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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李奎報
본관은 황려(黃驪), 자는 춘경(春卿), 처음 이름은 인저(仁低) ..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지헌(止軒),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다. 9세에 이미 神童으로 알려졌으며, 14세에 성명재(誠明齋)의 하과(夏課)에서 詩를 지어 기재(奇才)라고 불리었다. 소년시절 술을 좋아하여 자유분방하게 지냈는데, 과거지문(科擧之文)을 하찮게 여기고 강좌칠현(姜左七賢)의 모임에 드나들었다.
강좌칠현 江左七賢
강좌칠현(江左七賢)이란.. 고려 후기에 청담(淸談)을 즐기던 7명의 선비를 말하는데, 고려 후기 무인정권(武人政權)이 수립된 이후 文人을 숙청하는 분위기 속에서 文人들은 山林에 은거하거나 불교에 의탁하는 자가 많았다.
이 가운데 서로 義를 맺어 망년지유(忘年之友)를 삼고 詩와 술을 즐긴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임춘 (林春), 조통 (趙通), 황보항 (皇甫抗), 함순 (咸淳), 이담지(李潭之)를 중국 진(晉)나라 때의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빗대어 강좌칠현이라 불렀다. 그러나 후일 이인로 등은 무인정권 하에서 벼슬살이를 영위하기도...
강좌칠현은 죽림고회라고도 하는데, 무신란(武臣亂)의 와중에 자리를 잃고 현실세계에 염증을 느낀 위 7명으로 구성되었다. 중국 진나라 때 자유방임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심취하여 시주(詩酒)를 벗삼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떴던 것이다. 그들은 이규보에게 함께 하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이규보는 함께 어울리면서도 정작 동참의 권유에는 완곡하게 거절하면서 이런 글을 보냈다. 대나무 아래의 모임에 참여하는 영광을 차지하고서 술을 함께 마셔서 기쁘지만, 칠현 가운데 누가 씨앗에 구멍을 뚫을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실은 竹林七玄 가운데 인색한 사람 하나가 자기 집의 좋은 오얏 씨앗을 다른누가 가져다 심을까 염려해 모두 구멍을 뚫어놓았다는 고사가 있다. 은거를 표방하되 제 먹을 것 챙기기는 재빨랐던 이가 있었으니, 그와 마찬가지로 이규보는 죽림칠현의 한계와 이중성을 꿰뚫어 보있다. 속으로는 벼슬길을 바라면서, 겉으로 초월한 듯 살아가는 이들에게 보내는 야유이기도 했다.
이러한 자유분방한 생활로 16세, 18세, 20세 등 3번에 걸쳐 사마시(司馬試)에서 낙방하였다. 23세 때 進士에 급제하였으나, 이런 생활을 계속함으로써 출세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개성 천마산에 들어가 백운거사(白雲居士)를 자처하고 詩를 지으며 장자(莊子)사상에 심취하였다.
26세에 개성으로 돌아와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당시의 문란한 정치와 혼란한 사회를 보고 크게 각성하여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었다. 그 후 최충헌(崔忠憲)정권에 시문으로 접근하여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고 32세 때부터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이규보는 계관시인(桂冠詩人)과도 같은 존재로 문학적 영예와 관료로서의 명예를 함께 누렸다. 권력에 아부한 지조없는 文人이라는 비판도 있으나, 對 몽골항쟁에 강한 영도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정권에 협조하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는 우리 민족에 대하여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外敵의 침입에 대하여 단호한 항거정신을 가졌다. 국란의 와중에 고통을 겪는 농민들의 삶에도 주목하여 여러 편의 詩를 남기기도 하였다. 당시 이인로(李仁老) 계열의 문인들이 형식에 치중한 것에 비하여 기골(氣骨), 의격(意格)을 강조하고 신기(新奇)와 창의(創意)를 높이 평가하였다.
자기 삶의 경험에 입각하여 현실을 인식하고 시대적, 민족적인 문제의식과 만나야 바람직한 문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저서로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白雲小說), 국선생전(麴先生傳) 등의 저서와 많은 詩文을 남겼다.
