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압구정동과 반포동, 그리고 이촌동의 공통점은?
1970년 한강 공유수면매립사업, 서울의 사회문화적 지형 바꿔
백사장 저지대였던 압구·반포와 이촌, 아파트촌으로 탈바꿈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1960년대와 70년대 서울 개발과정의 여러 일화를 기록한 ‘손정목’은 당시 공무원들이
“전시효과”를 중요하게 여겼다고 회고한다. 지금과 달리 선출직이 아니라 임명직이었던 당시 서울시장들에 대해
“오직 임명권자 한 분에의 충성에 치중했고 그 한 분을 향한 전시효과와 공적 쌓기에 더 관심을 두었다”고 밝힌다.
특히, 1968년경 서대문구 현저동 금화아파트를 산 중턱에 건설하는 것에 비판이 일자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이 아냐”라며 강행한 일화를 그 예로 들었다.
1968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금화산의 금화아파트 공사 현장.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결과적으로 1960년대 서울시와 건설부의 관료들은 지금의 서울이 있게 한 기초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들은 19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1980년대를 거치며 실행된다. 물론 개발 초기에는 길을 뚫고 건물을 세우는 것과 같은 ‘전시효과’가
큰 사업들이 주를 이뤘다.
발전국가의 모델이 된 대한민국
전시효과가 작용했다 하더라도 서울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한강 이남의 강남 3구를 50여 년 전과 비교하면
말 그대로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강남 지역이 개발되기 전 이 지역들은 농지이거나 야산이었고 한남대교가 뚫리기
전에는 신사동이나 잠원동에서 나룻배를 타고 한남동으로 건너가야 할 정도로 오지였다.
한남대교뿐 아니라 한강에 교량이 놓인 곳 대부분은 예전에 나루터가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강의 나루터 흔적은
표지석으로만 남았고 모래사장이었던 곳은 공원과 강변도로가, 그리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서울 동작대교와 아파트촌. 교량이 있던 곳은 예전에 나룻터였고 아파트 단지는 백사장이었다.
여러 분야 학자들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은 ‘발전국가’의 성장전략을 통해 양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한다. 이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사회의 인적, 물적, 금융적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경제성장을 추진했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한국의 경우
반공을 국시로 하고 냉전의 한 가운데에 자리한 준전시 국가였던 상황이 국가 발전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고도 본다.
발전국가 관점에서 서울 개발과정을 연구한 장경석은 “국가 관료제가 권위주의적 발전동원체제로 체계화되고 성과
지향적인 기술적 효율성을 중시하는 체계”가 서울 개발의 원동력이었다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한강 유역개발은 관료와 예산 등 국가자원 동원체계가 집중되어 성과를 낸 대표 사업이 되었고,
세부 사업으로 진행된 공유수면 매립공사는 주거 형태는 물론 서울의 사회적 문화적 지형까지 바꾸는 계기가 된다.
(2022. 04. 01) 서울 올림픽대로와 한강변 아파트촌.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공유수면매립법과 한강 유역 개발
1962년 1월에 제정된 <공유수면매립법>에 따르면 ‘공유수면’은 “하천, 바다, 호소 기타 공공의 용에 사용되는 수류 또는 수면으로서 국가의 소유에 속하는 것”을 말한다. 이 법률은 공유수면의 이용과 매립에 법적 근거와 특례를 주기 위해 만들었다.
<공유수면매립법>은 “공유수면을 매립하여 효율적으로 이용하게 함으로써 공공의 이익을 증진하고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하려는 목적도 가진다. 그래서 공유수면 매립공사로 생긴 택지를 매각한 자금은 공익이라는 취지에 맞춰 다른
개발사업의 마중물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권 사업이었기에 편법 혹은 특혜가 난무하기도 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서울시 고위 공무원으로 각종 개발사업에 관여한 손정목은 공유수면 매립사업이 ‘정치자금
모금 창구’로 이용된 사실을 저서에서 밝힌다.
특히, 1969년 김학렬 부총리와 건설 회사 대표들 간의 회의에서 “5대 회사 대표이사들은 선뜻 그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부총리가 요구한 정치자금을 약속”했다고 당시의 개발사업과 정치자금의 관계를 증언했다.
1968년 강변도로 공사 현장. 지금의 양화대교와 절두산 성지 인근. 강 건너로 모래섬이었던 여의도가 보인다.
강변도로는 제방 역할도 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그만큼 건설 회사로서는 참여만 할 수 있다면 큰 수익이 보장되는 사업이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주요 공사는 건설업
비수기인 겨울철에, 그것도 놀고 있던 중장비와 노동력을 이용해 진행했다. 첫해 겨울에는 제방을 쌓고, 그다음 해에는
한강의 모래를 퍼부어 택지를 조성했다고 한다. 게다가 땅장사나 분양 사업을 할 수도 있었다.
