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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2 - 몽골의 유래와 어린 테무진이 살아 남기 위한 생존 투쟁!
가오홍레이의 “절반의 중국사” 책에는 “ 몽골인의 조상은 실위로 7세기에 “몽올실위” 가 부르테치노의
인솔하에 아르군강을 떠나 오논강, 케룰렌강, 툴르강의 근원지인 헨티산맥 부르칸 칼둔 초원에서
유목하면서 튀르크, 위구르, 키르키스 및 카타이(거란)에 예속되어 “몽골” 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합니다.
10세기에 들어서면 몽골은 키야트, 자다란, 타이치우트등 유력 씨족을 배출했고 그 외에 동남쪽
내몽골 자치구의 타타르부, 부이르호수의 옹기라트, 만리장성 북쪽 옹구트, 바이칼호 남쪽
메르키트, 예니세이강의 오이라트, 항가이산의 케레이트, 서쪽 알타이산의 나이만부로 나뉩니다.
몽골 초원에 몽골, 메르키트, 케레리트. 나이만, 옹구트(옹기라트) 가 거주하고 서쪽에는 투르크가 있고
동쪽에는 타타르가 있는데.... 그들은“푸른 투르크족”이나 “검은 타타르족”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니
몽골의 알타이어는 한국어나 일본어와 유사하며 중국어를 비롯 성조(聲調) 언어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몽골족은 3세기에 초원에 제국을 건설한 훈족(흉노)의 직계 후손이라 주장하는데, 훈족 조상을 태양의 사람
들이라는 뜻으로 “훈누” 라고 불렀으며..... 4~5세기에 훈족은 몽골 대초원으로 부터 퍼져나와 인도에서
로마까지 정복했으나 고향 씨족간의 접촉을 유지할수 없어 그들이 정복한 유럽문화에 동화되어 사라집니다.
11세기에 이르면 거란족 요나라의 압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몽골 제 부족들은 타타르를
우두머리로 하는 “반요동맹 ”을 맺어 주인과 대치하기로 했으니..... 이런 연유로 "타타르"
(韃靼 달단) 라는 이름은 몽골족을 칭하는 대표적인 이름으로 중동을 거쳐 유럽에 전해졌습니다.
1206년 몽골족 테무진이 칸에 추대될 당시의 몽골어로는 '칭기스 칸' 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
발음에 가장 가깝다고 하며.... 오고타이 칸 이후로는 '칭기스 카간', 13세기 후반 이후로는
'칭기스 카안' 으로 불렸다는데, 현대 몽골어로는 발음이 “칭기스 하앙” 에 가깝게 발음합니다.
현대 몽골어로 '칭기스(Чингис)' 는 '위대하다' 를 뜻하는데 어원에 대해 라시드 앗 딘은 '칭' 의 의미는
'단단하고 강하다' 는 뜻이며 '칭기즈' 는 '칭' 의 복수형이라 기술했고, 학자 펠리오에 의하면 몽골어
에서 '칭' 의 복수형이 칭기스가 될 수 없고, 호수나 바다를 의미하는 튀르크어인 'tangiz' 에서 온 것
으로 추정했으니 이 견해를 본다면 칭기즈 칸은 '사해(四海)의 군주', '세계의 군주' 라는 의미가 됩니다.
칭기즈칸의 부족인 몽골은 튀르크계인 위구르 제국의 해체 이후 바이칼 호수 방면에서 남하해
몽골 고원의 북동부에 퍼져 살았는데..... 칭기즈칸의 생애를 그린 몽골의 전설적인 역사서
《몽골비사》 에 의하면, 그의 원조는 하늘의 명령을 받고, 바이칼 호수에 강림한 보르테
치노 (孛兒帖赤那 푸른 늑대) 와 그의 아내가 될 코아이 마랄 ('흰 사슴') 이었다고 합니다.
원조비사(元朝秘史, 몽골비사) 는 후손들에게 전해지다 19세기에 베이징에서 한자로 적힌 문서가 발견
되었는데.... 13세기에 몽골어 발음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학자들은 한자는 읽을수는 있지만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는데, 연구를 통해 그 내용이 해독되니 “몽골비사” 라고도 불립니다.