이규보의 묘
이규보의 묘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천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등사 가는 길, 진강산 쪽에 있다. 여주이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1967년 후손들이 묘역을 정화하고 재실(齋室)을 복원하였다. 봉분의 높이 1.8m, 둘레는 16m이다. 봉분 앞쪽으로 상석과 석등 각 1기씨기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앞쪽 좌우로 망주석 한 쌍이 세워져 있다.
이규보는 술과 거문고 그리고 詩를 너무 좋아하여 스스로를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하였다. 호탕한 인품으로 그 詩風 또한 활달하였으며, 당대를 풍미한 걸출한 시호(詩豪)이었다. 또한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즉흥적으로 詩를 읊을 정도로 詩를 좋아 하였다.
시인으로서의 명성뿐만 아니라 그 문장력이 대단하여 몽고군의 침략이 있었을 때에 진정표(陳情表)로서 몽고군을 물리친 대문장가이었다. 규보(奎報)라는 이름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그가 22세 때(1189), 司馬試를 보려고 하는데 꿈에 검정 옷을 입은 시골사람들이 우거진 숲속에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을 좋아하던 이규보는 한잔 술을 부탁하며 그들에게 말을 건네자, 그 중 한 사람이 " 우리들은 하늘의 별자리 28수 다 "라고 말했다. 이규보는 곧 나아가 절하고 이번 과거에서 합격할 사람이 누구인지 물으니, 건너편 사람을 가리키며 " 이 사람이 규성(奎星)으로 과거시험을 맡고 있는 별자리이니 잘 알 것이다 "라고 일러 주었다.
이규보가 곧 물어보려는 순간에 잠을 깨었는데, 잠시 후 다시 꿈의 그 사람이 와서 " 그대가 이번에 장원하게 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이 것은 하늘의 기밀이니 누설하지 말라 "고 하였다. 이규보의어릴 적 이름이 인저(仁低)이었는데, 이 이후에 규(奎 .. 별 奎)자의 별자리가 장원급제의 소식을 알려주었다..의 보(報)는 뜻으로 규보(奎報)로 바꾸었다.
과거에 급제는 하였으나 武臣政權과의 결탁이 없으면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는데, 이규보는 그러기 싫어서 개성의 천마산에 들어가 세상을 관조하며 지내기도 하였으며 가난에 고생도 심하였지만 횡포가 심한 무신정권에 염증을 느껴 그러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기를 10년, 이규보는 32살이 되었다. 마침 무신 최충헌(崔忠憲)이 詩會를 열었는데, 이규보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던지 초청에 응하여 최충헌을 칭송하는 詩를 짓고서야 전주목의 서기가 되었다. 그러나 동료들의 그렇게 나약하느냐는 비판에 1년4개월 만에 그만 두었다.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이규보의 시문집(詩文集)으로 53권 13책이다. 이규보의 아들 함(涵)이 1241년 全集 41권을, 그 이듬해에 後集 12권을 편집하여 간행했으며, 1251년에 高宗의 명으로 손자 익배(益培)가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에서 증보판을 간행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여러번 간행되었으며, 현재는 英祖 때에 복각된 것이 완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집은 詩, 부(賦), 전(傳)을 비롯한 각종의 문학적인 글들이 25권을 이루고, 나머지는 서(書), 장(壯), 표(表) 등 개인적인 편지 및 관리로서 나라에 바친 글, 교서, 비답, 조서 등 왕을 대신하여 작성한 글들 그리고 碑銘, 제축(祭祝) 등 장례사나 제사, 불교행사에 쓰인 글들이 담겨 있다.
後集은 詩가 더욱 압도적이어서 10권을 차지하고 있다. 이규보가 武臣亂의 와중에서 태어나 전국적인 民亂과 몽골의 침입 등 고려사의 격동기 속에 평생을 보냈고, "고려이씨 재상의 문집"이라는 책의 제목에 나타나듯이 최고위 관직에 올랐던 만큼 다양한 사유와 경험이 담겨 있다.
