도를 달리하며 표현한 것이지요. 또 문양은 그것이 표상하는 사회적 의미와 항상 함께 움직입니다. 불교의 융성기와 쇠퇴기 때 보이는 연꽃 문양이 같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문양에서 의미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옛날엔 의미가 없는 문양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의미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한복이나 가구에 들어가는 길상문의 경우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것 또한 문양을 잘못 알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요전에 한창 시끄러웠던 ‘한복입기운동’이 오히려 한복을 버려놓은 것 같습니다. 한복이라고 모조리 문양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지요. 예전에 누가 아무 때나 입는 한복에 문양을 집어넣었습니까? 명절에나 입는 한복에만 특별히 새겨넣었지요. 그런 것 일일이 따지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한다면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은 왜 지킵니까. 하긴 따지고 보면 명절의 의미도 많이 사라지긴 했지요(웃음). 또 요즘 TV에서 사극을 보면 옛날에 제기에나 쓰였던 그릇들을 쓰고 있어요. 무덤에서 나온 그릇들과 실생활에서 썼던 그릇조차 구별하기 힘든 세상이 된 것입니다. 문양의 의미가 살아있다고 해도 그 의미를 잘못 알고 용도에 맞게 쓰지 않으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맞는 말씀이긴 하지만 요즘 세상에 문양의 의미를 모두 따져가며 사용하길 바라는 것은 조금 힘들겠지요. 의미의 상실이 어쩌면 우리 시대 문양의 특징적인 성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통문양의 의미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십시오. 문양은 질서입니다. 그 시대의 얼굴이지요. 옛 유물들에 나타나는 문양을 살펴보면 그 시대를 알 수 있습니다. 시대가 어지러워지면 가장 먼저 문양이 난잡해지지요. 예전의 균형이 깨지고 과장된 형태가 나타납니다. 신라말에 보이는 문양들이 좋은 예입니다. 전성기 때의 조화와 통일성이 사라지고 화려함만을 추구한 기형적인 문양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국가가 세워지고 문물이 새로 정비되어도 문양에 가장 먼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문양에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고 계승해나갈 때, 우리 문화도 그만큼 다채롭고 풍요로워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임영주 문화재전문위원 글_박활성 기자
닭 鷄 태양. 빛의 전령. 시보(時報).
질서. 신성. 축귀. 출세. 용맹. 벽사
화조책거리. 조선시대.
천황닭이 목을 들고, 지황닭이 날개를 치고, 인황닭이 꼬리를 쳐 크게 우니, 갑을 동방에서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제주도 서사무가[천지왕본풀이]중에서
새벽에 수탉이 우는 까닭은 자신의 지배구역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아침에 닭이 우는 것이 아니라, 닭의 울음이 아침을 가져오는 것으로 인식했다.
전설에 따르면 아침은 이렇게 시작한다. 먼저 바다 건너 동해 끝의 부상(扶桑) 꼭대기에 앉아있는 옥계(玉鷄)라는 닭이 처음 울기 시작하면, 도도산(桃都山)의 거대한 복숭아 나무에 살고 있는 금계(金鷄)가 따라 운다. 그 후 명산 대천의 석계(石鷄)들이 울고, 이어 천하의 모든 닭들이 따라 운다.
그러면 태양이 6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과 땅 사이의 광막한 공간을 달려, 양곡(暘谷)을 나와 함지(咸池)에서 목욕을 하고 부상 꼭대기까지 오르는 것이다.
한편 도도산에는 인간 세상을 횡행하는 귀신들을 다스리는 신도와 울루 형제가 살고 있는데, 도도산 금계가 우는 소리에 황야를 떠돌던 영혼들이 귀문(鬼門) 앞으로 모여들어 이들 형제의 검열을 받는다고 한다.
여기서 닭은 아침을 열어 세상에 광명을 가져오고, 밤의 어둠과 함께 귀신을 물리치는 서조(瑞鳥)인 것이다.
예로부터 닭의 울음은 때를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욱이 흐린 날에는 닭의 울음소리에 의지해 시각을 측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조상의 제사도 닭의 울음소리를 기준으로 거행하였다. 이렇게 앞으로 다가올 때를 미리 알려주는 닭의 능력은 사람들에게 예지력으로 다가왔으며 자연 닭에게 신통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위에 나온 제주도 서사무가 [천지왕본풀이]에서 닭은 신통한 능력을 넘어서 천지개벽을 예고하는 막대한 임무를 띄기도 한다.