내용을 보면 칭기즈칸을 가까이에서 직접 목격했던 인물이 지었으니 칭기즈칸의 어머니 호엘룬
이 주워다 키운 칭기즈칸의 의제(義弟) 중 한명인 “시키 후투후” 가 아닐까 하는 설이 있으니
그는 일족 중에 가장 먼저 문자를 익힌 인물이었고, 또 칭기즈칸에 의해 몽골 법률 《야삭》
의 집필 및 관리자로 임명되었으며 원조비사에 그와 관련된 일화가 여러번 나오기 때문입니다.
《원조비사》는 처음 기록될 때는 위구르어 또는 파스파 문자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원나라
의 멸망으로 원본은 산일되었으며, 명대에 몽골어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한자로 된 음차 표기+ 대역+
총역본이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유통되는 버전으로 고전 몽골어로 환원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또한 비슷한 내용이 《황금사》에도 전하고 있어, 비교 및 대조가 가능한데 중반부에 다룬 13익
전투(1190년) 와 금나라의 타타르 정벌(1194년) 사이 몇년간의 테무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원조비사》에도 없기 때문에 대략 4년간의 공백 동안 칭기즈 칸의 행적은 불분명 합니다.
별이 있는 하늘은 돌고 있었다.
여러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자리에 들지 아니하고 서로 빼앗고 있었다.
흙이 있는 대지는 뒤집히고 있었다.《원조비사》 254절
초반에 몽골족과 보르지긴 씨족의 내력을 다룬 뒤, 테무진의 일생을 다루는데 주요 내용은 몽골 통일과정
및 논공행상과 행정정비를 다루며, 해외원정 부분에 호라즘 왕국과 제베와 수부타이의 러시아 정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고, 마지막은 오고타이 칸이 자신의 행적을 돌아보는 것으로 끝나니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사서 내에서 칭기즈 칸의 활약은 별로 없고 사준사구나 야율초재 등의 활약이 더 돋보입니다.
숲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부족을 이끌고 초원으로 나왔다는 보르테 치노의 11대손인 도분
메르겐('명궁') 은 알란 코아('미인') 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인 벨구누테이(벨구누드
씨족의 조상) 와 부구누테이(부구누드 씨족의 조상) 를 두었지만 일찍 죽었다고 합니다.
도분 사후, 알란 코아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빛을 받아 남편없이 3명의 아들, 부쿠 카타기(카타긴 씨족
의 조상), 부카투 살지(살지오드 씨족의 조상), 보돈차르 문카그(보르지긴 씨족의 조상)를 낳았으니....
칭기즈 칸의 가계 보르지긴씨의선조가 되는 보돈차르 문카그는 알란 코아가 낳은 아들들 중 막내였습니다.
보돈차르 문카그의 자손은 번창하여 다양한 씨족을 형성했으니 12세기에 타타르연맹이 와해된 후에
보돈차르 문카그의 7대손 카불 칸(1120년~1149년 재위, 카이두의 증손)이 처음 몽골족의 지파를
통일하고, 카마그 몽골을 건설한후 대칸의 칭호를 획득했는데 바로 테무진(징기스칸)의 증조부 입니다.
후계자는 6촌 동생인 암바가이 칸(1149~1156년 재위) 이었고 뒤에 카불 칸의 후손들은 키야트 가문,
암바가이 칸의 자손은 타이치우드 가문으로 분화되었으며....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카불 칸의 4남인 카마그 몽골 제3대 칸인 쿠툴라 칸(1156~1161년 재위)의 조카였습니다.
메르키트족 신랑과 함께 시집가던 옹그라트족의 후엘룬을 납치한 예수게이는 몽골족으로 알려지지만 당시
에는 미약한 보르지긴 씨족의 구성원이었고 보르지긴 씨족은 더 강력한 타이치우드 친척들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는데, 후엘룬에게 당혹스러운 것은 남치범이 이미 아내(첩?)인 소치겔이 있고 둘 사이에는
아들 벡테르가 있었다는 사실이니 부인의 지위를 두고 은근히 두 여자 사이에 경쟁심이 일었던 것입니다.
