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둔 1945년 을유년(乙酉) 음력 2월 3일(양력 3월 17일) 04시, 충남 금산군 진산면 석막리(忠南 錦山郡 珍山面 石幕理) 151번지 달밝골(月明洞)에서 광산 기술자이셨던 부친 정팔성(鄭八成, 1911년生)님과 모친 황길례(黃吉禮, 1919년生 長水 黃氏)님의 7남매 (6남 1녀)중 3남(男)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태어나신 닭밝골은 북위 36도 07분, 동경 127도 21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풍수(風水)적으로 볼 때 명당중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초승달 지역(해가 제일 일찍 뜨고 제일 늦게 지는 반달형의 묘 자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좌로는 계룡산 - 대둔산 -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C자( = 태극) 모양의 산세(山勢)와 우로는 진안 - 무주 - 공주 - 부여로 이어지는 역(逆) C자( = 태극) 모양의 수세(水勢)가 둘러싸고 있는 땅입니다.
옛부터 인자가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다는 전설이 깃든 인대(印大)산에서 닭밝골을 내려다 보면 생가 뒤에 둘러쳐진 산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의자, 즉 보좌의 모양으로 보이며, 생가는 그 보좌위에 앉아 있는 모양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또 우뚝 솟은 코 모양으로 대둔산 줄기가 집 바로 뒤까지 뻗어 내려와 있으며, 집 양옆의 산은 좌청룡, 우백호처럼 둘러서 있는 등 그야말로 입을 가지고 대성할 인물 중의 인물이 날 명당자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문명의 혜택과는 거리가 멀어 화전민들이 쓰다만 다 쓰러져가던 토담집에서 태어나셔야 했으며, 인가(人家)라고는 3집 밖에 없고, 전기가 1979년 초(1979년 2월 12일)에야 비로소 들어갔던 오지(奧地)에서 성장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오히려 {오염되지 않는 하늘과 자연(自然)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퇴락해가는 인류문명과는 상관없는 천혜(天惠)의 땅이었습니다.
태어난 생가는 옛날에 이씨(李氏)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던 곳으로 어머님께서 석막리로 시집왔던 1937년에 이미 지은 지가 100년도 더 되었던 집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 1830년대 경(조선 순조)에 지은 평민 건축물로 화전(火田)민들이 지었던 집으로 추정됩니다.
본관(本貫)은 하동(河東)이며, 문성공(文成公) 정도정(鄭道正)의 후손으로 조선시대 영의정과 대제학을 지낸 대학자 정인지(鄭麟趾)가 배출된 가문입니다.
닭밝골에 태어나시게 된 것은 원래 공주(公州) 사람이었으며 대원군을 배알하기도 했던 조부 정춘백 옹(鄭春伯 翁)이 노름꾼에게 도장을 잘못 빌려주어 빚보증을 서 재산을 탕진하게 되자 지금으로부터 7∼80여년 전(일제시대) 아무도 몰래 간밤에 떡시루 하나와 쌀 한가마 그리고 4형제를 등에 짊어지고 진산 땅(진산면 교촌리 290번지), 다리골로 화전(火田)을 하기 위해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4형제 중의 한분이 아버님이 되시는 정팔성 옹(鄭八成 翁)입니다.
가족사항(家族事項)
정춘백(鄭春伯) - 팔만 +- 仁錫 38년 4월 8일 生 팔근 +- 光錫 八成 --+- 明析 45년 2월 3일 生 순재 +- 奎錫 51년 11월 生 +- 範錫 53년 10월 生 +- 龍錫 60년 3월 3일 生 +- 英子
아버지 3형제(兄弟)
일제 때 공주에서 진산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아버지 3형제가 금을 캤는데 첫째는 대구로 둘째는 일본으로, 아버지는 석막리로 오게 되셨습니다-9502.
첫댓글 감사^^*
^^
오호~~멎져요
감사
감사해요^^
감사^^ 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