이규보의 많은 詩 중에서 특히 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은 282句에 이르는 장편으로서 고구려 건국의 신화를 웅장하게 서술하였다. 또한 그의 저서 " 국선생전(麴先生傳) "과 "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은 당시 가전체(假傳體)문학의 대표작으로 국선생전은 술을 擬人化하여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하였고, 청강사자현부전은 漁夫에게 사로 잡힌 거북을 통하여 인간사의 흥망과 성패를 논하였다.
" 구삼국사(舊三國史) "의 존재와 내용 일부, 팔만대장경의 판각 연혁, 금속활자의 사용 사실 등 귀중한 역사적 사실도 많이 실려 있다. 이규보의 詩문은 옛 사람을 답습하지 않고 자유분방한 기풍을 지녔다는 평가로부터 民衆의 입장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진실되게 반영하고, 민족과 애국의 정신을 뛰어나게 노래하였다는 설명에 이르기까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 받아왔다.
회 문 시 回 文 詩
表意文字인 한자의 특성을 절묘하게 살려서 짓는 회문시(回文詩)는 첫 글자부터 순서대로 읽어도(순독 .. 順讀) 뜻이 통하고, 제일 끝 글자부터 거꾸로 읽기 시작하여 첫 문자까지 읽어도(逆讀 .. 역독) 뜻이 통하는 재미있는 詩 형식이다.
이는 뜻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운(韻)도 맞아야 한다. 일종의 배체시(俳體詩)이자 유희시(遊戱詩)이다. 앞 뒤로 韻의 제한을 받고, 또한 순서대로 읽거나 거꾸로 읽을 때에도 뜻이 통하도록 하여야 하기 때문에 짓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규보는 고도의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여 다음의 回文詩를 지었다.
美 人 怨
1. 장단제앵춘 腸斷啼鶯春 끼꼬리가 우는봄날, 애간장이 다 타는데
2. 낙화홍족지 落花紅簇地 떨어지는 꽃잎들로 땅을 붉게 덮었다네
3. 향금효침고 香衾曉枕孤 향내나는 이불속의 새벽 잠은 외롭나니
4. 옥검쌍유루 玉瞼雙流淚 옥과 같은 고운 뺨에는 두 줄기의 눈물일세
5. 낭신박여운 郎信薄如雲 님의 약속 못 믿을손 얇은 구름 같을지니
6. 첩정요사수 妾情搖似水 이 내 마음 일렁이는 강물처럼 흔들리네
7. 장일도여수 長日度與誰 기나긴 날을 그 누구와 함께 지내고파
8. 추각수미취 皺却愁眉翠 주름지는 푸른 눈썹, 수심 속에 찡그리네
위의 시(詩)를 아래와 같이 역독 (逆讀 ..맨 끝의 글자부터 읽음)했을 때의 詩는 다음과 같다
8. 취미수각추 翠眉愁却皺 푸른 눈썹 수심겨워 찌푸려진 모습이네
7. 수여도일장 誰與度日長 누구와 함께 긴긴 날을 함께 하며 지내볼까
6. 수사요정첩 水似搖情妾 흐르는 물 출렁임은 내 마음의 흔들흔들
5. 운여박신랑 雲如薄信郞 구름처럼 얄팍하신 믿음 없는 님의 마음
4. 누류쌍검옥 淚流雙瞼玉 두 뺨 위에 옥과 같은 눈물줄기 흐르나니
3. 고침효금향 孤枕嚆衾香 새벽녘에 외로운 베게 이불만이 향기롭네
2. 지족홍화락 地簇紅花落 땅 위에는 가득하게 붉은 꽃이 떨어지고
1. 춘앵제단장 春鶯啼斷腸 봄 꾀꼬리 우는 소리 애간장만 타 내리네...