후엘룬이 살았던 곳은 광활한 대초원으로 말, 소, 양과 염소가 지천이니 푸짐하고 풍부한 식사에 익숙
했는데,. 예수게이의 보르지긴 씨족은 작은 부족으로 땅은 목축세계의 가장자리 북쪽이니 큰 초지가
없어 마못, 새, 쥐, 물고기에다가 가끔은 사냥으로 잡은 사슴이나 영양등 거친 음식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숲에서 처원으로 나온 몽골족은 처음에는 미약했던 세력이었으니 작은 짐승을 사냥하려고 늑대와
경쟁하다가 썩은 고기나 주워 먹는 사람들로 여겨졌는데.... 기회만 생기면 초원의 다른
유목민들로 부터 가축이나 여자를 훔쳤으니 저 신부 후엘룬도 노획한 물건 정도로 여긴 듯 합니다.
호엘룬을 납치하고 얼마뒤 그녀는 임신했고 비슷한 시점에 예수게이는 테무진 우게, 코리, 부타가
이끄는 타타르족을 전멸시킨 뒤 부족을 델리운 볼닥 지역에 주둔시켰는데.... 여기서 호엘룬의
아들이 태어나게 되었으니 예수게이는 패장 테무진 우게의 이름을 따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테무진으로 지었는데, 그는 오른손에 어머니 자궁에서 활킨 핏덩어리를 쥐고 태어났습니다.
테무진(칭기즈칸)은 몽골 동부 헨티 아이막 지역인 오논강 유역에서 몽골족의 한 갈래인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씨족의 씨족장 예수게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몽골의 시조 보돈차르의 직계손으로 불리는
씨족으로 훗날 테무진에게 내쳐지는 타이치우드, 주르킨과 함께 몽골의 칸을 배출한 하얀 뼈 씨족으로
분류되는 가문으로 서열로 따지면 위 두 부족 보다는 낮았지만 모계가 명문인 올쿠누드 씨족이었습니다.
어머니 호엘룬은 콩기라트(온기라트, 옹기라트) 부족의 올쿠누드 씨족 출신으로 본래 올쿠누드 씨족
은 몽골의 왕족들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부족이니..... 예수게이의 보쌈은 자신들 몽골에게 시집
와야 할 여자를 다른 부족에게 시집보내는 올쿠누드 씨족에 대한 분풀이 일환이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 호엘룬은 원래 메르키트족 칠레두와 결혼했으나 남편과 함께 올쿠누드에서 메르키트로 가던
도중에 예수게이에게 납치되어서 그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호엘룬의 원래
신랑인 칠레두의 동생 칠게르가 훗날 테무진 일가를 공격해서 테무진의 아내 보르테를 납치합니다.
후에 칭기즈 칸이 칠게르를 쳐부수고 보르테를 구하긴 했으나 그 직후 태어난 장남 주치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우선 칭기즈 칸 본인은 주치를
아들로 인정했지만, 이러한 불확실한 출생은 평생 주치를 옭아매는 치명적인 약점
으로 작용하여 동생들과의 사이에 분란의 소지가 되니 “메르키트 콤플렉스” 로 불립니다.
1162년 칭기즈칸이 손에 쇠처럼 단단한 핏덩이를 쥐고 태어난 날에 아버지 예수게이
가 죽인 타타르족 장수 테무진 우게의 이름을 따와서 이름을 테무진(강하다는 뜻!)
이라고 했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마오쩌둥이 “일대영웅(일대영웅) 이라
높여 부르고 워싱턴 포스트지는 새 밀레니엄의 첫 번째 풍운의 인물로 꼽았습니다.
당시 타타르는 금나라의 이이제이(異夷制夷) 정책의 파트너로서 초원의 제 부족들을
억압하던 강자였고, 몽골 모르지긴부 키야트씨족의 지도자 예수게이는 이에 대항
하는 편에 있었으니..... 이후 금나라의 마름으로서의 타타르의 역할은 테무진이
토오릴 칸(옹 칸)과 금나라의 명령으로 타타르를 제압하면서 토오릴에게 넘어갑니다.
그 뒤로도 예수게이는 10여년간 타타르 부족과 전투를 벌여 승리해 명성을 올렸고, 친척
들은 시기했지만 그의 명성에 눌려 있었는데..... 1171년 아들 테무진이 9살이 되자
아들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처가인 쿵크라트(옹기라트)족을 찾아가다가 도중에
데이 세첸의 딸 보르테와 혼인시키고 테무진을 쿵크라트 부족에 데릴 사위로 맡깁니다.