이에 의하면 천지개벽은 닭 우는 어느날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이때 울었던 천황닭, 지황닭, 인황닭은 각각 하늘, 땅, 사람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특히 신라인들은 닭과 인연이 깊기로 유명하다. 천마총에 달걀을 묻은 신라인들이 과연 달걀에서 새 생명이 부화하듯 죽은 자의 소생을 기다렸을지, 아니면 저승가는 길양식을 장만해 주었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시림(始林) 숲에서 김알지의 탄생을 알린 것이 흰 닭이었으므로 이를 기념하여 시림은 계림(鷄林)이 되었으며 이어 신라의 국호가 된 것은 기록에 남아있다 이때 닭의 울음은 밤에서 아침으로의 시간적 이행을 은유하여, 신라의 건국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신화적 시간에서 역사적 시간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글_유나영
계도(鷄圖). 장승업. [산수영모십첩병풍] 중에서. 서울대박물관 소장.
화조책거리. 조선시대.
계도(鷄圖). 조선시대.
닭(鷄) 1-2-1
[천지왕본풀이]는 제주도에서도 지역에 따라 여러 판본이 전해지며 천지개벽의 모습도 그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앞에 나온 정주병본 [천지왕본풀이]의 경우는 직접적으로 닭을 언급하고 있으나 다른 판본에는 대부분 그 모습이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천지개벽의 모습을 새의 형상을 빌어 이야기하는 점은 공통적이다. 다음은 고대중본 [천지왕본풀이]에 나타나는 대목이다. “동방으로 머리숫제 니염 들여옵대다. 경신서방으로 촐리밋제 꼴리를 치고 갑오남방으로 건술하니 날개익제 날개 들려옵니다.”
1-2-2 김알지의 이야기를 계속하면, 「삼국유사」에는 그가 황금궤짝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했고, ‘알지’가 ‘아기’의 뜻이라고 밝혀져 있다. 하지만 예전부터 심마니들이 사용하는 말을 살펴보면 ‘닭’을 뜻하는 용어로 ‘기애기’, ‘끼애기’, ‘끼야기’라는 것이 있으므로, 김알지는 ‘기애기’의 이두식 표기라는 설도 가능하다. ‘기애기’는 ‘닭의 아기’ 즉 ‘병아리’가 되는 셈이다. 용왕의 아들 석탈해도 궤짝을 열고 나왔지만 후에 자신은 본래 알에서 깨어났다고 주장했으며, 박혁거세는 분명히 자주빛 알에서 태어났고, 그의 처인 알영(閼英)은 닭의 부리를 한 계룡(鷄龍)의 딸이었으니 그렇다면 신라인들이야말로 신성한 닭의 후손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박혁거세’는 우리말로 광명을 뜻하며, 알의 원형은 곧 태양을 상징한 것이기도 하다. 닭은 빛의 도래를 예고하는 태양의 새였으므로 아마도 이들은 스스로 태양과 광명의 자손을 자처했으며 닭은 그 전령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음악해설- 산조는 논리적인 음악이다. 가장 작은 단위는 한 장단에 있으며, 몇 장단이 모여서 일정한 감정을 단락 phrase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그 단락은 슬프거나 기쁜 감정의 단위가 되어서 발전해 나간다. (젊은 산조)는 '하나~둘' 하고 입장단을 치면서 들어야하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작은 장단에만 신경이 쓰여 단락까지는 미처 고려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서 안타까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이 (젊은 산조)는 아기자기한 작은 것들로 꽉 채워져 있어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 꽉 차있는 풋풋한 음악을, 느슨하고 권태로운 것으로 변모시키는 과정이 (젊은산조)를 연주하는 이들을 지향해야 할 과제이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덜어낸다'고 말한다. 치열한 욕망이 삭아들고, 감정이 덜어내져 덤덤한 흐름을 지니게 될 때, 비로소 (산조)가 되는 것이다. 이번 음반에 수록된 산조는 우리가 주목하는 것에 값 할 만큼 썩 젊다.