이규보는 위의 回文詩말고도 여러 편의 회문시가 있다.그리고 漢詩에서 제일 어렵다는 쌍회문시(雙回文詩)도 지었다. 이 것은 회문시에다 雙韻을 달았다는 것인데, 쌍운이란 詩를 지을 때 두가지의 서로 다른 운을 내어, 안쪽 귀절과 바깥 귀절에 각각 서로 다른 운을 나누어 다는 것을 말한다.
동명왕편 東明王篇
동명왕편은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에 관한 전설을 오언시체로 쓴 장편서사시이다. 본래의 작자나 지어진 연대는 알 수 없고, 이규보가 지은 그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 제3권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동명왕 탄생 이전의 계보를 밝힌 서장(序章)과 출생에서 건국에 이르는 본장(本章), 그리고 후계자인 유리왕(유리왕)의 경력과 작가의 느낌을 붙인 종장(終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명왕편의 서문에서 이규보는 ' 처음 동명왕의 설화를 귀신(鬼)과 환상(幻)으로 여겼으나, 연구를 거듭한 결과 귀신이 아니라 신(神)이라는것을 깨달았으며, 이것을 詩로 쓰고 세상에 펴서 우리나라가 원래 성인지도(聖人之道)임을 널리알리고자 한다 '고 저술 동기를 적고 있다.
' 동명왕편 '의 序文 全文
세상에서 동명왕(東明王)의 신통하고 이상한 일을 많이 말한다. 비록 어리석은 남녀들까지 흔히 그 일을 말한다. 내가 일찍이 그 얘기를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 선사(先師) 중니(仲尼)께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지 않았다. 동명왕의 일은 실로 황당하고 기괴하여 우리들이 얘기할 것이 못된다 "고 하였다.
뒤에 위성(魏書)와 통전(通典)을 읽어 보니 역시 그 일을 실었으나 간략하고 자세하지 못하였으니, 국내의 것은 자세히 하고 외국이 것은 소략히 하려는 뜻인지도 모른다. 지난 계축년 4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동영왕본기(東明王本紀)를 보니, 그 신이(神異)한 사적이 세상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더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鬼)나 환(幻)으로만 생각하였는데, 세 번 반복하여 읽어서 점점 그 근원에 들어가니, 환(幻)이 아니고 성(聖)이며, 귀(鬼)가 아니고 신(神)이었다.하물며 국사(國史)는 사실 그대로 쓴 글이니 어찌 허탄한 것을 전하였으랴...
당현종본기(唐玄宗本紀)와 양귀비전(楊貴妃傳)에는 방사(方士)가 하늘에 오르고 땅에 들어 갔다는 일이 없는데, 오직 시인(詩人) 백낙천(白樂天)의 그 일이 인멸될 것을 두려워하여 노래를 지어 기록하였다.
저 것은 실로 황당하고 음란하고 기괴하고 허탄한 일인데도 오히려 읊어서 후세에 보였거든, 더구나 東明王의 일은 변화의 신이(神異)한 것으로 여러 사람의 눈을 현혹한 것이 아니고 실로 나라를 창시(創始)한 신기한 사적이니 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後人들이 장차 어떻게 볼 것인가 ? 그러므로 詩를 지어 기록하여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聖人)의 나라라는 것을 천하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고구려 건국 신화의 大敍事詩 ... 주몽, 동명왕편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朱夢), 동명왕(東明王)에 관한 신화, 전설을 五言詩體로 쓴 장편 서사시이다.五言 장편 282句 운문체(韻文體)의 漢詩로 총 약 4,000字에 이른다. 詩가 섬세하고 화려한 이 전설은 記事體문학의 선구적 위치에 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제3권에 수록되어 있다. 동명왕 탄생 이전의 계보를 밝힌 서장(序章)과 출생에서 건국에 이르는 본장(本章) 그리고 후계자인 유리왕(硫璃王)의 경력과 작가의 느낌을 붙인 종장(終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쓰게 된 동기는 위에 인용한 "서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해동의 해모수(解慕漱)는 天帝의 아들로서, 고니를 탄 100명의 女人 종자(從者)를 거느리고 하늘로부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채색 구름 속에 떠서 내려 왔다. 城의 북쪽에 靑河가 있고 거기에 하백(河伯)의 세 딸 유화(柳花), 훤화(萱花), 위화(葦花)가 있었는데, 해모수가 사냥을 나갔다가 이들 세 미녀를 만나 그 중 맏딸인 유화와 결혼하도록 河伯에게 간청하였다. 하백은 해모수의 신통력을 시험한 뒤에 그에게 신변(神變 ..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무궁무진한 변화)이 있음을 알고 술을 권하였다.