예수게이는 사돈 될 사람에게 줄 선물이 말 한필 밖에 없었기 때문에 테무진을 몇 년동안 일군
으로 쓰고는 그 대가로 딸을 내줄 사람을 찾아야 했으니...... 어머니 후엘룬의 가족을 찾아
옹기라트로 향했는데, 워낙 먼 고장이라 도중에 어느 집에 묵었는데 테무진 보다 몇살 위인
소녀 부르테가 있었고 둘이 좋아하는 것 같은 눈치인지라 그만 그 집에 테무진을 맡긴 것입니다.
원거리 여행은 낯선 땅에서 길을 잃기 쉬우며 늑대등 맹수에 춥고 거친 기후, 무엇보다 다른 인간들이
무서우니..... 돌아오던중 예수게이는 시라 초원에서 타타르족의 천막에 신분을 숨기고 머물렀지만
타타르족 테무진 우게의 아들 자린부카는 8년전 예수게이를 알아보고, 음식에 독을 타서 먹이니....
돌아온 뒤 3일 만에 뭉릭에게 자신의 아들과 아내를 부탁하고 죽는데 시라 케헤르의 변이라 불립니다.
타타르 천막인줄 알면서 머무른 예수게이도 어처구니 없지만 몽골 초원에서는 '접대의 관습' 처럼 '아무리
적대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손님으로 방문한 사람은 해치지 않고 후하게 대접하는 관습' 이 있었으니
예수게이도 '설마 손님인 나를 해칠까' 라고 생각하고 잠깐 방심했는데, 타타르족은 되레 악용해 손님
으로 대접하는척 하고 그를 독살한 것이니 타타르족이 몽골족에 대한 원한이 너무 깊었기 때문으로 봅니다.
타타르족이 예수게이를 알아보면서도 손님으로 환영하는 척하면서 대접할 음식과 술에 독을 타서 독살
시킨 방식은 초원의 시점에서도 굉장히 비열한 방식이었으니... 처음부터 문전박대한 다음 칼로
죽였다면 테무진의 원한도 그만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그 결과 훗날 몽골 초원을 통일한 칭기즈칸
은 접대의 관습을 어긴 죄로 수레바퀴 보다 큰 타타르족 성인들을 모두 처형하고 애들은 노예로 삼았습니다.
예수게이는 죽기 직전에 사람을 보내 아들을 부르니 테무진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이미 죽었으니.... 시라 케헤르의 변
이라고 하는데 예수게이는 두 부인과 열 살이 안된 자식 일곱명만 세상에 남겼습니다.
그러자 지도자를 잃은 친척과 부족들도 이들을 버리고 떠나는데.... 삼촌이 형수인 후엘룬과 결혼할수도
있었지만 사냥이나 전투에 도움이 안되는 아홉이라는 어린 식구가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열 살인 벡테르가 나이만 됐으면, 26살 가량인 계모 후엘룬과 결혼해 가장이 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게이는 리더로서의 역량도 뛰어났고 카리스마도 충분했지만 그가 이끈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집단
은 오로지 그의 개인 역량에만 의지한 집단이었던 듯하니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리더를 잃은 탓에
그를 중심으로 모였던 집단은 뿔뿔히 흩어졌고, 예수게이의 가족들은 다른 친척들에게 무시받으며 유랑
해야 했으며, 아들 테무진(칭기즈 칸)은 흩어진 부족을 다시 모으느라 젊은 시절에 엄청난 고생을 합니다.
타이치우드 씨족이 버리고 가려고 야영지를 떠나자 후엘룬은 죽은 남편의 말총 영기를 움켜쥐고
말에 올라 떠난 사람들을 뒤쫓아가서는 영기를 높이 치켜들고 주위를 맴돌자 그들은 부끄러움
에다가 영혼으로 부터 초자연적인 복수를 당할까 겁내서 원래 야영지로 돌아왔으나 다음날
새벽에 변심해 테무진 가족의 가축까지 데려갔으니 겨울에 굶어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스물여섯살 후엘룬은 모자를 단단히 눌러쓰고 치마를 바짝 여미고 밤낮없이 다섯 자식을 먹일 음식을 구하기
위해 오논강 상류를 오르내렸으니 열매를 찾기도 하고 식물의 뿌리를 캐니 테무진은 어머니를 돕기 위해
쥐를 잡으려고 날카롭게 각은 뼈가 달린 나무 화살을 만들었는데..... 50년후 몽골을 방문한 페르시아의
연대기 기록자 주베이니는 개와 쥐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으며 음식도 그런 종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1043페이지에 이르는 가오홍레이가 지은 ‘절반의 중국사’ 책의 642페이지에 보면 호엘룬은 오논강 상류
에서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강변을 훑었는데 어린 테무진은 어머니를 도우면서 “돈과 권력이 있으면
사람들이 다가오고 그것이 없으면 떠나버린다는 사실"을 자기 눈으로 보고 겪으면서 체득했다고 나옵니다.