* 가야금 산조
가야금 산조는 이지영의 것이다. 이지영의 소리는 오랜 숙련을 거친 견실한 탄법이 돋보인다. 당당한 우조로 진양조의 첫머리를 자신 있게 내는 기계가 좋다. 열한 번 째 장단부터는 계면조 단락이 되어 정서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로 오면서 그가 가야금에 쏟아온 공력이 확연히 드러난다. 휘모리의 평조로 변조되는 부분이 특히 들을만하다
이에 환인은 천부인 세 개를 환웅에게 주어 인간 세계를 다스리도록 했다.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턱에 있는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한다. 그리고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고 이른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 왕검조선] 중에서
하늘이 넓고 산이 많은 이 땅에서 흔하디 흔한 것이 구름이다. 하늘이 높으면 높은 대로, 산이 낮으면 낮은 대로, 구름은 이 땅이 시작할 때부터 그렇게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다. 천가지 만가지로 변하는 것이 구름인지라 그것을 나타내는 모양도 한 두 가지일 수 없었다. 일단 구름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과 문양화 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후자는 다시 유운(流雲), 점운(點雲), 비운(飛雲), 완자운(卍字雲), 보운(寶運) 등으로 나뉘어진다. 유운 문양은 흘러가는 구름의 모양을 나타낸 것이고, 점운 문양은 점점으로 흩어진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비운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와 한대(漢代)에 걸쳐 발생한 용당초문(龍唐草紋)에서 발전한 것으로 바람에 날리는 구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완자문은 일만을 뜻하는 ‘萬’의 고식 표현인 ‘卍’자로 문양화 된 모습을 말하며, 보운은 통일신라 이후 서역의 보상당초문(寶相唐草紋)의 영향으로 꽃무늬 형식을 띤 구름문양을 가리킨다.
그 의미도 단순히 하늘을 나타내는 것부터, 천상계를 상징하는 것,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를 뜻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천상계의 신비함을 상징하며 동시에 하늘과 땅을 왕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도구로서의 의미가 가장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천장에 나타난 구름이 그러하며, 북부여의 건국시조 해모수가 유화와의 사이에서 주몽을 잉태한 후 하늘로 타고 돌아갔다는 붉은 구름이 또한 그 예이다.
예부터 사람들은 구름을 보고 하늘의 뜻을 헤아리고 그를 통해 한 해의 운을 점쳤다.
또한 자신들이 사용하는 그릇과 의복에 그 문양을 새겨 넣음으로써 구름의 상서로움이 자신에게 미치기를 기도하였다. 있는 듯 하면서도 없고, 멈춰선 듯 하면서도 끊임없이 흐르는 구름의 모습을 통해 삶의 이치를 배워갔던 것이다.
글_김형진
꽃구름무늬(積雲紋)
완자구름무늬(卍字雲紋)
쌍꼬리여의구름무늬(寶雲紋)
꽃구름무늬(積雲紋)
덩굴구름무늬(唐草雲紋)
창덕궁 주합루 앞 돌계단
쌍꼬리여의구름무늬(寶雲紋)
구름(雲) 2-1-1
제주도 천지개벽 신화에서 구름은 하늘과 땅이 열리는 1차 개벽에 이어 2차 개벽이 시작할 때 오방(五方)의 시작을 열어준다. 즉, 동으로 청구름, 서로 백구름, 남으로 적구름, 북으로 흑구름, 중앙으로는 황구름이 내리운다.
2-1-2 신라 헌강왕이 개운포에 놀러 나왔다가 처용을 만날 때도 구름을 통해 하늘의 뜻을 헤아리는 장면이 나온다.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서 길을 잃게 되자 헌강왕은 옆에 있던 일관에게 그 뜻을 점치게 하는데 일관(日官)이 ‘이것은 동해 용의 조화’라고 대답하자 왕은 용을 위해 그 자리에 절을 지을 것을 명한다.
봉황 鳳凰 성인의 출현. 태평성세. 경사. 왕. 황후. 여인
봉황무늬 암막새. 통일신라시대
이날 사염리에 있는 알영정 가에 계룡이 나타나서
왼쪽 갈비에서 어린 계집애를 낳았다. 얼굴과 모습이 매우 고왔으나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에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져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 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중에서
봉황은 용과 학 사이에서 나왔다. 그 생김새는 닭의 주둥이,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 모양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도상에 나타나 있는 모습은 제각각이다.
확실한 것은 상서롭고 아름다운 상상의 새라는 것이다. 그러나 봉황은 어떤 생물이 신령화된 것이라기보다는 용과 마찬가지로 자연현상, 특히 바람이 의인화되어 생긴 상징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봉황의 기원을 풍신(風神)에 두는 이유는 봉(鳳)자가 풍(風)자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봉황은 태양을 마주하는 조양(朝陽) 골짜기의 단혈산(丹穴山)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해(四海)의 밖을 날아 곤륜산(崑崙山)을 지나 지주(砥柱)의 물을 마시고, 약수(弱水)에 깃을 씻고 저녁에 풍혈(風穴)에서 잔다. 그리고 5색의 깃털 무늬를 지니고 울음소리는 5음을 내며, 오동나무에 깃들이고, 대나무의 열매를 먹고 산다고 한다.