하백은 해모수가 술에 취하매 柳화와 함께 가죽가마에 넣어서 하늘로 보내려 하였다. 그런데 술이 깬 해모수는 놀라서 유화의 비녀로 가죽가마를 찢고 혼자 하늘로 올라가 돌아오지 않았다. 하백은 이에 놀라 유화를 꾸짖으며 태백산 물 속에 버렸다.
유화는 고기잡이에게 발견되어 북부여의 금와왕(金蛙王)에 의하여 구출되었다. 뒤에 유화는 해모수와 관계하여 주몽(朱夢)을 낳았다. 처음에는 되 크기만한 알이어서 금와왕은 상서롭지 않은 일이라 하며 마굿간에 버렸는데, 말들이 이 곳을 짓밟지 않아 깇은 산 속에 버렸더니 짐승들이 이것을 보호하였다.
알에서 나온 주몽(朱夢)은 골격과 생김새가 영특하여 자라면서 재주가 뛰어났으며, 뒷날 부여를 떠나 南으로 가서 비류국(沸流國)의 송양왕(宋讓王)의 항복을 받고 나라를 세우니 이 것이 고구려의 건국이며, 그가 고구려의 始祖인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종장(終腸)에서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硫璃)가 아버지 동명성왕을 찾아 왕위를 계승한다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동명왕편은 당시 중화(中華)중심이 역사의식에서 탈피하여 "舊三國史"에서 소재를 취하여 우리의 민족적 우월성 및 고려가 위대한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고려인의 자부심을 천추만대에 전하겠다는 의도에서 씌여진 것으로 이규보의 국가관과 민족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외적에 대한 항거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북방대륙에서 한반도의 남단에 이르기까지 넓은 강토와 천상, 해상, 삼계를 무대로 하여 영웅호걸들의 상호 갈등을 통하여 사건이 전개, 발전되고 힘과 힘, 꾀와 꾀, 신통력의 대결을 통하여 부족사회적인 힘을 집결하여 고대국가의 건설이라는 역사적인 대업을 완수하는 사실이 작품을 통하여 반영되고 있다.
절 화 행 折 花 行
꽃이 예쁜가요 ? 내가 예쁜가요 ?
목단함로진주과 牧丹含露眞珠顆 모란꽃 이슬 머금어 진주같은데
미인절득창전과 美人折得窓前過 신부가 모란을꺾어 창가를 지나다가
함소문단랑 含笑問檀郞 빙긋이 웃으며 신랑에게 묻기를
화강첩모강 花强妾貌强 꽃이 예쁜가요 ? 제가 예쁜가요 ?
단랑고상희 檀郞故相戱 신랑이 일부러 장난치느라
강도화지오 强道花枝好 꽃이 당신보다 더 예쁘구려..
미인투화승 美人妬花勝 신부는 꽃이 예쁘다는데 뾰루퉁해서
답파화지도 踏破花枝道 꽃가지를 밟아 짓뭉게고 말하기를
화약승어첩 花若勝於妾 꽃이 저보다 예쁘시거든
금소화동숙 今宵花同宿 오늘 밤은 꽃하고 주무시구려
국선생전 麴先生傳
술(酒)을 의인화(擬人化)하여 지은 가전(假傳)작품이다. 이규보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人物이나 地名을 모두 술과 관련된 한자를 골랐으며, 당시의 문란한 사회풍속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국성(麴聖 .. 맑은 술)의 字는 중지(中之)이며 주천(酒泉)사람이다. 그의 조상은 온(溫)지방 사람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그의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벼슬을 하였다. 국성은 어려서부터 이미 국량(局量)이 깊었고, 유령(劉伶), 도잠(陶潛)과 더불어 벗으로 지냈다.