테무진이 예수게이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게이 사후 부족민들이 테무진 일가를 버렸다고 하는
견해도 있는데.....《몽골비사》의 기록에는 호엘룬은 예수게이에게 시집간후 몇 년 동안
자식을 못 가졌다고 하니 나중의 주치의 사례와 달리 테무진이 메르키트족의 아이일 수는 없습니다.
양이나 말 등을 많이 키우는 유목민 사회에서는 동물의 임신이나 출산에 해박하고 자연히 인간의 임신이나
출산에도 정통하니 산달이나 다른 남자와의 접촉 등을 깐깐하게 따지기 때문에.... 임신 기간이나 출생에
의심점이라도 생기면 목숨 부지하기도 힘드니 맏아들인 주치는 칭기즈 칸이 아들로 받아들였지만, 결국
모호한 출생 문제 때문에 후계자 다툼은 커녕 자의반 타의반으로 먼 변방으로 밀려나 씁쓸히 병사합니다.
예수게이 사후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의 행방은 우선 《몽골비사》에 따르면 친척들과 씨족 사람
들이 모두 떠나버렸으니.... 카불 칸의 장남 오킨 바르칵의 후손들인 키야트 주르킨 씨족,
암바가이 칸의 후손들인 타이치우드 씨족으로 가고 남은 인원이라고는 자신과 어머니,
형제들을 포함해서 성인 남성이 하나도 없이, 여자와 아이들로 고작 아홉명뿐 이었습니다.
어찌나 차갑게 버림을 받았는지, 예수게이의 부하인 콩고탄 씨족의 차카라 노인이 떠나가는 부족 사람들을
붙잡으며 가지 말라고 하자..... 그대로 투두엔 기르테에게 죽임을 당했고, 훗날 테무진이 자라서 부족을
버린 것을 보복할까봐 두려웠던 다른 부족장들은 테무진을 죽이기 위해 “추격꾼” 까지 보내기도 했습니다.
추격꾼을 피해 테무진과 가족들은 초원을 떠나 숲 속과 산 속에서 숨어서 가난하게 살아야 했는데..... 지금
남시베리아에서 성인 남자 하나 없이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아홉명이 추적자를 피해 늑대를 쫓아내고,
고기 잡으며 살아야 했으니 그 고생은 엄청났으며 이 과정에서 피와 불의 세례를 받아 단련되어 갔습니다.
예수게이는 호엘룬과의 사이에 훗날 칭기즈 칸이 되는 테무진과 주치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 옷치긴 네 아들
과 딸 테무룬을 낳았고 따로 소치겔이란 여인에게서 아들 벡테르와 벨구테이를 낳았는데, 벡테르는 테무진
보다 연상이며 덩치도 훨씬 컸던것 같으니 힘만 믿고 테무진과 카사르의 노획물을 여러번 빼앗았다고 합니다.
테무진, 카사르, 벡테르, 벨구테이가 함께 앉아 낚시를 하고 있는데 빛나는 물고기가 한마리 걸려들었다.
그 고기를 벡테르와 벨구테이가 테무진과 카사르에게서 빼앗았다. 테무진과 카사르는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우리가 낚은 물고기를 벡테르 형제가 빼앗았습니다. ” 라고 하자 어머니가 타이르기를.....
“그만들 두거라! 너희들은 형제간에 왜들 그러느냐? 우리에게는 그림자 말고는 동무도 없고 꼬리
말고는 채찍도 없다. 타이치우드 형제들과의 한(恨)은 어떻게 풀려고 하느냐? 너희들은 왜 옛날
알란 어머니의 우애 없는 다섯 아들 같이 굴고들 있느냐? 그러지들 마라!”고 했다.《원조비사》 76절
“어제도 고도리살로 잡은 작은 새를 그렇게 빼앗아 갔습니다. 이제 또 그렇게 빼앗았습니다. 어떻게 함께 살겠
습니까?” 하고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버렸다. 벡테르가 둔덕 위에서 거세 샤르가말 아홉 마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때, 테무진은 뒤에서 카사르는 앞에서 살을 시위에 매긴채 몰래 접근하는 것을 벡테르가 발견합니다.