봉황은 동방 군자의 나라, 즉 우리나라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 고대에는 봉황의 상징이 중국처럼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라시조 혁거세의 왕후 알영이 계룡(鷄龍)의 딸인데, 혹시 이 계룡이 봉황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볼 뿐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나 삼국시대 전돌에 봉황이 보이기는 하지만, 성군의 상징으로 봉황이 본격적으로 많이 사용된 것은 고려조 이후, 특히 조선왕조가 열리게 되면서부터이다.
봉황은 성천자가 출현하거나 성군이 덕치(德治)를 펼쳐 천하가 태평할 때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는데, 모든 새들의 군주이므로 이 때 뭇 새들이 따라 모인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군왕은 자신의 치세 때에 봉황이 나타나기를 고대하였다.
또한 봉황의 생김새나 행동거지는 제왕의 속성과 같다 하여, 그 자체로 군왕을 상징하기도 한다. 궁궐 전각의 기둥이나 천장, 왕의 수레나 흉배 등 궁궐 장식에 봉황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현재 우리나라의 대통령 문장과 국새에도 봉황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금슬 좋은 부부, 혹은 여인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에 부인들의 머리장신구나 혼례복, 혼수장롱에도 많이 보인다.
글_유나영
봉황무늬 암막새. 통일신라시대
문자도(文字圖)
고구려 금동봉형장식. 삼국시대
봉선. 조선시대. 궁중유물전시관 소장.
봉황(鳳凰) 1-4-1
그래서 「시경(詩經)」에서는 “봉황이 우네, 저 높은 언덕에서. 오동나무가 자라네. 저 조양(朝陽)에서…”라고 노래하고 있다.
1-4-2 여기에는 약간의 까닭이 있다. 1998년 새로 국새를 제작할 당시 원래 유력한 후보였던 용이 기독교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힌 것이다. 진정서에 표시된 주된 반발 이유는 “하필이면 전형적으로 사탄을 상징하는 동물을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물에 넣느냐”였다. 이제 동양의 용과 서양의 용조차 구별할 수 없는 글로벌 시대가 된 것이다.
문양은 그 시대의 질서이자 얼굴 談笑 一
문양사 전반에 관한 책을 많이 집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책을 집필하셨습니까? ‘문양’의 한자어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紋樣’과 ‘文樣’이 있지요. 말 그대로 문양이란 말에는 순수한 ‘패턴(Pattern)’으로서의 의미와 ‘픽토그라피(pictography)’의 의미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제가 83년에 처음 「한국문양사」를 출간할 때 접근한 방식은 미술양식사적인 방향이었습니다. 유물에 새겨진 문양은 그대로 기록과 마찬가지 역할을 하지요. 편년정리에 중요한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의 성격을 탐구하는 데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전통문양에 나타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성격이라면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요?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민족 고유의 문화라고 할 때 ‘고유’란 말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문화든지 순수하게 ‘고유’란 말은 없습니다. 지역마다, 또 시대마다 나름대로 주변 문화를 받아들이고 또 전해주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의 경우도 ‘고유’보다는 ‘토착’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민족의 경우 북방민족이나 단군신화에서 영향을 받은 ‘곰’ 신앙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보기에는 ‘태양’과 그것을 상징하는 ‘새’의 이미지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물에도 많은 이미지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태양 이미지는 태극, 더 나아가 우주를 상징하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연꽃 문양의 경우도 원래 태양 모티브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에 그 쓰임새를 보면 문양에서 우리 문화의 성격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원형이 파괴되어 버린 것도 많지요.