임금이 기특히 여겨 벼슬을 주니 무릇 조회의 잔치와 제사, 천식(薦食) 진작(進酌)의 禮에 한치의 어그러짐이 없어 마침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국선생(麴先生)이라 부르게 되었다.그러나 그의 아들 혹(酷 .. 텁텁한 술맛)과 역(繹 .. 쓰고 진한 술)이 아버지의 총애를 믿고 자못 방자하게 굴다가, 중서령(中書令) 모영(毛穎 .. 붓의 의인화)의 탄핵을 입어 자살을 하고 麴聖은 서인(庶人)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같이 국성이 파면된 틈을 이용하여 제(臍)와 격(膈) 지방에서 난리가 일어나자 다시 국성을 불러 원수(元帥)로 삼았다. 국성은 수성(愁城)에 물을 대어 한번에 적을 함락시켰고, 그 功으로 상동후(湘東侯)에 봉해졌다.
그 후 국성은 여러 번 표(表)를 올려 물러난 뒤 고향에 돌아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었다. 작품의 끝에 .. " 국씨(麴氏)는 대대로 農家이었고, 국성이 두터운 德과 맑은 재주로 임금의 심복이 되어 나라의 정사를 짐작하고, 임금의 마음을 기름지게 함이 있어 거의 태평한 지경의 功을 이루었으니 장하도다 "라고 평하고 있는데서 볼 수 있듯이, 국성을 한 국가의 신하로 설정하고 있다. 임금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루게 하는 공신으로 그릭 ㅗ있는 것이다. 역시 술을 擬人化한 작품인 국순전(麴醇傳)이 술의 나쁜 점을 취하여 현실을 풍자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작품은 술의 좋은 점을 취해 의인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나는 있으나 개구리가 없는 것이 인생의 한이다.
위의 글은 이규보가 몇 번의 과거에 낙방하고, 초야에 묻혀 살 때 집 대문에 붙였던 글이다. 王이 하루는 단독으로 야행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날이 저물었다. 요행히 民家를 하나 발견하고 하루를 묵고자 청하였지만 집 주인(이규보)는 .. 조금 더 가면 주막이 있을 것이다 ..하며 거절하였다
과거 급제의 비화
왕은 할 수 없어 발길을 돌리게 되었는데, 왕은 이규보의 집 대문에 걸려 있던 글이 매우 궁금하였다. 특하 개구리가 무엇인지? ... 이에 왕은 다시 그 집으로 가서 사정사정한 끝에 하룻밤을 묵어 갈 수 있었다. 왕이 잠자리에 누웠지만, 집주인의 글 읽는 소리에 잠은 안 오고 왕은 주인에게 찾아가 " 有我無蛙, 人生之恨"의 의미를 물었다.
집주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옛날에 노래를 잘 하는 꾀꼬리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까마귀가 꾀꼬리에게 내기를 걸었다. 바로 3일 후에 노래 시합을 하자는 것이었다. 두루미를 심판으로 하고서... 꾀꼬리는 어이가 없었지만 시합에 응하고, 노래 연습에 더 열중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까마귀는 노래 연습은 하지 않고 온두렁에서 개구리만 잡으러 돌아 다녔다. 그리고 잡은 개구리를 두루미에게 가져다 주고 뒤를 부탁하였다. 3일 후 꾀꼬리와 까마귀가 노래를 한 곡씩 한다음 꾀꼬리는 자신이 있었지만, 결국 심판인 두루미는 꾀꼬리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 자신도 과거에 여러번 낙방하고 전국을 떠도는 떠돌이인데 며칠 후에, 임시 과거시험이 있다고 해서 개성으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거짓말하고 궁궐에 돌아와 임시과거를 열 것을 명하였다. 이규보도 뜰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시험관이 내걸은 시제가 "유아무와 인생지한"이란 여덟 글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이규보는 왕이 계신 곳을 향하여 큰 절을 한 번 올리고 답을 적어 냄으로써 장원급제하였다....
