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응 스님의 선가귀감
21. ‘돈점’의 깨달음과 ‘선교일치’
돈오·선교일치 사상이 한국선종 전통
‘참나·부처’ 같음 깨달으면 돈오
본래 한 물건 없다는 것과 같아
뜻을 얻어서 마음을 닦는 이는
비굴하지 않고 교만하지도 않아
26장은 “옛 덕 높으신 스님이, ‘단지 너의 ‘눈 바른 것’이 귀하지 너의 ‘행리처’는 귀하지 않다’”고 한 내용이다.
서산은 “옛날 앙산(仰山慧寂, 803∼887)이 위산(潙山靈祐, 771∼853)의 질문에 답하기를, ‘‘열반경’40권은 모두 마군의 말이다’고 한 것이 앙산의 바른 눈이다. 앙산이 또 행리처를 묻자 위산이 답하기를, ‘오직 그대의 눈 바른 것이 귀하다’고 한 등의 까닭은 먼저 바른 눈을 연 후에 행리처(行履處)를 설한 것이니, 만일 수행하고 싶으면 먼저 돈오(頓悟)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고 평하였다.
‘위산영우어록’에서 “혜적(慧寂; 앙산이 공안과 하나가 된 상태)한 때에 즉해서 ‘행리’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위산의 대답이다. ‘행리처’란 수행을 말하고, ‘돈오’란 공안의 어구에서 즉시 깨닫는 것이다. 앙산이 탐원응진(耽源應眞, 9세기) 문하에 있을 때, 남양혜충(南陽慧忠, ?~775)이 전한 ‘〇(일원상)’에 대한 97개의 ‘선법’을 받았다. 앙산은 다시 위산을 참례하여 “어느 곳이 ‘참 부처’가 주하는 곳입니까?” 물으니, 위산이 “생각과 생각이 없는 묘함으로 도리어 생각의 신령한 불꽃이 다하여 없어져서 생각이 단지 근원에 돌아가면 자성과 형상이 상주하고 일과 이치가 ‘둘이 아닌 것’이 ‘참 부처’가 ‘여여’한 것이다”고 하니 앙산이 크게 깨달았다.
앙산은 남양의 ‘〇’에 대한 ‘선법’과 위산의 ‘선법’을 전승해서 ‘위앙종’을 성립했는데 신라의 순지(順之, 830~895)선사가 계승했다. 앙산의 설법을 소개한 이유는 ‘〇’ ‘돈오’ ‘선교일치’의 사상이 한국선종의 전통인 것을 밝히기 위해서다.
27장은 “모든 ‘선학자’는 깊이 ‘자신의 마음’을 믿고 ‘스스로 굽히지도 않고 높이지도 않기’를 바란다” 한 것으로, 종밀(宗密, 780~841)의 ‘원각경약소’의 내용이다.
평하시길 “이 마음이 평등하여 본래 ‘범부’와 ‘성인’이 없다. 그러나 사람을 기준하면 ‘미혹함’과 ‘깨달음’, ‘범부’와 ‘성인’이 있다. 스승을 인해서 분심을 내서 문득 ‘참 나’가 ‘부처님’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돈오’다. 왜냐면 ‘스스로 비굴하지 않기’ 때문이다. ‘(혜능)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한 것과 같다. ‘깨달음’을 원인으로 해서 습기를 끊고, ‘범부’가 ‘성인’이 되는 것이 ‘점오’다. 왜냐면 ‘스스로 높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신수)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는다’고 한 것과 같다. ‘비굴’하다는 것은 ‘교학자’의 ‘병’이다. ‘교만’은 ‘선학자’의 ‘병’이다. ‘교학자’는 ‘선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비결이 있는 것을 믿지 않고, 마음이 ‘방편’의 교설에 막혀서 달리 ‘참’과 ‘거짓’을 집착해서 ‘관행’을 닦지 않고 다른 이의 ‘보배’만 세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퇴굴한다. ‘선학자’는 ‘교문’에 수습해서 끊는 바른 길이 있는 것을 믿지 않고, ‘염오’된 습관이 생기해도 ‘참괴’할 줄 모른다. ‘과위’가 비록 처음이지만 흔히 ‘법만’이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높여서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뜻을 얻어서 마음을 닦는 이는 비굴하지도 않고 교만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남종 6조 혜능(638~713)의 ‘돈오’와 북종 신수(606~706)의 게송을 들어서 ‘점수’를 설명하고, ‘교학자’와 ‘선학자’의 편견에 의한 과실을 밝혔다. ‘법만’이란 자신의 깨달음을 높이 평가해서 교만한 것이다. 다시 평하시길 “‘스스로 굽히지도 않고 내세우지도 않는다’는 것은, 대개 ‘처음 마음’을 낼 때 ‘원인’ 속에 ‘결과’의 바다가 모두 갖추어 있는 것이다. 비록 믿음의 ‘한 지위’일지라도 널리 보살의 ‘과위’가 ‘원인’ 속에 통해 있는 것이니 곧 55위다”라고 했다.
청량국사 징관(淸凉澄觀, 738∼839)이 지은 ‘화엄경소초’에서 설한 내용으로, ‘초발심’이 곧 ‘정각’을 성취한다는 것을 말한다. ‘능엄경’에서 대승보살의 수행과위는 55위다. “궁극적으로, ‘금강간혜(金剛乾慧)’의 ‘묘각(妙覺)’은 ‘삼매’에서 ‘지관(止觀)’을 증득하는 것이 ‘바른 관법’이고, 다른 관법은 ‘삿된 관법’이다”라고 정의한다.
[1539호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