전통 문양의 변형이나 현대적인 표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하지만 지금까지의 문양도 고정된 형태로 남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변해오지 않았습니까? 물론 동일한 문양을 표현하는 데도 시대마다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재료나 그 시대의 종교, 사회의 성격에 맞게 달라졌을 뿐입니다. 같은 문양이라도 돌에 새기느냐, 도자기에 그려 넣느냐에 따라 기법이 달라지고 그에 맞는 형태가 있기 마련입니다. 즉, 추상성, 생략 등에 있어 그 정도를 달리하며 표현한 것이지요. 또 문양은 그것이 표상하는 사회적 의미와 항상 함께 움직입니다. 불교의 융성기와 쇠퇴기 때 보이는 연꽃 문양이 같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문양에서 의미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옛날엔 의미가 없는 문양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의미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한복이나 가구에 들어가는 길상문의 경우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것 또한 문양을 잘못 알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요전에 한창 시끄러웠던 ‘한복입기운동’이 오히려 한복을 버려놓은 것 같습니다. 한복이라고 모조리 문양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지요. 예전에 누가 아무 때나 입는 한복에 문양을 집어넣었습니까? 명절에나 입는 한복에만 특별히 새겨넣었지요. 그런 것 일일이 따지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한다면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은 왜 지킵니까. 하긴 따지고 보면 명절의 의미도 많이 사라지긴 했지요(웃음). 또 요즘 TV에서 사극을 보면 옛날에 제기에나 쓰였던 그릇들을 쓰고 있어요. 무덤에서 나온 그릇들과 실생활에서 썼던 그릇조차 구별하기 힘든 세상이 된 것입니다. 문양의 의미가 살아있다고 해도 그 의미를 잘못 알고 용도에 맞게 쓰지 않으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맞는 말씀이긴 하지만 요즘 세상에 문양의 의미를 모두 따져가며 사용하길 바라는 것은 조금 힘들겠지요. 의미의 상실이 어쩌면 우리 시대 문양의 특징적인 성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통문양의 의미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십시오. 문양은 질서입니다. 그 시대의 얼굴이지요. 옛 유물들에 나타나는 문양을 살펴보면 그 시대를 알 수 있습니다. 시대가 어지러워지면 가장 먼저 문양이 난잡해지지요. 예전의 균형이 깨지고 과장된 형태가 나타납니다. 신라말에 보이는 문양들이 좋은 예입니다. 전성기 때의 조화와 통일성이 사라지고 화려함만을 추구한 기형적인 문양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국가가 세워지고 문물이 새로 정비되어도 문양에 가장 먼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문양에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고 계승해나갈 때, 우리 문화도 그만큼 다채롭고 풍요로워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임영주 문화재전문위원 글_박활성 기자
닭 鷄 태양. 빛의 전령. 시보(時報).
질서. 신성. 축귀. 출세. 용맹. 벽사
화조책거리. 조선시대.
천황닭이 목을 들고, 지황닭이 날개를 치고, 인황닭이 꼬리를 쳐 크게 우니, 갑을 동방에서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제주도 서사무가[천지왕본풀이]중에서
새벽에 수탉이 우는 까닭은 자신의 지배구역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아침에 닭이 우는 것이 아니라, 닭의 울음이 아침을 가져오는 것으로 인식했다.
전설에 따르면 아침은 이렇게 시작한다. 먼저 바다 건너 동해 끝의 부상(扶桑) 꼭대기에 앉아있는 옥계(玉鷄)라는 닭이 처음 울기 시작하면, 도도산(桃都山)의 거대한 복숭아 나무에 살고 있는 금계(金鷄)가 따라 운다. 그 후 명산 대천의 석계(石鷄)들이 울고, 이어 천하의 모든 닭들이 따라 운다.
그러면 태양이 6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과 땅 사이의 광막한 공간을 달려, 양곡(暘谷)을 나와 함지(咸池)에서 목욕을 하고 부상 꼭대기까지 오르는 것이다.
한편 도도산에는 인간 세상을 횡행하는 귀신들을 다스리는 신도와 울루 형제가 살고 있는데, 도도산 금계가 우는 소리에 황야를 떠돌던 영혼들이 귀문(鬼門) 앞으로 모여들어 이들 형제의 검열을 받는다고 한다.
여기서 닭은 아침을 열어 세상에 광명을 가져오고, 밤의 어둠과 함께 귀신을 물리치는 서조(瑞鳥)인 것이다.
예로부터 닭의 울음은 때를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욱이 흐린 날에는 닭의 울음소리에 의지해 시각을 측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조상의 제사도 닭의 울음소리를 기준으로 거행하였다. 이렇게 앞으로 다가올 때를 미리 알려주는 닭의 능력은 사람들에게 예지력으로 다가왔으며 자연 닭에게 신통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위에 나온 제주도 서사무가 [천지왕본풀이]에서 닭은 신통한 능력을 넘어서 천지개벽을 예고하는 막대한 임무를 띄기도 한다.