이규보는 과연 광세(曠世)의 문인인가 ? 아니면 시대의 아부꾼인가 ? 그를 두고 내리는 평가는 극단적이다. 그만큼 문제적 인물이었으며, 복잡다단한 시대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의 비판이되었든, 이규보는 13세기 문학사에서 하나의 지평을 열었다는 데 이론이 없다.
샘 속의 달을 노래함
이규보는 13세기 한국문학사의 지평을 넓힌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문학인으로 크게 자부하였으며, 더불어 문필을 가지고 시대에 봉사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이 극악스러운 최씨 무인정권이었는데도 그러 하였다. 한마디로 이규보는 문제적 인간이었으며,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에도 극단으로 갈려 나온다. 문학적 감수성이나 세계인식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었냐는 이규보의 다음과 같은 시로 적절히 설명될 수 있다.
산승탐월광 山僧貪月光
병급일호중 甁汲一壺中
도사방응각 到寺方應覺
병경월역공 甁傾月亦空
산승이 달빛을 탐하여 / 병 속에 물과 함께 길어 담았네 / 절에 다다르면 바야흐로 깨달으리라 / 병 기울이면 달빛 또한 텅 비는 것을
위 시는, 영정중월(詠井中月), 곧 샘 속의 달을 노래한다는 뜻의 제목을 가진 시이다. 어렵지 않은 글자만 가지고도 정확히 운을 맞추고,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불교 논리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시화한 작품이다. 달빛을 사랑한 스님이라면 벌써 그것으로 공(空)의 생애를 충분히 실천한 분이련만, 그조차 욕심이요, 병 속의 가득찬 물을 쏟아내면 달빛 또한 사라지니, 완벽한 공(空)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싸움이 아닐 수 없다. 절묘한 표현이다. 샘물에 비친 달빛조차 색(色)의 세계로 여길 정도이니, 인식의 철저함을 넘어 시적 형상화이 수준에도 혀를 내두를 만하다.
불운한 시절의 모색
그는 1168년에 태어났다. 이 해가 고려 의종22년이었는데, 그로부터 꼭 2년 뒤에 무신란(武臣亂)이 터졌다. 집안이 그다지 번성해 보이지 않으나, 그럴수록 글로써 벼슬을 살고 집안을 일으켜야 할 형편에, 태어나자마자 만난 이런 시국의 비상사태는 그에게 결코 유리할 것이 없었다. 한미(寒微)하기는 하나 그 또한 문인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는 춘경(春卿)이요, 처음 이름은 인저(仁低)였는데, 벌써 아홉 살 때 시를 짓는 신동으로 알려지고, 그의 호 가운데 하나가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거니와, 특히 술을 좋아하기로는 벌써 소년시대 때부터이었다. 술 자체를 좋아했는지, 시대의 울분을 술로 달랬는지 모르겠으나, 자유분방한 성격에 과거시험 같은 딱딱한 글은 마음에 차지 않아, 어려서의 소문과는 달리 시험에는 20대 초반까지 합격하지 못하였다. 대신 강좌칠현(江左七賢) 같은 이들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강좌칠현은 죽림고회라고도 하는데, 무신란의 와중에 자리를 잃고 현실세계에 염증을 느낀 이인로, 오세재, 임춘, 이담지, 조통, 황보항, 함순 등 7인으로 구성되었다. 중국 진나라 때 자유방임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심취하여 시주(詩酒)를 벗 삼던 ' 죽림칠현(竹林七賢) '을 본떴던 것이다. 그들은 이규보에게 함께 하자고 권했다. 그러나 이규보는 함께 어울리면서도 정작 동참의 권유에는 완곡하게 거절하면서 이런 글을 보냈다. 대나무 아래의 모임에 참여하는 영광을 차지하고서 술을 함께 마셔서 기쁘지만, 칠현가운데 누가 씨앗에 구멍을 뚫을 사람인지 알수 없다.