건설 회사가 조성한 택지는 국영기업체나 정부 기관에서 일괄 매수했다. 혹은 건설 회사가 직접 아파트 단지를 조성해 일반에 분양했다. 이래저래 남는 사업이었다. 1960년대 말 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 덕분에 대기업으로 성장한 건설 회사들이 많다.
이촌동, 반포동, 그리고 압구정동
용산 앞 한강변 백사장은 1956년 5월 대통령 선거 때 30만의 청중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고 한다.
지금의 이촌동 일대다. 1968년부터 그곳 모래사장에 제방을 쌓고 그 안쪽 땅을 메워 택지로 만드는 공사를 시행한다.
허가된 매립 면적은 10만평이 조금 넘었고 1969년 6월에 공사가 끝난다. 하지만 최종 매립 면적은 12만 1천여평으로
계획보다 초과해 메웠다. 시행사는 건설부 산하 기관인 수자원공사였고 매립 후 조성한 택지에는 공무원아파트단지,
한강맨션아파트단지, 외인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그리고, 남는 땅마다 건설업자가 뛰어들어 아파트를 지어 일반에 분양했다. 그렇게 동부이촌동은 아파트촌이 되었다.
1973년 이촌동. 백사장을 매립한 후 아파트촌이 되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한강 백사장 건너편인 지금의 반포동 일대에는 제방이 없었다.
1970년 2월 현대건설, 삼부토건, 대림산업 등 세 회사가 투자한 합자회사가 이 지역에 제방을 쌓고
택지를 조성하기 위한 공유수면 매립공사 허가를 받는다. 공사는 1970년 7월에 착공하여 1972년 7월에 준공한다.
이때 총 매립 면적 18만9천여평 중 약 16만평의 택지가 이들 건설 회사에 귀속되었다. 이 택지는 주택공사가 일괄 매입해
아파트를 건설했고 1974년부터 일반에 분양한다. 약 오십 년 전에 분양된 일명 구반포아파트는 지금 재개발이 예정되어
입주민이 떠나고 있다.
1977년 반포주공아파트. 지금은 재개발이 예전된 곳이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압구정동 한강변 저지대는 현대건설이 제방을 쌓아 택지를 조성했다. 공유수면매립 면허는 1969년 2월에 취득했고
1972년 12월에 준공했다. 총 매립 면적은 4만 8천여평이었고 이중 약 4만평의 택지를 현대건설이 차지한다.
그런데 자료에 따르면 현대건설은 면허 신청 당시에 공유수면매립 목적을 “건설공사용 각종 콘크리트 제품공장 건설을
위한 대지조성 및 강변도로 설치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으로 밝혔다. 하지만 매립 목적이 어느 순간 택지 조성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손정목은 박정희 대통령의 신뢰를 받는 정주영의 현대건설이 위세가 당당했음을 그의 저서에서 언급했다.
결국, 과수원으로 유명했던 압구정동은 현대아파트뿐 아니라 최고가 아파트촌으로 유명해진다.
정책적 배려와 특혜가 일군 아파트 공화국
한강변 공유수면 매립공사는 서울의 주택난 해소에 어느 정도 도움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책적 배려 혹은 특혜가 작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압구정동 사례처럼 매립허가 신청 명분이 원래의 목적이 아닌 예도 있었고, 이촌동 사례처럼 원래 계획보다 더 많은 부지를 매립한 예도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두 사례 모두 원상 복구해야 함에도 흐지부지 넘어갔다.
지금이라면 특혜나 공정 시비가 생겼을 중대한 사안 아니었을까.
결과적으로 공유수면 매립공사는 건설 회사가 땅장사할 수 있도록 정책적 배려 혹은 특혜를 주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자금 모금 창고로 이용되기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후 수십 년, 한국에서 아파트는 승률 높은 재산 증식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부동산 관련 정책과 공약은 민감한 이슈가 되고 있다.
한편, 공유수면 매립사업으로 아파트촌이 된 이촌동의 용산구, 반포동의 서초구, 압구정동의 강남구 유권자 다수가
이번 대선에서 기호 2번을 지지했다. 보수 정당과 그 후보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해줄 것으로 판단해서였을까.
(2022. 04. 91)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서 바라본 용산 일대. 백사장이었던 곳이 아파트촌이 되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4. 01) 서울 반포동의 아파트촌. 재개발이 예정되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 참고 문헌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1, 2, 3권. 한울
안창모, 〈강남 개발과 강북의 탄생과정 고찰〉, 서울학연구
장경석, 〈발전국가의 공간개발-1960~80년대 서울 한강변 아파트 주거지역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공간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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