벡테르는 전혀 저항하거나 달아나지 않고 “타이치우드 형제들과 한(恨)을 풀지 못한판에 누구를
해코지 할수 있느냐? 너희들은 왜 나를 눈에 빠진 속눈썹, 입에든 가시로만 여기느냐? 그림자
밖에는 다른 동무가 없고, 꼬리 밖에는 다른 채찍도 없을 때 너희들은 왜 그렇게들 생각하느냐?
나의 가계를 단절시키지 말아다오! 벨구테이는 죽이지 말아다오!” 라고 말하고 나서 다리를 틀고
앉아 기다렸다. 테무진과 카사르는 앞, 뒤에서 접근하여 쏘고는 가버렸다. 《원조비사》 77절
후엘룬은 테무진에게 소리를 지르니“살인자야! 살인자야! 너는 내 뜨거운 자궁에서 나올 때 손에 핏덩이
를 쥐고 나왔다”, 이후 동생 카사르에게는 “ 너는 자기 태를 뜯어먹는 들개와 같구나 ”저주를 퍼붓고
는 혼절하면서 “이제 너희에게는 너희 그림자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고는 테무진 가족은 범죄자
집단이 되었으니 가족들은 습격할 핑계를 얻게 된 적을 피해서 살던 곳에서 즉시 달아나야만 했습니다.
테무진의 형제 살인을 두고 벡테르가 나이를 앞세워 어머니 호엘룬과 결혼해 테무진으로부터 가장의 지위를
빼앗으려 해서 죽였다는 설도 있는데... 유교 문화권과 달리 당시 몽골 지역 풍습상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친어머니를 제외한 아버지의 남은 부인들을 자신의 부인으로 거둘수 있었으나, 벡테르의 나이가
너무 어린게 걸림돌이었는데 한국에도 유교가 도입되기 전에 형사취수제 라는 비슷한 풍습이 존재했습니다.
오논강 귀족 혈통이라고 자랑하는 타이치우드 씨족은 그들 영토에서 살인을 저지른 테무진을 벌하기로
했으니.... 이에 테무진은 초원을 떠나 산악지대로 도주했는데 결국 추적자들에게 붙들렸으며,
목에 칼을 쓰게된지라 걸을수는 있지만 자기 손을 쓸수 없으니 누가 먹여 주지 않으면 굶어야 했습니다.
타이치우드 씨족은 몇개의 가계가 속해있고 전쟁포로도 노예로 함께 살고 있으니 이런 노예
에게 포로로 넘겨졌는데, 이들은 밤에는 몰래 저 칼을 풀어주어 쉬도록 했으며 어느날
좀 모자란 소년이 테무진을 감시하게 되었고 남자들은 술에 취해 쓰러졌을 때, 테무진
은 칼을 옆으로 돌려 소년의 머리를 쳐서 쓰르트린 후에 근처 강가의 잡초 속에 숨었습니다.
이후 수색이 시작되었으니 저번에 잘해준 노예 가족에게 발각되었는데 노인은 어두워
지면 달아나라고 말하고 지나갔는데.... 어두워지자 강에서 나온 테무진이 달아나는
대신에 노인의 집으로 들어서자 저 가족들은 기겁을 하는데... 자기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 주저하면서도 칼을 벗겨 태워버리니 테무진은 장작더미 속에 숨어 지냅니다.
다음날도 수색은 계속되었고 밤이 되자 이 가족은 가난한 처지임에도 양고기 요리를 해서
기운을 보충시켜준 다음 말까지 내주며 테무진을 떠나보내니.... 그는 추적자들을
피해 멀리 떨어진 어머니의 야영지까지 돌아올수 있었는데, 이 경험을 통해 신분
높은 친척 대신에 가난하고 힘 없는 자들이 진정한 벗이 될수 있다는 것을 느꼈는가 합니다.