실은 중국의 죽림칠현 가운데 인색한 사람 하나가 자기 집의 좋은 오얏 씨앗을 다른 누가 가져다 심을까 염려하여 모두 구명을 뚫어 놓았다는 고사가 있다. 은거를 표방하되 제 먹을 것을 챙기기는 배빨랐던 이가 이었었으니, 그와 마찬가지로 이규보는 죽림고회의 한계와 이중성을 꿰뚫어 보았다. 속으로는 벼슬길을 바라면서 겉으로 초월한 듯 살아가는 이들에게 보내는 야유이기도 했다.
이규보는 그만의 길을 걸었다. 백운거사(白雲居士)를 자처하고 시를 지으며 장자(莊子)사상에 심취하였다. 그가 새로운 역사의식을 갖추어 나가는 모습은 25세 때 지은 '동명왕편 ' 이나 ' 개원천보영사시 (開元天寶詠史詩) '같은 작품에 드러난다. 이때는 지방을 돌다 개성에 돌아와 궁핍한 생활을 할 때이었다. 무리 역시에 대한 지극한 자긍심과 함께 문란한 정치와 혼란한 사회를 보고 크게 각성한 결과이었다. 특히 '동명왕편'은 민족 영웅 서사시로 오늘날의 평가 또한 극진하다.
입신양명의 길로 나서다
한바탕 풍운의 시기가 지난 다음 이규보는 현실적인 길을 찾기로 하였다. 무신정권은 최충헌에 이르러 방향을 잡고 있었다. 이의민을 죽이고 실권을 잡은 것이 1196년, 이규보의 나이 28세 때였다. 이규보는 최충헌(崔忠獻)의 동향을 유심히 살폈으며, 그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詩文을 지어 보냈다. 그런 그를 최충헌이 알아보고 등용한것은 이규보의 나이 32세 전후로 추정된다.
이규보는 1207년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었고, 최충헌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최이'가 정권을 물려 받은 다음에는 더욱 총애를 받아, 계속 벼슬이 올랐다. 한때 위도(渭島)에 유배되기도 했지만 곧 복직되었고, 1237년에는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존성기를 누리던 때의 벼슬이다.
이러한 그의 행적이 오늘날까지 처신에서의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그를 권력에 아부하는 지조없는 문인이라는 측의 입장에서는 이규보로 대표될 수 있는 무인정권하의 기능적 지식인은 권력에 대한아부를 유교적 이념으로 호도하여, 그것을 유교적 교양으로 위장한다. 가장 강력한 정권 밑에서 지식인들은 국수주의자가 되어 외적에 대한 항쟁의식을 고취하여 속으로는 권력자에게 詩를 써 바치고 입신출세의 길을 간다.
물론 그 반대 입장도 있다. 무신정권에서 벼슬을하는것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기회가 오자 당당하게 나아가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최씨정권의 문인들 가운데 으뜸가는 위치를 차지했다. 그 점을 두고 이규보를 낮게 평가하려는 견해는 수긍하기 어렵다. 벼슬을 해서 생계를 넉넉하게 하자는 것은 당시에 누구에게나 공통된 바람이었다. 정권에 참여해 역사의 커다란 전환에 기여하고자 한 것이 잘못일 수 없다. 무신란이 중세 전기를 파괴한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규보는 중세 후기를 건설하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실상 문인 관료를 척결하고 일어선 무인정권에서는 국가 사무 특히 외교문서를 맡아 할 전문관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과거 정권에 때 묻지 않은 사람을 찾으려는 풍조는 오늘날도 마찬기지 아닌가. 문인이라곤 시골의 서당 선생 하나도 남기지 않고 내몰아 버린 무인정권으로서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중국에 보낼 공문 하나 만들기 어려었다. 그런 그들에게 새로운 문인, 자신들에게 거부감을 갖지 않은 문인, 과거 문인에 뒤지지 않을 실력이 갖춰진 문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거기서 이규보가 나타났다. 그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춘, 무인정권이 갈망하던 인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