이에 의하면 천지개벽은 닭 우는 어느날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이때 울었던 천황닭, 지황닭, 인황닭은 각각 하늘, 땅, 사람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특히 신라인들은 닭과 인연이 깊기로 유명하다. 천마총에 달걀을 묻은 신라인들이 과연 달걀에서 새 생명이 부화하듯 죽은 자의 소생을 기다렸을지, 아니면 저승가는 길양식을 장만해 주었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시림(始林) 숲에서 김알지의 탄생을 알린 것이 흰 닭이었으므로 이를 기념하여 시림은 계림(鷄林)이 되었으며 이어 신라의 국호가 된 것은 기록에 남아있다 이때 닭의 울음은 밤에서 아침으로의 시간적 이행을 은유하여, 신라의 건국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신화적 시간에서 역사적 시간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글_유나영
계도(鷄圖). 장승업. [산수영모십첩병풍] 중에서. 서울대박물관 소장.
화조책거리. 조선시대.
계도(鷄圖). 조선시대.
닭(鷄) 1-2-1
[천지왕본풀이]는 제주도에서도 지역에 따라 여러 판본이 전해지며 천지개벽의 모습도 그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앞에 나온 정주병본 [천지왕본풀이]의 경우는 직접적으로 닭을 언급하고 있으나 다른 판본에는 대부분 그 모습이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천지개벽의 모습을 새의 형상을 빌어 이야기하는 점은 공통적이다. 다음은 고대중본 [천지왕본풀이]에 나타나는 대목이다. “동방으로 머리숫제 니염 들여옵대다. 경신서방으로 촐리밋제 꼴리를 치고 갑오남방으로 건술하니 날개익제 날개 들려옵니다.”
1-2-2 김알지의 이야기를 계속하면, 「삼국유사」에는 그가 황금궤짝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했고, ‘알지’가 ‘아기’의 뜻이라고 밝혀져 있다. 하지만 예전부터 심마니들이 사용하는 말을 살펴보면 ‘닭’을 뜻하는 용어로 ‘기애기’, ‘끼애기’, ‘끼야기’라는 것이 있으므로, 김알지는 ‘기애기’의 이두식 표기라는 설도 가능하다. ‘기애기’는 ‘닭의 아기’ 즉 ‘병아리’가 되는 셈이다. 용왕의 아들 석탈해도 궤짝을 열고 나왔지만 후에 자신은 본래 알에서 깨어났다고 주장했으며, 박혁거세는 분명히 자주빛 알에서 태어났고, 그의 처인 알영(閼英)은 닭의 부리를 한 계룡(鷄龍)의 딸이었으니 그렇다면 신라인들이야말로 신성한 닭의 후손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박혁거세’는 우리말로 광명을 뜻하며, 알의 원형은 곧 태양을 상징한 것이기도 하다. 닭은 빛의 도래를 예고하는 태양의 새였으므로 아마도 이들은 스스로 태양과 광명의 자손을 자처했으며 닭은 그 전령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음악해설- 산조는 논리적인 음악이다. 가장 작은 단위는 한 장단에 있으며, 몇 장단이 모여서 일정한 감정을 단락 phrase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그 단락은 슬프거나 기쁜 감정의 단위가 되어서 발전해 나간다. (젊은 산조)는 '하나~둘' 하고 입장단을 치면서 들어야하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작은 장단에만 신경이 쓰여 단락까지는 미처 고려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서 안타까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이 (젊은 산조)는 아기자기한 작은 것들로 꽉 채워져 있어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 꽉 차있는 풋풋한 음악을, 느슨하고 권태로운 것으로 변모시키는 과정이 (젊은산조)를 연주하는 이들을 지향해야 할 과제이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덜어낸다'고 말한다. 치열한 욕망이 삭아들고, 감정이 덜어내져 덤덤한 흐름을 지니게 될 때, 비로소 (산조)가 되는 것이다. 이번 음반에 수록된 산조는 우리가 주목하는 것에 값 할 만큼 썩 젊다.
* 가야금 산조
가야금 산조는 이지영의 것이다. 이지영의 소리는 오랜 숙련을 거친 견실한 탄법이 돋보인다. 당당한 우조로 진양조의 첫머리를 자신 있게 내는 기계가 좋다. 열한 번 째 장단부터는 계면조 단락이 되어 정서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로 오면서 그가 가야금에 쏟아온 공력이 확연히 드러난다. 휘모리의 평조로 변조되는 부분이 특히 들을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