다만 라시드 앗 딘의 기록은 위에 적은 저 몽골비사 와는 조금 다른데, 예수게이가 죽고 부족민들
이 뿔뿔이 흩어진 것까지는 같지만 그 직후 테무진의 어머니 호엘룬이 직접 말을 타고 깃발을
들며 부족민들을 추격했고, 호엘룬을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않는 사람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으며
전투 끝에 부족민들은 많이 축소되었지만 어느정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테무진은 포로가 되어 갖은 학대를 당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붉은 만월의 날을 기리며 축제가 벌어지자
테무진은 방심한 틈을 노려 탈출을 시도하였고, 이때 평소에도 포로인 자신을 잘 대해주던 술두스
씨족인 소르칸 시라와 가족들의 도움으로 양털 수레 속에 숨어서 탈출해 코르초코에서 흩어진 가족들
과 재회했는데 이때 자신을 도와줬던 소르칸 시라의 아들이 훗날 사준사구의 일원이 되는 티라운 입니다.
테무진을 공격해 포로로 만든 사람 이름이 기록마다 다르니 《몽골비사》에는 부족장 타르고타이 키릴투크
라고 되어있으니.... "타르고타이" 는 별명이며 키릴투크가 본명으로 '타르고타이' 는 뚱뚱한 사람을 뜻
하는 몽골어로 실제 키릴투크는 《몽골비사》에 따르면 고도의 비만이라 말도 제대로 타질 못했다고 합니다.
또 라시드 앗 딘의 기록에는 자다란(자지라트) 씨족의 족장 자무카 세첸이 자기 친척인 테구 타치르가
울레게이 불락에 방목하던 테무진의 가축을 훔치러 갔다가 테무진의 노예인 주치 타르말라의 손에
죽게 된 일로 앙심을 품어 테무진을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대로 라시드 앗 딘의
기록에 의하면 테무진의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은 예수게이 사후에도 그럭저럭 유지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사지에서 도망쳐 나온 테무진은 얼마후 가족의 말을 훔쳐 달아난 말도둑을 잡으러 갔다가
훗날 사준사구의 일원이 되는 보르추를 만나서 인연을 맺었으며, 그의 도움으로 말을 되찾게 됩니다.
씨족들에게 버림받고 살아남기 위해 고생했던 테무진은 자무카 라는 몇 살 연상의 소년을 만났고 강력한
유대를 맺었으니..... 자무카의 가족은 오논강변 테무진 가족의 야영지 근처에 여러번 천막을 쳤는데,
그가 속한 자다란 씨족은 테무진의 부친과 먼 친척이었으니 두번이나 영원한 의형제를 맺자고 맹세합니다.
테무진과 자무카는 사냥과 낚씨로 놀이를 했다는데 몽골족의 아이들은 남녀 구별없이 말을 타고 성장
했으니, 네 살이면 안장없이 말을 타는데 익숙해지고 말 등에 올라선채 상대를 말에서 떨어뜨리는
시합을 했으며.... 다리가 등자에 닿을만큼 자라면 말을 탄채 활을 쏘고 올가미 밧줄을 던지며
장대에 매달려서 대롱거리는 가죽 주머니가 과녁이었으니 차츰 기마 전사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훗날 1216년에 칭기즈칸에 추대되는 보르지긴 테무진은 한자로는 孛兒只斤 鐵木眞 (패아
지근 철목진) 이라고 적는데.... 손자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개창한 이후 태조라는
묘호를 받았으니, 테무진 보다 세력이 더 컸던 의형제 자무카는 내심 칸이 되기를 기대
했으나 주르킨 씨족 등의 강력한 지지로 테무진이 '칭기즈' 란 칭호를 받고 칸이 됩니다.
이후 자무카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결집해 멋대로 '온 세상의 왕' 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구르 칸'
에 올라..... 칭기즈칸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상당히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결국에는
진압되었으며 자무카는 패주하는 도중에 부하의 배반으로 칭기즈칸에게 붙잡혀 사형당합니다.
1178년 테무진은 16세가 되었고 7년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후 약혼자 부르테를 만난적이 없는지라 이제
나이도 되었으니 어릴 적에 약혼한 옹기라트(콩기라트) 부족의 올쿠누드 씨족 출신으로 데이 세첸의
딸이었던 초원의 미인이라 불린 보르테 라는 여인을 찾아가서는 혼인을 하고 신부를 데리고 돌아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